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1화. The End (1)
수많은 작전과 계획.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다.
이호열도 아닌 고작 이호열의 수하들에게.
류오쥔춘은 어깻죽지에서 솟구치는 피를 보며 생각했다.
어째서냐.
어째서 나는.
이호열과 마주할 수조차 없단 말이냐?
용성락이 옛 주군에게 싸늘히 뱉는다.
“주제를 알아라, 폭군.”
냉철한 판단력은 용성락의 장점이다.
세뇌라고는 하지만 과거에는 류오쥔춘을.
현재는 호열을 진심으로 섬기고 있었기에.
두 인물의 전력을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었다는 것.
물론, 비교 대상조차 되지 못했지만.
“하늘과 땅이다.”
용성락은 아르카나 대륙에 머물며 호열에 의해 아르카나 대륙이 암전되는 걸 목격했었다. 한없이 깊은 어둠, 그 헤아릴 수 없는 힘을 직접 경험했었다.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호열의 이명 또한 알고 있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거겠지.
그 이름에 담긴 뜻과 무게는 아직 헤아릴 수 없었지만.
클라우디.
그 가문의 위대함은 4가문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다. 각자가 아르카나 대륙에 군림해도 모자라지 않을 4가문의 가주들이 클라우디의 이름 앞에 머리를 조아리지 않았었나.
그러니까.
“네가 아무리 날고, 기어 다니려고 애써 봤자다. 시기하고 음해하고 끌어내리려고 해도 무의미하다. 하늘과 땅이다. 너는 그분의 펄럭이는 옷깃에도 스칠 수 없는 존재다.”
“…….”
용성락, 자신의 발싸개도 되지 못했던 사내가 훈계를 늘어놓고 있는 꼴이다. 분노가 들끓어야 했다. 그러나 류오쥔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무엇이냐. 그 눈빛은……?’
류오쥔춘이 바라보고 있는 건 용성락의 흔들림 없는 안광이었다. 과거, 군주의 세뇌가 발동 중이었을 때도 자신에게는 보여준 적이 없는 결의였다.
군주이기에.
자신의 스킬이기에.
류오쥔춘은 [세뇌]의 한계를 익히 파악하고 있었다.
죽음의 순간, 그 효과가 해제된다.
용성락이 변심한 것도 그가 죽음에 가까워졌었기 때문이었으니까.
그렇다.
“널 죽일 수 있다면 나 또한 기꺼이 죽겠다고 결심했다. 네 사상은 심각하게 위험하잖아? 폭군으로 전직한 지금은 더더욱 말이지. 하지만…….”
[세뇌]조차도 타인에게 죽음을 강요할 수 없거늘.
한데 용성락은 스스로 죽음을 각오했다고 지껄이고 있었다.
자신이 아닌, 이호열을 위해서.
류오쥔춘은 이를 악물었다.
그렇구나.
녀석에겐 나를 뛰어넘는 스킬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오해하지 마라. 모든 것은 나의 판단이니까.”
“……?”
“그분을 위해 널 찾아 나선 것, 그 시작부터가.”
용성락이 당연하다는 듯 말을 잇는다.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마라. 그분에게 너는 개미만도 못한 존재다, 류오쥔춘. 그분이 너 따위와 마주하실 필요도, 굽어살필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지.”
“……!”
류오쥔춘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어쩌면 정말로 나는.
이호열과 마주할 자격조차도 갖추지 못한 게 아닐까?
그에게 있어서 신경 쓸 존재도 아니었던 걸까?
내심 깨닫고 있었거늘.
부정하고 싶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류오쥔춘의 머리가 필사적으로 변명거리를 찾는다.
‘……절대 아니다. 저 엘프들을 보아라.’
아르카나 대륙에서 엘프는 드래곤과 비견되는 고등한 존재.
그들을 움직이기 위해선 분명.
이호열의 명령이 필수적일 터.
과거의 주군.
그 처절한 속내를 꿰뚫어본 것인가.
용성락이 피식 웃는다.
“한데,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는 말이 사실이더라고. 우연히 나와 같은 목적을 가진 엘프 어르신들과 조우하게 됐거든. 엘프의 지도자님께서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신 거겠지.”
……우연하게 만났다고?
폭군인 나의 잠재력을 우려했기에.
치밀한 포위망을 뻗쳐온 게 아니란 말이냐?
군주.
언제나 군림하던 존재.
용성락이 뱉어낸 진실에 류오쥔춘의 자존심이 무너져 내렸다.
“놀라기는, 아까 말했잖아?”
“……?”
“너는 그분과 마주할 자격조차 갖추지 못했다고.”
이내, 용성락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너는 그분의 라이벌도, 숙적도, 폭군도 아니다. 류오쥔춘. 기껏해야 부하였던 내게 죽는 것. 그게 네 그릇에 걸맞은 최후다.”
과장이 아니었다.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태초의 악을 쫓던 엘프들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폭군, 류오쥔춘?
귀찮은 날벌레조차도 되지 못했다.
슥─
그러니 기술이 필요하지도, 마법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무심하게 휘두른 엘프의 검격.
류오쥔춘의 몸과 머리를 그대로 절단하였다.
“나는……!!!”
데구르르─
부릅뜬 눈.
류오쥔춘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럴 가치도 없는.
흔하디흔한 죽음.
[사망하셨습니다.]
‘누구’의 말대로 악마와 다를 바 없는 최후였다.
.
.
.
“현인들이시여, 만나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용성락은 엘프들에게 넙죽 고개를 숙였다. 엄살이 아니었다. 혼자서 류오쥔춘과 마주했다면 어떤 꼴을 당하게 되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으니까.
‘위험했다.’
능력치가 형편없는 [군주]의 특징을 고려해 기습하려고 했건만.
[폭군]으로 각성한 육체가 그런 능력을 보여줄 줄이야.
새삼스럽게 또 한 번 감사를 올리게 된다.
“이 또한 총대장님의 안배셨겠지……?”
용성락은 엘프들이 자리를 뜨고 나서도 한참 동안 자리에 남아있었다. 차갑게 식어가는 류오쥔춘의 분리된 머리와 몸통을 바라봤다.
“말했지? 나는 너를 믿지 않는다고.”
몸에 좋다는 건 평소에 독식해서 챙겨 먹던 류오쥔춘이다. 혹시라도 잘려나간 머리가 저절로 붙어서 부활하지는 않을까, 우려한 것.
마법이 존재하는.
아르카나 상식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말했다시피 용성락은 냉정하고 철저했다.
“내키진 않지만, 확실하게 하는 게 좋지.”
왜, 마을 근처에 시체를 내버려두는 것도 좋지 않으니까. 용성락은 류오쥔춘의 머리를 땅속 깊이 묻고 몸통은 깊은 산기슭에 던졌다.
사람의 흔적을 지우는 것쯤이야.
“네 덕분에 배운 걸, 너한테 써먹게 되는군.”
천하통일, 오성으로 활동하며 실컷 해본 일이었다.
오성이라 해서 떠오르는 건데.
류오쥔춘의 부하가 달려들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정말로, 이번엔 아군이어서 다행이었다.’
겸사겸사 엘프들이 일찌감치 처리한 모양이었거든.
뭐, 녀석들 말고 다른 부하가 있다고 해도 걱정할 건 없었다.
류오쥔춘의 사망과 동시에 상태이상, [세뇌]도 해제되었을 터.
“걔들이 미쳤다고 구하러 오겠어, 너를?”
나처럼 죽이러 오지 않으면 다행이지.
아우우우우─!
용성락은 나무 위로 올라갔다. 이윽고, 피 냄새에 몰려든 짐승들을 바라봤다. 류오쥔춘의 육신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모습을 두 눈에 담았다.
“명복은 좆이나.”
가운뎃손가락까지 날려준 다음에야 나무에서 내려왔다.
“서둘러야겠는데.”
류오쥔춘, 녀석을 추적하느라 꽤 긴 시간을 보냈다.
“가시는 길은 지켜봐야지.”
그사이에 제국의 황제께서 눈을 감았다는 비보를 접했다. 그러니 적어도 황제의 장례가 끝나기 전, 임무가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고 안토니움에 돌아가야 면목이 있지 않겠는가.
*
제국, 황궁의 회장.
유스라 왕국보다는 덜 휘황찬란하지만.
적당히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넘실거리는 이곳에서.
나는 상석(上席)에 앉아있다.
황제가 기거하는 황궁의 상석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바로 황제의 자리란 뜻이다……!
하르콘, 내쉬, 마티스, 벨리에, 벤쉬, 그리고 제국의 대신들까지.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새삼스럽게 안도의 한숨을 삼킨다.
‘진짜 거절해서 다행이다.’
물론 뻔뻔한 철면피는 미동도 없고, 꼿꼿한 자세 또한 황제의 자리를 우리 집 소파처럼 여기고 있었건만. 모든 건 임시에 불과했다. 진짜였으면 나, 이호열의 정신력이 버티질 못했을 거라고.
내가 상석에 임시로 앉게 된 이유?
간단했다.
제국의 황후께서.
자신의 능력 부족을 뼈저리게 실감하시고 계시기 때문이었다.
‘그래, 배우는 자세는 좋아.’
문제는 내 입방정을 지나치게 경청한다는 것이다.
-“부끄럽게도 저는 통치에 무지합니다. 그러나 클라우디께서 보여주신다면, 가르침을 주신다면, 빠르게 습득하여 폐하의 빈자리를 대신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일종의 대리청정의 대리청정.
본의 아니게 제국의 비선실세,
뭐, 그런 느낌이 되어버린 거지.
덕분에 무려 제국의 [권한] 기능까지 활성화해 버렸다.
‘허.’
시스템 메시지로 떠오르는 수치들.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간다는데.
쑥대밭이 되었어도 제국은 제국이었다.
‘예상되는 세금 수입 골드만 얼마야, 이게……?!’
그러나 청렴결백.
부귀영화만큼이나 내게는 무의미한 것도 없었기에. 나는 곧바로 본론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권한] 기능을 통해 제국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보완점을 내놓았다는 말이다.
내쉬를 비롯한 대신들이 감탄을 내뱉었다.
“저희보다도 제국에 관해 훤히 꿰뚫고 계시다니요!”
……그게 설명하기는 복잡한데.
그냥 시스템창에 다 나오는 거거든.
천하의 그랑펠도 이번엔 입방정을 떨지 않았거늘.
“내쉬 경, 호열 경은 마탑의 수석님이십니다.”
……벤쉬 윌리엄 선임, 당신이 왜 팔불출처럼 미소를 짓고 있는 건데? 덕분에 수치심이 치솟았지만, 제국의 회의는 계속해서 진행되어야만 했다.
“크고 작은 세력들이 태동하고 있습니다.”
월드 퀘스트 관련 소식들이 전달되어 온다. 신하들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르카나 대륙을 지배한 제국이라고 한들. 그건 과거의 영광에 불과했으니까.
“클라우디께서 기적을 행하셔서 안토니움은 평화를 되찾았지만……. 송구하게도 제국이 흔들렸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겠지요. 저들이 눈독을 들이는 것도 이해가 되는 바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얌전하길 바라는 게 이상하지.’
흉조에서 역류한 세력들.
그들에게 있어서 아르카나 대륙을 통일한 제국?
그닥 좋은 감정을 가질 순 없겠지.
특히나 과거에 대단했던 세력들일수록.
‘자신들의 영토를 제국이 차지한 꼴처럼 보일 테니까.’
물론, 내가 전면에 나서서 유세를 부릴 순 없었다. 엄밀히 따져 보면 흉조에게서 삭제된 이들은 구해낸 건 내가 아니라 흉조에 삼켜지셨던 우리 악크샨 선배님들이셨으니까.
더욱이.
‘내가, 그랑펠이 나설 명분이 없단 말이지.’
클라우디는 그저 대륙을 조율할 뿐.
딱히 제국과 세릭로즈 가문을 지지하는 게 아니었거든.
그런 의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정해져 있었다.
하르콘에게 말했던 것처럼 진정한 암투가 당장의 최선이라는 거지.
그러니 나는 입을 열었다.
“우려할 것 없다.”
적어도 아르카나 대륙이 정상화되는 데에는 제국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판단한바. 그때까지는 제국이 온전해야 한다는 게 나의 판단이었으니까.
그리고 이 무거운 책임감이 어떻게 간과할 수 있겠냐?
‘프라이드, 녀석이 벌인 짓을.’
황제가 전황의 서고로 발을 들이게 된 데에는 프라이드가 관련되어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이제부터 속속들이 도착하는 소식에도 내게 감사할 필요는 없다.
“……응?”
문득, 내쉬가 흠칫했다.
아마도 안토니움의 마력석탑을 통해 텔레파시가 속속들이 전해져오고 있는 모양인 듯싶었다. 믿지 못할 소식이라도 전해 들은 표정을 짓는데.
그렇게 놀랄 거 없다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시작부터 놀라기는 이르단 뜻이지만.
“내쉬 경,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혹여 좋지 않은 소식이라도……?”
“설마, 적대 세력들이 벌써 진격해 오기라도……!!”
도리도리, 내쉬가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게 병력들이 안토니움에 도착하기는 했는데……. 그게 적대세력은 아닌 것 같다고 합니다! 서문에서는 붉은 눈의 듄 일족이, 동문에서는……. 잠깐만요, 다이아몬드 상단?! 그, 그리고 북문에서는 자신을 아젠트레스라고 밝힌 엘프가?!”
“붉은 눈이라면……. 그 말도 안 되는 무력을 지닌 다른 대륙에서 왔다는 존재들이 아닙니까? 그, 그들이 안토니움에 접근하다니요?”
“다아이몬드 상단은 분명 엄청난 호재지만……! 한때 제국을 돈으로 사려고 했던 상단주, 가몬드 필인 만큼 각별하게 주의를……!”
“그보다 엘프라니요. 그건 또 무슨?!”
“애초에 그들의 말을 신뢰할 수 있단 말입니까?”
“…….”
그쯤에서 일제히 나를 향하는 시선.
다들 내가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바라는 것 같은데.
딱히 내가 입을 열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렇다.
침묵 또한 그랑펠식 화법.
말했다시피 놀라기엔 이르다.
황제의 애도가 한창 중인 안토니움에 빈손으로 돌아올 만큼.
다들 격식이 없는 이들이 아니거든.
이내, 내쉬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자, 잠시만요. 안토니움으로 오시는 길에 걸리적거리는 세력들을 격파하셨다니?! 클라우디의 뜻에 따라서 어, 어둠의 위대함을 널리 알리셨다니요?!”
……근데.
마지막 말은 금시초문인데.
누구야, 누가 마음대로 내 어둠을 널리 알린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