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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09화 (409/489)

◈ 409화. 나흘, 보답할 시간 (1)

세계수의 씨앗.

그 크기만큼 새싹의 크기도 크다.

햇병아리 한 마리야 가볍게 품을 정도.

“서늘한 게 마음에 드는군.”

프로즈낙스가 부리를 움직인다.

흑암룡이 내리신 명령을 충실히 수행해야 하는 바.

프로즈낙스는 인간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너희는 안토니움을 살피는 데에 집중해도 좋다. 세계수의 새싹은 나와 시건방진 용기사가 살피도록 할 테니까. 자신 있느냐, 용기사여?”

“……예.”

스칼이 죽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태민은 어이가 없었다.

불쑥 뒤를 돌아보면서 중얼거렸다.

“스칼, 저것도 변덕이 죽을 끓네. 언제는 드래곤을 만날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고 했으면서. 정작 드래곤이 눈앞에 있는 지금은 왜 저래?”

그 의문에 답할 수 있는 건 당사자인 스칼밖에 없었다.

스칼은 프로즈낙스를 흘겨봤다.

차라리 드래곤의 형태라면 기꺼이 명령에 따랐으리라.

그런데.

위엄 넘치는.

환상 속의 드래곤은 어디 가고 병아리라니.

심지어 이 껄렁한 말투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클래스 퀘스트 : 용혈]

용기사여, 드래곤에 오르고 싶다면 그들과 같은 냄새를 풍겨라. 그걸 가능케 하는 것은 오직 정순한 용의 혈액뿐이니. 용혈을 마시고 그들과 피를 나눈 동족으로 인정을 받아라.

-용혈을 습득하라. (선택)

-빙룡, 프로즈낙스와의 관계도를 쌓아라. (선택)

시스템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새롭게 추가된 퀘스트 목표가 저 말하는 병아리가.

빙룡, 프로즈낙스라고 말해주고 있다.

“일단, 이 몸의 어깨를 주물러 보거라.”

“……예.”

만물의 왕.

“시원치 않군. 됐다, 흥미로운 이야기나 해보거라.”

“……예.”

드래곤에 관한 환상을.

“쯧. 내 등에 오르려면 아직 멀었구나.”

“……예.”

처참하게 깨부수고 있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고생길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것.

하지만 멀리서 보면 비극도 희극으로 보인다고 했던가?

황궁 마법사, 내쉬 윌리엄이 남태민에게 말을 건넸다.

“모험가분들에 관한 이야기는 소문으로만 접했는데. 정말로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계시는 듯합니다. 용기사라니요! 스칼 경은 훗날, 제국 역사서에 실리시게 될 겁니다.”

남태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대접을 받을 만도 하지.’

유일무이한 히든 클래스, 용기사. 그 사기성은 아르카나 대륙 전기 시절부터 스칼을 봐온 남태민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남태민이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제국 역사서에 이름을 남기려면 저도 분발해야겠는데요.”

이런 선의의 경쟁이라면 호열 씨도 허락해 주시지 않을까?

의욕이 샘솟는다.

남태민이 가볍게 몸을 풀던 참이었다.

문득, 내쉬의 걸음이 멈췄다.

“왜요, 바바리안은 제국 역사서에 실릴 수 없나요?”

“아뇨, 그럴 리가요. 그런 게 아니라…….”

내쉬의 시선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안토니움의 성벽.

슥─

내쉬가 손가락을 치켜들며 말을 이었다.

“보이십니까? 저게 뭘까요? 얼핏 봤을 땐 식물 같은데. 언제부터 성벽 위에 저런 게……. 어제만 하더라도 저런 건 보이지 않았는데요.”

인간보다 짐승에 가까운 감각기관.

남태민이 드넓은 시야로 성벽을 바라본다.

그러자 정말로 보였다.

“저거 가시넝쿨 같은데요?”

“네? 가시넝쿨이요?”

“뾰족한 게 장미 가시 같기도 하고…….”

함부로 성벽을 넘지 못하게 철조망 대신 가시넝쿨이라도 걸쳐두려는 걸까. 하지만 안토니움의 성벽, 그 높이를 생각하면 딱히 의미가 없는 짓 같아 보였다.

남태민이 턱을 매만졌다.

“우리 총대장님 마법처럼 지반을 들어 올리는 게 아니고서야……. 사다리 같은 거로는 성벽 위로 올라갈 순 없을 텐데. 그리고 아무리 뾰족한 가시넝쿨이라고 해도 이런 갑옷을 뚫긴 무리잖아요?”

“맞습니다. 제국이 허술한 방책을 세우진 않을 텐데.”

내쉬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황궁 마법사였거늘. 그렇기에 더더욱 성벽의 가시넝쿨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형님 혹은 마탑의 선임 마법사들이라면…….

무언가 짐작하고 계시지 않을까.

내쉬가 텔레파시를 보냈다.

“성벽 위를 주시하라고?”

벤쉬는 히사기와 동행했다.

히사기는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조합이었다.

남태민 혹은 레오니가 벤쉬와 동행을 했다가는.

“정말이구나, 아우야. 그래서 뭐냐, 저 넝쿨은? 태워버리고 싶게.”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 같았으니까.

차분하게 생각하자.

히사기는 벤쉬의 반응에 휘둘리지 않고 상황을 바라봤다.

“벤쉬 선임 마법사님, 무언가 짐작이 가시는 바가 있으십니까?”

“흐음, 글쎄요.”

마도명가 윌리엄 가문의 장남.

격식 하나만큼은 까다로운 호열의 기준에도 어긋난 전력이 없던 벤쉬였다. 히사기가 격식을 갖추고 묻자 벤쉬도 선임으로서 격식을 갖춰 대답했다.

“이 벤쉬 윌리엄조차도 저 안토니움의 가시넝쿨은 이해하기 어렵군요. 돌아오는 텔레파시를 듣자 하니 마티스, 벨리에 선임께서도 저와 다르지 않으신 것 같고요.”

히사기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범상치 않은 가시넝쿨이라는 건가.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았거늘.

벌써부터 호열의 공백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잠깐, 거기 누구냐?”

그러나 그 공백마저 예상했다는 듯.

이내, 호열의 안배가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누구도 바라보지 않고.

시선조차 주지 않았던.

낮디낮은 하수도에서부터.

“스케빈저의 왕, 에밀리오.”

“에밀리오라면……?”

“우리의 왕이 성전 연합군에 안토니움의 상황을 전한다.”

“!”

스케빈저들이 에밀리오의 말을 전하기 위해 흩어진 성전 연합군을 찾아온 것이었다. 안토니움 내부라면 저 가시넝쿨에 관한 정보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터.

이내, 기대하던 소식이 전해졌다.

“안토니움의 모두가, 모든 게 저 가시넝쿨에 잡아먹혔다.”

“……!!!”

조금도 예상치 못한 첫마디가 떨어졌다.

재촉하지 않아도.

믿지 못해도 뒷말은 이어졌다.

“가시넝쿨에 접촉한 인간은 장미 꽃송이로 변하게 된다. 그 피부에 한 겹, 두겹 꽃잎이 돋아나서 몸을 덮고. 결국에는 장미 꽃송이로 변하게 된다는 의미다.”

“지랄.”

레오니가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레오니와 동행하던 벨리에, 그녀도 레오니의 대답에 전적으로 동감이었다.

그야 마탑의 관점으로 바라보아도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최상위 마법이라고 해도 인간을 장미로 변화시킬 순 없어요. 아니, 가능하다고 해도 어마어마한 마력을 소모하겠죠. 그런데 안토니움의 모두를 그런 꼴로 만들었다고요?”

와락!

한편 내쉬는 스케빈저의 옷자락을 거칠게 붙잡았다.

“나는 지금 진지하다, 스케빈저. 자비로우신 그분께서는 너희들조차도 온전히 신뢰하셨을지 몰라도, 나는 아니란 뜻이다. 그래서 에밀리오는 지금 어디에 있지?”

멱살을 잡힌 스케빈저가 삐뚤게 대답했다.

“우릴 믿을 수 없다고?”

“그래, 밑바닥 출신을 어떻게…….”

“이래서 황궁 새끼들은.”

“뭐?”

퉷!

스케빈저가 흙바닥에 침을 뱉었다.

“이래서 끝까지 말렸어야 하는 건데. 에밀리오는 목숨을 걸고 황궁에 진입했다! 가시넝쿨이 어디서 뻗어져 나왔는지 알고는 있는 거냐, 잘나신 황궁 마법사? 너희 황궁 밑바닥에서부터 쏟아져나왔다고 저 가시넝쿨은!!”

스케빈저가 글썽거리는 눈가를 훔쳤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저 하수도에 숨어있어서 화를 피했을 뿐.

그들은 안토니움의 주민들이 가시넝쿨에 잡아먹히는 모습을.

꽃송이로 변해가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봤으니까.

“……가시넝쿨이 황궁에서부터 뻗어져 나왔다고?”

스륵.

옷자락을 쥐고 있던 내쉬의 손에 힘이 풀렸다. 내쉬는 고개를 들어 올려 성벽을 바라봤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성벽 위로 가시넝쿨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안토니움 전역이……?

“아직도 믿지 못하겠다면, 귀를 기울여라.”

“!”

“성벽 너머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오는지.”

잠자코 내쉬의 뒤를 지키고 있던 남태민은 흠칫했다.

뒤늦게 알아차렸다.

맹수처럼 예민한 청각을 한껏 곤두세워도.

어떤 소리도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체……?”

내쉬와 남태민.

벨리에와 레오니.

단신의 마티스.

모두가 갈피를 잡지 못하던 순간이었다.

오직.

“간단한 일이군, 히사기 견습 마법사!”

벤쉬만이 자신감 넘치게 입을 열었다.

히사기는 벤쉬의 말에 흠칫했다.

저건 근거가 있는 자신감일까.

아니면 견습 마법사인 자신의 앞에서 우쭐대고 싶어 하는 선임 마법사의 습관인 걸까.

그러나 의심의 눈초리 따윈 안중에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걸까.

저벅저벅.

당당한 걸음.

벤쉬가 안토니움의 성벽을 향해 다가갔다.

“그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안토니움은 인간을 장미 꽃송이로 변하게 하는 가시넝쿨에 뒤덮였다. 또한 그 원인을 찾기 위해 스케빈저의 왕, 에밀리오가 황궁에 진입한 상황. 그렇다는 말은…….”

푸른 눈이 번뜩였다.

“이 수석님께선 이조차도 예상하셨다는 뜻이겠죠! 과연, 마탑의 실세. 수석의 직위에 오르기 위해선 이 정도의 미래는 내다봐야 한다는 건가? 역시, 수석의 자리는 호락호락하지 않군요.”

더없이 맑은 눈을.

“그렇다면 우리에게 내리신 명령도 이해가 되는군. 나흘 동안 그 어떤 일이 발생해도 안토니움에 진입하지 마라. 우리에겐 장미꽃으로 변한 인간을 되돌릴 방법 따윈 없으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이네. 히사기 견습.”

“……듣고 있습니다.”

“이 수석님에겐 해결책이 있겠는가?”

히사기가 흠칫하여 되물었다.

“설마…….”

벤쉬가 흡족한 미소를 흘렸다.

“그렇네, 이 수석님이 창시하시고 이 수석님만이 발현하실 수 있는 『반전마법』이라면? 충분히 위기를 파훼할 수 있을 터. 그렇다면 또 하나 질문이다. 이번에는 자네도 대답해도 좋네, 스케빈저 군.”

“……저도요?”

“안토니움을 관조하라. 이 수석께서 내리신 간결한 명령에 숨은 속뜻은 무엇이겠는가? 참고로 나는 이런 수석님의 은유엔 더없이 익숙합니다.”

으쓱거리는 어깨.

벤쉬에게 낙담은 없었다.

낙담조차도 긍정으로 받아들이는 그였으니까. 그동안 불허가된 모든 출탑 신청서에 나름대로 변명을 덧붙였던 벤쉬의 긍정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찰나의 침묵 끝.

벤쉬가 알아서 말을 이었다.

“저 가시넝쿨들이 안토니움 밖으로 기어나오는 걸. 이 수석님이 부재중이신 나흘 동안 필사적으로 저지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진짜 임무.”

“……!”

“전부 이해가 되는군요.”

벤쉬는 의문이었다.

“과연, 내쉬는 표면적인 이유에 일부에 불과했던 겁니다.”

단지 아우가 황궁 마법사라는 게.

내게 출탑 허가가 떨어진 이유였을까?

절대 아니리라.

설령 마르셀로 탑주님께선 그리 생각하셨을지라도.

“이 수석님은 여기까지 내 쓰임새를 내다보신 거였어요.”

비로소 이 수석님께서 출탑의 이유를 물으신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내가 활약할 시기가 왔도다.

벤쉬가 천천히 마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히사기는 멈칫했다.

‘선임 마법사라고 해도 상대는…….’

무려 안토니움을 집어삼킨 정체불명의 가시넝쿨이었다.

규격 외의 존재, 프로즈낙스가 합류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

그러나.

‘세계수의 씨앗에 쓸 신경도 부족할 거야.’

결국, 지금의 전력으로 가시넝쿨의 범람을 막아내는 수밖에 없다는 뜻. 히사기는 의문이 들었다. 가능할까? 제아무리 마탑의 선임 마법사들이 있다고 해도…….

“히사기 견습, 그리고 스케빈저 군. 행운으로 여기게.”

“……행운이라니요?”

“나의 비전 마법을 목격하는 건 그대들이 처음이니.”

그러나 히사기는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아르카나 대륙 최고의 무력 집단, 마탑.

수뇌부인 선임 마법사들은 대격변 이후.

단 한 번도 자신들의 전력을 세상에 드러낸 적이 없었으니까.

강대한 능력을 지닌 만큼.

그 능력의 무거움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화염마법학 선임 마법사, 벤쉬 윌리엄.

지금 그에겐 더없이 큰 명분이 있지 않던가?

이윽고 벤쉬의 육체에서 화염이 솟구쳐 올랐다.

“나흘이라고 하셨던가.”

내뱉는 음절 하나하나에 서린 열기.

걷잡을 수 없는 화염이 일대에 퍼진다.

성벽을 타고 내려오던 가시넝쿨이 성장을 멈췄다.

그 끄트머리부터 메말라가기 시작한다.

아니, 스스로 타오르기 시작한다.

가벼움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어조.

“나를 온전히 믿어주신 이 수석님의 신뢰에.”

화염의 제왕.

염제.

벤쉬 윌리엄이 말을 끝마쳤다.

“보답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로군.”

.

.

.

빙룡, 프로즈낙스.

병아리가 솜털을 꼼지락거렸다.

이건, 마탑의 금발머리 애송이인가.

“썩 괜찮은 인간이 있었군.”

“……절 말씀하시는 겁니까?”

“감히 나의 혼잣말에 끼어들지 마라. 자칭 용기사.”

“……예.”

“그에 비하면 너는 한참 멀었다.”

감히 이 몸에게 열기를 느끼게 하다니.

그 애송이.

겉보기와 다르게 꽤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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