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1화. 장밋빛 미래 (1)
맹활약.
누구보다 형님을 신뢰하는.
아우, 내쉬조차 생각지도 못한 전개였다.
“……형님, 설마 근원의 겁화를 굴복시키신 겁니까?”
윌리엄 가문의 비전 마법, 『근원의 겁화』.
발현자는 일대의 열기를 완벽히 통제할 수 있게 되지만, 그 부작용으로 환청과 환각. 마법 발현에 관한 자제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내쉬는 자신도 모르게 불길처럼 번들거리던 아버지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아버님은 물론, 조부님도…….’
그보다 아득한 선조 중에서도 근원의 겁화를 통제한 이는 없다고 들었다. 겁화란, 통제할 수 없기에 겁화라 불렸다고 전해 들었단 말이다.
그런데 이 순간.
형님의 화염은 확연하게 달랐다.
겁화처럼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지만.
“……어째 아까보다 움직이기 편해졌는데요?”
주위에 심각한 피해를 주지 않았다.
남태민의 말에 내쉬는 주변을 바라봤다.
모험가, 남태민뿐만이 아니었다.
“이제야 숨통이 트이네.”
“후우. 한여름 같지만, 그래도 버틸 만해.”
“다들 투덜대지 마, 우릴 위해 싸워주고 계신 거라고!”
연약한 제국의 백성들에게도 그 열기가 전해지지 않았다. 내쉬의 얼굴에 그제야 감격이 어렸다. 벤쉬 형님, 가문의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내셨군요……?
어린 시절.
마탑으로 향하던 벤쉬의 말이 떠오른다.
내쉬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정말로, 윌리엄 가문의 폐단을 끊어내신 겁니까?”
그 과정에서 형님께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시련을 겪으셨으리라.
내쉬가 결단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감격은 여기까지다.
‘형님께서 마탑에서 어떠한 노고를 겪으셨는지는.’
제국을, 안토니움을 가시넝쿨에게서 구원해 내고 차분히 듣도록 하겠습니다. 내쉬가 하수도에 반쯤 몸을 숨기고 있는 스케빈저를 바라봤다.
“스케빈저. 그대들의 은신처는 무사한가?”
“하수도를 말하는 거라면 솔직히 상황은 좋지 않다. 황궁의 하수도에서도 가시넝쿨은 뻗어져 나오고 있었으니까. 다들 모여 필사적으로 막아보려고 하고 있지만, 글쎄…….”
“그런가.”
제국 황궁 마법사.
하수도에 발현된 방어 마법진을 유지하고 보수해왔던 내쉬였다.
당연하게도 하수도의 구조는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내쉬가 스케빈저에게 말했다.
“황궁으로 연결된 하수도엔 마법진이 매복되어 있다. 침입자를 처단하기 위한 마법진이지만, 정확한 발현 조건은 마법진에 상당한 질량이 가해지는 순간이다.”
“……상당한 질량? 좀 쉽게 말할 수 없나?”
“가까이 다가가지 말란 뜻이다.”
어쩌면, 사방이 막힌 하수도는 가시넝쿨의 전진을 방어하기에 특화된 시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케빈저들 또한 제국의 백성이 아니던가? 더욱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안토니움을 수호하고 있는 이들이었다.
내쉬가 덧붙였다.
“공적을 인정받고 싶다면 살아남아라.”
“……!”
“마법진이 발현되면 하수도 일대는 붕괴하게 된다. 함께 파묻히지만 않는다면, 목숨도 건지고 가시넝쿨의 전진도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겠지. 다만, 한 가지 우려가 되는 건…….”
스케빈저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에밀리오……!”
내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스케빈저의 왕.
에밀리오는 사태의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하수도를 타고 황궁의 지하로 잠입한 상태였다. 만약, 가시넝쿨이 더욱 커져 마법진을 발현시킬 정도의 질량에 다다르게 된다면.
그래서 하수도가 무너지게 된다면…….
“에밀리오는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
황궁 지하엔 수많은 함정과 마법진이 도사리고 있다.
제국의 보고.
그중에서도 『전황의 서고』를 지켜야만 했으니까.
에밀리오가 수많은 함정과 마법진을 뚫고 정보를 습득할 수 있을까? 만에 하나 습득한다고 해도, 하수도가 아닌 가시넝쿨에 뒤덮인 안토니움의 지상으로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까?
화르륵!
벤쉬 형님이 버티고 계신다고 하더라도 그 사정권은 안토니움 밖으로 빠져나오는 가시넝쿨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야……. 남태민이 빠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젠장, 저걸 완전히 태워버릴 수도 없고.”
가시넝쿨에 맺힌 장미 꽃송이.
그 꽃잎 속에 인간이 잠들어 있다는 걸 스케빈저들의 말을 통해 알게 되지 않았던가? 그러니 지금의 최선은 믿고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내쉬가 안절부절못하는 스케빈저에게 말했다.
“믿도록 하게.”
“……?”
“에밀리오, 그대들의 왕을.”
“……!”
“나 또한 믿고 있으니.”
비단, 에밀리오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벤쉬 형님을, 꽃송이 속에서 어떤 사투를 벌이고 있을지 알 수 없는 제국의 백성들을, 황궁에 계실 폐하를, 마지막으로 나흘 뒤에 돌아올 것이라고 선언한 호열까지도.
*
살금살금.
에밀리오는 은밀하게 움직인 끝에 황궁 지하에 들어섰다.
스케빈저의 왕으로서 쌓아온 숱한 경험.
전국시대의 영향으로 상승한 능력치.
그 덕분인가, 에밀리오는 어떠한 상처도 입지 않았다.
허나, 그뿐이었다.
‘젠장.’
두 눈으로 꽃송이의 실체를 확인했던 에밀리오였다.
계단 곳곳, 경비병들이 있을 법한 자리에 피어난 꽃송이들.
에밀리오는 고개를 내저었다.
‘정신 차려.’
두려움은 떨쳐내고 똑똑히 봐야 할 때다.
안토니움을, 이 말도 안 되는 가시넝쿨의 정체를.
에밀리오가 두려움을 떨쳐내고 걸음을 옮기던 순간이었다.
문득, 외벽을 뚫고 뻗어져 나온 가시넝쿨이 보였다.
에밀리오가 가시넝쿨을 자세히 살폈다.
‘유달리 굵잖아?’
가속한 두뇌가 답을 내놓는다.
어쩌면, 이 넝쿨이 처음으로 자라난 뿌리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가시넝쿨을 거슬러 올라가면…….
‘원인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몰라.’
슥.
에밀리오는 본능적으로 무너진 외벽 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가시에 찔리면 온몸이 꽃으로 뒤덮이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바.
가시를 뚫어지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움직인 끝.
에밀리오는 벽 반대편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목격했다.
“!”
쏟아져 나오는 빛.
붕괴한 균열.
[전황의 서고]를.
한 걸음, 두 걸음…….
에밀리오는 전황의 서고, 그 내부를 조심스럽게 들여다봤다가 흠칫했다. 코를 찌르는 짙은 꽃향기. 전황의 서고 내부엔 꽃송이가 아닌 만개한 장미꽃들이 있었다.
“……뭐야?”
한 줄기의 가시넝쿨에 피어난 장미꽃들. 에밀리오는 생각했다. 무엇 때문일까. 어째서 이곳의 장미들은 다른 꽃송이들과 다르게 활짝 피어난 거지?
“!”
회전하는 군주의 두뇌까지 빌려올 필요는 없었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에밀리오라고 한들, 현재 황제가 제국의 몇 번째 황제인지는 알고 있었으니까.
“일곱 개……. 일곱 번째……!”
그렇다.
활짝 피어난 장미꽃의 개수가 제국 황제의 수와 같았다.
황궁 지하에 황제의 수와 똑같은 장미꽃의 수.
에밀리오가 정답을 내놓는다.
‘설마, 이 가시넝쿨은 황제들을 양분으로 삼아 자라난 건가?’
그렇다면.
지금의 황제 또한 장미꽃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는 건가?
이 소식이야말로 클라우디께 전해야만 하는 정보가 아닌가?
‘빠져나가야 해.’
그러나 이 순간, 에밀리오에겐 해결하지 못한 의문이 하나 남아있었다. 아르카나인인 에밀리오의 시야엔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하게 떠올라 있는 시스템 메시지.
[적대 세력의 군주와 마주했습니다.]
현 황제가 장미꽃이 되었다면, 지금 안토니움에 살아 숨 쉬고 있는 군주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에 관한 답은 당사자가 스스로 내놓았다.
부르르─
문득, 잘게 꽃잎을 떠는 장미꽃들.
이내, 만개한 장미꽃들이 머리를 조아리듯.
그 줄기가 꺾였다.
그와 동시에 에밀리오의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렸다.
-“영원한 장미의 군주, 세릭로즈가 묻겠다.”
그건 에밀리오에게만 전해진 텔레파시가 아니었다.
전황의 서고의 피어난 장미들만 머리를 조아린 것도 아니었다. 안토니움의 모든 꽃송이가 영원한 장미의 군주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안토니움 인근 모두가 왕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플레이어의 시야에도 떠올라 있었다.
[영원한 장미의 군주, 세릭로즈가 출현합니다.]
[필드가 변형됩니다.]
[끝나지 않는 영원한 장밋빛 미래가 엄습합니다.]
[상태이상, ‘영면’이 발생합니다.]
“!!!”
찰나의 순간.
발현된 광역 상태이상.
그 상태이상을 거부한 건 고작, 4인에 불과했다.
벤쉬, 마티스, 벨리에.
3인의 선임 마법사.
그리고.
‘버텨라, 내쉬. 세릭로즈의 이름이 나온 이상……!’
극한의 정신력으로 의식을 부여잡고 있는 내쉬가 끝이었다.
그 덕분일까?
서로서로 알아보는 데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가시면류관을 머리에 쓴 사내, 세릭로즈.
그가 벤쉬를 향해 말을 이었다.
“용맹한 마법사여,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벤쉬는 생각했다.
이 수석님께서는 상황을 어디까지 내다보셨을까? 사태의 원흉이 나의 코앞에까지 모습을 드러내리란 것도 예상하셨을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수석의 뜻을 저 같은 선임이 어찌 알겠습니까.”
그러나 이 순간,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세릭로즈, 황제의 이름을 내세운 저 황제가 아닌 존재를.
불살라버리는 것.
벤쉬가 답했다.
“염제, 벤쉬 윌리엄이다.”
벤쉬는 내심 상대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었다.
이 수석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거악이 안토니움 내부에 진입한 상황이 아니던가.
틀림없이 악마라고 생각했었거늘.
한데, 그 대답이 예상 밖이었다.
“윌리엄이라. 그리운 이름이군.”
오래 전부터 윌리엄 가문을 알고 있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말투에서도 감출 수 없는 기품이 느껴졌다.
익히 봐온 악마들과는 무언가 달랐다.
“윌리엄 가문의 벤쉬. 가히 염제를 자처할 만한 능력을 갖춘 그대에게 나, 세릭로즈가 합당한 상을 내리겠다.”
“허?”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염제로 각성한 자신의 각오를 무엇이라 여기는 것인가?
벤쉬는 말을 섞는 대신 겁화를 일렁였다.
‘나는 질 수 없다.’
화염에 취약한 가시넝쿨과 꽃.
상성 상으로는 화염마법이 완벽하게 앞섰다.
허나, 세릭로즈는 겁화의 앞에서도 여전히 여유가 넘쳤다.
“선택하라.”
정확히 말하자면.
“자비로운 내가 그대에게 선택지를 주겠다.”
그건 명백한 황제의 태도였다.
“바라는 건 영원한 행복인가, 허망한 진실인가?”
*
보자, 나도 만반의 준비를 해야겠지?
‘오만, 녀석의 꿍꿍이는 아직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봉쇄된 안토니움에 진입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거다. 결국, 공성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는 뜻. 자고로 공성전에서 중요한 건 화력이다.
나는 가넷 홀에 들려 결전용 마도구를 차례로 둘러봤다.
마법부여학 선임, 키코 아르민.
“앗, 이 수석님이시라면 그 스태프도 완벽하게 다루실 수 있으시겠네요. 물론, 이 수석님이 스태프에 의존하셔야 한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오늘은 별달리 할 일이 없는 모양인가.
내가 마도구를 고르는 걸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
그나저나 감회가 새롭구만.
‘옛날엔 이거 하나 고르는 게 고작이었는데.’
마탑의 휘황찬란한 아이템들을 놔두고 선택했던 육망성 브로치.
하지만 레벨 제한이 시달리던 과거는 이제 없다고.
[레벨 : 976]
무려 일천(一天)에 육박한 레벨이었다.
아무리 대단한 마도구라고 하더라도.
착용하는 데엔 별다른 무리가 없다는 뜻이었다.
“이걸로 하지.”
“아, 넵.”
“이것도 부탁하겠다.”
“자, 잠시만요……!”
“이 또한.”
“네, 넵!”
무엇이든 다다익선이다.
수석에게는 너그러운 마탑의 규율이 덕분.
내가 십여 개에 달하는 마도구를 인벤토리에 챙긴 순간이었다.
문득, 하나의 마도구가 내 시선을 끌었다.
[소형 마력 태양]
벤쉬가 그렇게도 대여하고 싶어했던 최상급 마도구였다.
그래, 어찌어찌 출탑도 하게 된 마당에.
이제 와서 엄격하게 마도구 반출을 제한해 봤자 뭣 하겠냐?
“이것도 부탁하지, 키코 아르민 선임.”
“이건……? 넵, 처리하겠습니다!”
앞서 말했듯 공성전에선 화력이 중요한 법이다.
벤쉬, 벨리에, 마티스, 내쉬까지.
그들을 위한 마도구를 챙겨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여차하면 내가 써도 되는 거고.’
내가 장사꾼처럼 인벤토리에 마도구를 잔뜩 싸들고 가넷 홀을 나선 순간이었다. 별안간 허공에서 하이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이엘은 정중히 고개를 숙여왔다.
“송구합니다, 주군.”
부르지 않았는데, 갑작스레 나타났을 때 하이엘은 지금처럼 극진한 태도로 용서를 구하곤 했다. 누가 보면 오해할 정도로 말이야.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그런 걸론 단 한 번도 하이엘을 구박한 적이 없다. 하이엘에겐 언제나 합당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하이엘의 우려가 가득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흔하지 않게.
“드레드센의 생존자, 그들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나의 눈썹이 움찔거리고 말았다.
*
“기어코 현실을 택했나.”
세릭로즈, 장미의 군주가 나지막이 입을 연다.
“보아라. 말했듯 허망하기 짝이 없지 않느냐.”
장미 꽃잎에 뒤덮인 벤쉬를 바라보면서.
“베, 벤쉬 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