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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18화 (418/489)
  • ◈ 418화. 암투

    권력이 움직인다.

    “그분이시라면…….”

    “폐하께서도 호열 경을 높게 평가하셨었지.”

    “하르콘 경, 먼저 결단을 내려줘서 고맙군.”

    신하들의 얼굴에 언뜻 희비가 내비친다. 그러나 장담컨대 이 자리에서 누구보다 절망한 건 황궁 시녀장, 조안이었다. 조안은 잰걸음으로 황궁을 거닐었다.

    “하르콘 경…….”

    제국을 수호하는 무력?

    아르카나 대륙을 아우르는 정치력?

    사람을 이끄는 인품?

    더 나아가.

    “긍지라고 하셨지요……?”

    허나, 유감스럽게도 자신에게 그 대단한 걸 알아볼 식견 따윈 없었다. 기껏해야 황궁 시녀들을 관리하고, 황가의 보필하는 게 조안의 임무였으니까.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는 따를 수 없습니다.’

    모험가, 이호열.

    위상은 익히 알고 있다.

    그가 아니었으면 제국은 무너져도 한참 전에 무너졌을 터.

    특히 검성이 이끄는 반란군이 안토니움으로 진격해 왔을 때.

    그의 구원이 없었다면 자신은…….

    ‘참수당해 시체도 찾지 못했겠지.’

    황궁에서 늘어나는 건 눈치다.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영면에 드셨으니, 황후 폐하는 물론이요, 황자 저하께서도 권력과는 멀어지시리라고. 그런 와중에 제국으로 복귀한 무력의 실세,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 모험가를 새로운 황제로 추대하고 있었다.

    조안이 중얼거렸다.

    “……황궁에서 쫓겨나지 않으시면 다행이야.”

    아니, 더욱 냉정하게 생각해본다.

    새로운 황제가 훗날.

    자신에게 위협이 될 황자 저하를 살려둘 리가 있을까?

    ……저벅저벅.

    그렇게 생각하자 조안의 걸음은 더욱 분주해졌다.

    “황후님!”

    벌컥─!

    별실의 문을 열자 보인 건.

    곤히 잠드신 황자와 그 곁에서 저하를 보살피고 계신 황후였다.

    황후가 작은 목소리로 화답한다.

    “울다가 지쳐 조금 전에 잠드셨어요.”

    담담히 내뱉는 황후의 눈가가 언뜻 젖어있었다.

    혹, 폐하의 비보를 전해 들으신 건가.

    황후가 멈칫하는 조안에게 다가와 묻는다.

    “상황이 일단락된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이렇게 긴 나흘은 처음이에요.”

    황후는 안도하는 눈치였다.

    이 평화를 깨고 싶지는 않았지만, 조안은 입을 열었다.

    그래, 모든 건 황후와 황자 저하의 안위를 위해서였다.

    “그보다 대피하셔야 합니다.”

    “피하다니요?”

    “두 분의 안위가 심히 염려됩니다……!”

    차마 입에 담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조안은 상황을 간결하게 설명했다.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오신 황후님이시다. 충격을 받으시면 어쩌나, 염려했거늘. 기우였다. 황후께선 모든 전후사정을 듣고도 변함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요, 그렇게 된 거군요.”

    “네, 그러니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황자 저하께서는 두 분이 노력 끝에 뒤늦게 맺은 결실이셨다.

    올해로 고작 다섯 살.

    그것이 조안이 서둘러 황궁을 떠나고자 결심한 이유였다.

    “폐하께서 황위 승계를 끝마치지 못하시고 눈을 감으신 지금. 저하에겐 황위 계승을 주장할 명분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편치 않으시겠지만, 부디 저하께서 장성하실 때까지……!”

    지금이야 제 나이 때,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으시지만.

    세릭로즈의 피를 이은 저하셨다.

    장성하신다면 언젠가는 분명.

    제국을 다시 탈환하실 능력을 거머쥐게 되실 터.

    조안은 이미 각오를 마친 상태였다.

    “그때까지 제가 두 분을 보필하겠습니다.”

    “조안…….”

    “절 그리 안쓰럽게 바라보실 것 없습니다, 황후님.”

    결단?

    웅성거리는 황궁에서 별실까지 홀로 걸어오며 끝마쳤다. 다만, 간단한 짐과 재물을 챙길 필요는 있겠지. 조안이 황궁을 떠날 채비를 하기 위해 몸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황후가 조안을 불러세웠다.

    “그분께서는 이미 별실에 다녀가셨는걸요?”

    ……멈칫!

    그분이라면.

    이호열, 그 모험가……?

    “그게 무슨?! 그보다 황후님, 무사하신 건가요?”

    경악하는 조안에게 황후가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황궁과 떨어진 별실에서 제가 어떻게 주군의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을까요? 염려할 것 없답니다, 조안.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고 염두에 두고 있었으니까요.”

    그렇다.

    황후는 비보에도 무너지지 않았었다.

    자식을 둔 어미로서 무너질 수 없었다.

    문득, 탁상 위를 향하는 황후의 시선.

    탁상 위엔 호신용 단검이 놓여 있었다. 황후가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자신이 휘두르는 단검 따위 위대한 모험가인 호열에겐 위협조차 되지 않을 텐데. 잘도 저걸 집어 들었구나, 싶었으니까.

    덜덜덜.

    떨리는 손으로 단검을 쥐었던 황후.

    그녀에게 호열은 말했다.

    -“좋은 자세다.”

    잊고 있던 짐을 상기시켜 줬다.

    -“그대는 앞으로 모든 이를 경계해야 한다.”

    제국의 은인에게 다짜고짜 검을 치켜든 이유?

    그건 머릿속이 더없이 혼란했기 때문이었다.

    주군께서 눈을 감으신 지금.

    침대에 곤히 잠든 황자를 지킬 수 있는 건 어미인 자신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 과정에서 삶을 포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눈을 감는다면…….

    주군을 따라갈 수 있으리라 여겼으니까.

    그러나 크나큰 착각이었다.

    -“나를 포함해 모든 이의 말을 의심해야 한다. 이 시간부로 모든 판단에 주체가 되는 건 그대니까. 그대가 타인의 말에 휘둘린다면 제국도, 제국의 백성도, 타인에게 휘둘리게 된다.”

    -“그, 그게 무슨?”

    호열의 시선에 단검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침대를 향하는 시선.

    잠든 황자를 바라보는 그 눈빛이 사뭇 따뜻했다.

    -“또한 황자도 예외는 아니겠지.”

    -“!”

    물론, 이어지는 말은 실로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저게 진정 사람이 지킬 수 있는 것들일까?

    듣기만 해도 부담감에 헛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호열은 아랑곳하지 않고 덧붙였다.

    -“허나, 신뢰해도 좋을 이가 있다면.”

    황후가 조안을 향해 호열이 건넸던 뒷말을 따라 뱉었다.

    “그대를 위해 나를 의심하는 자는 믿어도 좋다…….”

    “……황후님?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조안.”

    황후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조안을 바라봤다.

    그녀도 머리가 복잡하겠지.

    자신과 황자의 안위를 염려해 별실로 달려왔거늘.

    가장 우려하던 존재가 이미 다녀갔다는 대답을 들은 셈이니까.

    하지만 혼란스러운 건 황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한 조언은 태어나서 처음 들어봅니다, 모험가님.’

    당신을 의심하는 자를, 오히려 신뢰하라니요?

    그 말인즉.

    모험가인 호열은 황제의 자리 따위엔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뜻이었다. 황자가 황태자로 인정받지 못했으니, 그런 황자가 장성할 때까지. 황후로서 황제의 공백을 채우란 뜻이었다.

    문득, 황제가 지나가듯 했던 말이 떠오른다.

    -“진정한 군주란, 그분을 두고 하는 말 같소.”

    그땐 어째서 그런 소릴 하셨는지 알지 못했는데…….

    입가에 머금은 씁쓸한 미소.

    황후가 작게 읊조렸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폐하.”

    *

    흑암룡이란 무엇인가?

    참고로 말하지만, 흑염룡이 아니다.

    엄연히 다른 흑암룡을 말하는 거다……!

    드래곤들의 말에 따르자면 클라우디가 흑암룡이라 불린 이유는 뜻 그대로다. 클라우디는 아르카나 대륙을 그림자에서, 배후에서 관조하고 조율하던 존재였으니까.

    ‘부끄럽다. 정말.’

    그 시절, 내 취향은 정말이지 입으로 내뱉기 곤란할 정도였다. 주인공이 힘을 숨기는 만화나 소설만 추천을 받아서 읽어댈 정도였으니까.

    ‘그 취향이 반영된 건지 아닌지, 이젠 모르겠다만.’

    그 곤란한 취향 덕분이었다.

    ‘이번엔 덕분에 살았다.’

    하마터면 떠맡을 뻔한 황제 자리를 거절했잖냐?

    그래, 황제야말로.

    대놓고 위대한 자리였으니까.

    나, 이호열.

    돈은 많으면서도 유명하지 않은 삶을 꿈꿨던 소시민이다.

    그런 내가 아르카나가 현실이 된 지금.

    제국 황제 자리를 반길 수 있겠냐고……!

    그런 의미에서.

    그랑펠과의 극적인 의견 통일이 이렇게 반가운 적이 없었다.

    “제가 감히 무어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하르콘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이런 판단을 내릴 거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우려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황후께서 황좌의 무게를 감당하실 수 있을지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총대장님의 판단이시라면 믿고 따르겠습니다.”

    황후에게도 말했듯.

    나는 훗날, 황자가 황제 자리에 앉기를 바랐다.

    그게 제국의 규율이니까.

    물론, 아르카나 대륙 꼬라지를 고려하면…….

    황자가 자라는 과정에서 위대하신 흑암룡인 내가 알게 모르게 제국을 관조하고 조율하며 도움을 줘야 하겠지. 그럼 황제와 다를바 없이 피곤한 일 아니냐고?

    ‘피곤해도 그냥 넘어갈 수 있어야지.’

    올해로 다섯이라고 했었나.

    별실에서 마주한 황자는 울다 지쳐 잠들어 있었다.

    그래, 모든 건 황태자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할 정도로.

    어린 황자의 얼굴에서 겹쳐본 탓이다.

    하나뿐인 조카, 아랑이를.

    ‘아는 조카 하나 더 생겼다고 하지, 뭐.’

    보자, 시차를 생각하면.

    아랑이보다 네 배는 빨리 클 테니.

    그래도 그건 다행이네.

    그 이후엔 적당히 그랑펠식 화법으로 덧붙였다.

    본의 아니게.

    황후에게 부담감을 팍팍 실어버린 것 같았는데…….

    ‘나한테 단검을 들이민 걸 보면.’

    그래도 용감하게 잘 해내지 않을까?

    하르콘과 그에 관한 대화를 나누며 황궁을 거닐었다.

    하르콘이 웃음을 흘렸다.

    “다들 멋쩍은 표정을 짓겠군요.”

    “그런가.”

    “눈알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습니다. 누군가를 들먹일 것도 없이 저 또한 암투를 각오했으니 말입니다.”

    “지극히 사람다운 모습이군. 나쁘지 않다.”

    “그렇습니다. 성품을 떠나서 제국을 위하는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진실된 이들입니다. 그렇지 못한 이들은 변심하여 일찍이 제국을 떠났을 테니 말입니다.”

    하르콘의 말이 옳았다.

    신하들이 나를 새로운 황제로 생각했든, 하지 않았든.

    자신의 선택이 곧 제국을 위한 결정이라 생각했을 테니까.

    ‘황제가 내게 황좌를 떠넘기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야.’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해줄 말은 같다.

    ‘우리 자기 짐은 스스로 들자고, 제발.’

    나는 현실과 악크샨. 그리고 클라우디 가문의 무게만으로도 과분해 짓눌려 쓰러질 것 같으니까 말이야……! 이윽고, 하르콘과 나는 황궁 최상층에 이르렀다.

    대기하고 있던 황궁 마법사, 내쉬가 고개를 숙여왔다.

    “두 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준비가 끝난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하르콘 경.”

    나는 나열한 병사들을 바라봤다.

    저마다 손에 뿔피리를 쥐고 있었다.

    그래,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활기가 맴도는 안토니움에 비보를 전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내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게양하겠습니다.”

    촤륵─

    줄을 당기자 솟아오르는 제국기.

    뿌우우─

    이어서 뿔피리 소리가 경건하게 울려 퍼진다.

    이로써 안토니움의 모두가 황제의 서거를 알게 되었다.

    복구 중인 제국령에도 소식이 전해질 터.

    그뿐만이 아니다.

    ‘다들 군침을 흘리겠지.’

    흉조에서 역류한 세력들은 물론이요, 악마, 그리고 류오쥔춘을 비롯한 군주들까지. 황제의 공석을 틈타 제국에 어떠한 위해를 가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과연, 다들 양반은 못 되는구나?

    점멸하는 시야.

    [월드 퀘스트 : 찬탈자의 명분]

    [월드 퀘스트 : 마도의 시대]

    [월드 퀘스트 : 혼돈을 위하여]…….

    내 시야뿐만 아니다.

    모든 플레이어의 눈앞에.

    빼곡한 퀘스트 메시지가 떠올랐을 터.

    당연히 퀘스트 보상에 휘둘리게 될 플레이어가 속출하겠지.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냄새가 물씬 나네.’

    보상을 두고 서로를 죽고 죽이는 아르카나 대륙 전기 시절이 다시 도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 진짜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그런 의미에서.

    나의 투쟁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펄럭이는 제국기.

    마찬가지로 펄럭이는 여명의 재킷을 추스르며 읊조렸다.

    “암투를 각오했다고 했었나, 하르콘.”

    “그렇습니다, 총대장님.”

    “어쩌면 그대의 판단이 옳겠군.”

    그림자에서.

    배후에서.

    클라우디로서.

    아르카나 대륙을 조율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

    그에 관해서 길게 대답해 봤자 입방정밖에 더 떨겠냐?

    결국, 나는 그랑펠식 화법으로 말을 끝마쳤다.

    “한없이 깊은 어둠으로서 선사하겠다.”

    ……진짜 말이나 못 하면!

    “아르카나 대륙을 뒤덮는 진정한 암투(暗鬪)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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