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5화. 내가 모르는 이야기 (3)
상위 마왕, 거악, 드래곤…….
출현 메시지를 출력할 정도의 강자들.
그들이 단순하게 ‘격’이 다른 강함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림자 신의 사도는 그 방향이 조금 달랐다.
그래도 인간미가 느껴졌거든.
슈슉.
날렵하긴 하지만 드래곤이 움직일 때처럼 뇌우를 일으키는 건 아니다. 엘프처럼 자연에 조화롭게 섞여들어 기척을 지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스왁.
단순하게 인간의 육체를 극한까지 벼려낸 기술들.
지피지기라고.
나 역시, 인간의 한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 범상치 않은 경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절대 쉽지 않아, 호적수다.’
생각하는 순간, 귀철이 움직였다.
-오직 살생을 위한 검로를 걸어온 자다, 주인.
챙.
귀철이 옆구리를 파고드는 단검을 쳐냈다.
나는 목격하지 못한 완벽한 사각.
보다시피 귀철이 나의 팔을 이끌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쯤 피로 물든 옆구리를 감싸 쥐고 있었겠지.
그러나.
“시야의 사각을 노리는 엄습인가.”
어쨌든, 막아냈기에 당당하게도 평가해 준다.
“검술이라 칭할 순 없으나, 예리하군.”
슥.
그리고 뻔뻔하게도.
원래부터 내 것이었던 것처럼 따라 한다……!
어떻게 따라 할 수 있냐고?
마법의 구조를 보자마자 파악하고, 따라 발현했던 원리와 같다.
“좋다. 한 수 가르쳐 주마.”
꾹.
어떻게 검을 쥐어야 하는가.
어떤 방향으로 뼈를 움직여야 하는가.
어떤 근육에 어느 정도의 힘을 가해야 하는가.
내게 고민은 필요하지 않았다.
몸이 알아서 움직였다.
또각.
사도가 그랬던 것처럼.
나의 육체 또한 사도의 시야 사각을 파고들었다. 나의 행동을 억제하기 위해 녀석이 반사적으로 내뻗은 오른팔을 되려 엄폐물처럼 활용. 몸을 숨기고는 가속한다.
“기이롭지 못한 네게 기이를 보여주마.”
내뱉은 말은 실현하고야 만다.
한 수 가르쳐 주겠다, 대놓고 선언한 만큼.
한 단계 발전한 기술을 선보여야 하지 않겠냐?
[집념이 ‘근력’으로 변환됩니다.]
[집념이 ‘민첩’으로 변환됩니다.]
10포인트의 집념을 각각 5포인트.
[근력]과 [민첩]으로 변환한다.
그와 동시에 육체의 관절, 근육의 섬유마다 마력을 순환시킨다.
이제는 익숙한 과정이다.
‘서클을 생성했을 때부터 연습한 발현이니까.’
마법사로서 [초월자] 칭호를 습득했을 때부터.
나는 마력으로 육체를 강화해왔다.
하지만 그때보다도 나는 성장했거든.
‘레벨은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십좌의 주인.
‘격’이 다른 마력을 온전히 지배하는 데에 성공했기에.
마력을 더한 나의 육체 또한.
격이 다른 움직임을 보여줄 수 있다는 뜻이다.
스왁.
원조보다 빠르고, 강하다. 귀철이 사도의 목덜미를 그대로 갈라버린다. 뎅겅. 무릎을 꿇고, 서서히 쓰러지는 사도를 향해 나는 읊조렸다.
“보이지 않는 검이라.”
이번에도 사도의 기술을 완전히 습득해 냈다.
“그 명칭은 ‘인비저블 소드’가 좋겠군.”
……좋긴 개뿔이 좋아, 진짜!!
-과연, 내게도 흠이 되지 않는 이름이군. 주인.
너도 장단 맞추지 마라, 귀철.
‘듣는 내가 다 수치스러우니까.’
애초에 인비저블 소드뿐이면 말도 꺼내지 않았다.
나는 끝없이 부활하는 사도를 쓰러트릴 때마다 기술 하나를 습득하고, 내 방식대로 발전시키고, 빌어먹을 기술명을 붙여대고 있었으니까.
스멀스멀.
‘……그나저나.’
어떻게 생긴 놈이야, 저거?
그동안 수많은 아르카나 대륙의 강자는 물론이요, 완전히 다른 세계인 마계의 지배자 상위 마왕하고도 얼굴을 맞대본 경험이 있는 나였거늘.
‘무한 부활은 좀 심하지 않냐?’
아무리 인간계 수준에 머무른 강함이라고 해도 말이야.
계속해서 부활하는 건 반칙이지.
왜, 내가 일반적인 플레이어였다고 생각해 봐라.
많은 걸 가정할 필요도 없었다.
‘당장 첫 세계수의 축복이 없었으면.’
부활에 부활에 부활…….
결국, 끝나지 않는 소모전 끝에 내 생명력과 마력은 진작 바닥나도 이상하지 않았을걸?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시간 낭비를 환영한다는 말은 아니었거늘.
‘기술 습득도 좋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다.’
잊혀진 자들의 협곡.
어딘가에서 자취를 감춘 디엔드를 찾아야 했다.
그림자 신의 사도.
정체 모를 녀석과 합을 겨루며 기술을 습득하고 발전시키는 것도 나름대로 보람이 있는 일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주객전도가 되어선 안 된다는 거지.
나는 입을 열었다.
“정말로 그것이 최선인가.”
근데, 그렇다고 또 마땅한 해결책이 있는 건 아니란 말이지.
왜, 부활하자마자 다시금.
나를 향해 달려드는 사도를 봐라.
“섣부르구나.”
챙.
단검, 그다음에는 도끼냐?
웨펀마스터도 아니면서 온갖 무기는 다 쓰는구만.
단검과는 다르게 충돌했을 때의 파괴력이 상당할 터.
귀철이 눈치껏 감응, 스스로 외관을 바꾸기 시작했다.
검(劍)에서 보다 넓적한 도(刀)의 형태.
하지만 그랑펠의 심미 스탯의 반영된 덕분인가. 크기가 커지고, 검날이 구부러졌어도 귀철에게선 유려한 아름다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온다.’
허나, 귀철의 변화를 감상하는 데 한눈을 팔 새는 없었다.
인간 수준이라곤 했지만, 나도 인간이잖냐?
더군다나 [천적관계]도 발동되지 않은 상태다.
한순간의 방심이 죽음으로 이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그래, 다른 건 몰라도 모든 공격이 급소를 향해 상당히 위협적이었으니까. 한 번만 삐끗해도 치명상으로 이어질 게 뻔했다.
“지나치게 거칠다.”
뎅겅.
물론, 그랑펠의 재능은 이번에도 사도를 완벽하게 능가했지만.
그래서 단검, 도끼, 그다음에는 장검(長劍)인가?
아니, 정확하게는.
“검무(劍舞)로군.”
부활한 사도.
이번엔 마치 춤을 추는 듯했다.
사도의 흐느적거리는 움직임을 따라서.
나의 보폭도 덩달아 넓어졌다.
하지만 내가 널 따라 춤을 출 거라고는 기대하지는 말라고.
『과거 사교계에서 그랑펠의 존재는 사막의 오아시스 혹은 신기루와 같았다. 사교 자리를 즐기지 않았기에 모습을 드러내는 날은 많지 않았거늘…….』
사교 자리는 즐기지 않는 우리 그랑펠 님이시다.
그런 그랑펠 님께서 춤 같은 걸 추겠냐!
검무 또한 자신의 방식으로 개척하는 그랑펠의 재능.
“내가 움직일 필요는 없다.”
춤처럼 유려한 움직임이 필요하다면.
“세상이 내게 맞춰 움직이면 되는 일이니.”
내딛고 있는 지각이 춤추게 하면 간단한 일.
‘공사판 짬밥이 얼만데, 내가.’
제국의 도시들을 복구하면서 극도로 가다듬은 일명, 건축마법이다. 지반을 뒤흔들어 출렁이게 하는 것쯤이야, 검을 휘두르는 도중에도 즉시 발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쿠드득.
땅이 솟아오른다.
또각.
또각.
또각.
솟아오르는 땅을 차례대로 밟자 마치 검무처럼 예측할 수 없는 보폭이 된다. 세상에 그런 검무가 어디 있냐는 눈빛으로 쳐다보지는 마라, 사도여.
“……?!”
내가 발전시킨 지금.
이건 더 이상 검무가 아니었으니까.
나의 입방정이 어김없이 작명 센스를 발휘한다.
“이것이 바로 ‘가이아의 춤’이다.”
푹─!
기어코 기술명을 내뱉고, 또 한 번 사도를 쓰러트린 순간이었다.
별안간, 시야가 점멸했다.
일단, 레벨 업 메시지는 죽어도 아닐 거다.
스멀스멀.
녀석은 지치지도 않고 되살아나고 있었으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경험치는 단 한 번도 드롭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레벨이 오를 이유는 없을…….
[당신이 창시한 기술이 일백 개를 돌파했습니다.]
……잠깐, 뭐냐?
내가 벌써 백 개가 넘는 기술을 창시했다고? 나는 그림자 신의 사도를 백 번이나 쓰러트리지 않았다. 기껏해야 스무 번 정도 처치한 것 같은데…….
‘혹시.’
그동안 내가 창시한 기술이 전부 카운트된 건가?
그렇다면 이해가 된다.
[『기이』]랍시며 그동안 내가 발버둥 치면서.
써먹은 기술들을 전부 합쳐 계산한다면…….
‘……충분히 될 것 같은데, 일백 개?’
시스템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일백 개가 넘었다면 정말로 넘었다는 소리겠지.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건데? 내가 다음 메시지를 확인하려 눈을 돌린 순간이었다.
-주인이여, 질리지도 않고 오는군!
귀철이 경고해왔다.
역시나, 다른 기술로 무장한 채 쇄도해오는 사도.
그런데 나의 시야가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여태까진 그저 단순히 본 것을 따라 하는 데에 그쳤다면.
지금 이 순간부터는 사도의 행동.
그 본질이 보이기 시작한 듯한 느낌이었다.
마법에 비유하자면.
“……!”
마법의 구조를 간파하는 것을 넘어서 마법을 발현하는 마력의 입자, 하나하나까지 보이는 듯한 느낌. 쉽게 말해 한 단계 높은 경지에 올라선 듯한 감각.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었다.
메시지가 연달아 점멸했으니까.
[일백 개의 기술을 창시한 당신의 위대한 업적은 검과 마법의 경계를 넘어서 모든 분야의 스승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습니다.]
[아르카나 대륙이 당신을 우러러봅니다.]
[칭호, ‘기이의 대종사’를 습득하셨습니다.]
그렇다.
나의 주제로는 감당할 수 없는 적들에게 맞서기 위해.
필사적으로 쳐왔던 발버둥이.
기이의 밑거름이 되어 꽃을 피워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기이의 대종사]
아르카나 대륙의 인정을 받고, 칭호를 손에 넣음으로써. 비로소 나는 그랑펠의 재능을 온전히 활용할 수 있는 그릇을 갖추게 된 것이었다.
그런 나의 시야는 설령.
그림자 신의 사도라고 해도 속일 수 없었다.
그렇다.
이제야.
비로소.
녀석의 정체를 파악했다는 뜻이다.
“익숙하구나.”
사도의 움직임에서 편린이 스쳐 간다.
그건 숨길 수 없는 암살자의 기백.
그렇다, 키치가 보여줬던 특유의 움직임과 같았다.
“결코, 잊을 수 없기 때문이겠지.”
서서히 끓어오르기 시작하는 일대의 적합한 마력.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그림자 신의 사도, 녀석이 지키고 있는 이곳.
[잊혀진 자들의 협곡]이 그림자 용병단의 성지라는 사실을.
그러니 더는 외면할 수 없었다.
[스킬,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발동됩니다.]
은발의 머리칼이 시야를 가려온다.
내가.
아니, 그랑펠이 입을 열었다.
“너를 통해 받아 가겠다.”
찰나를 넘어서는 극한.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벼락과도 같은 그랑펠의 일섬.
“내 누이의 평안을.”
사도가 허공으로 흩어지고 눈앞이 번뜩였다.
[성지의 수호자, ‘그림자 신의 사도’를 처치하셨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쿵쿵.
울리취가 육중한 걸음으로 오크 옥션을 거닐었다.
“아니꼬운 새끼 돼지 녀석.”
도대체 누구 마음대로.
네놈이 아르카나 대륙 최고의 부호란 말이냐?
뒷세계에서 잠자코 있었더니, 오크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고 있다.
“시대는 바뀌었다, 가몬드. 내가 언제까지 네 비위를 맞춰주리라 생각하는 거지? 우리 오크 옥션은 더 이상 인내하지 않는다. 마냥 웅크리고 있을 생각은 없다.”
대륙은 뒤집어졌다. 음지가 언제까지 음지에 머무를 수도, 양지가 언제까지 양지일 수도 없다는 뜻이다. 울리취는 부지런히 움직이는 오크들을 바라봤다.
덜컹.
마차에 실리는 재물들.
울리취는 장담할 수 있었다.
새로운 시대의 대륙은 분명 우리를 반길 거라고.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곧 찾아뵙겠습니다, 클라우디시여.”
아직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있었다고는 한들. 그것이 클라우디를 향한 울리취의 무한한 신뢰에 영향을 끼칠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다만.
“크흠.”
울리취의 못마땅한 시선이 바닥에 널브러진 키치를 향했다.
그림자 용병단과의 연줄은 어쩌면 오크 옥션이 긁어 부스럼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왜, 그림자 용병단은 클라우디의 노여움을 살 수밖에 없는 과오를 저질렀으니.
그 때문에 이례적으로 낙찰품을 돌려줬거늘.
“키치, 그렇게 퍼질러 잘 여유가 있는 건가?”
툭툭.
울리취가 키치의 옆구리를 발로 건드렸다.
그래도 양심은 있군.
키치가 하품을 뱉으며 몸을 일으킨 순간이었다.
“응?”
울리취가 키치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지하 생활에 익숙하기에.
지하에서 있을 수 없는 광경에 빠르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울리취가 말을 더듬었다.
“키치…….”
“뭔데? 말까지 더듬어?”
“네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그 말에 키치의 안색이 급변했다.
전등 밑에서.
오직 자신의 그림자만이 완전히 사라졌다.
“!”
그 말이 뜻하는바, 역시 키치는 알고 있었다.
‘사도가 죽었어……?’
그림자 신의 심복과도 같은 협곡의 사도가 죽었다.
성지에 발을 들인 누구인지 모르는 불청객에게.
사도를 처치할 정도의 능력을 가진 불청객이라니…….
“……설마.”
아르카나 대륙을 통틀어서 생각해 봐도.
이 순간.
키치의 머릿속엔 단 한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클라우디.
슥.
키치가 곧장 테이블 위의 보석함을 챙겼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울리취가 키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갑자기 어딜 그리 급하게 가는 건가, 키치?”
키치는 어딘가 후련한 미소를 흘렸다.
“이제야 죗값을 치를 시간이 왔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