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0화. 자비로우신 어둠이여 (2)
아젠트레스는 새롭게 싹 틔운 세계수로 향하던 중.
바람을 타고 흘러든 엘시도어의 냄새를 맡았다.
완전히 다른 세계의 존재인 모험가에게서.
그의 음성은 차가웠다.
“아니, 대답은 듣지 않겠다.”
“?!”
그것이 아젠트레스와 백성륜.
둘이 나눈 대화의 전부였다.
엘프의 지도자로 유일한 하이엘프인 아젠트레스였다.
일반적인 엘프와는 ‘격’이 다르다는 것.
‘……온다!’
백성륜.
초신성의 우두머리로서 쌓아온 수많은 대인전 경험?
아젠트레스 앞에선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꼴조차 되지 못했다.
백성륜이 살의를 담아 무기를 휘둘러 왔다고 한들. 과거, 아젠트레스가 아르카나 대륙을 유랑하며 손에 묻힌 피에 비할 바는 되지 못했으니.
우지끈!
맨손이었다.
아젠트레스가 백성륜을 완벽히 제압했다.
오른손으로 백성륜이 휘두른 언월도를 부러트리고.
왼손으로 백성륜의 목을 낚아챘다.
“컥!”
그 손아귀에 자비란 없었다.
어째서 엘시도어의 냄새를 풍기는가.
정체가 무엇인가, 질문 따윈 필요치 않았다.
천하통일, 류오쥔춘, 이호열…….
하이엘프.
드높은 마력과 정신력을 타고난 존재.
아젠트레스가 백성륜의 속마음을 읽어냈으니까.
“그렇군.”
덕분에 알게 되었다. 백성륜은 꼭두각시에 불과하며 그 우두머리는 류오쥔춘이 이들의 군주란 사실을.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정보.
“네놈은 인간이 아닌 벌레였구나.”
천하통일, 그들이 노골적으로 호열을 적대하고 있단 사실을.
아젠트레스는 곧장 백성륜의 목을 비틀었다.
행동에 망설임은 없었다.
우드득!
긍지를 바라보며 비로소 인간을 굽어보게 된 하이엘프.
그러나 추악한 벌레에게까지 인내심을 베풀 정도로.
아젠트레스는 자비롭지 못했다.
퍽.
아젠트레스가 백성륜을 흙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우두머리를 포함하여 남은 건 넷인가.’
자신의 손으로 처리하고 싶었거늘.
유감스럽게도 세계수로 향하는 길과는 반대편이었다. 태초의 악이 세계수를 노리고, 드래곤들조차 온전치 못한 지금. 벌레 따위에 시선을 분산시킬 순 없었다.
아젠트레스가 엘프들에게 텔레파시를 전달했다.
-모조리 처형하라.
천하통일의 말살을 지시했다.
태초의 악을 쫓아 아르카나 대륙을 수색하던 일백(一百)의 엘프에게 척살령이 떨어진 것. 아젠트레스는 백성륜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걸음을 떼었다.
그때였다.
미동도 없던 백성륜의 몸이 움찔거렸다.
[스킬, ‘발악’이 발동됩니다.]
죽음에서 살아나는.
기사회생 같은 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발악에 불과하지.
문득, 돌아오는 정신.
백성륜은 핏물과 쓴웃음을 동시에 삼켰다.
‘……간만에 보는데, 이 메시지도.’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한 시절에야 유용하게 써먹었다.
그 효과가 상당히 특수한 조건을 달고 있던 덕분이었다.
[발악 : 생명력이 1퍼센트 이하일 때 발동합니다. 발동 시, 최대 생명력의 30퍼센트까지 급격하게 회복하며 모든 상태이상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지속시간 : 1분)]
뒤통수를 치는 데 특화된 스킬, 발악.
적어도 동귀어진을 가능하게 하는 효과였는데.
“……빌어먹을.”
생명력이 차올랐어도 아젠트레스를 향해 달려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압도적인 격차를 실감했으니까. 아니, 백번 양보해서 설령 승산이 보였다고 한들.
‘아니지, 이젠 명분이 없나.’
죽음의 순간.
백성륜에게도 상시 발현 중이던 군주의 족쇄.
류오쥔춘의 세뇌가 풀린 것이었다.
백성륜은 헛웃음을 뱉었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말이야.”
나는 류오쥔춘, 당신을 따랐을 텐데.
류오쥔춘이 어떤 악행을 저질렀다고 한들, 자신 또한 그의 신임을 받아 이득을 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백성륜은 류오쥔춘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독기가 마음에 드는군. 나를 위해 싸울 기회를 주마.”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는 건 처음이었다.
백성륜은 그때부터 결심했었다.
류오쥔춘, 그를 위해서 살겠다고.
정작 주군이라 섬긴 이는 믿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백성륜은 비릿하게 웃었다.
“됐어, 이걸로 서로 빚진 건 없는 걸로 하지.”
지속시간, 1분이 끝나간다.
[발악]의 효과가 점점 꺼져간다.
무뎌졌던 감각이 돌아오고 고통이 돌아온다.
백성륜은 대자로 뻗어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과다출혈]
[골절]
[내상]…….
상태이상마저 돌아오면.
1퍼센트 남은 생명력은 풍전등화처럼 꺼져버리겠지.
영락없이 뒈지게 생겼군.
왜, 죽는 순간엔 주마등이 스쳐 간다고 하던데.
자신에게는 스쳐 갈 추억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플레이어를 죽이는 걸 추억이라고 떠올리고 싶진 않았는데.
그걸 빼면 무엇 하나 남은 기억이 없었으니.
“컥.”
백성륜이 피를 토해내던 그때였다.
“으헉?”
인기척이 느껴진 건.
쓰러진 백성륜을 향해 누군가 달려왔다.
발소리를 들었을 때는 한 명이 아닌 무리였다.
“……차림새가 낯설어요.”
“혹시 말로만 듣던 모험가들인가?”
“모, 모험가!”
“놀랄 때가 아니라 일단 상처부터!”
“……?”
백성륜은 어이가 없었다.
‘어째서냐?’
아무런 관련도 없는 자신에게 어째서 이런 호의를 베푼단 말인가? 아르카나 대륙 전기 시절부터 PK를 일삼은 탓에 바닥을 기는 명성. 과거, NPC들이었던 아르카나인이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 순 없을 텐데…….
“저희에게 감사하실 것 없어요.”
“……?”
“저흰 그분께 받은 걸 돌려드리는 것뿐이니까요.”
……‘그분’이라고?
그나저나 허튼짓이었다. 이건 웬만한 치유 마법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치명상이다. 필사적으로 매달려 봤자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밖에…….
[생명력이 급격하게 차오릅니다.]
“?!”
백성륜의 상식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 연달아 벌어지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순간, 백성륜을 치유하고 있는 건.
플레이어들이 알지 못하는.
아르카나 대륙에서 잊혔던 존재들이었으니까.
[평화를 노래하는 목자들이 아르카나 대륙에 평화를 몰고옵니다. 이제부터 목자들은 아르카나 대륙을 떠돌며 부상당한 플레이어를 치유합니다.]
백성륜은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나는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들이 말하는 ‘그분’이 누구인지를.
어리석게도.
아직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뿐이겠지.
백성륜은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한때 주군이라 여겼던 류오쥔춘조차도.
‘……나를 믿지 못하고, 버렸는데.’
숙적이라 생각했던 이호열.
그가 남긴 긍지가 자신을 살릴 줄이야.
백성륜은 이 순간, 강한 회의감을 느꼈다.
그의 입술이 작게 움찔거렸다.
“받았으니 반드시 갚겠다. 그게 나, 백성륜이니까.”
*
“요동치고 있군.”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오른다.
아르카나 대륙은 더없이 광활하다는 걸.
류오쥔춘은 영지, [랑에리]의 정보창을 확인했다.
[랑에리]
[현황 : 공포]
[명성 : 3,800]…….
영지의 상태가 [공포]로 바뀌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랑에리에 적대세력이 몰려들었다는 것.
점멸하던 월드 퀘스트로 보았을 때 아르카나 대륙에 돌아온 신흥 세력들이 랑에리를 노리고 있을 게 뻔했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랑에리는 먹음직스러운 영지였으니.
류오쥔춘이 비뚤게 입꼬리를 올렸다.
“겁도 없이.”
황제가 죽고 나서야 제국을 노리기 위해 움직인 이들이다.
류오쥔춘은 그런 어중이떠중이들과 달랐다.
아르카나 대륙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이호열을, 제국을, 아니, 아르카나 대륙을 집어삼키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만큼 수많은 계획을 세우고, 실행해온 류오쥔춘이었으니까.
[전국시대의 효과로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더욱이 시대의 흐름이 클래스, [군주]의 능력을 부추겼다.
그런 군주의 상위 클래스.
[폭군]으로 거듭난 류오쥔춘의 능력치?
[클래스, ‘폭군’의 영향력이 랑에리를 뒤덮습니다.]
[영지, ‘랑에리’가 당신에게 복종합니다.]
[영지의 명성에 비례해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대마법사], [용기사], [웨펀마스터]…….
인류의 최종병기라 불리는 히든 클래스와 비교해도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스스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류오쥔춘은 망설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나, 칭찬받을 자격이 있다.”
츠릉─!
검을 빼 들고는 침입자들을 평가했다.
“오성이 자리를 비운 시점을 노린 건 높게 평가하마. 그러나 간과했구나. 군림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한 법이다. 그렇다. 같잖은 변명은 필요하지 않다.”
류오쥔춘의 눈이 광기로 희번덕였다.
“군림하지 못한다면, 그저 힘이 부족한 것이다.”
류오쥔춘은 장담할 수 있었다.
현재, 자신과 이호열의 격차가 아무리 심하다고 한들.
[폭군]의 잠재력은 차원이 다르다.
전국시대가 끝나기 전.
이호열을 자신의 발아래에 둘 수 있다고.
그러니 이건 증명에 불과했다.
털썩─
류오쥔춘이 랑에리 영주성에서부터 성문까지 거닐었다.
경비병, 신하, 상인, 농부…….
모든 랑에리의 백성들이 류오쥔춘 앞에 납작 엎드렸다.
폭군 앞에 굴복했다.
비유가 아니었다.
스스스.
바닥에 납작 엎드린 이들에게서 흘러나온 무형의 기운이 정말로 폭군, 류오쥔춘에게 집중되고 있었으니까. 류오쥔춘의 눈이 발동 중인 클래스 스킬을 향한다.
[폭정 (20%) : 발동 시, 폭군의 지배 아래에 있는 모든 생명체의 능력치를 흡수한다. 그 효율은 지배력이 상승할 때마다 비례하여 상승한다. (현재 흡수율 - 20%)]
랑에리의 전력이 100이라면, 2할에 해당하는 20이 폭군 류오쥔춘에게 집중된 상태였다. 나약한 누군가는 말하리라. 그렇다면 전력상 단순한 손해가 아니냐고.
실로 나약하기 짝이 없는 소리다.
‘내가 온전히 지배하고, 휘두를 수 없다면.’
그것이 가진 가치가 일백이든, 일천이든, 일만이든, 무한대이든 의미가 없지 않으냐? 류오쥔춘은 자신의 논리를 이 자리에서 증명할 생각이었다.
“같잖은 충성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공성전.
적 또한 각오를 마치고 랑에리를 공격했을 터.
류오쥔춘은 그 각오를 무참히 짓밟을 생각이었다.
“지배받지 않는 인간은 나약하다.”
서로가 앞다퉈 목숨을 갈구하게 하고, 자신들끼리 칼을 겨누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류오쥔춘이 생각하며 랑에리의 성문을 개방한 순간이었다.
끼기긱!
“찾았다.”
마주했다.
“쥐새끼.”
안대로 한쪽 눈을 가린 사내.
천하통일의 선발대.
아르카나 대륙에 내던졌던 용성락을.
“너 때문에 도려낸 눈이 욱신거려서 살 수 있어야지.”
용성락은 아르카나 대륙에서, 성전 연합군으로서 자신의 쓰임새를 잊지 않았다. 최상위 랭커도 아니고, 아르카나인들처럼 뛰어난 능력을 갖추지도 못했다.
그런 자신이 남들보다 앞서는 것이라고는.
“류오쥔춘. 내게는 네놈의 사고방식이 훤히 보인다. 쓰레기니까 쓰레기를 알아본다는 거지. 풍겨오더라고, 이곳에서 지독한 쓰레기 냄새가.”
과거, 류오쥔춘에게 세뇌당하고 휘둘린 덕분.
류오쥔춘의 행동 패턴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뿐.
더욱이 용성락에겐 제국과 성전 연합군의 지원이 있었다.
덕분에 찾아낼 수 있었다.
-“랑에리의 주민들이 흉흉한 소문을 전해왔습니다.”
-“특이한 행색의 사내들이 랑에리 영주성을 드나들고 있다고 했었죠? 백성들의 말에 따르면 그 복장도, 외관도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온 것 같다 하였는데…….”
-“공통적으로 붉은색 의복을……!”
랑에리에서 류오쥔춘의 흔적을.
“그야 개수작이 조금도 발전하지 않았잖아?”
“…….”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아르카나 대륙, 어딘가에서 비명횡사했을 줄 알았던 용성락이 멀쩡히 살아있을 줄이야. 분명, 이호열이 자비를 베푼 거겠지. 말도 안 되는 이상을 관철하기 위하여.
나약한 판단이다.
“인간은 고쳐쓸 수 없거늘.”
류오쥔춘은 그쯤에서 생각하기를 관뒀다.
용성락의 배반은 나름 신선했지만, 충격을 받을 이유 따윈 없었다.
류오쥔춘, 애초에 그는 누구도 신뢰하지 않았으니까.
당연하게도.
스릉─!
휘두르는 검격에도 옛정은 없었다.
“!”
용성락은 흠칫했다.
‘발전이 없던 게 아닌가?’
군주 클래스였기에.
과거에도 전장에선 별다른 활약을 펼칠 수 없던 류오쥔춘이었거늘.
……설마, 벽을 깬 건가?
군주의 상위 클래스.
폭군의 힘을 온전히 다룰 수 있게 된 건가?
‘빠르다.’
그 움직임이 쉽사리 눈을 쫓을 수 없을 정도.
어느새 코앞이었다.
허나, 용성락은 목숨이 걸린 찰나에 입을 열었다.
“그런데. 폭군으로 거듭난 만큼 시야는 좁아졌구나, 류오쥔춘. 나를 쓰레기라 여기면서도 깨닫지 못한 거냐? 정말로 내가 네놈의 잘난 영지를 공포로 몰아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류오쥔춘이 자각할 틈도 없었다.
스슥─
날아드는 화살에는 자비란 담겨있지 않았기에.
푸푹!
“……?!!”
폭군으로서 급상승한 방어력을 가뿐히 무시하고 살갗을 파고드는 화살. 류오쥔춘이 육체가 고작 화살 한 방에 격하게 휘청거렸다.
[상태이상, ‘혼란’이 발생합니다.]
[상태이상, ‘출혈’이 발생합니다.]
[상태이상, ‘경직’이 발생합니다.]…….
“!”
거만하게 뜨고 있던 눈동자가 저절로 휘둥그레질 정도.
폭군의 감각이 그 정체를 짐작게 한다.
그렇다, 잊을 수 없었다.
‘……이건?’
어떻게 포장을 하더라도, 조국과 천하통일을 외면하고 아르카나 대륙으로 도망친 사실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스스로 치욕으로 여기고 있었기에.
이윽고.
숲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고고하디고고한 존재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엘프.
“……!”
그런데, 하나가 아니었다.
둘, 셋, 넷…….
대략 수십.
빠져나갈 틈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방에서 엘프가 다가오고 있었다.
류오쥔춘은 경악했다.
‘고작 나를 죽이기 위해 이렇게 많은 엘프가 움직였다고……?’
설령 엘시도어의 원한을 샀다고 한들.
그건 현실에서의 일이었다.
아르카나 대륙의 엘프가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엘프와는 관계도가 악화할 만한 일은 저지른 적이 없었거늘.
‘엘프가 나를…….’
쉴 새 없이 굴러가던 류오쥔춘의 머리가 답을 내놓는다.
그래, 한 가지를 가정한다면.
모든 게 맞아떨어졌다.
‘……설마.’
엘프.
저들 또한 이호열의 세력이라면.
그러나 류오쥔춘은 납득할 수 없었다.
“그분과 다르게 우린 자비롭지 않다.”
어째서 태고의 존재들마저도.
이호열을 그분이라 칭하며 따른단 말인가?
이내, 용성락을 향하는 시선.
“…….”
어째서 군주였던 나조차도.
단 한 번도 목격하지 못한 충심을 이끌어낼 수 있단 말인가?
죽음 앞에서도 꺾이지 않게 한단 말인가?
“대체, 내게, 무엇이 부족하기에……!!”
억울함에 복받쳐 소리쳤다.
그러나 류오쥔춘의 의문은 해결되지 못했다.
말했다시피 엘프들에게 자비는 없었으니까.
뎅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