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26화 (426/489)

◈ 426화. 나는 믿지 않는다 (1)

[기이의 대종사 : 기이에서 태어나지 않은 존재가 기이를 깨우치게 되었다. 선구자인 그의 가르침이 수많은 이들을 기이의 영역으로 이끄리라.]

그래, 그렇게 된 거구나.

드래곤이나 엘프, 상위 마왕. 설령 그들이 기이의 영역에서 나보다 앞서있다고 한들. 그들에게 기이란 그저 익숙한 것에 불과하다는 뜻.

하지만 나는 아니다.

살고 싶어서 발버둥을 치는 과정에서 깨닫게 된 기이 아니겠냐? 나는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기이를 이해하고, 앞으로 나아갔으니까.

‘덕분에 그 이해도만큼은.’

같은 기이의 영역에 진입한 어떤 존재들보다 앞설 수밖에 없단 거겠지. 나는 덕분에 기이의 스승, 대종사라는 거창한 칭호를 손에 거머쥐게 된 모양이었다.

스승의 시야는 이런 걸까?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사도의 움직임에 담긴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계속해서 부활하는 사도를 쓰러트릴 수 있었던 거겠지.

약점.

그러니까 사도의 본체는 그림자였다.

벼락과도 같은 일섬이라는 게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거든. 나는 검강에 강렬한 빛을 휘감아 사도는 물론, 사도의 그림자까지 불살라 버렸으니까.

그 결과, 맥이 뚫렸다.

[레벨 : 1,001]

단번에 25레벨이 상승.

네 자릿수 레벨에 진입하게 됐다는 뜻.

나는 솟구치는 적합한 마력을 서서히 갈무리했다.

‘어쨌거나.’

트여버린 시야.

덕분에 이 장소가 그랑펠 누이의 목숨을 앗아간 그림자 용병단의 성지라는 걸 파악했다. 예전 같았으면 곧바로 [흑화]가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겠지.

‘잘 참았다, 그랑펠.’

그러나 키치에게 내뱉은 말 때문인가.

‘내뱉은 말은 지키는구나. 뭐가 됐든.’

이전 세대 그림자 용병단의 죄를.

키치를 비롯한 그림자 용병단에 풀어낼 생각은 없다.

너그럽게 용서했었기에.

나는 흑화 대신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발동하는 걸로 그랑펠 누이의 빚을 받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게 끝이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그림자 신.

적어도 너는 아직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지 않겠냐?

나는 입을 열었다.

몇 번이고 했던 말 같은데.

“나는 신 따위 믿지 않는다.”

그것이 여신이든, 그림자 신이든, 마찬가지다.

나, 이호열의 종교는 무교.

그랑펠도 누굴 섬길 성격의 소유자는 아니거든.

그런 뜻에서 내뱉은 말이었거늘.

……꿈틀─

……이거, 아무래도 그림자 신이라는 양반이 발끈한 모양인데?!

스스스.

잊혀진 자들의 협곡에 스산한 바람이 불어온다.

‘뭐야.’

사도가 등장했을 때와는 연출의 스케일부터가 다르다.

사도가 그림자처럼 은밀하게 모습을 드러냈다면.

지금은 움찔거리는 녀석은…….

스오오.

자신의 위대함을 떠벌리지 못해 안달이 난 상태 같았다……!

물리법칙을 초월한 지금의 연출을 봐라.

협곡 밑바닥으로 어렴풋이 내리쬐던 햇빛.

그 햇빛 덕분에 늘어진 그림자.

일대의 모든 그림자가 기괴하게 요동치고 있다.

이럴 때는 플레이어라는 나의 신분에 감사하게 된다.

아르카나인이었어 봐라.

정말로 신의 노여움이라도 산 게 아닌가, 가슴을 졸일 만한 상황이잖냐?

그러나 점멸하는 시야.

[메인 퀘스트 : 흑막을 들추다]

덕분에 나는 당당하게 지껄일 수 있었다.

“자칭 그림자 신이여.”

분명, 자칭이라는 수식어에 잔뜩 화가 난 거겠지.

스와아아악!

일대의 그림자가 위협적으로 나를 향해 뻗어온다. 내 그림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의 그림자가 귀철의 그림자를 치켜든 채 나의 목을 겨누고 있다.

지켜보는 누군가는 묻겠지.

위험한 상황이 아니냐고.

아르카나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무력 집단 중 하나.

그림자 용병단의 실체라고 할 수 있는 그림자 신이 노한 상황.

조금이라도 입을 잘못 놀렸다간 영문도 모른 채 목이 날아가는 건 아니냐고.

[최후의 모험가]라는 믿는 구석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망 페널티를 고려하면 디엔드 구출에 차질이 생기는 거 아니냐고.

전부 맞는 말이다.

“수줍음을 타는 것이냐. 주위가 어둡구나.”

그래,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뻔뻔하게 내뱉고 있는 거였거든.

다른 누구는 몰라도 그림자 신, 녀석에게는 그럴 필요가 있었으니까.

모든 건 퀘스트 내용 덕분이었다.

[메인 퀘스트 : 흑막을 들추다]

아르카나 대륙이 붕괴하고 만신전이 열렸다. 그러나 그림자 신의 온전하지 못한 ‘격’은 만신전에 진입할 수 없는 원인이 되었으니. 이제부터 그림자 신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격을 위해 움직이리라.

그림자 용병단.

그들에 관해선 AAU에 유스라 지부 총책임자로 취임한 뒤로 더욱 자세히 알게 되었다. 어쨌거나, 인간에 불과한 그림자 용병단이 아르카나 대륙 전기 스토리 후반부까지 활약할 여지가 남아있던 이유?

그건 그림자 용병단에 숨겨진 비밀 덕분이었다.

‘문제는 그 비밀이 뭔지 다들 모른다는 거였지.’

AAU가 코스모였던 시절, 구체적인 설정을 부여한 게 아니었던 탓에 알지 못한다는 거였는데……. 이렇게 당사자와 조우한 덕분에 알게 됐다.

그 ‘흑막’이 너를 말하는 거였구나, 자칭 그림자 신.

그것이 내가 뻔뻔할 수 있는 이유.

동시에 당당해야만 하는 이유였다.

퀘스트 목표.

-증명의 전장 그림자 신과 조우하라. (진행 중)

그래, 우리가 맞붙을 전장은 여기가 아니잖냐?

“나의 왕좌를 원하는가.”

나는 정말로 마왕이라도 된 것처럼 읊조렸다.

슥.

잊혀진 자들의 협곡, 누구도 찾지 않을 정도로 외진 장소,

거만한 눈빛으로 그림자 신의 성지를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과연, 탐낼만하구나. 대륙의 음지에서도 밑바닥, 스산하고, 악취가 풍기고, 아름다움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이곳의 경치엔 그대 또한 질려버렸을 테지.”

새삼 느끼는 거지만…….

독설을 내뱉을 때만큼은.

드높은 긍지가 드높은 싸가지가 되는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덕분에 내 의도는 충분히 전해진 듯싶었다.

!!!

제대로 긁힌 건가, 요동치는 그림자.

그러나 이대로 멈출 내가 아니다.

나는 덧붙였다.

“그렇다면 기다리고 있겠다. 부디 증명의 전장에서 그대를 마주할 수 있다면 좋겠군. 그대가 내게서 누이를 앗아갔던 것처럼 나도 앗아가 주겠다.”

더없는 진심을 덧붙였다.

“네 전부를.”

대화는 여기까지다.

‘……어디 보자, 나도 연출이 필요하다.’

사실 마왕 쟁탈전, 십좌의 증명은 이미 시작된 상태였다. 왜, 마계의 리치 디스커스부터가 내가 차지한 부에르의 왕좌를 노리고 기습한 것만 봐도 알잖냐?

‘하지만, 넌 그 사실을 알지 못하지.’

그러나 퀘스트 내용과 목표로 보았을 때.

그림자 신은 마왕 쟁탈전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 확실했다. 그런 상황에서 ‘격’이 다른 힘을 다룰 수 있는 나를 공격할 수 있을까?

설령 그럴만한 능력이 있다고 해도.

나를 죽인다면?

녀석은 평생 해결할 수 없는 의문에 빠지게 되겠지.

‘그러니까.’

그림자 신이 나를 위협한 것처럼 나도 녀석을 적당히 위협해서 내쫓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럴 때 써먹을 수 있는 발버둥이 내게는 남아 있었다.

[심미 : 上]

심미를 가미해 그림자를 내쫓는 마법을 발현한다.

거칠게 요동치는 그림자.

그림자를 억누르듯 강렬한 빛을 내기 시작하는 나의 육체.

쏴아아.

그걸 가능케 하는 건 ‘격’이 다른 마력에 더해진 [『기이』] 덕분이었으니. 녀석이 그제야 꼬리를 내리고 그림자 속으로 다시금 몸을 감추기 시작했다.

이내, 시야가 점멸했다.

[그림자 신이 당신과의 재회를 기약합니다.]

재회라.

이거, 상위 마왕에.

득실거리는 악마에.

이제는 그림자 신이라는 아르카나 대륙의 흑막까지.

내 목숨을 노리게 생겼구만.

그러니까 더더욱 가만히 있을 새가 없다.

‘디엔드, 역시 나는 네가 없으면 안 된다.’

완전히 뒤바뀐 협곡의 풍경.

잊혀진 자들의 협곡을 감추는 그림자가 사라진 덕분이려나.

[그림자 용병단의 성지, ‘잊혀진 자들의 협곡’이 아르카나 대륙에 드러납니다.]

마티스에게서 빌린 마도구, [정련된 아락시타스 반지]가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적합한 마력이 요동치는 곳, 나는 그곳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마주했다.

잠깐이지만.

간과하고 있던 사실과.

잊혀진 자들의 협곡이 그림자 용병단의 성지라면, 어째서 악크샨에서 탈주하신 선배님들은 그림자 용병단이 머물고 있는 협곡으로 향하신 걸까?

도대체 악크샨과 그림자 용병단.

둘 사이에 어떤 접점이 있었기에…….

이들은 악크샨 악마 사냥꾼답지 못하게.

이런 음습하기 짝이 없는 차가운 협곡 밑바닥에서.

유명을 달리하게 된 걸까?

[클래스 퀘스트 : 악크샨 내전]

악크샨 기지의 탈주자.

그들은 아르카나 대륙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 중 하나로 손꼽히는 잊혀진 자들의 협곡으로 숨어들었다. 잊혀진 자들의 협곡에 진입하여 악크샨의 탈주자들이 탈취한 악크샨의 유물을 되찾아라.

-잊혀진 자들의 협곡에 진입하라. (성공)

-악크샨의 유물을 되찾아라. (진행 중)

나는 백골과 백골이 걸치고 있는 장비를 바라봤다.

악크샨의 징표, 악크샨 늑대가 새겨진 은제 무기들. 저게 악크샨의 유물인지 유산인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지만, 나는 일단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예기치 못한 메시지가 떠오른 건.

[악크샨의 유물이 당신을 거절합니다.]

……거절한다고?

이래 봬도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인데.

서운하게 왜 이래?

*

AAU.

“선배, 뭐 하나만 여쭤봐도 돼요?”

“응? 뭔데?”

“다른 게 아니라요…….”

성현준의 모니터.

그곳엔 악크샨 늑대가 떠올라 있었다. 윤수겸은 어깨를 으쓱였다. 성현준은 아직 말을 잇지도 않았는데, 무슨 소리를 할지 뻔히 보였다.

“너 총책임자님이 악마 사냥꾼 아닌가, 생각하는 거지? 마왕을 압살하고, 악크샨 늑대까지 길들이신 시점에서 그런 생각이 들 법도 하지. 근데, 너도 알고 있잖아? 악마 사냥꾼이 어떤 직업인지.”

악마 사냥꾼.

그들의 치렁거리는 장비는 멋있게 비칠지 몰라도 실속이 없기로는 아르카나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클래스였다. 윤수겸이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다.

“나도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닌데. 아무리 그래도 총책임자님하고는 거리가 멀어. 뭣보다 옛날에 마탑 수석 자리를 꿰차신 걸 생각하면, 차라리 대마법사를 능가하는 마법사 계열 히든 클래스라는 추측이 더 신빙성…….”

“선배, 저 아직 질문 안 했는데요?”

“엥? 총책임자님, 클래스 물어보려던 거 아니었어?”

쯔쯔, 성현준은 장난스럽게 혀를 찼다.

“선배, 아직 긍지가 부족하시네요. 총책임자님에 관해서 섣불리 알려고 들지 마라. 총책임자님이 저희에게 뭐 숨기시는 거 보셨어요?”

……얘, 중증이네.

“저희가 받아들이기에 아직은 이르니까. 총책임자님께서도 말씀을 아끼고 계시는 거겠죠. 아셨으면 이제부터 밥 먹기 전에 외치세요, 호멘.”

“……진짜, 호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너 정도는 아니다.

윤수겸이 혀를 내두르기도 잠깐.

성현준에게 되물었다.

“그래서 넌 뭐가 궁금한 건데?”

“아, 다른 게 아니라 악크샨 삭제 업데이트에 관해서요! 악크샨 기지가 완전히 궤멸한 건 대격변 이후지만, 실현됐다는 건 계획이 있었단 거잖아요?”

드륵.

성현준이 마우스를 움직이자 회의록이 떠오른다.

“실제로 악마 사냥꾼 클래스 삭제에 관한 업데이트 계획도 코스모 데이터베이스에 남아 있고요. 업데이트에도 그럴싸한 스토리가 필요한 법이잖아요? 악크샨에 어떤 스토리가 얽혀있는지 궁금해서요. 혹시 알게 된다면 총책임자님께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고…….”

윤수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런 거였어? 그러면 한번 물어볼게.”

윤수겸은 곧바로 메신저를 돌렸다. 코스모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름대로 끈끈한 관계를 나눠온 이전 동료들이다. 답변은 곧장 돌아왔다.

그런데, 윤수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없어.”

“네?”

“현준아, 기억하지? 뭐든 명분이 있어야 한다고.”

얼핏이라도 남아 있는 아르카나 대륙 전기의 설정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라도 실현이 되었다. 그것이 코스모가 의도했던 방향이든 아니든.

그러나 악크샨 기지는 그 반대였다.

“그 회의에 참석했던 직원이 있어. 그런데 악마 사냥꾼 클래스 삭제 안건은 일찌감치 철회됐었대. 단순히 인기가 없다고 클래스를 삭제하는 건 아르카나 운영 방식에 맞지 않는다고.”

“네? 그럼 악크샨은 왜……?”

“코스모, 즉 우리의 개입이 없었는데 멸망했다.”

윤수겸이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

“악크샨을 멸망하게 한 원인은 ‘내부’에 있었던 거야.”

.

.

.

마력은 재료와도 같다.

어떤 간섭 과정이 더해져서.

어떤 결과를 발현하게 될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는 뜻.

그건 적합한 마력도 마찬가지다.

나는 디엔드를 바라봤다. 디엔드는 악크샨 탈주자들에게서 비롯된 적합한 마력에 감응되어 흑화한 상태였다. 그런 디엔드가 나를 향해 선언한다.

“우리 악크샨은 사냥해야만 한다.”

그제야 알아차렸다.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너를.”

악크샨 내전.

그 원인에 그랑펠이 있었음을.

정말 여러모로 죄가 많은 남자구나, 그랑펠……!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