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08화 (408/489)
  • ◈ 408화. 나흘 (3)

    성전 연합군.

    ‘나한테는 다들 과분한 아군이지만.’

    그중에서도 특기 전력을 뽑자면…….

    일단, 4가문의 가주들과 황혼의 후예 메어리를 빼놓을 수 없겠지. 초월자로서 시공간의 사교장에 출입할 수 있는 걸 넘어 사교장 상층까지 진입할 수 있는 자격을 거머쥔 이들이었으니까.

    하지만.

    ‘프로즈낙스는 규격 외야.’

    짧게나마 합을 겨룬 덕분에 또 한 번 깨닫게 됐다.

    드래곤은 차원이 다르다.

    그야말로 초특기 전력이라는 뜻이다.

    “네게 막중한 임무를 맡기겠다, 프로즈낙스.”

    따라서 나는 프로즈낙스에게 중책을 맡겼다.

    그놈의 폴리모프는 언제까지 유지하고 있을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만……. 겉모습만으로 상대를 판단하지 않는 우리 그랑펠 님 아니시겠냐?

    “무엇이든 받들겠습니다, 흑암룡이시여.”

    그래도 격식은 있구나.

    고개를 조아리는 햇병아리 프로즈낙스.

    나는 못 미더움을 떨치고 말을 이었다.

    “태초의 악, 녀석이 뻗쳐올 마수를 처분하거라.”

    태초의 악.

    세계수를 썩게 하고, 드래곤들이 타락하게 하고, 엘프들이 죄책감에 아르카나 대륙을 떠돌게 한 원흉이었다. 녀석은 분명 새로운 세계수를 노릴 거다.

    녀석의 목적?

    정확하게 알 순 없어도 하나는 확실하다.

    태초의 악은 아르카나 대륙에 세계수가 존재하길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드래곤들이 악과를 삼키게 유도하고, 엘프를 기만하고, 첫 세계수가 완전히 고립되어 죽게 만든 거겠지.

    ‘이번에도 네 마음대로 될 것 같냐?’

    그래, 새롭게 싹 틔운 세계수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세계수의 비밀정원].

    현실도 아르카나 대륙도 아닌 균열에서 싹을 틔웠던 세계수의 씨앗이 있었으니까. 태초의 악이라고 한들, 그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겠지.

    하지만 프로즈낙스가 뱉어낸 세계수의 씨앗은 다르다. 아르카나 대륙, 안토니움 북부에 뿌리를 내렸기에. 태초의 악도 그 존재를 알고 마수를, 꿈틀거리는 부산물을 뻗쳐올 수 있다는 뜻.

    ‘부산물, 만만치 않았다.’

    나는 냉정하게 질문을 던졌다.

    성전 연합군에 태초 악의 부산물을 처치할 수 있는 이들이 존재하는가? 대답은 아니다.

    더군다나 나는 [최후의 모험가] 효과로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할 수 없는 상황. 좋으나 싫으나 프로즈낙스에게 맡길 수밖에 없단 뜻이지.

    다행히도 프로즈낙스는 의욕적으로 답했다.

    “제게 원수를 갚을 기회를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하겠구만.

    물론, 프로즈낙스의 임무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총대장으로서 성전 연합군의 전력을 끌어올려야 한다.’

    용기사, 스칼.

    프로즈낙스가 성전 연합군에 완전히 합류한 지금.

    스칼에겐 진정한 용기사로 거듭날 기회가 찾아왔다.

    물론, 이놈의 성격 탓에 강요는 할 수 없겠지.

    게다가 프로즈낙스의 성격을 고려하면.

    억지로 시켰다간 어떤 사달이 날지 모를걸?

    “용기사에 관해서는 온전히 네게 맡기마.”

    그러니 네가 인정할 수 있을 때 스칼을 네 등에 태워라.

    나는 그랑펠식 화법으로 프로즈낙스에게 전달했다.

    무엇보다 내가 경험했기에 내릴 수 있는 판단이었다.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스칼.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워넣어 봤자.’

    결국, 나중에 몇 배로 고생해야 한다니까.

    왜, 지금의 나를 봐라.

    숨 돌릴 틈이 없다.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이놈의 지긋지긋한 단련 퀘스트에 시달리고 있잖냐……!

    *

    “……저 병아리, 진짜 빙룡이었어.”

    프로즈낙스의 개전(開戰).

    [빙룡, 프로즈낙스가 필드를 변형시킵니다.]

    원수라 할 수 있는 태초의 악, 녀석의 마수 앞에서 프로즈낙스는 전력을 다했다. 성전 연합군, 플레이어들의 눈앞에 메시지가 점멸했다.

    [히든피스, 빙룡의 설산에 진입하셨습니다.]

    시야가 뒤바뀐다.

    안토니움 북부.

    고즈넉한 풍경은 온데간데없었다.

    보이는 건 하늘을 찢을 듯이 솟은 설산.

    몰아치는 눈보라.

    그리고.

    “짓밟아주마.”

    맹렬한 피어를 내지르는 햇병아리, 프로즈낙스였다. 아군이기에 추위에도, 드래곤 피어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건가. 모두가 안도하는 것도 찰나였다.

    “버, 벌써 끝났어?!”

    대지를 쑥대밭으로 만들며 돌진해온 [태초 악의 부산물], 마수가 그대로 빙결되어 버린 것이었다. 프로즈낙스가 앙증맞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마수를 향해 나아간다.

    “시시하군, 본체를 데려와라.”

    콱.

    닭발을 축소한 듯한 모양새.

    작디작은 햇병아리 발이지만, 위력은 그대로라는 걸까.

    싸뿐하게 즈려밟는 순간.

    얼어붙은 촉수가 그대로 깨져버린다.

    때아닌 소란에 뒤늦게 순간이동한 선임 마법사들.

    화염마법학 선임, 벤쉬 윌리엄이 경악을 뱉는다.

    “저, 저런 괴물을 봤나!”

    화염마법에 관련된 서적이라면 모를까.

    다른 서적은, 특히나 마탑의 역사엔 큰 관심이 없는 벤쉬였다.

    그야 이전까지의 마탑의 역사엔 자신, 벤쉬 윌리엄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따라서 용마대전에 관한 기록에도 크게 감흥이 없었던 벤쉬였거늘.

    “빙산을 소환하다니, 저런 건 세니오스 님이라고 해도……!”

    물고 물리는 속성 마법.

    빙결마법에 확실한 상성 상 우위를 지닌 화염마법이었거늘. 저건 상성이 무의미해지는 수준이었다. 차원이 달랐다. 흑마도학 선임, 마티스도 웬일로 벤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변화의 경지라고 하지.”

    프로즈낙스가 설산을 소환한 것처럼.

    격이 다른 존재들은 일대를 변화시킨다.

    마티스의 말을 히사기가 플레이어의 상식으로 번역한다.

    “필드의 변화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남태민도 웬일로 히사기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몹은 많지 않지. 이런 스케일은 더더욱 그렇고.”

    덕분에 새삼스럽게 자각하게 됐다.

    우리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괴물에게 달려들었던 걸까?

    그러나 더더욱 믿지 못할 말이 이어졌다.

    다름아닌 프로즈낙스의 부리에서.

    “고작 이 정도로 놀라는 거냐, 인간? 흑암룡께선 무려……!”

    시간조차 얼려버리는 한기에서 버티셨다. 이 몸, 프로즈낙스는 물론이요.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한 드래곤들이 모여든 전룡소집에서 드래곤 무리를 말 한마디로 굴복시키셨다!

    이어지는 무용담이 좀처럼 끝날 기미가 없었다.

    “……저 정도면 전설 아닌가?”

    “전설로도 부족해. 신화지, 신화. 전부 사실이라면 말이야.”

    “그래서 저 병아리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 건데?”

    말하는 이가 참 중요했다.

    차라리 호열이 직접 저런 말을 내뱉었다면 무한하게 신뢰할 수 있었을 터. 프로즈낙스의 자유분방한 입방정을 확인한 이들이었기에. 마냥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그런 상황을 믿을 수 없는 이가 또 하나 있었으니.

    “촉수는 어디 갔지? 설마, 벌써 처치한 건가?”

    그리핀을 타고 뒤늦게 안토니움에 도착한 스칼이었다.

    필사적으로 뒤쫓았거늘.

    잔뜩 위축된 그리핀의 속도로는 지금이 최선이었다.

    남태민이 프로즈낙스에게 속삭였다.

    “쟵니다. 그 용기사.”

    “그 병아리는 또 뭐야. 애완동물인가?”

    “……너, 큰일 날 소리를 하고 있네.”

    그랬다.

    정말로 큰일 날 소리였다.

    프로즈낙스는 호열의 말을 떠올렸다.

    “그대가 자격을 갖췄는지는 내 판단에 맡긴다고 하셨다.”

    “자격? 뭐야, 병아리가 말도 하네?”

    “인간 교육이라, 나름대로 유희가 될 것 같군.”

    프로즈낙스가 음험한 눈빛으로 스칼을 바라봤다.

    거대 연합.

    세 길드 마스터는 스칼의 재수에 일찌감치 명복을 빌었다.

    뻔뻔함.

    질풍노도의 말버릇.

    그렇다고 반항할 수도 없는 압도적인 능력까지.

    아무래도 스칼 앞에 고생길이 훤히 열린 것 같았으니까.

    .

    .

    .

    같은 시각.

    마찬가지로 호열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스케빈저의 왕. 에밀리오였다. 빛조차도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하수도. 에밀리오가 스케빈저들에게 지시했다.

    “어떠한 소문이라도 좋아. 하나도 빠짐없이 수집해.”

    “알겠어, 에밀리오.”

    “그나저나 너는 어디로 갈 생각인데?”

    안토니움 곳곳으로 연결된 하수도.

    에밀리오는 가장 거대한 하수도관을 바라봤다.

    알아차린 이들이 흠칫하여 되물었다.

    “그쪽은 황궁이잖아? 언제는 얼씬도 하지 말라면서 무슨 일인데 그래? 뭔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맡기라도 한 거야? 그게 아니면 대박 냄새라든가?”

    에밀리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게 있어.”

    그분께서는 명령하지 않으셨지만.

    에밀리오는 능동적으로 판단했다.

    어째서인가, 두뇌 회전이 빨라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여태까지는 한 수 앞을 예상하는 게 고작이었다면, 지금은 열 수 앞을 내다볼 수 있을 듯한 감각이었다.

    스케빈저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가 동행할까?”

    “아니, 황궁 쪽은 위험해.”

    “그렇긴 하지만…….”

    단순히 접근하는 것만으로 언제 화살받이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마법진에 걸려들어 바싹 타버릴지도 모른다. 물불 가리지 않는 스케빈저들조차도 접근하지 않는 데엔 이유가 있다는 것.

    “그럼, 조심해. 에밀리오!”

    저벅─

    그러나 에밀리오는 고개를 끄덕이곤 황궁과 연결된 하수도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누구도 바라지 않은 일이었거늘. 어째서일까. 발길이 저절로 황궁으로 향했다.

    ‘……이상한데.’

    스스로도 의아한 행동.

    그러나 에밀리오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이 순간.

    스케빈저의 왕.

    군주의 그릇을 가진 에밀리오의 능력은 급격하게 상승한 상태였다.

    그래.

    아르카나인인 에밀리오에겐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시야엔 일찌감치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적대 세력의 군주와 마주했습니다.]

    [스탯, ‘판단력’이 상승합니다.]

    [스탯, ‘냉철’이 상승합니다.]

    [스탯, ‘자제력’이 상승합니다.]…….

    스케빈저의 왕이라 불리지만, 에밀리오는 하찮은 왕에 불과했다. 에밀리오에겐 황제처럼 위대한 검술의 스승도, 지식의 스승, 수많은 경험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에밀리오의 눈은 군주의 그것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아르카나의 군주들이 자신과 같은 군주의 씨를 말린 이유였다.

    전국시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클래스, [군주]는 만개하게 되니까.

    [월드 퀘스트, ‘전국시대’의 효과로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의문이 따를 수밖에 없으리라.

    에밀리오는 애초에 안토니움의 하수도에서 떠나지 않았었다.

    어째서.

    지금에서야.

    적대 세력의 군주와 조우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단 말인가?

    그 이유는 간단했다.

    메시지에 떠오른 적대 세력의 군주.

    그건 황제를 말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찌릿!

    “……!”

    발끝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통증에 에밀리오는 멈칫했다.

    마법진인가?

    설령 마법이라고 해도 비명을 지를 순 없었다.

    어둠 너머에 황궁 경비병이 석궁을 겨누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가시?’

    마법 같은 게 아니었다.

    바닥을 바라보자 웬 가시넝쿨이 있었다.

    에밀리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가시넝쿨의 끝을 바라보려고 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 뿌리를 찾으려고 조심스럽게 발길을 옮겨도 더욱더 복잡하게 뒤엉킨 가시넝쿨밖에 보이지 않았다.

    ‘대체…….’

    접근을 봉쇄하기 위해서 가시넝쿨을 심은 건가?

    아니,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이런 넝쿨은 없었다.

    게다가 이런 가시넝쿨이라면 경비병이 서 있을 자리도 없으리라.

    에밀리오는 마른침을 삼켰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그러나 의문스러웠기에 더욱더 물러나선 안 됐다.

    안토니움 내부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었으니까.

    에밀리오가 가시넝쿨을 피해 몸을 웅크리던 순간이었다.

    “으윽.”

    “……!”

    어둠 저편에서 신음이 들렸다.

    그 정체야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술에 취했다가 뒤늦게 눈을 뜬 경비병의 신음이었다.

    숨을 죽이자 생생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론? 멜? 자네들, 어디에 있는가? 횃불은 어디다 팔아먹고는……. 아야! 뭐야, 이 빌어먹을 가시넝쿨은?! 이런 젠장 할. 아직도 술이 덜 깼나…….”

    경비병도 모르는 눈치인 걸로 보았을 때.

    가시넝쿨이 자라난 건 수 시간 내외인 듯싶었다.

    이내, 경비병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이 꽃송이는 또 뭐야?”

    꽃송이……?

    그 말에 에밀리오는 웅크렸던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자 정말로 보였다.

    구부정하게 고개를 숙인 경비병 앞.

    가시넝쿨에 맺힌 거대한 두 개의 꽃송이가.

    그건 정말로 사람 크기의 장미 꽃송이였다.

    이내, 경비병이 휙 몸을 돌렸다.

    “사람만한 장미 꽃송이라니, 분명 개꿈이구만. 이거.”

    잠 혹은 술이 덜 깼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둘 다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에밀리오가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스르륵.

    “?”

    등을 돌린 사내에게 은밀하게 다가가는 가시넝쿨을.

    가시넝쿨이 사내에게 닿는 순간.

    에밀리오의 안주머니에서 잠자코 있던 생쥐.

    찍찍─!

    녀석이 뛰쳐나와 하수도 저편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

    덕분에 에밀리오는 직감할 수 있었다.

    “어, 어어, 어어어?!”

    사람만한 장미 꽃송이의 위험도를.

    가시넝쿨에 휘감긴 경비병이 한 겹, 두 겹, 세 겹…….

    장미꽃잎에 뒤덮여간다.

    “이런 미ㅊ……?!”

    이윽고 꽃송이로 변해버렸다.

    가시넝쿨에 매달렸던 두 개의 꽃송이.

    그 꽃송이들과 같은 형태로.

    .

    .

    .

    [전황의 서고]

    [붕괴도 : 100%]

    [영원한 장미의 군주, ‘세릭로즈’가 출현합니다.]

    [영원한 장미의 군주, 세릭로즈가 필드를 변화시킵니다.]

    [영원한 장밋빛 미래가 제국 수도, 안토니움을 뒤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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