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12화 (412/489)

◈ 412화. 장밋빛 미래 (2)

세릭로즈가 치하한다.

“윌리엄의 염제여. 그대는 나의 첫 상대로 부족함이 없었다. 겁화를 온전히 지배한 그대 또한 화염에게 칭송받는 군주라 칭할 수 있지 않겠는가?”

벤쉬는 분전했다.

안토니움을 완전히 지배한 세릭로즈를 상대로도 밀리지 않았다.

그러나 승패를 가른 건 속성의 우위가 아니었다.

가시넝쿨에 맺힌 장미 꽃송이.

어느샌가 꽃송이에선 꽃가루를 흘러나오고 있었다. 꽃가루는 세릭로즈와의 전투에 집중한 벤쉬의 허점을 노렸고, 호흡을 타고 벤쉬의 몸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벤쉬를 장밋빛에 젖게 만들었다.

“……!”

장밋빛 꿈에서 벤쉬가 목격한 건 돌아가신 어머니였다.

“오늘 하루는 어땠니, 벤쉬?”

뺨이 부풀지 않아 계셨다.

목에도 손에도 푸른 멍은 보이지 않는다.

온전하신 어머니가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곁엔 아버지가 있었다.

“고생했구나.”

번들거리는 화염과도 같은 동공이 아니다.

자신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봐 주는 아버지였다.

벤쉬는 단번에 무언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이건 현실이 아니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만 한다.

아직 결착을 짓지 못한 승부를 마무리 지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벤쉬의 옷자락을 붙잡는 작은 손이 있었다.

“형님, 어디 가시게요?”

고개를 돌리자.

“……!”

어린 내쉬가 울먹거리는 눈망울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벤쉬는 잊고 있던 감정을 떠올렸다.

살기 위해서.

더는 버틸 수 없어서.

과거, 마탑으로 향했던 시절.

가문의 폐단을 끊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본가를 떠났었다.

오직 자신만을 믿고 따르던 내쉬를 혼자 남겨둔 채로.

‘내쉬…….’

단 하루도 아우를 우려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내쉬가 가문에서 어떤 수모를 겪고 있을지 알 수 없었으니까.

자신의 선택을 진심으로 후회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어쩌면…….

‘나는 돌아온 건가.’

그 후회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과거로?

제길, 머릿속이 혼란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좋지 않을까?

“그럼 들자.”

벤쉬는 생각했다.

설령 이것이 거짓된 행복이라고 해도.

당장은 깨어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으니까.

.

.

.

“혀, 형님!! 벤쉬 형님!!”

그쯤에서 벤쉬는 온전한 장미 꽃송이가 되었다.

순식간에 꺼진 겁화.

다시금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가시넝쿨.

“이런.”

내쉬의 뒤를 이어.

마티스와 벨리에도 상황의 심각성을 알아차렸다.

마탑의 선임이다.

허공에 흩날리는 꽃가루는 일찍이 경계하고 있었다.

벨리에는 쓰러진 레오니를 살피다 입술을 깨물었다.

‘본 적이 없는 상태이상이야.’

현재 아르카나 대륙에서 치유마법의 정점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벨리에였다. 그러나 꽃가루를 흡입한 레오니가 어떤 상태이상에 시달려 쓰러진 것인지, 벨리에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상태이상, ‘영면’이 발생합니다.]

“레오니 양…….”

[공포]조차도 잊게 하는 상위 치유마법, 『번복의 축복』마저도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벨리에가 레오니를 살포시 내려놓고는 결론을 내렸다.

‘벤쉬 선임도 설마 이 꽃가루를……?’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꽃가루를 포착했을 터.

하지만 벤쉬는 눈앞의 세릭로즈를 상대하는 데에 전력을 쏟았다. 그 바람에 꽃가루가 자신을 휘감고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 것이었다.

자세한 사정까진 알지 못해도 벨리에는 결단을 내렸다.

‘여기서 결착을 지어야 해.’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가 꽃가루에 기절한 상태.

그럼에도 염제로 각성한 벤쉬 선임이라면.

그 상대에게 분명 적지 않은 피해를 주었을 터.

“그대를 믿습니다, 벤쉬 선임.”

벨리에는 곧장 포탈을 발현했다.

“곧바로 지원하지.”

마티스도 그녀와 같은 판단을 내리고 포탈을 발현했다.

벨리에와 마주했다.

이윽고,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사내를 목격했다.

“형님…….”

내쉬였다.

숙련 마법사 정도의 실력.

억지로 버티고 있다는 게 와닿을 정도의 몰골이었다. 간신히 뜨고 있는 눈이 향한 곳엔 허공에 덩그러니 피어난 장미 꽃송이가 있었다. 마티스는 지체하지 않았다.

“룰.”

자신의 시동어를 내뱉었다.

“날뛰어도 좋다.”

스스스.

그러자 그가 걸친 검은 예복에서부터.

마티스가 봉인하고 있던 과거와 배경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흑마도학을 정립하기 위해 아르카나 대륙을 떠돌던 시절.

그가 받아들였던 적합한 마력들이 뿜어져 나온다.

세릭로즈가 마티스의 기운을 알아차렸다.

“염제, 그다음은 우울한 마법사인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세릭로즈였지만, 말이 이어지진 않았다.

마티스가 적합한 마력을 발현.

암창(暗槍)을 세릭로즈를 향해 쏘아 보냈다.

어둠의 창.

하나하나가 잔혹한 대륙의 과거를 담고 있다. 살갗에 닿는 즉시, 대상의 정신을 무너트릴 수 있을 터. 세릭로즈가 쇄도하는 암창을 보며 내뱉었다.

“기구한 사연이로구나.”

푸푸푹─

그러고는 암창을 자신의 육체로 받아냈다.

“!”

마티스의 동공이 움찔거렸다.

우지끈.

암창이 박힌 세릭로즈의 육체는 사람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피가 솟구치기는커녕 나무에 무언가가 꽂히는 소리만이 울렸으니까.

허나, 상관없다.

흑마도학의 창시자.

자신조차도 저 영향력에 자유로울 수 없기에. 봉인마법까지 발현하여 억제하고 있는 적합한 마력들이었다. 그러한 잔혹사가 깃든 암창에 꽂히고 온전한 정신을 유지할 순…….

“그러나 이제 슬퍼하지 말거라.”

파직─

‘……뭐?’

마티스의 예상과 다르게 산산이 부서지는 암창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세릭로즈의 정신이 적합한 마력을 이겨냈다는 뜻이었다.

세릭로즈가 마티스를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이름 모를 우울한 마법사여. 나를 대신하여 아르카나 대륙에 퍼진 슬픔과 끔찍한 과거를 추슬렀구나. 염제와 마찬가지로 그대에게도 선택할 기회를 주겠다.”

그 선택지는 벤쉬 때와 같았다.

“바라는 것은 영원한 행복인가, 허망한 진실인가?”

마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남은 적합한 마력을 어떻게 발현해야 하는가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가장 위력이 뛰어난 건 역시나 상위 흑마법, 『암전』이었다.

대상의 감각을 빼앗는 『흑관』의 효과와 비슷하지만.

암전은 대상의 감각은 포함한 모든 것을 빼앗는다.

그러나.

‘암전의 발현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마티스의 속내를 알아차린 건가.

저벅─

벨리에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영원한 행복? 당신이 그런 걸 줄 수 있나요?”

염제로 각성한 벤쉬 선임도.

봉인마법을 해제한 마티스 선임도.

가시면류관을 머리에 쓴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고전하고 있었다.

‘나는 말할 것도 없겠죠.’

치유마법사.

발현할 수 있는 전투 마법은 숙련 마법사 수준에 불과했다. 벨리에는 냉정하게 상황 파악을 끝냈다. 구체적으로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실천했다.

“그 전에, 당신은 누구죠?”

건방지다고 여겨져 목숨을 빼앗길지라도.

벨리에는 감히 질문을 던졌다.

마티스에게도.

나흘 뒤에 돌아올 것이라 했던 호열에게도 도움이 되기 위해서였다.

세릭로즈가 답했다.

“세릭로즈. 보다시피 제국의 황제다.”

“세릭로즈? 내가 아는 황제는 당신이 아닌데요.”

“황제를 알고 있는가? 유감이지만, 그대가 알고 있는 황제는 더는 제국에 존재하지 않네. 그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스스로 황제의 왕관을 내려놓았으니. 허나, 누구도 그를 나약하다고 비난할 순 없겠지.”

전황의 서고, 그 진실을 스스로 발설했다.

“그를 포함한 일곱의 황제, 모두가 왕관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으니까. 어찌 보면 당연하고 가엾은 일 아니겠는가? 인간이란 불완전하고, 나약한 존재니까.”

“……!”

잠깐, 녀석에게 희생된 황제가 하나뿐이 아니란 말인가?

전황의 서고를 들여다보지 못했기에.

진위여부를 알지 못하는 벨리에가 다시금 물었다.

“견디지 못했다니, 같잖은 수로 빼앗은 거겠죠.”

일종의 도발이었다.

녀석을 자극해서.

시종일관 내리깔아보는 태도가 아닌.

진정한 모습을, 치부를 끄집어내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장미의 군주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충분히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명심하도록. 나는 그저 나약한 황제들의 요청에 응했을 뿐이라는 것을. 제국의 황제들이 품어온 고뇌를, 그대들은 짐작할 수 있는가? 나는 알고 있다. 전황의 서고에서 그들에게 지혜를 하사해왔으니.”

“……전황의 서고?”

그 단어에 내쉬가 이를 악물었다.

“전황의 서고에……. 도사리고 있던 거냐……?”

세릭로즈가 턱을 매만진다.

“도사리고 있다라. 표현이 흡족하지 못하군. 더 나은 표현이 있지 않겠는가, 황궁 마법사여? 나는 그저 관조하며 내놓았을 뿐이다. 일곱의 황제들에게 아르카나 대륙과 제국을 평화로이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그런데…….”

내쉬를 향해 단호히 덧붙인다.

“그런 나의 자비에도 제국은 결국, 한계에 다다르지 않았더냐? 그렇다. 나는 더는 제국의 백성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악마가 활보하는 아르카나 대륙에 나의 백성들을 내버려 둘 바에는. 저들에게 깨어나지 않는 영원한 꿈을, 장밋빛 미래를 치하하겠단 것이다.”

“……!!!”

어째서 제국의 백성들이 깊은 잠에 빠지듯.

편안한 표정으로 쓰러졌는지 깨닫게 됐다.

저들은 끝나지 않는 행복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이었다.

장미 꽃송이로 변한 모두가.

순간, 내쉬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렇다면, 벤쉬 형님께서도…….’

꿈에서 누려보지 못하셨던 행복을 누리고 계신 걸까.

그렇다면 내게 형님의 단잠을 깨울 자격이 있는 걸까.

가문에서도, 마탑에서도 시련을 겪어오신 형님을 내가 감히…….

“내쉬 윌리엄 황궁 마법사.”

마티스의 부름에 내쉬는 멈칫했다.

“……네, 듣고 있습니다.”

“그대의 마력 잔량은 어떠한가.”

“송구하게도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텔레포트의 발현은 가능하겠는가.”

“단거리에 한 사람 정도라면…….”

“그렇다면 부탁하지.”

상위 흑마법.

암전의 간섭을 끝마친 마티스가 세릭로즈를 바라봤다.

온전하지 못한 내쉬의 힘을 빌려서라도.

텔레포트 발현에 낭비할 마력조차 아껴서라도.

단번에 때려 박아야 했다.

녀석의 뇌리에 흘려 넣어야만 했다.

“흔들리지 말게.”

마티스가 덧붙였다.

“영원한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내쉬 윌리엄.”

녀석은 실로 위험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듯했으니까.

이내, 마티스의 육체가 내쉬의 마력으로 휘감겼다.

텔레포트 발현.

스슥.

순식간.

세릭로즈의 뒤편으로 텔레포트한 마티스가 손을 들어 올렸다.

세릭로즈의 뒤통수를 겨누고 암전을 발현했다.

팟.

먹물을 내뿜듯 세릭로즈를 뒤덮은 적합한 마력.

말했듯 모든 걸 대상은 박탈당해야 했거늘.

세릭로즈는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말하지 않았느냐, 우울한 마법사여. 나는 영원한 행복을 선사할 수 있다고. 그러니 어떤 잔혹한 과거와 배경을 지닌 적합한 마력이라고 한들, 내 앞에서는 의미가 없다고 말이다.”

적합한 마력으로 발현한 흑마법은 일반적인 마법으로 방어할 수 없다. 치유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완전히 되받아칠 순 없단 말이다. 그러나 세릭로즈의 말이 사실이라면.

‘영원한 행복이라는 걸로 상쇄했다는 건가……?’

그 말을 증명하듯.

“……!”

검게 물들었던 마티스의 반지가 점차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일대의 적합한 마력을 파악할 수 있는 관측형 마도구였거늘.

세릭로즈가 두 팔을 벌리며 입을 연다.

“보아라. 같잖은 속임수가 아니다.”

장미 꽃송이를 향하는 마티스의 시선.

“보아라. 모두가 행복을 꿈꾸고 있지 않느냐?”

마티스는 대꾸할 수 없었다.

꽃잎에 뒤덮인 이들.

저들에게 진정 미련과 후회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꽃송이에선 단 한 점의 적합한 마력도 감지되지 않았으니까.

‘……대체?’

영원한 장미의 군주.

“나는 그저 백성들의 행복을 바랄 뿐이다. 꿈이라고 한들.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비참한 대륙에서 가엾은 백성들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인가?”

세릭로즈가 초점을 잃은 마티스와 벨리에.

“설령 꿈이라고 한들.”

그리고 꼬꾸라진 내쉬를 향해 물었다.

“나의 자비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마법사들이여?

*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군.”

그래, 그렇게 된 거였나.

대략적인 상황을 전달받은 나는 읊조렸다.

더없이 진지하게도.

“나의 꽃밭에는.”

평가를 내렸다.

“고작 장미꽃과는 맞바꿀 수 없는 꽃들로 가득하니까.”

.

.

.

윌리엄 가문의 염제.

벤쉬를 품었던 장미 꽃송이가 움찔거렸다.

정확하게는.

불길에 타오르기 시작했다.

자신을 뒤덮었던 장미 꽃잎을.

흔적도 없이 불사르며.

“염제.”

화(火)로 화(花)를 피어냈다.

“그 이름에 어울리는 건 열기 아니겠는가.”

고작 장미 따위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지근한 온기 따위가 아니라.”

강렬하게도.

화륵─!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