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4화. 내가 모르는 이야기 (2)
[클래스 퀘스트 : 악크샨 내전]
악크샨의 탈주자.
그들은 아르카나 대륙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 중 하나로 손꼽히는 잊혀진 자들의 협곡으로 숨어들었다. 잊혀진 자들의 협곡에 진입하여 악크샨의 탈주자들이 탈취한 악크샨의 유물을 되찾아라.
-잊혀진 자들의 협곡에 진입하라. (진행 중)
‘내전에 탈주에…….’
……그래, 이제야 좀 사람 냄새나시네들.
아르카나 대륙 전기 시절.
내가 기억하고 있는 악크샨 악마 사냥꾼은 인간미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양반들이었다. 플레이어들은 바득바득 이를 갈며 때려치웠던 체력 단련 퀘스트만 봐도 그렇다.
‘그땐 보상도 없던 시절인데.’
악마 사냥에 나서지 않는 날에도 다들 악크샨 기지에서 틀어박혀서 온종일 훈련만 해댔으니까. 휴일에 훈련하는 게 뭐가 문제냐고는 묻지 말아주라.
‘나 때는 말이야.’
지금 아르카나 대륙이랑 그때 아르카나 대륙은 완전히 다르다니까? 마계가 업데이트되지 않은 시절이라 지금처럼 악마가 창궐하지도, 설쳐대지도 않아서 악크샨은 손가락만 빨던 날이 더 많았다고.
거의 매일이 휴일, 매일을 체력 단련만 했다는 말씀.
‘그걸 어떻게 버텨낸 거냐, 호열아. 진짜.’
그놈의 폼생폼사가 뭔지……!
다른 건 몰라도 취향 하나는 소나무였구나, 나도.
퀘스트 메시지를 닫으며 읊조린다.
“시행착오를 통해 성장하는 법.”
그래, 싸우면 크는 거지.
물론, 악크샨 선배님들이야 전부 의젓한 어른들이셨지만.
어쨌거나, 처음으로 보인 선배님들의 인간미라서 그런가.
갑작스러우면서도 내심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그나저나.’
내전이라.
내부에 큰 갈등이 있었던 건 사실인가 보군.
자연스럽게 그 원인이 궁금해진다.
보자, 곰곰이 기억을 되새겨보지만……. 떠오르지 않는 게 당연하겠지. 현실 시간으로 십 년도 훌쩍 지난 시점의 일이다. 아르카나 대륙 시간으로는 정확히 그 네 배.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짐작도 안 되는데.’
결국, 클래스 퀘스트를 진행하면서.
천천히 알아가는 수밖에 없다는 거겠지.
그런 의미에선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아르카나 대륙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 중 하나』
1,000에 육박하는 적정 레벨도 모자라서 음산한 기운이 맴돈다 싶었더니만……. 거짓말을 하지 않는 시스템 메시지도 경고하고 있다. 그랑펠은 태평해도, 호열아 너는 방심 금물이다.
스릉─
따라서 어귀에서부터 간만에 애검, 귀철을 치켜들었다.
그런데 간만에 듣는 귀철의 목소리가.
시작부터 흔치 않은 반응을 보인다.
-피 냄새가 진동하는군, 주인.
그랑펠에게는 극진한 존댓말을 하더니.
내게는 그럭저럭 반 존댓말을 쓰는구나, 귀철.
그러나 나 또한 그 마음을 백분 이해하고 있다.
차별대우에 서운해하기보다는 곧장 본론을 꺼냈다.
“긴장을 늦추지 말거라.”
-물론이다. 나의 주인이여.
“사연 없는 무덤은 없는 법이거늘.”
물론, 그랑펠식 화법으로 말이지.
“이곳은 사연이 없기에 더욱 이질적이구나.”
나는 귀철을 치켜든 오른손 손가락을 바라봤다.
[정련된 아락시타스 반지]
[제한 : Lv.500]
[효과 : 적합한 마력을 감지할 수 있다.]
흑마도학 선임 마법사, 마티스 딘 카를.
그에게서 빌린 적합한 마력을 감지할 수 있는 마도구였다. 적합한 마력 덩어리인 어둠의 정령, 디엔드였다.
그 행방을 찾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거든.
그런데, 보석이 조금도 검게 물들지 않았다는 건. 피 냄새가 진동하는 이곳에 과거와 배경 따윈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더더욱 위험하다.
귀철의 음성이 가라앉았다.
-사연조차 남기지 않을 정도로 무의미한 살육을 저질렀단 말인가? 실로 불쾌하군, 주인이여. 아무래도 이 땅에 검사라 칭할 이는 존재하지 않은 듯싶군.
확신할 수 있는데, 적어도 우리 선배님들이 그런 만행을 저지르시진 않았을 거다. 어떤 불화가 있어서 악크샨에서 탈주하신 건지는 아직 모르겠다만…….
‘살육? 말도 안 되지.’
성격을 떠나서, 다들 악마 사냥꾼이잖아?
악마를 사냥할 때 빼고는 무엇 하나 내세울 게 없는 클래스.
이런 위험천만한 장소에서 피비린내가 풍길 정도로.
누굴 해칠 능력이 선배님들에겐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의문은 여전했다.
‘어째서 하필이면 이런 곳으로 피하신 거지.’
뭐, 궁금증 해결을 위해서라도 진입해야겠지.
당연한 이야기지만 [천적관계]는 발동되지 않았다. 그 말인즉, 이제부터 무려 일천(一千). 적정 레벨의 장소를 온전히 내 능력만으로 감당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예전 같으면 말이야.
‘있는 엄살, 없는 엄살 다 부렸겠지.’
하지만 마냥 엄살을 부리기엔.
그래도 발버둥 치면서 쌓아온 게 꽤 많아서 말이야.
그랑펠은 숫자에 불과하다 여기는 스탯 총합만 봐도 그렇다.
[능력치]
근력 : 200 / 민첩 : 194 / 마력 : 877 / 행운 : 16 / 심미 : 上 / 집념 : 10 / 매력 : 有
근력, 민첩, 마력.
주요 스탯만 더해도 가뿐하게 일천이 가볍게 넘어간다.
거기에다 마력은 특히 ‘격’이 다르다고.
그럼에도 자만하지는 않았다.
다른 클래스에 비하면 초라하디초라한.
스킬창을 보면 있던 자신감도 확 달아나 버렸으니까.
‘잊지 말자, 주제 파악.’
다짐하고 있는 도중, 귀철이 말을 건네왔다.
-주인이여, 나를 배려하지 않아도 된다.
……배려하는 게 아니라 이게 내 전력이다, 귀철.
그 말에 악의가 없었기에 더더욱 찔리는구만.
크흠, 멋쩍어서 헛기침을 삼키던 순간이었다.
문득,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림자의 성지, ‘잊혀진 자들의 협곡’에 진입하셨습니다.]
잊혀진 자들의 협곡.
그 어귀에서 어느덧 협곡 내부에 진입한 모양.
과연, 적정 레벨만큼이나 비범한 장소구나 싶다.
그랑펠의 까다로운 주둥이가 평가를 내린다.
“흥미롭군.”
얼마나 흥미롭든, 대단하든, 쉽사리 인정하는 법이 없기에 태연하게 내뱉었거늘. 방금……. 어떤 조화가 일어난 거지? 나는 고개를 빳빳하게 세운 채 동공을 살짝 움직여 위를 바라봤다.
‘협곡 위에서 밑바닥으로…….’
겨우 몇 걸음 만에 수백 미터를 이동한 건가?
마법이면 놀라지도 않았다.
포탈만 해도 완전히 다른 세계를 오갈 수 있고, 텔레포트만 해도 수백 킬로미터를 왕래할 수 있으니까.
마법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장소에만 적용되는 규칙 같은 건가?’
[미궁] 혹은 [던전].
필드들이 고유한 규칙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어쩌면 이 협곡에도 아르카나의 상식만으로는 알아차릴 수 없는 규칙이 적용 중인지도 모른다.
이거, 난감했겠는데……?
‘최후의 모험가가 없었다면 말이야.’
객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 처했다는 거지.
그러나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나는 앞으로 당당히 나아갔다.
“부디 나의 흥미를 식게 하지 말거라.”
좋다.
입방정 한번 잘 떨었다, 그랑펠.
나는 엄살을 부릴 수 없었다.
디엔드의 행방을 쫓는 건 물론.
나는 지금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십좌의 마왕 중 최약체.
마계에 득실거리는 악마족과 마계의 리치, 디스커스 못지않은 보스몹들이 언제 내 숨통을 옥죄어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단 말이다.
그런 나의 결단을 듣고 발끈이라도 한 건가?
또각.
걸음을 내딛기 무섭게.
스스스.
협곡의 밑바닥에서 ‘무언가’가 치솟아 올랐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다만.
메시지가 덕분에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성지의 수호자, ‘그림자 신의 사도’가 출현합니다.]
……미친.
철면피로는 평온하게 등장 연출을 감상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야 적정 레벨 일천짜리 공간에서 출현 메시지를 출력하다니.
‘그림자 신의 사도? 뭐 하는 몹인데, 저건?’
내가 속으로 한탄하던 찰나였다.
“!”
흑색 방어구로 전신을 도배한 사도.
쌔액.
녀석이 그 찰나를 찰나로 쪼개서는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천적관계]가 발동되지 않고, 마력을 휘감지 않아 육체 능력을 보완하지도 못한 무방비 상태.
스왁─!
온다.
일격에 숨통을 끊기 위해.
나의 목덜미를 향해 비수가 날아들었다.
……이거, 엄살이 아니라 진짜 죽게 생겼는데?
*
뒷세계.
오크 옥션의 오크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어쩐지, 머리 위가 둥둥거리더니.”
“제국을 노리든 말든 알 바는 아니지만, 꼭 지금이어야 하나? 아니, 다 같이 먹고 살기도 힘든 시대에 이게 뭐 하는 건지……. 하여튼, 인간들 싸움 좋아하는 건 알아줘야 해.”
“그나저나 울리취 님, 우리 야간 수당은 챙겨주시겠지?”
키치는 그런 오크들을 보며 헛웃음을 뱉었다.
다른 건 몰라도.
락키드보다야 오크들이 이성적이고, 사회적이었다.
“하.”
흘러나오는 한숨.
키치가 의자 등받이에 한껏 몸을 뉘었다.
머리가 한껏 젖혀질 정도로.
검은 단발이 찰랑거릴 정도로.
그럼에도 목덜미를 간질이는 긴장감은 해소되지 않았다.
“……분명 왔을 텐데. 그것들.”
울리취 덕분에 지상 소식에 관해 알게 되었다.
제국의 황제가 사망하고, 모험가들이 본격적으로 아르카나 대륙에 돌아오기 시작했다고 했었지. 모험가들도 복귀했는데, 그림자 용병단이 아르카나 대륙을 밟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분명, 나를 잡아서 족치려고 들 거야.”
특히 락키드, 그 녀석.
건수를 잡았다고, 마주치면 전력을 다해 나한테 달려들겠지.
물론, 키치가 우려하는 건 락키드와의 충돌이 아니었다.
당사자는 길길이 날뛸 테지만.
락키드는 키치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그래, 키치가 우려하고 있는 건.
어깨와 목을 짓누르고 있는 건.
과오의 무게였으니까.
“…….”
슥.
키치의 시선이 정갈하게 정돈된 테이블 위를 향한다.
보석함.
클라우디 가문 영애의 머리칼이 담긴 보석함에 손을 뻗었다.
울리취는 보석함을 건네며 덧붙였었다.
-“역시 나보다도 네게 필요할 것 같군, 키치.”
그 탐욕스러운 오크가 양보를 다 할 정도로.
그림자 용병단이 클라우디 가문에게 지은 죄가 크다는 거겠지.
하지만 오해하지 마라, 울리취.
나는 죗값을 치르는 게 두려운 게 아니거든.
“이딴 거 알게 돼서 좋을 게 없는데 말이야.”
클라우디의 처분은 단장이었던 내가 온전히 감당하면 되는 일.
키치는 단원들에게 불똥이 튀는 걸 원치 않았다.
비로소 뒷세계에서 손을 털고, 안정을 되찾은 단원들이었다.
‘너흴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
그들은 다시금 그림자 아래 숨어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개뿔. 정작 너희는 들은 척도 안 하겠지만.”
그러나 이젠 단장도 뭣도 아닌 자신이었다.
명령을 내리긴 지랄.
탈주자로 즉결 처형을 피해 다녀야 할 신세가 되었다는 뜻이다.
“……심란한데, 한 병 더 깔까.”
……한 병을 더 깐다고?
이미 혼자서 여섯 병을 비웠는데?
키치의 혼잣말에 바텐더 오크가 흠칫한 순간이었다.
……꿈틀.
오크 옥션을 밝히는 마력 전등 아래.
키치의 그림자가 움찔거렸다.
주변에 있던 오크, 모두가 그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지만.
당사자인 키치만이 알아차렸다.
그녀 역시, ‘그림자 신의 사도’ 중 하나였으니까.
키치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사도가 깨어났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성지에 누군가 진입했다.’
성지, 잊혀진 자들의 협곡.
그곳에 그림자 용병단원이 아닌 ‘누군가’가.
그 존재는 쉽게 떠올릴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잊혀진 자들의 협곡에는 사연이 남지 않는다.
그림자 신이 그걸 원치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잊혀진 자들의 협곡을.
협곡 밑바닥의 존재 자체를.
아르카나 대륙의 이들을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거늘.
키치가 중얼거렸다.
“누군지는 몰라도.”
뭐, 크게 신경 쓸건 없겠지.
그림자 신의 사도야말로 이질적이기 짝이 없는 힘을 지니고 있다. 대인전에서의 사도의 강함은 상상을 초월하며 무엇보다 죽어도 죽지 않으니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죽고 싶어도 마음대로 죽을 수 없지.”
키치의 입꼬리가 씁쓸하게 올라갔다.
“그야 우린 신의 미움을 산 괴물들이니까.”
.
.
.
젠장.
강하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골때리는 능력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내색할 수 없었다.
여기서 엄살을 피우는 순간.
손에 붙들고 있는 귀철이 내 전력에 실망하지 않겠냐.
‘그랑펠의 진실을 알아차릴지도 모른다고.’
그렇다.
나의 흑역사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귀철을 바로 쥐었다. [집념]까지 아득바득 긁어모아서 그림자 신의 사도라는 녀석에게 맞섰다.
정말이지, 처절하기 짝이 없는 항전이었거늘.
나의 입방정과 자세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으니.
나는 되살아나는 사도를 향해 내뱉었다.
“흥미가 식어가는구나.”
근데 말이야, 이게 또 마냥 허세는 아니거든.
『그랑펠의 재능은 한 가지에 국한되지 않았다.
명석한 두뇌는 기본.
타고난 마법적 재능은 웬만한 마법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 흉내 낼 수 있을 정도였다.
더 나아가 그에 뒤지지 않는 육체의 잠재력까지.』
되살아나는 사도를 다시 쓰러트리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점차 단축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나는 뻔뻔하게도 지껄였다.
“분발하거라.”
자, 뭐든 보여라.
비기든, 필살기든, 환영이다.
말했잖아?
나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다.
갑자기 마주한 시련에서도 성장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와라.
“보다 고아한 검술을 펼칠 순 없는 것이냐?”
어떤 스킬이든, 모조리 습득해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