◈ 428화. 마주하게 되어 기쁘군
잊혀진 자들의 협곡.
아찔한 절벽 위에서 협곡 밑바닥으로 내던져지는 시체의 수를 생각하면……. 협곡의 어귀 정도는 아르카나 대륙인들에게도 알려졌을지 모른다.
“단순한 쓰레기장처럼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훗날 협곡의 진실이 알려진다면, 그 내부가 아르카나 대륙에 알려지지 않은 게 이상하다 떠들어대겠지. 물론, 키치는 협곡을 감춘 게 그림자 신의 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뭐야?”
덕분에 곧바로 직감했다.
훤히 드러난 협곡의 내부.
그림자 신이 성지에서 자취를 감췄단 사실을.
‘설마, 클라우디 총대장님께서……?’
그림자 신의 사도를 처치한 것도 모자라서.
그림자 신마저 처치하신 건가?
다행히도 설마가 착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키치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추방신이라고 해도 그림자 신(神)은 신이야.’
게다가.
키치가 자신의 발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림자는 여전히 사라진 상태.
사도 계약으로 그림자 신에게 강탈당했던 그림자였으니.
그림자 신이 멀쩡히 살아있다는 증거와도 같았다.
그렇다면.
‘단순히 성지를 떠났다는 건가, 어째서?’
클라우디와 그림자 신.
둘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
충돌의 영향으로 그림자 신이 잊혀진 자들의 협곡을 떠난 건가?
키치가 몇 가지 추측을 떠올리던 순간이었다.
후두득.
돌무더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찾았다!”
화통을 삶아 먹은 듯 걸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림자 용병단 말단.
락키드의 입꼬리가 키치를 발견하곤 만개했다.
“전 대장, 현 탈주자 키치!”
우드득!
문답무용.
락키드는 그림자 용병단 규율에 충실했다.
단장이고, 단원이고 그림자의 규율에 예외는 없다. 아르카나 뒷세계의 거물, 그림자 용병단이 지금껏 유지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으니까.
『기밀 유지를 위해 탈주자는 신속히 처단한다.』
순식간에 좁혀지는 거리.
“도망칠 생각은 말라고, 키치!”
붕!
우렁찬 뼛소리를 내며 락키드가 머리통만 한 주먹을 내질렀다. 웬만한 투석 병기보다 강한 위력을 지닌 주먹질이 키치의 얼굴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락키드가 연신 히죽거렸다.
“젠장, 머리카락은 언제 싹둑 잘라버린 거야?”
“왜, 긴 머리가 더 잘 어울려서 아쉬워?”
“뭔 개소리야, 미쳤어?”
우득!
락키드가 뻐근한 목을 돌리며 쏘아붙였다.
“그 머리끄덩이라도 붙잡아야 승산이 있는데, 그럴 수가 없잖아? 뱀처럼 손아귀를 빠져나가기는. 그보다 날 만만하게 바라보지 말라고, 키치.”
그림자 용병단에 입단한 목적?
돈도 돈이었지만, 락키드에게 가장 큰 이유는 키치였다. 누구도 나를 꺾을 수 없다. 자만심이 넘치던 콜로세움의 정복자 시절, 락키드에게 굴욕을 안겨준 게 바로 키치였으니까.
“이 락키드 님께서 말단 자리에 만족할 줄 알았나? 내 목표는 처음부터 키치 너였다! 울프를 비롯한 네 따까리들은 처음부터 안중에도 없었단 거지!”
스왁!
덩치와 다르게 빠르다.
……아니, 원래 이렇게 빨랐었나?
한 발자국 내빼는 걸음.
키치가 락키드와 아슬아슬한 간격을 유지했다.
덕분에 락키드의 표정 변화가 훤히 보였다.
“네 머리를 내 손으로 박살 내는 상상을 단 하루도 거르지 않은 날이 없다, 키치! 분신과도 같은 도끼를 내던진 이유도 너 때문이다. 그래, 맨손이 아니면 네 속도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테니까.”
역시, 빠르게 느껴지는 게 착각이 아니었구나.
슝.
락키드의 주먹이 다시금 키치의 뺨을 스쳤다.
콰콰칵.
정권의 위력에 등지고 있던 협곡 암벽이 깎여나갈 정도.
그러나 키치는 여전히 락키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유야 간단했다.
어째서인가.
락키드의 얼굴에서 점차 웃음기가 사라지고 있었으니까.
“넌 어째서 그림자 용병단을 떠났지?”
“……?”
“빌어먹을. 내 계획이 모조리 어그러졌잖아?”
단장 키치를 쓰러트리고 단숨에 말단에서 단장으로 올라서겠다.
그 뒤에 가장 먼저 할 일?
날 얕잡아봤던 드쉐브, 그 꼬맹이 녀석의 버릇부터 고쳐줘야지. 늙어빠진 알카리 영감탱이는 강제로 현역에서 은퇴시켜 버리겠다. 재수 없는 울프 녀석은 실컷 부려 먹어주겠노라.
락키드의 야심 찬 복수 계획, 그 모든 게.
“네가 용병단을 떠나는 바람에 물거품이 됐다고!”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어서일까?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더러웠다.
그럼에도 키치를 잡아서 족치면 기분이 나아질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키치를 마주하니 기분이 갈수록 좆 같았다.
락키드의 시선이 키치의 발밑을 향했다.
“그보다 네 그림자는 어디에 팔아먹은 거냐, 키치?”
키치가 어깨를 으쓱였다.
“애초에 빼앗겼던 거야, 뭘 새삼스럽게.”
“하?”
“그보다 잘도 찾았네. 뭐, 만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클라우디를 쫓아 잊혀진 자들의 협곡으로 나선 순간부터 아르카나 대륙으로 복귀한 그림자 용병단원들과 조우하게 되리라 각오했었다. 하지만.
“그중 하필이면 널 만나게 될 줄은 상상 못 했는데.”
가장 먼저 락키드와 마주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그야 락키드에겐 좋지 않은 단점이 있었으니까.
당장 눈앞의 일밖에 바라보지 못하는 근시안적인 시야.
단장이었던 키치였기에 알아볼 수 있는 락키드의 성질머리였다.
“어떻게 그 성깔은 좀 고친 거야?”
키치가 질문을 던진 순간이었다.
“……잠깐.”
마치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처럼.
락키드의 얼굴이 급변한다.
키치를 상대하던 모호한 표정과는 다르다.
락키드의 얼굴이 온전한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래. 네 말대로 이번에도 잠깐 잊어버렸다, 키치.”
“……뭘?”
“나는 널 찾아서 아지트로 돌아온 게 아냐.”
그렇다.
락키드는 우연하게도.
키치를 잊혀진 자들의 협곡 어귀에서 마주친 것뿐이었다.
제 버릇 남 못 준다더니.
키치가 어이가 없어 하면서도 되물었다.
“그럼, 뭐 때문에 그렇게 심각한 건데?”
락키드가 들끓는 목소리로 답했다.
“대륙으로 돌아왔다.”
“돌아와 누가?”
“우리의 악연, 광폭회 그 새끼들이.”
광폭회(狂爆會).
“사실이야?”
그 세 글자에 키치의 눈빛 또한 무겁게 가라앉았다. 락키드를 바라보던 눈빛과는 다르다. 감정이라고는 한 점도 느껴지지 않는 살수의 안광.
스릉.
키치가 그제야 자신의 비수를 치켜들었다.
락키드가 광폭회를 쫓아서 잊혀진 자들의 협곡에 돌아왔다는 것. 바꿔 말하자면 광폭회가 잊혀진 자들의 협곡에 진입했다는 뜻이었으니까.
‘클라우디께서도, 광폭회도 협곡을 찾았다…….’
그림자 용병단이 없는 잊혀진 자들의 협곡을.
어쩌면 그분의 목적은 나의 처분이 아니라.
잊혀진 자들의 협곡에 있는 다른 ‘무언가’가 아닐까?
키치와 함께 협곡에 진입한 락키드는 어리둥절했다.
“사도가 없잖아?”
“그림자 신이 협곡을 떠났거든.”
“뭐? 그럼, 네 그림자가 사라진 것도…….”
“그 얘긴 나중에 하자, 락키드.”
침입자를 처리하는 사도도, 그림자 신도 사라진 현재.
광폭회가 협곡 어디에서.
어떤 함정을 파고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뭐, 좋아.”
두 사람이 숨을 죽이고 나아가던 때였다.
“!!”
시야에 신형이 걸렸다.
부스럭.
시체더미를 파헤치고 있는 의문의 사내들. 그들의 정체야 뻔했다. 광폭회였다. 락키드가 땅을 박차고 뛰어나갔지만, 그마저도 대비했다는 걸까.
발동하는 마법진.
쩌저적─!
락키드의 발목이 순식간에 빙결되었다.
“유감이지만, 우리 목적은 너희가 아니다.”
“뭐라는 거야, 버러지 같은 새끼들이……!!”
“우리의 악연은 지난 삶으로 충분하지 않나?”
절그럭.
그렇게 말하는 광폭회의 간부는 손에서 ‘무언가’를 흔들어 보였다. 빛바랜 은제 장비. 마치 그것이 자신들의 목적이라 말하고 있는 듯했다.
키치는 견적을 냈다.
‘할 수 있어.’
멀리 떨어진 거리.
어떤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저 셋의 목쯤은 충분히 취할 수 있었다.
다만, 육체를 붙잡던 그림자가 사라지고 사도의 권능 또한 사라진 지금. 지나치게 가벼워진 육체는 작은 공격에 스치기만 해도 극심한 피해를 입을 게 뻔했다.
더욱이.
‘……전해드려야 해.’
키치는 품속에 보석함을 떠올렸다.
보석함에 담긴 클라우디 가문 영애의 머리카락.
그 은빛 머리칼이 키치의 이성을 붙잡았다.
광폭회 간부가 눈썹을 찡긋거렸다.
“알아들었나? 좋아, 광폭회와 그림자 용병단의 악연은 여기서 끊는 걸로 결정. 따져보면 너희는 손해 볼 것도 없지 않나? 어차피 승자는 너희였으니까.”
이윽고 발현되는 포탈.
광폭회가 포탈 너머로 사라지며 말을 남긴다.
그 말에 키치, 그리고 락키드가 멈칫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를 거다. 우리 광폭회는 그림자 용병단, 너희보다 큰 걸 집어삼킬 거거든. 그래, 우리 광폭회의 광기가 아르카나 대륙으로 돌아온 ‘클라우디’를 집어삼킬 거다.”
“……!!”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키치와 락키드.
‘반드시 죽여야 한다.’
다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포탈을 향해 쇄도했다.
그러나 판단이 늦고 말았다.
광폭회의 간부가 비웃음과 동시에 말을 끝마쳤다.
“그런 의미에서 감사하마. 클라우디에게 꽂을 비수를 네 녀석들이 잘 보관하고 있었더구나. 우리가 클라우디를 집어삼키게 된다면 그 공적을 인정해 자비를 베풀겠다. 고마워해도 좋다, 그림자 용병단이여.”
이내, 완전히 닫힌 포탈.
사라진 광폭회.
남겨진 두 사람.
많은 대화는 필요치 않았다.
키치와 락키드.
전직과 현직.
그림자 용병단의 뜻이 일치했다.
“임시동맹이다, 키치.”
“기한은?”
“광폭회, 저 개새끼들을 모조리 쳐죽일 때까지!!”
*
포커페이스.
나는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그대의 노고가 내게도 느껴지는군, 월스와일.”
그게 정말 최선이냐?
무려 [신화] 등급 아이템을 제작하신.
위대하신 우리 월스와일 님에게 할 말이 그게 전부냐고!
“흡족하시다면 진심으로 다행입니다.”
그런데 월스와일은 내 콧대 높은 감사 인사에도 만족한 모양이었다. 아니, 만족한 걸 넘어서 안도의 한숨까지 삼키는 게…….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신화 등급 아이템이 튀어나와서 만족한 게 아니다.
노말 ▶ 매직 ▶ 레어 ▶ 유니크 ▶ 에픽 ▶ 전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는 어떤 등급의 아이템이 제작되었어도 나는 투덜거릴 입장이 아니었다. 그야 아르카나 대륙 최고의 대장장이인 월스와일 아니겠냐?
‘누구한테 맡겨도 그 이상의 결과는 안 나온다는 말인데.’
심지어 월스와일은 제련비용조차 받지 않았다.
드워프 장비가 아르카나에서 얼마에 팔리는지를 고려하면…….
‘진짜 노말템이 튀어나왔어도.’
할 말이 없는 처지였단 말이다……!
그런데 이건 본 적이 없는 신화 등급 아이템이었다.
물론, 최상위 시공간 임무인 신화 퀘스트를 수행해본 나였지만 신화 퀘스트를 클리어한다고 신화 등급 아이템을 보상으로 주는 건 아니었으니까.
‘어쨌든, 확인해 보자.’
호들갑은 거기까지.
그 능력을 확인할 차례다.
나는 떠오르는 정보창을 확인했다.
[지휘관의 장갑 - 노룡의 지혜]
[등급 : 신화]
전설을 뛰어넘는 서사.
신화라 불릴 이야기가 유낙서스의 유산에 깃들었단 건가?
과연, 그 제한부터 심상치 않다.
[제한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진짜로 심상치 않구만.
‘좀 그렇긴 하지만…….’
어차피 이 정보창을 다른 이에게 보여줄 일은 없겠지. 다른 것도 아니고 신화 등급 아이템이다. 내가 죽어서 드롭하지 않는 이상, 절대 누구에게도 빌려줄 생각 따윈 없다.
‘어차피 내가 아니면 착용조차 하지 못하는 아이템이니까.’
그런데 이어지는 효과가 더욱 심상치 않았다.
[효과 : 신화에 기록될 위대한 엘더 드래곤, 유낙서스가 선포했다. “나의 유산으로 하여금 클라우디께서는 용언을 이해하고 내뱉을 수 있게 되리라!”]
용언(龍言)……?
드래곤 피어, 드래곤 브레스를 포함해서 오직 드래곤들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그 고유 능력을 말하는 건가? 설마 그걸 내가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게 된다고?!
슥.
백문이 불여일견.
나는 곧장 장갑을 착용했다.
그리고 멈칫했다.
[용언을 이해하게 된다.]
덕분일까, 귓가에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으니까.
-듣고 있다면.
-나의 진정한 힘을 일깨워라.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여.
나의 입방정이 그 목소리의 정체를 내뱉는다.
“내가 너의 음성을 들었다.”
“???”
일제히 집중되는 드워프들의 시선.
다시금 생각한다.
……나는 아무래도 제 명에 못 살 것 같다고.
“전설의 흑암룡이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