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0화. 나흘, 보답할 시간 (2)
“…….”
공기가 건조하다.
피부가 메마르는 듯하다.
주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갑자기 왜 이렇게 뜨겁지?”
“으윽, 목이 타들어가는 것 같아요.”
“엄마아, 물 먹고 싶어…….”
흑마도학 선임 마티스 딘 카를.
그는 이 순간, 직감하고 있었다.
벤쉬 윌리엄, 그가 걷잡을 수 없는 화염으로 거듭났다는 사실을.
슥.
마티스의 시선이 안토니움의 성벽을 향했다.
마티스, 자신부터가 마탑의 선임이다.
따라서 마탑의 선임이 어떠한 존재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각각이 학파의 절대자.
그러한 위치에 오른 이들의 진가를.
화염마법학 선임, 벤쉬도 예외는 아니다.
아니, 그는 조금 더 특별했다.
마티스의 입꼬리가 작은 포물선을 그린다.
“부디 양해해 주게, 벤쉬.”
유독 벤쉬에게 엄격했던 이유?
간단하다.
그는 강하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인 선임 마법사들보다도.
화룡, 카림제바 토벌. 악마 숭배자의 속내를 드러낸 원로 마법사, 카림제바를 뒤쫓았을 때. 마티스는 벤쉬와 동행했다. 그리고 확신하게 되었다.
-“물론, 비전 마법이라면 상대하지 못할 건 없겠지만…….”
그는 이미 반신을 감당할 수 있다고 선언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가벼운 평소의 성정에 가려져 있을 뿐.
염제의 명성은 허상이 아니었으니까.
마도가 중에서도 명가라 꼽히는 윌리엄 가문이었다. 벤쉬 윌리엄은 그러한 윌리엄 가문에서도 수백 년 만에 태어난 재능이었다.
마티스, 자신과 비교하자면…….
‘나로서는 흑마법을 쫓아 대륙을 떠도는 게 고작이었던 나이.’
벤쉬는 자신과 비슷한 나이에 아르카나 대륙에 명성을 떨치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종종 마티스는 생각하곤 했다. 벤쉬 윌리엄, 어쩌면 그야말로 마르셀로와 이호열 수석의 뒤를 이어야 하는.
다음 세대의 수석 자격을 갖춘 자가 아닐까 하고는.
자신처럼 지는 해와는 다르다.
벤쉬에겐 아직도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벤쉬를 차기 수석으로 염두에 두었기에.
마티스는 엄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러나 자신만이 아니었다.
이 수석님이 계셨으니까.
마티스는 호열의 판단을 의심하지 않았다.
‘출탑 허가를 내리시지 않은 걸 보면 알 수 있다.’
이 수석님 또한 벤쉬의 진가를 알아보고.
그가 전력을 해방했을 때의 여파를 우려.
그의 출탑을 극도로 통제하신 게 분명할 터.
지금도 보아라.
멀리서.
그가 마력을 발현했을 뿐인데.
쩌저저적─
안토니움의 수분이 말라붙고 있었다.
갈라지는 대지.
타오르는 태양.
구름조차 증발한 하늘.
모든 열기가 그에게 복종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사태의 심각성이 와 닿았다.
벤쉬 윌리엄에게 전력 해방 허가가 내려질 만큼.
안토니움 내부엔 위험한 일이 발생한 것인지도 모른다.
저 뻗쳐오는 가시넝쿨이 평범한 가시넝쿨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티스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수석님께선 모든 걸 알고 계셨단 뜻이었으니.
그렇다면…….
‘벤쉬뿐 아니라 나 또한 수석님의 안배였나.’
이윽고, 마티스가 적합한 마력을 끌어올렸다.
“과연, 그 무거운 신뢰를 배반할 순 없겠군요.”
*
……꿀꺽.
히사기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저 사내가 방금까지.
가벼운 어조로 대화를 주고받던 벤쉬가 맞단 말인가?
화르륵!
그의 육체에서 일렁이는 화염.
마치 화염으로 만들어진 왕관을 머리에 얹고 있는 듯한 모양새. 화염으로 만든 망토를 휘감고 있는 듯했다. 저건 말 그대로 화염의 제왕, 염제(炎帝)의 형상이었다.
히든 클래스, 마창사.
마탑 견습 마법사와 비슷한 식견.
덕분일까, 히사기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말도 안 돼…….”
속성을 다루는 마창기예.
스킬을 발전시키며 속성 마법에 관한 지식을 알아가던 히사기였다.
그런 히사기의 상식이 무너지고 있었다.
“어, 어떻게 저런 화염을?”
순수마법과 함께 극악의 마력 효율을 다투는 화염마법이었다.
당연하다.
속성 마법은 환경에 마력 효율이 좌우된다.
활화산(活火山) 혹은 살아있는 사람은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지옥의 불구덩이 속이 아니라면 화염은 자연상태에서 존재할 수 없다. 물 속성 마법의 마력 효율이 특출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수분은 자연에 언제나 존재하니까.’
히사기의 상식이 흔들리고 있던 시점이었다.
벤쉬가 입을 열었다.
마탑의 선임 마법사로서 견습 마법사에게 가르침을 선사했다.
“윌리엄가의 비전 마법이다. 히사기 견습 마법사.”
“……비전 마법.”
“가문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결전마법이지. 허나, 모험가인 자네는 윌리엄 가문의 명성을 모를 수도 있겠군. 뭐, 쉽게 말하자면……. 윌리엄 가문은 마탑이 존재하기 전부터 마도 명가라 불렸다네.”
히사기는 속으로 경악했다.
……그렇게 대단한 사내였단 말인가?
스스로 눈치가 빠르다고 생각해 온 히사기였거늘.
‘그런 자만심은, 허세는 느껴지지 않았다.’
벤쉬 윌리엄.
그는 의도적으로 가벼움 속에 위대함을 숨긴 것인가.
아니면 단순하게 겸손한 것인가.
“제 식견이 부족했습니다, 벤쉬 선임님.”
‘누군가’가 벤쉬를 억제하고 있던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히사기였다.
고개를 끄덕인 벤쉬가 너그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우가 걱정하겠군.”
최대한 빨리 끝내는 게 좋겠어.
벤쉬는 문득, 어머니의 말씀을 떠올렸다.
네가 가진 재능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란다, 벤쉬.
-“잊지 마렴. 그 어떤 순간에도 주위를 살펴야 한다.”
벤쉬는 그 가르침을 잊지 않고 주위를 바라봤다.
자신이 내뿜는 열기에 당황하는 제국의 백성들이 보였다.
벤쉬는 결단을 내렸다.
“나흘 내내는 무리겠습니다.”
벤쉬, 자신의 한계가 아니었다.
자신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에 안토니움의 백성들이 피해를 입지 않는 선.
그 한계선을 말하는 것이었다.
척.
벤쉬가 허공에 손가락을 가볍게 휘젓는다.
손가락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화염이 치솟아올랐다.
성벽을 타고 내리던 가시넝쿨이 그대로 불타 바스러졌다.
히사기의 뱀눈이 휘둥그레졌다.
‘광활한 안토니움이다.’
정반대쪽에선 드래곤이 날뛰어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넓디넓은 영토를 자랑하는 제국의 수도란 말이다. 벤쉬의 화염은 그런 안토니움을 에워싸는 성벽을 완벽하게 뒤덮은 것이었다.
‘차원이 다르다.’
저것이 바로 마탑의 선임 마법사.
그중에서도 실전 마법에 꽃이라 할 수 있는.
화염마법학 선임의 전력이란 말인가?
.
.
.
안토니움의 서쪽.
“앗 뜨거. 갑자기 뭔데, 저 화염은……?”
손에 쥔 검의 손잡이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갑옷도 마찬가지. 레오니가 미간을 찌푸리곤 난데없이 솟구친 화염을 째려보던 순간이었다.
벨리에의 입술이 떨어졌다.
“결국, 우려했던 바가 현실이 됐군요.”
“우려? 뭔가 알고 계신 건가요?”
“알죠, 레오니 양. 어찌 염제를 모를 수 있겠어요.”
“……염제?”
벨리에는 대답하는 대신 마력을 끌어올렸다.
마력 탈진에 시달리다 정신을 차린 게 몇 시간 전.
그 탓에 발현 과정은 신속할 수 없었지만.
“저도 이제부턴 엄살을 피워선 안 되겠어요.”
벨리에는 이를 악물었다.
지켜보던 레오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만, 염제라면?
‘그……. 금발머리 선임 이명이 아니었나?’
내 눈과 귀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저 화염이 벤쉬가 발현한 마법이라는 뜻이었다.
가벼워 보였어도 괜히 선임 마법사가 아니라는 거겠지. 벤쉬의 화염은 안토니움의 가시넝쿨을 압도하고 있었다.
이기고 있는 시점에선 걱정할 게 없을 텐데.
“그런데 어째서 보호마법을……?”
벨리에가 이번에는 행동으로 대답했다.
“열기를 비롯한 온갖 상태이상에 저항이 있는 저희와 다르게. 제국의 연약한 백성들에겐 이 정도의 열기를 버틸 수 있는 재간이 없으니까요.”
“……?!”
레오니는 그 말에 뒤를 돌아봤다가 흠칫했다.
풀썩.
정말로, 곳곳에 쓰러진 아르카나인들이 보였다.
전부 목을 감싸 쥐고 있었다.
순식간에 수분이 증발한 여파가 분명했다.
벨리에가 쓰러진 이들을 치유하며 말을 이었다.
“부디 이 싸움이 길어지지 않으면 좋겠군요.”
.
.
.
누구보다 빠르게 알아차렸다.
그리고 누구보다 우려하고 있었다.
내쉬 윌리엄, 그가 형님의 이름을 내뱉었다.
“벤쉬 형님……?”
빙룡과 마찬가지로.
일대 환경을 좌지우지하는 변화의 경지.
이건……!
틀림없었다.
형님께서 가문의 비전 마법을 발현하신 게 분명하다.
남태민이 흠칫해서 되물었다.
“저게 벤쉬 선임님의 마법이라고요?”
성전 연합군 자격으로 마탑을 드나들며 벤쉬와 마주했던 남태민이었다. 마탑의 선임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가벼운 사내. 그것이 남태민에게 남겨진 벤쉬의 인상이었거늘.
남태민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거, 사람을 완전히 잘못 봤잖아.”
평소 같았으면 형님을 과소평가한 이에게.
보란 듯이 형님 자랑을 늘어놓았을 터.
그러나 내쉬에게는 그러한 여유가 없었다.
“……위험합니다.”
“설마, 비전 마법에 대가가 같은 게 있는 건가요?”
“아뇨, 그런 뜻이 아닙니다.”
내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래, 위험한 건 벤쉬 형님이 아니었다.
형님이 발현한 화염에 휘말릴 제국의 백성들이었다.
“남태민 경, 윌리엄 가문의 차남인 제가 부모님에게 어떠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왔는지 짐작하실 수 있으십니까?”
“갑자기요? 글쎄요?”
형제라는 공통점.
남태민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자신의 형, 남철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철민이 형은 참 대단했다.
대격변 이후, 숫자가 전부가 된 세상.
세상 사람들은 이제야 철민이 형의 진가를 조금씩 알아보고 있었지만. 우리 형제와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은 옛날부터 내게 한마디씩 건넸을 정도였으니까.
-“넌 철민 형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냐?”
-“이번에도 철민이 형 공략법 때문에 살았네.”
-“진짜 이런 건 AAU도 모를걸?”
남철민을 떠올린 남태민은 작게 웃었다.
“늘 형한테 잘해라?”
내쉬가 작게 웃으며 답했다.
“태민 경의 형님께선 좋은 분이신 모양이군요.”
그러고는 씁쓸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의 경우는 조금 달랐습니다. 벤쉬 형님이 좋지 않으신 분이라는 게 아닙니다. 그저 윌리엄 가문에 내려오는 규율을 말하는 것입니다.”
강대한 힘을 품고 있는 윌리엄가의 전승 마법.
그건 오직 장손에게만 허락된 비전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핏줄들은 비전 마법 대신 무엇을 배우게 되는가?
내쉬가 벤쉬조차도 알지 못하는 비밀을 내뱉었다.
“목숨을 바쳐 비전 마법의 승계를 지킨다.”
“모, 목숨을 바쳐요?”
“그렇습니다. 이제부터 저는 벤쉬 형님의 마력을 주시해야 합니다. 윌리엄 가문의 비전이, 겁화가 형님을 집어삼키지 않도록. 어쩌면 부모님의 가르침대로 제 목숨을 내놓아야 할지도 모르겠지요.”
“무슨 그런……!”
“가혹하지만, 그것이 윌리엄 가문입니다.”
아무리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남의 가문을 욕보일 순 없었다.
남태민이 마지못해 입을 다물자 내쉬가 미소를 흘렸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각오했으니까요.”
그러니 형님도 우려하실 것 없습니다.
제 목숨 따윈 오래전부터.
형님을 위해 바쳐도 상관없다고 여겼으니까요.
내쉬가 맹렬하게 솟구치는 화염을 응시한다.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껏 날뛰십시오, 벤쉬 형님.’
형님께서는 무엇도 우려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
.
.
화염의 제왕.
비전 마법으로 머리에 얹게 된 화염의 면류관은 벤쉬를 자극하고 있었다.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마력으로, 누구도 걷잡을 수 없는 화염으로, 모든 걸 태워버릴 힘으로.
벤쉬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그대야말로 화염마법의 근원이자,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마법의 정점이라고. 윌리엄 가문이 명가라 불린 데에는 괜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다.
비전 마법을 익히게 됨으로써 몸에 깃들게 되는 염제의 성품은 다른 마법사를 짓밟기에 특화되어 있었으니까. 그러나 벤쉬는 잊지 않았다.
자신의 긍지를.
-“잊지 마렴. 그 어떤 순간에도 주위를 살펴야 한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어머니의 뺨은 언제나 부풀어 있었다는 사실을.
그럴 때마다 자신의 아버지를 불살라 버리고 싶었던 충동을.
그러한 가문에서 빠져나와 마탑에 입성했던 자신의 각오를.
-“나는 빌어먹을 윌리엄의 규율을 끊을 거다, 내쉬.”
그러나 우스운 일이었다.
화룡, 카림제바.
그의 식견이라면 비전 마법을 통제하는 데에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거늘. 그가 악마 숭배자였다니.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그땐 정말로 빌어먹을 기분이었다.
그러나 믿지 못할 일이었다.
카림제바의 진실을 밝혀낸 이호열 수석. 그 이 수석님께서 자신의 출탑 신청서에 불합격을. 정말로 귀찮으실 법도 하거늘.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불합격을 서명해 주신 덕분에.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몇백 번이고.
스스로를 되돌아보실 기회를 주신 덕분에.
벤쉬는 깨닫게 되었다.
벤쉬가 속삭이는 화염을 향해 읊조렸다.
“마법의 정점이라고, 내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미소.
더없이 온전한 정신으로.
염제는 겁화를 완전히 지배해 냈다.
“우리 이 수석님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