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7화. 나는 믿지 않는다 (2)
뭔데, 아이템 주제에 내외하는 거야, 뭐야?
장비 아이템에 [제한]이 존재하긴 하다만, 내가 그 제한을 충족하지 못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야 레벨도 1,000을 돌파했고 뭣보다 선배님들이 착용한 걸 내가 착용하지 못할 리가 없잖냐?
[악크샨의 유물이 당신을 거절합니다.]
그렇다면 메시지엔 반드시 이유가 있단 거겠지.
클래스 퀘스트 목표는 아직 갱신되지 않았거늘.
나는 조금도 충격받지 않았다는 듯 읊조렸다.
“나 역시, 내키지 않던 참이었다.”
아쉬운 게 없다는 듯 털어내는 옷매무새.
말했다시피 눅눅하고, 어두운 잊혀진 자들의 협곡 밑바닥이었다. 그림자 신, 녀석이 성지를 떠났다고 하더라도 햇빛이 들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으니.
“자고로 환기와 일광은 필수거늘.”
하다못해 내 자취방에 거주하면서도 매일같이 대청소를 하고,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떨어진 머리카락 한 올조차도 허용하지 않던 그랑펠이 아니던가?
‘저런 걸 맨손으로 건드리는 거?’
악크샨 유물만 아니었더라도.
그랑펠은 손을 뻗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거다.
그러나 때아닌 내외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문득, 허공에서 나타나는 하이엘.
“주군.”
전에 말했다시피 하이엘이 나의 부름 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는 한 가지 상황밖에 없다. 예상치 못한 위협 혹은 소식이 도래했을 때다.
“디엔드가 옵니다.”
스오오오─
이래 봬도 디엔드의 계약자인 나다.
달라진 디엔드의 기척?
하이엘이 말해주지 않아도 나 또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심지어 손에 쥔 귀철마저 알아차린 듯했다.
-주인, 무언가 잘못되었군.
그 순간, 사방이 어둠에 뒤덮였다.
무엇 하나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
나의 시야가 점멸했다.
[어둠의 정령, ‘디엔드 크리시아드 이터널 다크니스’가 출현합니다.]
……이거, 확실하게 내게만 떠오르는 메시지겠지?
주변에 아무도 없겠지?!
잊혀진 자들의 협곡이 제발 그 이름값을 해주길 바라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그래, 이렇게라도 찾아서 좋네.’
드리우는 적합한 마력.
이건 명백한 위협이었다.
그래, 디엔드가 나를 위협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안도할 때가 맞느냐고 묻겠지.
그러나 이 또한 예상했던 전개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내가 경험했었으니까.’
적합한 마력 덩어리, 디엔드.
그리고 그런 디엔드조차도.
상대적으로 밝게 보이게 하는 적합한 마력의 소유자인 나, 이호열.
덕분에 나는 알고 있었다.
적합한 마력의 성질과 위험성을.
그래, 마티스도 경고했듯.
적합한 마력은 양날의 검이다.
-“부디 흑화를 경계하시기를.”
[상태이상, 흑화]
오해를 살만한 명칭과는 다르게 엄청난 위험성.
나 역시, 흑화를 경험해보았기에 그 후폭풍을 잘 안다. 흑화한 그랑펠에게서 비롯된 적합한 마력은 아르카나 대륙 전역을 뒤덮이게 할 정도였으니까.
덕분일까.
‘아니면, [기이의 대종사] 효과 덕분인가.’
나는 디엔드가 [흑화]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디엔드와 마주하자마자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디엔드가 입을 여는 순간, 그 원인 또한 확신할 수 있었다.
“우리 악크샨은 사냥해야만 한다.”
그러니 다시금 감사하자.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너를.”
주변에 듣는 귀가 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디엔드의 풀네임을 출현 메시지로 띄우는 것도 모자라서 나의 풀네임까지 내뱉다니. 우리 선배님들께서…….
‘정말로 나한테 맺힌 게 많은 모양이신데?’
농담처럼 말했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흠칫했다.
악크샨 일부 악마 사냥꾼들의 탈주.
그 원인에 그랑펠이 관여되어 있는 것 같았으니까.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그랑펠?’
나야 악크샨 선배님들이라고 꼬박꼬박 존칭을 붙이고 있었지만.
과연, 과거의 그랑펠이 존칭이란 걸 사용할 수 있었을까.
내가 어떤 이유로 회사를 그만두고 균열로 뛰어들었는데.
‘부장님 면상에 녹차를 끼얹을까 봐 그랬으니까.’
정말로 선배님들 얼굴에 홍찻물이라도 끼얹은 건가?
그래서 선배들이 널 잔뜩 벼르고 있는 거냐, 그랑펠?
머리를 굴리는 와중이었다.
디엔드의 적합한 마력이 요동쳤다.
그와 동시에.
하이엘이 전면으로 나섰다.
“크리시아드의 이름으로.”
크리시아드.
내가 지어준 이름 아래 하나로 묶이게 된 하이엘과 디엔드였다. 덕분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거구나, 하이엘. 세계수의 씨앗을 싹 틔운 덕분. [첫 세계수의 축복]을 받고 정령왕 이상의 격에 도달한 하이엘이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주군.”
그러나 전투력은 하이엘보다 디엔드 쪽이 높겠지.
플레이어에 비유하자면 하이엘은 힐러, 디엔드는 딜러였으니까.
그럼에도 하이엘은 디엔드를 막아선 것이었다.
네 충성심은 내가 잘 알았다, 하이엘.
그러니 물러서도 된다.
나는 {자연} 능력을 발현하던 하이엘에게 말했다.
“우려할 것 없다.”
“그러나 주군…….”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다.
흑화한 디엔드라고 해도.
흑화의 의미를 잘 알고 있는 내가 아니냐?
나는 진지하게 읊조렸다.
“디엔드에게 이것은 성장통에 불과하다.”
그래, 중2병이 성장통이긴 하지……. 물론, 그놈의 성장통이 십수 년이 지난 뒤에 재발하는 바람에 이 순간에도 고통받고 있는 내가 있긴 하다만……!
나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기뻐해도 좋다.”
내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는 하이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금방 우려를 지울 순 없는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하다.
디엔드가 내뿜는 기운이 흉흉하기 그지없었으니까.
서슬푸른 악크샨의 칼날.
사냥감에겐 더없이도 비정한 칼날이 정말로 디엔드를 통해 나의 목을 겨누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그러나 내가 누구냐?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요, 동시에 누구도 견줄 수 없는 적합한 마력의 소유자인 한없이 깊은 어둠이다.
그저 음성으로도 충분했다.
“디엔드의 성장을 위한 간섭이라면 이해하겠다.”
나는 디엔드를 휘두르고 있는 적합한 마력.
악크샨의 유뮬에서 비롯된 과거와 배경에게 선언했다.
과거의 악크샨 선배님들과 그랑펠 사이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지금의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허나,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하지만 그와 별개로 나와 당신네들의 문제에 디엔드를 휘둘리게 한 책임은 똑바로 따져 물어주겠다. 왜, 아무리 선배라고 해도 부조리는 참아선 안 되는 거잖아?
“행동에 관한 책임을 묻겠다.”
그래서 이걸 좋아해야 하나, 싫어해야 하나.
말했다시피 아르카나 대륙, 그 어떤 과거와 배경 사연이라고 해도.
그랑펠에게서 비롯되는 적합한 마력을 능가할 순 없었으니.
“주군? 내가 무슨 짓을……?”
나의 적합한 마력은 흑화에 시달리던 디엔드를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했다.
하지만 악크샨이 누구인가?
사냥감 혹은 사냥감으로 간주한 이 앞에선 절대 꺾이지 않는 이들이다. 흑화의 영향으로 다시금 악크샨 탈주자들의 음성을 전달하는 디엔드.
“역시, 우리는 틀리지 않았군.”
이윽고, 디엔드를 통해 그들의 공격이 전해져 왔다.
그래, 그게 내가 기뻐해야 하는지 슬퍼해야 하는지.
고민하던 이유였다.
공격이 가벼웠다.
지금의 나로서는 끄떡도 하지 않을 정도로.
여명의 재킷에 흠집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간지러운 일격이었다.
‘내 얼굴에 침 뱉기 같아서 말이야.’
……진짜 이 얘기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악마를 사냥할 때 빼고는 나사가 빠져도 몇 개는 빠진 클래스. 악마족 몬스터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오만가지 취향을 가진 플레이어들조차도 외면해 버린 최하위 천민 클래스.
그게 바로 악마 사냥꾼이었으니까.
선배님들의 공격이 내게 유효할 리가 없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그대들의 각오를 잘 알았다.”
사실 그랑펠의 성질머리 같았으면.
악크샨이고 선배고 뭐고, 주고받음의 미학을 실천했겠지.
그러나 나는 간과할 수 없었다.
‘분명, 사연이 있다.’
클래스 퀘스트.
악크샨의 유물이 나를 거부한 이유.
악크샨 탈주자들이 그랑펠을 사냥하겠다, 선언한 이유.
그러니까 그 원인을 제대로 알기 전까지는.
한 번만 성질을 죽이자, 그랑펠.
물론, 그 또한 그랑펠식 화법으로 내뱉는다.
“허나, 디엔드가 신세를 졌으니 이번에는 넘어가지.”
그러자 탈주자 선배님들의 적합한 마력이 점차 누그러들기 시작했다. 어째서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 그들이 마지막 말을 남긴 채 디엔드에게서 물러갔다.
“우리는 결코 틀리지 않았다…….”
두둥실.
디엔드가 의식을 잃은 채 허공을 부유한다.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흑화의 후유증을 생각하면 아마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할지도 모르겠지.
나는 하이엘에게 말했다.
“시련을 겪었으니, 디엔드는 더욱 화려하게 피어날 것이다.”
“주군의 뜻을 디엔드에게 전하겠습니다.”
“부탁하마.”
스륵.
하이엘이 의식이 없는 디엔드와 함께 허공에서 자취를 감췄다.
이제 남은 건 나와 귀철.
그리고 악크샨의 유물뿐이군.
‘혹시…….’
어떻게 탈주자 선배님들, 기분이 조금이라도 풀렸나.
악크샨 유물을 회수할 수 있으려나.
슬쩍, 쳐다보기만 했거늘.
곧장 메시지가 점멸한다.
[악크샨의 유물이 당신을 거절합니다.]
네네, 어련하십니다.
그 똥고집 제가 또 잘 알죠.
나는 머리를 정리했다.
‘악크샨의 유물을 회수하려면 일단, 그랑펠하고 탈주자 선배님들 사이에 있었던 갈등의 원인을 알아야 한다. 그걸 알기 위해선…….’
역시 [어둠의 이해]에 진입하는 수밖에 없겠지.
클라우디 가문을 잃고 아르카나 대륙을 떠돌던 그랑펠에게 나는 악크샨의 존재를 각인시켰으니까. 그랑펠이라면 분명, 악크샨으로 향했을 거다.
그 시점에서 그랑펠의 과거를 이해한다면, 악크샨 내전의 원인도 그랑펠이 그 사이에서 어떤 상황에 부닥쳤는지도 알게 될 터.
‘문제는 불확실성인데…….’
어둠의 이해.
과거에 진입하는 만큼 시차가 상상을 초월한다.
고작 몇 시간이 흐르는 것 같았는데, 현실 시간으로는 보름, 아르카나 대륙 시간으로는 두 달이 훌쩍 지나있었을 때도 있었으니까.
나는 악크샨 유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은 재회할 때가 아니군.”
아무리 클래스 퀘스트가 중요하다고 해도, 그놈의 절차보다는 중요하진 않겠지. 마탑의 수석, AAU 유스라 지부 총책임자, 당분간 제국 황제의 대리청정까지 떠맡아버린 상황.
‘……휴직계 쓰는 데에도 한 세월이겠구만.’
그러니까 나는 [잊혀진 자들의 협곡] 풍경을 눈에 담았다. 좌표를 기억했으니, 포탈을 발현한다면 다음에 찾아올 땐 큰 수고를 들이지 않을 수 있을 터.
누군가는 물으리라.
악크샨 유물을 누가 슬쩍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괜찮다,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누가 여기까지 와서 고작 은제 무기를 뒤져서 훔쳐가겠냐?
‘심지어 이 장소가 어딘데?’
아르카나 뒷세계의 거물, 그림자 용병단의 성지다. 그림자 용병단하고 척을 질 생각이 아니라면 이곳까지 굴러들어 올 이유는 없다는 거지.
게다가.
‘고집하면 또 우리 선배님들 아니시겠냐.’
똥고집을……. 아니, 집념을 생각하면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당장 악크샨 유물을 회수할 방법은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니까 지금은 할 수 있는 걸 하자, 호열아.
-그림자 신. 그리고 디엔드의 성장통. 찰나지만 많은 일이 있었군, 주인이여. 그래서 다음 행선지는 어디인가? 하이엘과 디엔드가 자리를 비웠다고 해도 나는 주인의 곁을 충직히 지키겠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발현한 덕분인가.
어째 처음보다 조금 공손해진 것 같은 귀철의 음성.
나는 그런 귀철에게 답했다.
“유산을 확인할 시간이다.”
그렇다.
십좌의 증명, 월드 퀘스트, 플레이어들의 뒤통수.
앞으로 닥칠 시련들에 맞서 새로운 장비를 손에 넣을 때가 왔다.
나는 일찌감치 경고했다.
“귀철.”
무려 드워프 최고의 대장장이 월스와일.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제련한 유낙서스의 유산이 나를.
아이언 캐슬 호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 강렬한 열기와 맞닿아도 너무 놀라지 말거라.”
.
.
.
……귀철에게 놀라지 말라고 했거늘.
철면피 덕분에 티는 나지 않겠지만.
정작, 나부터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이거, 아무래도…….
[지휘관의 장갑 - 노룡의 지혜]
[등급 : 신화]
‘……신화 등급 아이템?!’
유낙서스에게 너무나도 큰 걸 물려받은 것 같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