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23화 (423/489)

◈ 423화. 내가 모르는 이야기 (1)

출근길의 4호선.

고막을 파고드는 대화.

……엿듣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직업병 때문이겠지, 성현준의 귀가 저절로 쫑긋거려졌다.

“이호열이 사방팔방에 제국기를 내걸었을 땐 뭔 쌩쇼를 하는 건가, 싶었거든? 그야 나 같으면 한시라도 빨리 제국을 집어삼킬 생각만 했을 테니까.”

“어휴. 긍지라곤 찾아볼 수 없는 새끼.”

“그래, 이번엔 욕해도 달게 먹는다. 진짜 어떻게 황제 자리를 마다할 발상을 할 수 있지? 봐도 봐도 예측할 수도, 종잡을 수도 없다니까?!”

전 코스모, 현 AAU 소속.

덕분에 플레이어는 아니지만.

웬만한 플레이어 이상으로 아르카나를 꿰뚫고 있는 성현준이었다.

모든 시스템 메시지엔 이유가 있지만.

모든 플레이어의 눈앞에 떠오르는 월드 메시지에는.

더더욱 큰 의미가 담겨있다는 걸 안다는 뜻.

‘나도 야밤에 경악했었지.’

오죽했으면 주말 저녁에 직장 상사, 윤 선배한테 전화해서 업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겠느냐고. 물론, 머리를 맞댄다고 해서 답이 나오진 않았지만.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게 괜한 소리는 아니었다.

-“아니, 황제 자리를 거절하는 게 말이 돼요?”

-“안 되지. 나오는 세금만 하더라도 얼만데.”

-“세금? 잠깐만요, 듣고 보니까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플레이어가 영지를 차지하고 싶어 하는 가장 큰 이유?

영지를 소유한 플레이어라는 명예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꾸준하게 수급할 수 있는 골드에 있었다.

‘작은 도시라고 해도 세금이 어마어마하니까.’

단순한 골드만이 아니었다. 영주의 칭호는 명성이 되었고, 그 드높아진 명성을 내세운다면 골드만으로는 살 수 없는 높은 등급의 아이템을 미리 선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거 총책임자님에겐 전부 해당 사항이 없잖아요?”

호열이 영주로서 취할 수 있는 이득?

-“그렇지……? 애초에 부족한 게 없으시니까.”

차고도 넘쳐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보물섬 유스라 왕국의 가치만 해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

귀중한 아이템?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착용 중이신 장비들만 따져도 충분했다.

에고 소드와 엑스칼리버, 휘황찬란한 제복까지…….

‘운영자인 나조차도.’

감히 등급을 짐작할 수 없는 수준의 아이템들이었으니까.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국은 흔한 영지가 아니잖아? 대륙 단위로 세금을 거둬들일 수 있고, 새로운 황제에게 잘 보이려고 아르카나인이나 플레이어나 엄청나게 뇌물을 찔러줄 텐데…….”

월요일 아침의 출근길.

“쓰읍, 상상하는 내가 다 군침이 나온다.”

호열의 황제 즉위 거절이야말로 복권 번호 이상으로 직장인들에게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많은 이들이 떠드는 만큼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이도 있었다.

“그래서 문제란 거야.”

“문제? 뭐가 또 문젠데.”

“이호열이 황제로 즉위했다면, 누구도 제국을 차지하겠다는 발상 자체를 하지 못했겠지. 이호열이 누군데? 철인을 넘어선 완벽한 초인이잖아?”

“그치. 어떤 미친놈이 이호열 영지를 노리겠어.”

“근데, 이호열은 황제 자리를 고사했어. 그렇다면 황제의 자리는 엄밀하게는 공석. 그 빈자리엔 제국의 황후나 어린 황자가 앉게 된단 소리잖아?”

성현준은 그쯤에서 주변을 둘러봤다.

대화를 엿듣고 있던 몇몇 이들의 눈에 흥미가 깃들었다. 아르카나 커뮤니티에 죽치고 있는 건가, 확실히 일리가 있는 추측이었다.

“그 꼴을 가만히 보고 있을까?”

“아르카나인이면 또 몰라도…….”

“욕심 많은 플레이어들이?”

성현준은 탄식을 삼켰다.

‘플레이어 속내는 내가 또 잘 알지.’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플레이어를 지켜봐 왔다.

덕분이겠지.

플레이어들이 보여줄 행동이 패턴처럼 대충 예상이 갔다.

꾹─

지하철 손잡이를 붙잡은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더군다나 명분이, 유혹이 쏟아지고 있어.’

플레이어들이 전해온 소식.

현재 아르카나 대륙엔 월드 퀘스트가 끊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그 퀘스트들의 공통된 목적이 바로 제국의 반대편에 서는 것이라고 했었지.

성현준의 표정이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는 이유였다.

‘……총책임자님께서 바라시는 건 뭘까.’

그저 제국이 온전하기를 바라시는 걸까.

그렇다면 어째서 황좌에 즉위하시지 않으신 걸까.

윤수겸과 밤새도록 수다를 떨었어도 답하지 못한 고민을.

혼자 하고 있으려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됐다, 회의에서도 같은 소릴 할 텐데.’

월급도 안 나오는 지하철에서 뭔 생고생이냐, 이게.

도리도리.

성현준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털어낸 순간이었다.

“어라?”

대화를 나누던 두 대학생뿐만이 아니었다.

각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던 승객들이 흠칫했다.

속보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마탑 포탈 목표 좌표에 안토니움이 추가됐다는데?!”

“……!”

제국의 수도, 안토니움.

방금 말했다시피 제국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 도화선에 불을 붙일 수 있는 건 당연히 플레이어일 터.

그런 플레이어들을 안토니움에 곧장 풀어놓는다?

“이거, 무조건 사건 터진다.”

“안토니움 난장판 되는 거 아냐?”

“몇몇 길드가 성전 연합군에서 탈퇴하기 시작했다는데?”

여론 파악은 거기까지였다.

지하철 문이 열리고.

성현준은 내달렸다.

타다닥.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마탑의 포탈에 목표 좌표를 설정할 수 있는 건 탑주, 마르셀로.

그리고 수석, 이호열 총책임자님밖에 없을 텐데.

도대체 어떤 그림을 그리고 계시길래.

성현준이 머리를 헝클었다.

“진짜, 총책임자님 업무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

플레이어.

각자가 욕망에 충실하기에.

누구도 종잡을 수 없는 존재.

하지만.

“……여기, 분위기가 왜 이래?”

대격변 이후.

지금까지 균열에서 활동하며 살아남은 플레이어들은 생존 본능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 생존력이 마탑의 포탈을 통해 안토니움으로 입성한 플레이어들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경건한 제국의 수도, ‘안토니움’에 진입하셨습니다.]

[황제를 위한 애도 기간입니다.]

[당신의 머리가 저절로 겸손해집니다.]

섣불리 나서지 말라고.

“우리가 생각했던 거랑은 완전 딴판이잖아?”

“월드 퀘스트는 확실히 떠올라 있는데…….”

“괜히 다들 쫄아서 그런 거 아닐까?”

그러나 어디에든 본능의 경고를.

애써 외면하는 이들은 있는 법이었다.

하지만 안토니움은 경거망동을 용납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문득, 들려오는 음성.

“정말이구나. 이 포탈을 통해서 모험가들이 쏟아져 나올 거라는 게.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신기하군. 나 같으면 두려워서라도 그분의 말씀을 흘려듣지 않을 텐데.”

……시작부터 뭔 헛소리야?

스윽.

플레이어들이 고개를 돌린 곳엔 붉은 눈이 있었다.

그렇다.

성전 연합군을 통해 모든 사정을 전해 들은 샤힌 듄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유달리 들뜬 표정을 짓는 이들은 유심히 관찰할 필요가 있겠지. 좋다. 가도 좋다. 이 붉은 눈이 그대들의 얼굴을 기억했으니.”

……꿀꺽.

그의 말에서 살의는 느껴지지 않았거늘.

압박감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샤힌 듄이 말을 끝마쳤다.

“부디 그분의 신뢰를 받은 내 체면을 구기지 말거라.”

“!!!”

그제야 플레이어들은 자각했다.

이호열, 그가 어째서.

안토니움을 포탈의 목표 좌표에 추가했는지를.

그렇다.

자신감이었다.

안토니움 외부에서 어떤 세력이 들끓는다고 한들.

내부에서 플레이어들이 작당한다고 한들.

규율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샤힌 듄.

다이아몬드 상단.

4가문.

“……대체 어디서 저런 NPC들이 튀어나온 거야?”

설령 아르카나 대륙에 어떠한 폭풍이 몰아닥친다고 하더라도.

항상의 자세.

언제나처럼 꼿꼿하겠단 선언과도 같았다.

“그래, 잠깐이지만 흔들린 내가 등신이었지!”

그건 긍지를 품은 이들에겐 더욱더 큰 긍지를.

“……이거, 국물도 못 건지겠는데요 형님?”

그렇지 못한 이들은 더욱더 위축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제국의 어머니가 지켜보고 있었다.

황후가 결연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당신의 가르침을 명심하겠습니다, 클라우디시여.”

바스라진 장미는 제국의 양분이 되었고, 그러한 제국에는 단비와도 같은 긍지가 스며들고 있었다. 그래, 새로운 시대의 장미를 싹 틔우기 위해서.

*

마티스, 벨리에, 벤쉬.

세 선임 마법사는 마탑으로 복귀했다.

따로 부탁하거나 당부할 건 없었다.

마탑엔 탑주, 마르셀로가 있잖아.

누구보다 내 마음을 잘 알고 있는 마르셀로다.

‘자리를 비워도 걱정할 건 없겠지.’

수석의 권한 발동.

포탈 목표 좌표에 안토니움을 추가한 참이었다. 혹시라도 안토니움에서 사건이 터져도 마탑이 즉각 지원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지금 안토니움에 모여든 지원군의 수준을 생각하면…….

‘안토니움을 공격하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겠지만, 뭐.’

저벅저벅.

“그럼 수석님의 평안을 기원하겠습니다.”

마티스와 벨리에.

두 선임은 아르카나 대륙에 별다른 미련이 없어 보였거늘.

어째 벤쉬만큼은 얼굴에 아쉬운 기색이 가득했다.

서당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던데.

“어째서일까요? 어째 다신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벤쉬에게도 눈치가 생긴 모양이었다.

포탈 앞에서 우수에 찬 눈으로 안토니움의 전경을 바라보는 벤쉬.

나는 그에게 특별히 한마디를 덧붙였다.

“[소형 마력 태양].”

“……예?”

“그 마도구는 내가 보관하고 있겠다, 벤쉬 윌리엄.”

“예, 예?!”

“이 또한 수석의 합당한 권한이다.”

출탑 신청 불합격의 원인을 내가 보관하고 있으니.

앞으로는 불합격으로 그렇게 청승을 떨 필요 없다.

무엇보다 진심으로 기대 이상이었거든.

‘그 능력을 충분히 증명했으니까.’

물론, 모든 건 그랑펠식 화법을 이해했을 때의 이야기.

“아니, 수석님께선 마도구 따위 없으셔도……!!”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벤쉬는 포탈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마음 같아선 출탑 신청서에 직접 합격 도장을 찍어주고 싶다만, 당장은 마탑에 들릴 여유가 없었다.

‘나도 상당히 바빠서 말이야.’

벤쉬까지 배웅하고 나서야 나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하이엘.”

“하이엘, 주군의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슬슬 떠나자꾸나.”

찾으러 가야지, 디엔드를.

어째서인가, 나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고 있는 디엔드였다.

그러나 어둠의 정령, 디엔드와 나의 계약은 끊어지지 않았으니.

하이엘이 내게 고개를 조아렸다.

“주군께서 하사하신 크리시아드라는 이름, 그 이름의 책임감을 깊게 느끼고 있습니다. 같은 크리시아드로서 디엔드의 이상을 알아차리지 못한 제 책임이옵니다.”

네가 사과할 것 없다, 하이엘.

계약이 유효한 걸로 봐선 디엔드에게 안위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닌 것 같았으니까. 그렇다면 디엔드가 나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몰려드는 과거와 배경에 심취한 모양이구나.”

어둠의 정령.

적합한 마력, 그 자체.

어쩌면 디엔드도 나처럼.

[흑화]에 시달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 [흑화], 나와 그랑펠의 인격이 반전되는 것처럼 디엔드도 그 탓에 나의 부름에 응답하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려할 것 없다, 디엔드.

‘내가 미쳤다고 널 얌전히 세상에 풀어두겠냐?’

디엔드가 몬스터로서 플레이어들과 적대하는 상상을 해본다.

분명, 출현 메시지가 떠오르겠지.

그 탓에 ‘디엔드 크리시아드 이터널 다크니스’라는.

해괴망측한 이름도 떠오를 거고.

혹시라도 그게 내가 지어준 이름이라고, 밝혀지기라도 한다면?

‘흑암룡에, 풀네임에, 이터널 다크니스까지…….’

그때야말로.

흑역사의 꼬리를 밟히게 돼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일 테니까……!

그러니까 나는 하이엘의 인도를 따라 포탈을 발현했다.

“이곳입니다.”

하이엘이 다시금 고개를 조아렸다.

“송구하게도 디엔드의 기척은 이곳에서 끊기고 말았습니다.”

나는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엘의 직감이 흡족하지 못해서?

아니, 그럴 리가 있냐.

광활한 아르카나 대륙이다.

하이엘, 너 없이 나 혼자였다면 평생을 뒤져도 디엔드를 찾지 못했을걸? 왜, 정령학파 선임 마법사 페이얀 롯도 그런 말을 했었으니까.

-“계약을 맺었다고 해도 정령들은 예민한 존재라서요. 제 파이어 드래이크만 하더라도 물 근처에선 불러도 응답조차 하지 않습니다. 상당히 얄밉죠? 평소 자신들이 머무는 장소도 알려주지 않고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하이엘과 깊게 교감하시는 수석님이 대단하시면서도 부럽…….”

그러니까 지금 내 말문이 막힌 데엔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 아르카나 대륙.

정말로 광활하구나.

제로 산맥도 현실로 업데이트되었겠다.

대륙에 이런 게 남아 있을 줄은 몰랐는데…….

[잊혀진 자들의 협곡 어귀]

[적정 레벨 : 1,000]

적정 레벨 일천(一千)이라니.

디엔드, 이런 곳에 겁도 없이 혼자 진입한 거냐.

내가 흠칫하며 걸음을 옮긴 순간이었다.

“!”

눈앞이 점멸했다.

퀘스트였다.

최근엔 좀처럼 반짝인 적이 없던 클래스 퀘스트.

그런데…….

[클래스 퀘스트 : 악크샨 내전]

……내전이라니?

아니, 선배님들.

나 모르게 싸움도 하셨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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