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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14화 (414/489)
  • ◈ 414화. 장미로는 부족하다 (2)

    시스템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럼, 아주 잘 알지.’

    그래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혹시나 싶어서 아르카나 대륙으로 통하는 포탈을 발현해 봤던 나였다. 하지만 돌아온 건 점멸하는 메시지뿐.

    [최후의 모험가 : 아르카나 대륙에서 사망하지 않습니다. 사망 시, 즉시 현실로 귀환하며 일정 시간 동안 아르카나 대륙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 쿨타임 : 24시간]

    그 탓에 영락없이 하루.

    아르카나 시간으로 나흘 동안.

    아르카나 대륙을 성전 연합군에게 맡기게 됐다.

    사실 뭐, 크게 걱정이 되진 않았다.

    빙룡, 프로즈낙스.

    겉모습이야 하찮은 햇병아리지만, 차원이 다른 무력을 지닌 프로즈낙스가 성전 연합군의 합류한 이상. 제아무리 태초의 악이라고 한들. 새롭게 피어난 세계수의 싹을 짓밟을 순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하이엘이 전해온 소식이 변수였다.

    “안토니움이 장미와 가시넝쿨에 뒤덮였습니다.”

    그만한 파급력이라면 역시.

    ‘프라이드, 그 자식이 기어코.’

    [전황의 서고]가 붕괴한 거겠지.

    황제의 안위도 물론 걱정이었지만.

    상황 자체가 심각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드레드센 마을의 생존자.

    아이언 캐슬 호에서 동행하며 란샤를 비롯한 생존자들과 교감을 나눴던 하이엘이었다. 그 밀접한 관계 덕분. 하이엘은 멀리 떨어진 아이언 캐슬 호에 있으면서도 안토니움의 이상 현상을 파악할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솔직한 심정?

    누구는 말이야.

    답답해 죽겠는데……!

    “나의 꽃밭에는 고작 장미꽃과는 맞바꿀 수 없는 꽃들로 가득하니까.”

    태연하게 꽃밭 이야기나 늘어놓는 주둥이가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말했다시피 나는 [최후의 모험가] 효과 탓에 당장은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할 수 없었으니까.

    물론, 프로즈낙스가 안토니움 인근에 있긴 했다만.

    새롭게 싹 틔운 세계수를.

    태초의 악에게서 지켜내는 것만으로도 분주할 터.

    ‘성전 연합군에 마티스, 벨리에, 벤쉬가 있지만…….’

    마탑의 선임들은 [전황의 서고]의 붕괴를 알아차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들이 [전황의 서고], 존재 자체를 알지 못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겠지.

    왜, 내쉬 같은 측근도 서고의 진실을 알지 못했으니까.

    ‘우선, 내 두 눈으로 확인하자.’

    일단, 인벤토리부터 뒤졌다.

    [마안(魔眼)의 망원경]

    마왕의 전리품을 통해서 안토니움의 전경을 살폈거늘.

    아니 근데…….

    저게 대체 누구야……?

    이글이글 타오르는 저거.

    내가 아는 그 벤쉬 윌리엄이 맞냐?!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이엘이 말했던 상태이상.

    장미꽃잎에 휩싸였던 안토니움의 백성들이 깨어나고 있었다.

    처음엔 내가 모르는 지원군이라도 도착한 건가, 싶었거늘.

    ‘아니, 주변엔 아무도 없을 텐데?’

    성전 연합군의 총대장으로서.

    연합군의 전력을 훤히 꿰뚫고 있기에.

    굳이 마안의 시점을 돌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안토니움을 지원할 정도로 성전 연합군은 여유롭지 않다는 걸.

    그렇다면…….

    ‘다들 자력으로 상태이상을 극복했다는 건가?’

    이내, 하이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아온다.

    “주군, 드레드센 생존자들의 숨결이……!!”

    그래, 하이엘.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다행이기 짝이 없는 상황이구나.

    안도의 한숨을 뱉고 싶었거늘.

    고양이가 생선 가게를 그냥 지나치길 바라야지.

    “알고 있느냐, 하이엘.”

    입방정이 씨부린다.

    “시련과 풍파 속에서 더욱 꽃은 찬란히 피어나는 법이다.”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

    그 효과로 아르카나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광물과 식물에 관한 지식에 통달한 나였다. 당연하게도 꽃에 관한 지식에도 해박하기는 하겠지.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이건 순 끼워 맞추기 아니냐?

    나의 딴죽에도 굴하지 않고 입은 씰룩거린다.

    “저들이 겪어온 시련과 풍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뭐, 그건 나도 인정.

    다른 헛소리는 다 인정하지 못하지만.

    그것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평범한 아르카나인들이 저런 상태이상을 극복한 거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질문을 되돌려 주겠다.

    그쪽들 눈에는 말이야.

    저들이 평범한 사람으로 보이느냐고 말이야.

    살아남은 안토니움의 백성들?

    악마에 의해 제국이 함락되어 가는 과정을 생생히 지켜본 이들이다. 그뿐이냐. 혼란한 틈을 노려 반역을 일으킨 반란군과도 치열한 혈투를 벌였었다.

    그랑펠식 화법으로 말하자면…….

    저들이야말로 사막에서 피어난 꽃과 다름없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그것이 고작 장미 따위와 바꿀 수 없다고 말한 이유다.”

    이내, 나의 시선이 마안의 망원경 너머.

    사태의 원흉.

    가시면류관을 쓴 사내를 향한다.

    정체가 무엇인지는.

    마주하지 않고는 모르겠다만.

    나는 믿는다.

    현실 시간으로 12시간.

    아르카나 대륙 시간으로 이틀.

    ‘믿을 수 없어도, 믿는 수밖에 없다.’

    [최후의 모험가]의 페널티가 사라질 때까지.

    내가 아르카나 대륙에 재진입할 때까지.

    성전 연합군.

    그리고 안토니움의 백성들이 녀석에게 굴복하지 않으리라고.

    믿겠단 뜻이다.

    나는 근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과소평가하지 마라.”

    ……하여튼 말은 참 잘한다니까.

    “나의 꽃들은 쉽게 꺾이지 않는다.”

    *

    덜컹─!

    굳게 닫혔던 성문이 열렸다.

    가시넝쿨의 범람을 우려할 필요는 없었다.

    안토니움 병사들이 곳곳에서 외쳤다.

    “대장님, 가시넝쿨이 메말라 가고 있습니다!”

    툭.

    이젠 건들기만 해도 가시가 바스러질 정도. 건장한 성인 남성이 힘을 줘도 꼼짝하지 않고, 칼질에도 끄떡하지 않던 가시넝쿨 세력이 급속도로 위축되고 있었다.

    “……!”

    가장 먼저 그 변화를 알아차린 건 다름 아닌 플레이어들이었다. 세릭로즈를 향해 마창기예의 발현을 준비하던 히사기의 눈이 반짝였다.

    [영원한 장미의 군주, 세릭로즈 : ???]

    물음표에서.

    [영원한 장미의 군주, 세릭로즈 : Lv.1,800]

    레벨이 나타났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히사기가 중얼거렸다.

    “……레벨이 하락했다?”

    무려 일천팔백 레벨이라니.

    도무지 하락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수치.

    그러나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랭커였기에.

    아르카나의 시스템을 꿰뚫고 있는 히사기가 아니던가?

    몬스터의 레벨이 물음표로 떠오르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경우밖에 없었다. 플레이어와 몬스터의 레벨 격차가 극심할 때. 말 그대로 차원이 다를 경우로 한정되어 있었다.

    히사기가 알고 있는 정보라면 남태민도 알고 있다.

    “녀석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벤쉬 선임님!!”

    쇠약해졌단 사실을 곧장 알아차리다니.

    이게, 이 수석님께서 마탑을 개방하신 이유인가?

    벤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관점이 다양할수록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는 거겠지.”

    벤쉬의 화염이 세릭로즈를 향해 뻗어 나갔다.

    “확실히 기이란 오묘하군요, 이 수석님.”

    화르륵.

    세릭로즈는 타오르는 자신의 육체를 바라봤다.

    우려하던 바가 현실이 되었다.

    전황의 서고.

    일곱의 장미 중 하나가 꺾이자 생명력이 급감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스스.

    이내, 육신이 재가 되어 바람에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릭로즈에게 중요한 건 고작 육신 따위가 아니었다.

    ‘나는 모든 의문에 답을 내놓을 수 있는 존재…….’

    세릭로즈는 쇠약해진 육체보다도.

    자신의 존재.

    그 자체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째서 나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인가?’

    결국, 세릭로즈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어째서 발버둥 치는 것이냐.”

    말하지 않았는가?

    그저 전조가 나타났을 뿐이었거늘.

    벌써부터 아르카나 대륙에 온전한 것은 없었다.

    십좌를 두고 펼치질 마왕 쟁탈전에서 제국은.

    아르카나 대륙은 고래 싸움에 터져 나가는 새우에 불과할 터.

    “대체 어찌하여.”

    세릭로즈가 한 차례 고개를 저어냈다.

    촤아악.

    그러자 벤쉬의 겁화가 흩어지고 안토니움을 뒤덮은 가시넝쿨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군주로서 영원한 행복이라는 당근을 거두어들이고, 가혹한 채찍을 치켜든 것이었다.

    세릭로즈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나는 나의 백성을 해하지 않는다.”

    전황의 서고.

    나의 존재 이유도.

    황제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바친 이유도.

    모든 건 제국과 제국의 백성을 위해서였으니까.

    스르륵.

    그럼에도 세릭로즈는 채찍을 휘두르겠다고 결단했다. 당근으로 저들을 회유할 수 없다면, 매를 들어서라도 막아서야 하는 게 군주라는 자리의 무게였으니까.

    그러나.

    “우, 움직인다!!”

    “달라붙어서라도 막아라!”

    “다시는 안토니움을 내어줄 수 없다!”

    채찍에도 굴하지 않는 백성들의 모습이.

    세릭로즈를 마침표 없는 의문에 빠지게 했다.

    자신의 지혜를 의심하게 하고 있었다.

    츠륵.

    세릭로즈의 채찍, 가시넝쿨이 머뭇거리던 순간이었다.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이 상황을 즐겁다고 여기는 듯한 음성.

    “무엇을 의심하는 거지, 세릭로즈?”

    프라이드였다.

    세릭로즈는 프라이드가 탐탁지 않았다. 제국의 수도, 안토니움에 악마가 발을 들였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프라이드는 지나치게 영악했다.

    “설마, 네가 틀렸다고 자신을 의심하는 거냐?”

    찰나의 머뭇거림에서 고뇌를 알아챌 줄이야.

    과연, 마음을 유린하는 악마다웠다.

    허나, 세릭로즈는 프라이드의 말에 휘둘리지 않았다.

    “다물어라. 악마.”

    모든 것은 제국과 백성을 위해서.

    악마 따위가 아무리 속삭여 봤자 세릭로즈는 타락할 생각도.

    자신의 백성들을 제물로 바칠 생각 따윈 없었으니까.

    그러나 프라이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무엇도 의심하지 마라, 전황의 서고여. 너는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네가 내린 판단은 더없이 정확하다. 그러니까 네가 아는 잔혹한 진실을. 네 백성들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말하면 되지 않겠느냐, 세릭로즈?”

    프라이드는 저들이 무엇을 신뢰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즐거웠다. 왜, 가장 큰 절망은 누구보다 신뢰하던 존재에게 배반당했 때 찾아오는 법이었으니까.

    프라이드의 입꼬리가 씰룩거린다.

    “십좌를 놓고 벌이는 마왕 쟁탈전보다도, 새로운 군주들이 난립하는 전국시대보다도, 끔찍한 미래를 너는 알고 있지 않느냐?”

    결국, 광소를 터트렸다.

    “그렇다, 한없이 깊은 어둠이 가져올 파멸을!!”

    다르게 말하자면.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나의 빌어먹을 혈육이 가져올 처참한 미래를.

    “어서 그 잔혹한 진실을 안토니움에 선포하라!”

    프라이드는 세릭로즈의 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어째서인가?

    세릭로즈의 시선이 되려 자신을 향하기 시작했다.

    이내, 뜻하지 않았던 말이 이어졌다.

    “고맙다. 덕분에 기억했다.”

    “설마, 망각했던 거냐? 아무래도 좋다, 어서…….”

    “바뀌었었구나.”

    “……바뀌어?”

    영원한 장미의 군주는 깨어나며 전황의 서고에 남겨졌던 계시를 모조리 집어삼켰었다. 자신이 황제들에게 빌려주었던 지혜를 회수하기 위함이었다.

    “그래, 내가 내렸던 마지막 계시가.”

    그렇기에 최후의 황제가 프라이드에게서 감추기 위해 태워버렸던 최후의 계시를 망각하고 있었다. 허나, 프라이드가 ‘한없이 깊은 어둠’을 언급한 덕분에 깨닫게 되었다.

    세릭로즈의 시야가 백성들을 향한다.

    “편협한 나보다 현명하구나, 나의 백성들이여.”

    이윽고, 안토니움 위에 떠오른 마안.

    정확하게는 마안에서 쏟아지는 찬란한 은빛.

    한 줄기의 빛을 향한다.

    “그대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거였어, 저 한 줄기의 빛을.”

    세릭로즈는 이로써 깨닫게 되었다.

    나야말로 나의 백성들을 더없이 과소평가하고 있었단 것을.

    그와 반대로 프라이드에겐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세릭로즈? 계시가 바뀌었다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 설마, 그 애송이가 계시를……!!”

    눈치를 챘을 땐 이미 늦었다.

    “역시, 내가 품기엔 과분한 백성들이었나.”

    장미 속에 가둬두기에.

    한 줄기 빛 아래에서 저들은.

    이미 찬란한 꽃처럼 빛나고 있지 않은가?

    이내, 가시넝쿨이 완전히 움직임을 멈췄다.

    세릭로즈가 마지막으로 안토니움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제국이여.”

    백성들이여.

    부디 미련한 황제를 용서하거라.

    모자란 군주였으나.

    그대들을 향한 나의 사랑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으니까.

    벤쉬에게 말을 건넸다.

    “염제여, 전해주겠는가.”

    “누구에게 무엇을 말인가?”

    “한 줄기 빛에게.”

    그러고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부디 나의 제국을 가엾이 여겨달라고 말이지.”

    .

    .

    .

    나는 두 눈을 의심했다.

    정말로 형식적인 표현이지만.

    말 그대로 의심하는 게 최선이었으니까.

    [제국의 황제, ‘세릭로즈’가 사망했습니다.]

    [축적된 공적에 따라 당신에게 합당한 자격이 부여됩니다.]

    [현재 당신의 황위 계승 순위 :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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