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3화. 장미로는 부족하다 (1)
쓰러진 최후의 3인.
이로써 안토니움은 장미에, 영원한 행복에 뒤덮였다.
세릭로즈가 걸음을 옮겼다.
“그렇다면 다음은.”
더 나아가.
아르카나 대륙을 영원한 꿈에 뒤덮이게 할 차례였다.
세릭로즈가 다음 수를 떠올리던 순간이었다.
문득, 고동이 느껴졌다.
“?”
안토니움의 꽃송이들에서.
행복한 꿈에 빠졌기에.
미동도 없어야 했거늘.
꽃송이들이 움찔거리고 있었다.
피어나는 게 아니다.
‘영면’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세릭로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감히 내가 하사한 꿈을 거절했단 건가?”
어떻게……?
*
란샤의 동공이 움찔거렸다.
“거기서 뭐 하고 있어?”
마테가 자신을 바라보며 싱그럽게 웃고 있었다.
그의 뒤에 펼쳐진 드레드센의 풍경.
마테가 다가와서는 란샤에게 속삭였다.
“설마 내가 너무 잘생겨서 넋이라도 나가셨나?”
“뭐라는 거야?”
“하하, 농담. 피곤해? 어젯밤에 잠이라도 설친 거야?”
“아니야. 그런 거.”
란샤는 마테와 함께 초원을 거닐었다. 산골 마을 드레드센은 해가 저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석양이 가시기 전에 마을로 돌아가야 했다.
음메에─!
“어이쿠, 오늘도 함께로구나.”
염소를 몰던 가드너가 두 사람을 알아보고 말을 걸어왔다.
마테는 너스레를 떨었지만.
란샤는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숙였다.
“진짜 좀…….”
벌써부터 부부 취급은 민망했으니까.
가드너가 껄껄 웃었다.
“뭐, 어떠냐 란샤? 우리 드레드센 마을 사람 모두가 알고 있는데. 보자, 두 사람 결혼 선물로 내가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역시, 염소가 좋으려나?”
“아저씨, 진심이세요?”
“마테, 넌 몰라도 내가 란샤 앞에서 거짓말을 할까?”
“하긴 우리 란샤가 조금 집요하긴 하죠. 오늘도 저에게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더라니까요? 결혼하면 매일같이 붙어있을 텐데, 왜 그러는지…….”
란샤는 대화를 나누는 마테와 가드너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어째서일까.
잊고 있던 감정이 가슴을 후벼 파는 듯했다.
란샤가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이게 내가 바라던 행복이었구나……?”
분명 한 치의 미련도 없어야 했는데.
가슴이 시렸다. 마음속 한구석이 채워지지 않았다. 눈앞에 펼쳐진 행복에 감사해야만 했는데……. 자꾸만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확하게는.
“……란샤, 너 울어?”
잊히지 않았다.
마테의 얼굴에 악마의 빙의로 고통스러워하던 마테가 겹쳐 보인다. 평화로운 드레드센 마을 위로 화염과 날뛰는 악마가 선명히 떠오른다.
은퇴한 용병, 가드너가 그런 악마에 맞서기 위해 무기를 치켜든 모습도.
끝으로.
“……어떡해? 나, 조금도 잊히지가 않아.”
찬란한 은빛 머리칼.
꼿꼿한 뒤태.
그러나 고독하기 짝이 없는 호열의 모습까지도.
머릿속에 대화가 스쳐 간다.
-“결국, 이번에도 모든 걸 떠안으시겠다는 건가.”
하늘을 나는 배.
아이언 캐슬 호에서 드워프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들.
란샤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 마테.”
“미안하다니, 갑자기 뭐가?”
“아무래도 나…….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
우스운 일이었다.
모험가도, 영웅도, 잘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 시골 촌뜨기인데. 눈앞에 바라던 행복이 펼쳐져 있는데. 나는 어째서 비참한 현실로 돌아가려고 하는 걸까?
란샤가 그 이유를 내뱉는다.
“나 혼자서 행복할 순 없어.”
몰랐더라면 모를까.
그 쓸쓸한 뒷모습을 봤는데.
보고도 외면할 순 없었다.
그 순간, 란샤의 시야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행복이 사라지고 있었다. 드레드센도, 가드너 아저씨의 얼굴도, 마테의 미소도 밝은 빛 사이에 파묻히고 있었다.
하지만 똑똑히 들렸다.
“그래? 그럼 다녀와, 란샤.”
다정한 목소리가.
“늦어도 괜찮아.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있을게.”
.
.
.
남태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기분이었나.”
완승.
남태민은 쓰러진 히사기 위에 걸터앉아 자신의 감정을 되살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우승이었다. 8강에서 스칼을, 4강에서 레오니를, 결승에서 이 뱀 눈깔을 압살했는데…….
“어째, 뭔가 찝찝하단 말이지?”
딱히 행복하지가 않았다.
그런 남태민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눈앞에 떠오른 랭킹 시스템 메시지에서 기시감을 느꼈으니까.
“……맞다, 호열 씨!”
비공식 랭킹 압도적인 1위.
호열 씨를 넘어서지 못했는데.
어떻게 최강을 자처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남태민이 흐려져 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웃음을 뱉었다.
구체적으로는.
쓰러진 히사기를 보면서.
“우리가 서로를 때려눕힐 사이는 아니지, 이젠?”
히사기도 비슷한 풍경을 보고 있었다.
“당신보다 더 무례하거든요, 진짜 남태민 군은.”
거대 연합의 마지막 길드 마스터.
레오니는 질끈 눈을 감은 상태였다.
대체 무엇을 보았길래?
눈을 감은 채로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 인간이 잘도 저런 소리를 하겠다, 레오니 미친년아!!”
누구한테 뺨이라도 맞은 걸까.
아니면 자신이 두들긴 것인가.
뺨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어쨌거나 레오니의 눈앞에도 선명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상태이상, ‘영면’이 해제됩니다.]
.
.
.
벤쉬는 식탁을 바라봤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광경이었다.
윌리엄 가문에 이런 평화는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형님, 형님. 제가 오늘은요!”
내쉬가 재잘거렸다.
언제나 기가 죽어있던 아우가 나이에 맞게.
재롱을 피우는 모습은 썩 보기 좋았다.
하지만 벤쉬는 알고 있었다.
‘행복이라.’
이건 자신이 바라던 행복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이뤄질 수 없는 소원 따위 빈 적이 없었으니까.
벤쉬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아쉽지만.
이제는 슬슬 돌아갈 시간이다.
어머니가 물어왔다.
“왜, 더 들지 않고?”
벤쉬는 답했다.
“가봐야 할 시간입니다.”
아버지가 말했다.
“이 시간에 어딜 말이냐, 벤쉬?”
벤쉬는 웃었다.
“어디겠습니까. 빌어먹을 현실이지.”
누가 그런 소리를 했었는데.
경험해봐야 그리워할 수도 있는 법이라고.
하지만 틀린 말이었다.
눈앞의 행복을 단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었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지금부터 이 풍경이 그리워질 것만 같았거든.
벤쉬가 어머니를 향해 말을 이었다.
“어머니, 오랫동안 혼자서 쓸쓸하시겠지만.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올 거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뭐, 말은 이렇게 해도 당장 내일 재회하게 될지도 모르는 게 인생 아니겠습니까?”
그러고는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리고 당신에 관한 생각은 여전합니다, 아버지.”
행복이라.
나는 어쩌면 저런 아버지를 바랐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벤쉬는 아버지의 번들거리는 눈을 잊지 않았다.
벤쉬가 웃으며 덧붙였다.
“그러니 꿈에서라도 착한 척할 생각은 말아주시길.”
그러자 내쉬가 이번에도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형님, 정말로 떠나셔야 하는 건가요……?”
벤쉬는 내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그렇게 됐다.”
“역시…….”
정말이지.
“……그 세상에서도 벤쉬 형님이 안 계시면 안 되는 거군요! 벤쉬 형님이 대단하시긴 하시죠. 저는 언제쯤 형님처럼 의젓해질 수 있을까요?”
한결같은 아우였다.
말하는 와중에도 내쉬는 여전히 자신의 옷자락을 붙들고 있었다.
벤쉬는 그런 내쉬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약속하겠다, 내쉬.”
“네? 무엇을요, 형님?”
“앞으로는 자주 보자꾸나.”
“……정말이요?”
스륵─
그 말에 내쉬가 꼭 붙들고 있던 벤쉬의 옷자락을 놓았다.
이윽고, 시야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벤쉬의 귓가에 아련한 음성이 이어졌다.
“정말로. 약속하신 거예요, 벤쉬 형님?”
화르륵─!
“물론이다.”
……그리고.
화염의 꽃 속에서 염제가 눈을 떴다.
맞은 편에는 세릭로즈가 있었다.
이제야 여유 넘치는 표정에 금이 가셨군, 그래?
세릭로즈의 목소리에선 분노가 느껴졌다.
“어째서 내가 내려준 자비를 거절한 것이냐?”
벤쉬는 헛웃음을 뱉었다.
“자비? 나는 그딴 꿈 따위 바라지 않았는데.”
“다물어라.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은 없다.”
전황의 서고.
모든 의문에 모든 답을 내놓을 수 있다. 당연하게도 백성들이 바라는 행복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단 뜻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진정으로 바라던 행복에서 깨어나서…….
“이 비참한 현실로 돌아온 이유가 무엇이냐?”
추악하기 그지없는 아르카나 대륙에서 다시 눈을 뜨려는 것인가?
세릭로즈는 벤쉬를 노려봤다.
좋다, 염제에 걸맞는 사내여.
“그대라면 짐작하고 있겠지. 앞으로 아르카나 대륙에 벌어질 끔찍한 일련의 사건들을. 그건 나약한 인간 따위가 견딜 수 있는 일이 아니다.”
“……!!!”
이 순간, 세릭로즈의 음성은 영면에서 깨어난 모든 이들의 뇌리 속에 울리고 있었다. 세릭로즈가 백성들에게 예정된 재앙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제국과 대륙을 황폐하게 한 악마의 등장은 전조에 불과하다. 십좌 쟁탈전이 시작된 지금, 마계는 전례 없이 들끓고 있단 말이다! 그대들은 그대들보다 먼저 죽은 자를 부러워하게 될 것이다.”
“그 혼세에서도 어리석은 인간은 같은 처지의 인간을 공격하리라. 모습을 숨겼던 군주들이 난립해 아르카나 대륙을 더욱더 깊은 혼란에 빠트릴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영원한 행복을. 자비로운 내가 내려준 안식을 제 발로 걷어찬단 말인가? 나의 백성들이여!”
벤쉬가 대꾸한다.
“그래서는 면목이 없지.”
“……면목이 없다?”
“고작 그따위 행복에 만족해서는, 꿈에 취해서 헤롱거려서는. 마탑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신 세니오스 님과 탑주님을 뵐 면목이 없다는 뜻이다.”
벤쉬뿐만이 아니었다.
안토니움.
깨어난 제국의 백성들이 저마다 외치고 있었다.
“우리 아들이 어떻게 지킨 안토니움인데……!!”
“여기까지 버텼는데, 억울해서라도 도망칠 수 없어.”
“죽을 때 죽더라도 악마 새끼한테 되돌려주고 뒈질 거라고!”
세릭로즈는 깊은 충격을 받았다.
“뭐라……?”
자신조차도 두려움에 떨어야 할 시련들이었다. 한데, 이 연약한 존재들이 진정으로 시련에 맞서 싸우겠다고 마음을 먹었단 말인가?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굴릴 새도 없었다.
“좋아, 꽃송이에 뒤덮인 제국의 백성들도 깨어나고 있겠다. 더는 겁화를 억누를 필요가 없겠군, 그래. 그렇다면 이제부터가 나의 진심이다.”
염제가 겁화를 내뿜었으니까.
아니, 벤쉬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지상엔 전투태세를 취한 성전 연합군이 있었다.
마티스와 벨리에.
내쉬도 휘청거리며 그들의 전열에 합류했다.
그리고.
쿵─!
굳게 닫혔던 안토니움의 성문에도 백성들이 달라붙기 시작했다.
꽃송이에서 깨어난 이들이 꽃가루를 털어내고.
잔혹한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가시넝쿨을 잘라내!”
“젠장, 이젠 찔려도 상관없다고!”
“근데, 뭐 없어? 하다못해 식칼이라도 있어야…….”
‘누군가’의 안배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장비를 빌려주겠다.”
“아니, 자네들은 스케빈저들 아닌가?”
“……무기를 빌려주겠다고? 우리한테?”
그래, 안토니움은 완전히 함락되지 않았었다.
낮디낮은 하수도에서부터.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던 스케빈저들이 있었으니까.
“살다 살다 자네들 도움을 다 받게 되는군. 어쨌든, 고맙네.”
“고맙단 소리를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렇다면, 피차일반인가?”
스릉.
스케빈저와 백성들이 힘을 합쳐 안토니움을 뒤덮은 가시넝쿨을 잘라내기 시작한다. 어찌하여……? 세릭로즈는 여전히 납득할 수 없었다.
“진정으로 고통을 바라는 것인가, 백성들이여?”
가시넝쿨을 잘라내어 봤자 자신에게 직접적인 피해는 줄 수 없었다.
눈앞의 염제도 마찬가지다.
타오르는 겁화로 이 육체를 전소시킨다고 한들.
‘이것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이 본체는 전황의 서고에 피어난 일곱 개의 장미였으니까.
그러니 미련하게 발버둥을 쳐봤자…….
세릭로즈가 정신을 추스르던 순간이었다.
“……!”
섬뜩─
서늘한 감각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직감할 수 있었다.
전황의 서고에 누군가 진입했다.
일곱의 장미.
자신의 숨통을 노리고 있었다……!
.
.
.
전황의 서고.
스케빈저의 왕.
에밀리오는 생각했다.
클라우디께서는, 보잘것없는 내가, 여기까지 기어들어 와 이 장미꽃들을 발견하리란 것까지 예상하셨을까?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설령.
나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한들.
그분이시라면.
“너그럽게 용서해주실 테니까.”
에밀리오의 검이 거침없이 장미를 겨눴다.
서걱─!
*
나는 입을 열었다.
“모든 게 안배대로군.”
……아니, 그랑펠 넌 예상했어도 나는 전혀 몰랐는데?
뭣보다 벤쉬 윌리엄 선임.
당신, 내 예상보다 훨씬 대단한 양반이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