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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17화 (417/489)

◈ 417화. 판도라의 상자 (2)

시야에 황제의 잔상과 목소리가 흘러가던 순간이었다.

타닥─!

분주한 발걸음과 동시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르콘 단장님!”

이걸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예시카.

그녀가 황궁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순간, 하르콘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황제의 잔상과 목소리는 발현자인 내게만 유효했건만.

괜히 찔리는구만.

나는 그쯤에서 『진실된 환상』의 발현을 거뒀다.

모든 질문에 답을 내놓을 수 있다는 전황의 서고에 어떤 질문을 던졌길래. 황제의 입에서 철저히 숨기고 계셨단 말이 나왔단 말이냐. 그리고 대체 어떤 답변이길래.

마지막 순간, 그렇게 해맑게 웃을 수 있는 거고……!

‘심히 불길하다.’

이로써 나는 비명횡사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죽어서 황제와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이 흑역사에 무덤덤해질 때까지.’

나는 황제의 몫까지 치열하게 살아남아야 한다.

다짐하던 순간이었다.

누군가의 침음이 들려왔다.

“이, 이 흉측한 건 대체 무어란 말인가들?”

황궁의 객실.

그 입구에 신하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하르콘이 우렁차게 말했다.

“다들 자리를 비켜주겠나?”

“오오, 하르콘 단장님!”

“이곳이 프라이드가 머물던 객실이라고 합니다.”

예시카의 안내.

하르콘의 뒤를 따라서 나도 객실에 들어섰다.

악마 주제에 넉살도 좋구나, 프라이드.

이런 곳에서 대접을 받으면서 황제를 기만했을 터.

하르콘이 이를 악물었다.

“악질적인 모욕이로군.”

객실 외벽에 그려진 피 칠갑.

광활한 벽면이 피로 완전히 뒤덮이다시피 했다. 짐승의 피인지, 사람의 피, 악마의 피인지는 알 수 없지만……. 보기만 해도 부정적인 감정이 치솟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

하르콘의 분노 섞인 혼잣말에 마티스가 화답했다.

“모욕을 넘어선 저주입니다.”

역시 알아보는구나, 마티스.

뭐, 놀랍지 않은 일이다.

마티스라면 흑마도학을 정립하기 위해 아르카나 대륙을 떠돌던 시절, 이런 저주도 흔히 목격했을 테니까. 물론, 저주의 강도에 차이는 있었지만.

치유학파 마법사.

자연스럽게 피에 익숙한 벨리에였다.

그 덕분에 거부감은 없다는 듯.

가까이에서 유심히 들여다보던 벨리에가 입을 열었다.

“대륙에서 통용되는 글자는 아닌 것 같은데요.”

“폐하도 모자라 황궁마저 욕보인 것인가.”

“단순한 모욕이 아닙니다. 저주에는 반드시 의도가 담겨있으니까요.”

마티스의 마지막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저주란 불순한 의도가 담긴 전언이지.”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의 반복 퀘스트부터.

원로 마법사였던 악마 숭배자가 남겼던 저주.

그리고 [어둠의 이해]까지.

직접 몸으로 부딪힌 덕분에 저주엔 나름 익숙한 나였다.

이젠 척하면 척이라고.

덕분에 언제나처럼 자신감 넘치게 답했다.

“그러나 이건 황제에게도, 그대들에게도 남긴 전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내게 남긴 전언이지.”

“……!”

아까부터 점멸하는 메시지에 선명하게 적혀있었으니까.

[저주 : 하나뿐인 나의 혈육이여]

그랑펠, 너는 절대 인정할 수 없겠지.

이딴 녀석과 같은 클라우디로 묶인다는 게 말이야.

하지만 너무 억울해하지 마라.

기분이 더러운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신하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길이만 다르지, 머리칼이 완벽히 같습니다.”

“저, 정말로 같은 클라우디 일족이란 말인가?”

“그 사내에 관해 무언가 알고 있을지도……?”

일그러지는 하르콘의 미간.

곧장 호통을 내지를 것처럼 움찔거리는 입꼬리.

그러나 나의 입방정이 조금 더 빨랐다.

나는 신하들을 향해 바라봤다.

“그대들의 말이 옳다.”

“……여, 역시!!”

“그 또한 클라우디였다.”

똑똑히 덧붙였다.

“동시에 제국의 선대 황제와 결탁하여 클라우디를 멸문으로 몰고 간 클라우디의 배신자이자 대역죄인이지. 물론, 지금은 나의 사냥감에 불과하지만.”

“?!”

선대 황제.

하르콘과 이 자리의 신하들이 섬겼던 황제가 아닌 그 이전 세대의 황제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엔 시차가 존재하잖냐?

‘중2병을 앓던 건 현실 시간으로 십 년하고도 수년 전.’

아르카나 대륙 시간으로는 수십 년 전이니까.

그나저나 한마디 말로 분위기를 완전히 뒤집었구나. 나를 향하던 의심의 눈초리를 어디 가고, 이젠 다들 초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는 얼굴들이시다.

물론, 하르콘도 예외는 아니었다.

“경께선 그 사실을 알고 계시면서도…….”

아니, 또 그렇다고 착각할 건 아닌데?

‘그게.’

나도 처음부터 알고 있던 건 아니거든. 왜, 클라우디 멸문에 수많은 세력이 얽혀있을 거라고 예상하긴 했는데. 구체적인 사연을 듣게 된 건 최근이었으니까.

-“방관했던 저를 용서하십시오. 흑암룡이시여.”

재잘거리기 좋아하는 해츨링.

햇병아리, 프로즈낙스를 통해서 말이지.

전부 듣고 나니까 이해가 됐다.

‘하긴 제국이 허가하지 않는 이상.’

공공의 적인 그림자 용병단이 대낮에 활개를 치며 아르카나 대륙을 돌아다닐 수도, 스케빈저들이 떼로 몰려다닐 수도 없었을 테니 말이야.

에밀리오도 지나가듯 그에 관한 말을 했었다.

-“설령 제국이, 대륙이, 세상이 클라우디를 저버렸다고 해도. 우리 스케빈저들만큼은 클라우디를 배반해서는 안 된다고, 오래전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하르콘을 비롯한 이들은 나의 속내를 알 수 없었으니.

어째 나를 바라보는 눈빛들이 다들 심상치 않구만.

‘……부담스럽다, 정말.’

대인배를 넘어서 성인군자를 바라보는 듯한 시선들.

과거의 원한 따윈 고려하지 않는다는 건가.

원수를 갚아도 모자랄 판에 자비를 베풀다니.

긍지롭구나.

‘뭐, 그따위 생각들을 하는 거겠지.’

부끄러워할 법도 하거늘.

이놈의 철면피엔 기별도 없었다.

언제나처럼 담담하게 본론을 늘어놓을 뿐.

“양해를 구하겠다. 지금은 혼자 있고 싶군.”

방금 내뱉은 폭탄선언 때문인가?

하르콘, 마티스, 벨리에를 포함.

누구 하나도 군소리 없이 객실에서 물러났다.

대뜸 혼자 있고 싶다고 선언한 이유야 간단하다. 보기만 해도 음산한 저주를 정화해야 하지 않겠냐. 그 과정에서 무엇을 보고, 어떤 헛소리를 지껄일지 알 수 없는 일이니까.

‘왜, 지난번 어둠의 이해 속에서도.’

모조리 죽여야 한다고.

살벌하게 중얼거렸던 기억이 선명했거든.

연달아서 불필요한 오해를 사는 건 사절이다.

또각─

나는 곧장 프라이드가 남긴 저주에 다가갔다.

[저주, ‘하나뿐인 나의 혈육이여’에 진입합니다.]

“다시는 추악한 입으로 핏줄을 운운하지 말거라.”

점멸하는 메시지에 차디찬 음성으로 화답했다.

“버러지.”

*

위험하지 않냐고?

되묻겠다.

내가 언제는 위험하지 않은 적이 있었냐고.

‘시작부터 일촉즉발이었는데, 새삼스럽게.’

나보다 몇 배나 높은 레벨을 자랑하는 악마들과 전투를 벌이면서도 기어코 꼿꼿하게 살아남았던 나란 말이다. 그러니 낯선 저주 속에서도 나는 혼란스럽지 않았다.

곧바로 응시할 수 있었다.

프라이드.

악마의 냄새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인간 시절의 녀석과.

그나저나, 배경이 익숙하다. 이제 보니 반전 마법으로 복구한 클라우디 저택과 똑같이 생겼군. 나는 클라우디의 저택에서 계단을 오르는 프라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벅저벅.

위층으로 향하던 프라이드가 문득, 나를 바라본다.

“축하한다, 그랑펠.”

축하?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싶었는데.

이어지는 말에 나는 흠칫했다.

“친애하는 나의 아우여.”

역시, 항렬 상 윗사람이 맞았구만?

그러니까 차기 가주로 선택된 그랑펠에게 앙심을 품고는.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인 거겠지.

‘어쩌면 구체적인 단서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음을 다잡기도 잠깐.

내리쬐는 달빛 아래.

더욱 화사하게 빛나는 은빛의 머리칼.

프라이드가 말을 이어나간다.

“하지만 나는 의구심이 드는구나. 과연, 네가 클라우디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지 말이다. 나의 아우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저, 말하는 본새 봐라?

그랑펠보다 몇 살이 많은지는 모르겠다만.

윗사람, 그러니까 누나가 셋이나 있는 나 이호열이다.

애증과 그냥 증오는 기가 막히게 구분한다는 거지.

‘말만 상냥하게 하지, 담긴 뜻은 노골적인데?’

나였으면 형이고 뭐고, 말대꾸로 대응했을 텐데.

과거에도 그놈의 격식을 지키기 위해서냐.

그랑펠은 정중하게도 답했다.

“감당하겠습니다.”

그래, 백 번 양보해서 동생이 그렇게 답했으면.

그럼 잘해보라고.

빈말이라도 덕담으로 돌아올 법도 했거늘.

“감당하겠다? 하하하하!”

저 싸가지는 아주 그냥 숨이 넘어갈 듯 비웃고 있다.

“평소와 다르게 농담도 할 줄 아는구나. 아니지, 차기 가주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니까. 여유 덕분에 자연스럽게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는 건가?”

그랑펠은 답하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

굳이 대답할 필요가 없잖아?

프라이드의 성질머리가 예상했던 그대로였으니까.

침묵이 아니꼬웠던 모양.

“나를 노려다 보는 그 눈빛도 썩 마음에 드는구나, 그랑펠. 그래, 어쩌면 나보다 클라우디 가주에 걸맞은 자질을 가진 건 너일지도 모르겠지.”

순식간에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

“그러나 명심하거라, 아우야. 너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클라우디가 짊어진 무게를. 그 잔혹한 짐을 너는 조금도 알지 못한단 뜻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 한마디만큼은 진심처럼 느껴지는군.

과거의 그랑펠도 같은 심정이었다는 거겠지.

그랑펠의 입이 열린다.

“그럼에도 감당하겠습니다.”

물론,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프라이드도 그쯤에서 그랑펠에게 더는 말을 섞을 마음이 없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 이윽고, 프라이드가 계단을 오르며 짧게 덧붙였다.

“넌 한결같이 오만하구나, 그랑펠.”

.

.

.

[저주, ‘하나뿐인 나의 혈육이여’를 정화했습니다.]

[악크샨과의 관계도가 상승했습니다.]

[악크샨에서의 영향력이 상승했습니다.]

마티스의 말을 떠올려본다.

모든 저주엔 의도가 담겨있다.

좋아, 출제자의 의도를 생각해 보자고.

‘이제 와서 추억이라도 팔려는 건 아닐 테고.’

그렇다면 간단하군.

‘앞으로 내게 닥칠 시련과 풍파를 예고하는 건가?’

감당할 수 없이 가혹한 클라우디의 무게라.

내가 클라우디가 아르카나 대륙에 돌아왔다고 선포한 지금. 그 후폭풍이 어떻게 되돌아올지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네 의도대로 위축될 생각은 조금도 없다, 프라이드.

나, 이호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친 덕분에.

그랑펠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대륙에게 버림받았던 ‘그날’과는 다르단 거다.

모진 시련과 풍파에도 함께해 줄 아군이 있단 뜻이다.

그러니 이번에는 내가 문제를 낼 시간이다.

안토니움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떠난 프라이드.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을 녀석에게.

의도를 담아 되돌려주겠단 뜻이다.

“무의미한 짓에 불과하다.”

나는 말끔해진 외벽을 보며 읊조렸다.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

가시넝쿨의 범람.

그로 인해 무너졌던 건물들은 반전마법으로 복구되었다. 황궁 마법사, 내쉬는 두 눈으로 지켜보고 반전마법의 구조를 필기하면서도 믿지 못했다.

“혀, 형님. 이게 정말 제가 아는 마법이 맞나요?!”

벤쉬가 지그시 고개를 끄덕였다.

“자책하지 마라, 아우야. 마탑에서도 반전마법을 이해한 마법사는 수석님과 탑주님, 고작 두 분에 불과하시단다. 괜히 마법 역사상 가장 현학적이라 평가받는 게 아니다.”

“벤쉬 형님께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마법이라니요!”

“……크흠, 이 수석님 앞에선 빈말도 못 하겠구나.”

드레드센의 생존자.

란샤는 먼발치에서 호열을 바라봤다.

문득, 가드너가 말을 건네왔다.

“이런 현실도 썩 나쁘지 않구나, 란샤.”

“그렇죠?”

“그래, 너무 멀리 계셔서 아쉽지만…….”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애초에 호열의 손길이 드레드센 마을에 닿은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드레드센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큰 마을과 도시가 악마에게 멸망한 걸 고려하면 말이다.

란샤는 이번에도 손을 모았다.

‘부디, 여신의 자비가 당신께 함께 하시길.’

이내, 눈을 뜬 순간이었다.

간절한 기도가 응답이라도 받은 걸까?

여신이 눈앞에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하, 하이엘 님?!”

얼핏 보면 여신으로 착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고아한 자태의 하이엘이 있었다. 하이엘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란샤의 인사에 화답하고는 입을 열었다.

“주군께서 궁금해하십니다.”

“무엇을요?”

“드레드센 마을, 모두가 무사한가요?”

……간과하고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한들.

그분께선 어디서나 자신들을 지켜보고 계셨다는 걸.

란샤가 벅차오르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부 덕분에요!!”

안토니움은 붕괴 직전까지 내몰렸던 상태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 어떤 계략을 부린다고 하더라도.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래,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출제자의 의도는 확실하게 전달되었다.

“한 줄기 빛…….”

프라이드에게는 물론.

“여기 안토니움 맞지……?”

“분명 봉쇄에다가 전쟁 중이라고 하지 않았어?”

“전쟁이라고? 축제가 아니라?!”

뒤늦게 집결한 플레이어들에게까지.

허나, 평화 속에서도.

자신이 짊어진 짐을 잊지 않은 자가 있었다.

하르콘이었다.

“그대들에게 전할 말이 있네.”

다시금 송구합니다, 폐하.

그러나 모든 것은 제국을 위함이니.

부디 제 변심을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십시오.

“지금부터 라이언 하트 기사단은 폐하의 뜻을 따라.”

그가 신하들 앞에서 비장하게 말을 이었다.

“모험가, 이호열 경을 새로운 제국의 황제로 추대할 생각이네.”

“……!!!”

데구르르, 눈알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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