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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07화 (407/489)

◈ 407화. 나흘 (2)

“나흘간 그대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다음과 같다.”

호열을 최대한 따라해보려는 건가.

프로즈낙스가 털을 잔뜩 부풀리고 말한다.

햇병아리의 모습이라 크게 와 닿을 순 없었지만.

“내쉬와 에밀리오, 그리고 삼인의 선임 마법사가 주가 되어 안토니움의 동태를 살피도록 한다. 단, 섣부른 진입은 허가하지 않겠다.”

남태민과 레오니가 속닥거렸다.

“우린 어느 쪽에 합류해야 하는 건데?”

“나는 저 마탑의 금발만 아니면 좋겠는데.”

“마탑 금발이면 벤쉬 윌리엄 선임?”

똥촉.

레오니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남태민은 왠지 모르게 벤쉬를 피하고 싶었다.

왜, 지금도 봐라.

“후후. 드디어 나, 벤쉬 윌리엄의 시간이 왔군요!”

유독 혼자만 들떠 있었거든.

히사기는 침묵을 지켰다.

어느 쪽에 합류하게 되든 아무래도 좋았다.

‘다들 우리보다 월등한 실력자들이니까.’

그것보다 더욱 큰 의문이 있었으니까.

눈앞의 병아리, 자칭 빙룡 프로즈낙스.

빛과 함께 사라졌던 녀석이 어째서.

하필이면 병아리의 모습으로 나타났단 말인가?

‘뭐, 중요한 건 아니겠지만.’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했지만, 상관없었다.

총대장, 호열이 현실에 멀쩡히 살아계신다.

지금은 그저 추측이 맞아떨어졌다는 것으로 충분했다.

마티스의 시선이 벨리에를 향한다.

“벨리에 선임께선 짐작하고 계셨습니까?”

“짐작이라면 이 수석님 말씀하시는 거죠?”

“그렇습니다.”

흑마도학 선임, 마티스 딘 카를.

마티스는 북부와는 정반대, 남부에서 안토니움의 동태를 살피던 중이었다. 그 바람에 가장 늦게 사태를 접하게 되었다. 다만, 사태의 심각성은 직접 상황을 지켜봤던 이들 못지않게 파악하고 있었다.

검게 물든 반지.

과거에서 비롯되는 적합한 마력.

북부, 일대엔 적합한 마력이 넘실거렸으니까.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은 과거에서.

이 정도로 짙은 적합한 마력이 발생했다는 것?

그만큼 강렬한 사건이 벌어졌단 뜻이다.

그 탓에 진지해질 수밖에 없었다.

마티스가 입을 열었다.

“저는 노파심에 이 수석님을 우려했습니다.”

벨리에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저도 마찬가지인걸요?”

“정말이십니까?”

“수석님에게 직접 묻기까지 했으니까요.”

대격변 이전.

오직 모험가들에게 주어졌던 부활의 권능. 혹시나 이 수석님께선 아직도 그 부활의 권능을 보유하고 계신 것이냐고, 그게 아니라면 어째서 희생을 각오하시는 거냐고.

직접적으로 물었던 벨리에였다.

벨리에가 말을 이었다.

“물론, 제대로 된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요. 아니지. 제대로 대답하셨는데, 그저 제가 이해하지 못한 걸지도요……? 하지만 분명한 건.”

벨리에가 미소를 흘린다.

“지금부터 나흘. 이 수석님께선 저희에게 적잖은 임무를 주셨단 거죠. 마티스 선임님도 알고 계시죠? 이 수석님을 실망시키면 어떤 독설이 돌아올지요.”

벨리에의 말에 잠자코 있던 벤쉬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죠. 누구보다 이 벤쉬 윌리엄이 잘 알죠.”

내쉬의 눈이 반짝였다.

“역시, 벤쉬 형님! 모르는 게 없으시군요!”

어째서 나흘이란 말인가?

칭호, [최후의 모험가] 효과를 알지 못하는 이들로서는 의문을 해결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반드시 성과를 내야만 했다. 프로즈낙스가 덧붙인 마지막 말을 생각해서라도.

“흑암룡께선 아르카나 시간으로 정확하게 나흘 뒤 라이언 하트 기사단과 함께 아르카나 대륙으로 진입할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들이여, 서둘러 움직여라!”

남태민은 햇병아리를 흘겨봤다.

“저거, 은근히 얄밉네?”

방금 전까지 우릴 죽이려고 들었으면서 말이야.

악과를 뱉어내고 개과천선을 했다는 건가? 어떻게 저렇게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꿀 수 있는 거야? 뭐, 정말로 호열 씨를 어미 닭처럼……. 아니, 우두머리라 생각하는 건가?

남태민의 시선을 알아차린 걸까.

프로즈낙스가 작디작은 머리를 돌린다.

부리를 열어 대꾸한다.

“원래 이 나이 땐 싸우면서 크는 법이다, 인간.”

“싸우면서 커? 몇 살인데 그런 소릴…….”

“그나저나 보이지 않는구나, 인간 한 마리가.”

질풍노도의 해츨링.

뻔뻔하게 말을 돌린 프로즈낙스는 호열의 전언을 떠올렸다. 다른 이들에게도 막중한 임무를 주어진 만큼. 프로즈낙스 또한 중대한 임무를 받아든 참이었다.

-“용기사를 찾거라.”

프로즈낙스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과연, 모든 걸 굽어살핀다는 흑암룡.

그 명성은 과장된 게 아니었다.

“어찌하여 보잘것없는 하나의 인간조차 굽어살필 수 있는 것인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지만……. 흑암룡, 당신의 명령이기에 충실하게 수행하겠습니다. 그래서 어디 있는 거냐, 용기사를 자처하는 오만한 인간 녀석은!”

용기사라면, 스칼?

“……맞다.”

프로즈낙스의 윽박.

거대 연합은 뒤늦게 스칼의 존재를 떠올렸다.

깍두기와 같은 존재였기에 그 부재를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냥 가만히나 있지. 그 자식은 재수도 없네.”

남태민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그……. 드래곤을 찾겠다고 혼자서 아르카나 대륙 곳곳을 뒤지고 있을 텐데. 구체적으로 어디서 뭐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지금도 개고생을 하고 있을걸요?”

*

[클래스 퀘스트 : 용혈]

용기사여, 드래곤에 오르고 싶다면 그들과 같은 냄새를 풍겨라. 그걸 가능케 하는 것은 오직 정순한 용의 혈액뿐이니. 용혈을 마시고 그들과 피를 나눈 동족으로 인정을 받아라.

-용혈을 습득하라. (진행 중)

남태민의 예상은 정확했다.

“그 귀한 걸 어디서 찾아야 하는 건지.”

스칼은 재수가 없었다.

호열이 프로즈낙스에게 남긴 상처에서 용혈이 뿜어져 나왔다는 사실도, 심지어는 호열 덕분에 귀찮게 용혈을 섭취해 드래곤의 환심을 살 필요도 없어졌다는 사실도, 지금의 스칼은 알 방법이 없었으니까.

“일단, 조금 더 빠르게 날자.”

아르카나 대륙에서의 스칼의 애마, 그리핀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우선, 제로 산맥으로 향했다.

드래곤의 흔적을 찾기 위함이었다.

“뭐라도 남아있으면 좋겠는데.”

대규모 정기 업데이트.

알다시피 제로 산맥은 현실로 업데이트된 상태.

따라서 아르카나 대륙, 제로 산맥이 있던 자리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스칼은 낭만 탐험가, 로렌츠크의 조언을 떠올렸다.

-“만물의 왕은 강렬한 존재감을 남기는 법이지. 산에, 들에, 땅에 심지어는 공기에도! 나라면 제로 산맥 터를 먼저 둘러볼 걸세.”

제로 산맥 최정상.

드래곤들이 오랜 시간 머물렀던 장소인 만큼 흔적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과연, 로렌츠크의 예상은 정확했다. 제로 산맥이 있던 자리. 고도가 점점 높아지자 그리핀이 낑낑거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만물의 왕이 남긴 기척에 지레 겁먹은 게 분명했다.

“괜찮아. 여기에 드래곤은 없어.”

슥.

스칼이 그리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핀을 안정시키며 조금 더 높게 날아올랐다.

그리고 목격했다.

갈라진 차원의 틈, 균열.

[히든피스 : 용의 신전]

“……찾았다.”

차원을 초월하는 드래곤들의 안식처를.

그러나 스칼은 감히 진입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떠오른 메시지가 두 눈을 의심케 할 수준이었다.

[적정 레벨 : 초월자]

[붕괴도 : 100%]

100퍼센트에 육박한 붕괴도야 놀랍지 않았다. 드래곤들이 괜히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던 게 아닐 테니까. 그런데.

“……초월자라니.”

적정 레벨이 심상치 않았다.

아르카나 대륙 전기 시절 때부터 최근까지.

공식 랭킹 최상위권을 수성하던 자신조차 들어보지 못한 단어.

‘제로 산맥에도 비슷한 문구가 있긴 했지만.’

누구에게도 권장되지 않음.

제로 산맥의 적정 레벨을 표현하는 문구.

제로 산맥, 그 이상의 경고문이 있을까 생각했거늘.

“이건 더 심한데……?”

과연, 미지에서 오는 경고가 더욱 위험하게 느껴졌다.

……꿀꺽.

스칼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호열 경, 총대장님은 무언가 알고 계신 걸까?’

새삼스럽게 주제 파악을 하게 됐다.

설령 흔적을 찾게 되었을지라도. 만물의 왕은 누구에게나 용안(龍顔)을 보여주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스칼은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는 그리핀의 고삐를 붙잡았다.

“어쨌든, 단서를 찾았으니까. 오늘은 됐어.”

드래곤의 위치를 파악한다는 목표는 달성했다.

새롭게 갱신된 클래스 퀘스트에 욕심이 나기는 했다만…….

드래곤이라면 눈이 돌아가는 자신조차도 엄두가 나질 않았다.

용혈을 취하긴 위해선 드래곤에게 상처를 내야 한다는 소리인데. 지금의 드래곤들은 언제 악룡으로 돌변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스칼이 욕구를 억누르며 중얼거렸다.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하던 시절이 아니라고, 스칼.”

이곳이 아르카나 대륙 전기라고 착각하지 말자.

죽으면 정말로 죽는 거다.

스칼은 되뇌며 하늘을 날았다.

‘소식을 전해야 해.’

물론, 지금의 정보가 얼마나 쓰임새가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야 초월자라니. 제아무리 총대장님이라고 모든 걸 알고 계실 순 없을 터. 어쩌면 초월자라는 적정 레벨, 그 조건을 충족하는 데에 시간을 허비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스칼이 한숨을 삼키던 그때였다.

“끼엨!”

그리핀이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휘청─!

격하게 흔들리는 안장.

그러나 마스터에 육박한 탈것 숙련도.

스칼이 빠르게 균형을 잡았다.

동시에 탈것에 관한 이해도를 발휘.

그리핀의 시야를 빠르게 뒤쫓았다.

“……뭐야, 저거?”

그러자 아득한 지상을 가로지르는 ‘무언가’가 보였다.

콰드드득─!

정확하게는 매서운 속도로 전진하는 기괴한 촉수를.

“끼엨!!”

그리핀은 아르카나 대륙에서도 영물로 통한다. 등급으로 따지자면 [유니크]는 족히 되는 펫이라는 뜻. 웬만한 몬스터 앞에서는 주눅이 들지 않는 정신력을 가졌거늘.

푸드덕─!

스칼은 짐짓 놀랄 수밖에 없었다.

‘드래곤의 흔적을 발견했을 때보다 불안해하고 있어.’

대체 저 촉수가 뭐길래?

일단, 그 위력은 실로 파멸적으로 보였다. 대지를 부드러운 모래사장을 가르듯 나아가는 게 경로를 방해한다면 뼈도 못 추릴 것 같은 기세였다.

하지만 촉수에겐 명확한 목적지가 있어 보였다.

“진정해. 그리핀, 저게 널 해치진 않을 거야.”

단순하게 ‘어딘가’를 향해 나아갈 뿐.

자신에게서 도망치는 생명체를 쫓고 있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스칼의 안도는 오래가지 않았다.

촉수를 바라보던 도중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

잠깐, 저쪽은 제국의 수도 안토니움 방향이다!

*

프로즈낙스.

햇병아리가 문득, 부리를 열었다.

“아, 한 가지를 까먹고 있었다.”

“엥? 까먹어?”

“아니. 저거, 애초에 그 빙룡이 맞긴 한 거야?!”

병아리로 폴리모프하는 바람에 뇌 크기도 병아리, 지능이 새대가리가 된 건 아닐까? 남태민과 레오니가 진지하게 눈빛을 교환하던 순간이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프로즈낙스가 입을 연다.

“새롭게 싹 틔운 세계수의 씨앗을 수호하는 것도 그대들의 임무였다. 흑암룡께선 너희 인간들이라면 분명 세계수의 씨앗, 그 특징을 명심하고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

그 말을 듣는 순간, 플레이어들은 떠올랐다.

[세계수의 정원]이 본래는 [포식자의 늪지대]였다는 사실을.

더군다나 남태민, 히사기, 레오니.

세 사람은 포식자 균열의 경험자였다.

“온갖 네임드 몹이 몰려들지 않았었나?”

“전부 세계수의 씨앗이 지닌 엄청난 축복을 노렸습니다.”

“그래도 싹이 트고 나서는 다툼을 멈췄던 것 같은데? 아냐?”

그러면 세계수의 씨앗이 싹을 틔운 지금.

몬스터들이 몰릴 이유는 없는 거 아닌가?

프로즈낙스를 향하는 의문 섞인 시선.

당사자인 프로즈낙스는 뻔뻔하게도 날개를 퍼덕였다.

“아니, 그런 잡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적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어머니와 나의 형제들을 타락시킨 원흉이니까. 또한 그 녀석이 원하는 건 축복이 아닌 새로운 세계수, 그 자체다.”

세계수와 드래곤을 타락시킨 존재?

새로운 세계수를 통째로 집어삼키는 게 목적?

그런 무지막지한 놈이 다가올 거라고……?

아니, 그걸 왜 지금 말하는데?!

원망스러운 시선을 알아차린 걸까.

프로즈낙스가 부리를 연다.

“말하지 않았나. 어릴 땐 그럴 수 있다고.”

저거, 이번에도 나이를 들먹이다니.

뻔뻔함이 정도가 지나치잖아.

애초에 어리다는 게 어디 말이나 된단 말인가?

“드래곤들은 최소 1천 살은 먹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레오니가 한마디를 보탰다.

“저놈의 세계수 족보 좀 들여다보고 싶네.”

확신할 수 있었다.

저정도의 뻔뻔함은 집안 내력이 분명하리라고.

그러나 더 이상 투덜거릴 여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느껴지기 시작했으니까.

콰드드득─!

태초의 악.

녀석이 새로운 세계수를 향해 뻗친 촉수.

거대한 악의가.

[악마, ‘태초 악의 부산물’이 출현합니다.]

이 순간, 거대 연합은 솔직하게 프로즈낙스를 원망하고 있었다. 저 새대가리가 완벽하게 깜빡한 바람에 선임 마법사도, 황궁 마법사도, 스케빈저의 왕도 주위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세계수의 새싹을 수호해야 한다니.

그러나 거대 연합은 알지 못했다.

프로즈낙스의 뻔뻔함에는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는 사실을.

그렇다, 만물의 왕으로 태어난 존재의 천성이었다.

당연하게도. 그러한 왕을 건드린 대가는 톡톡히 치를 수밖에 없다. 이윽고, 허공으로 떠오르는 병아리. 프로즈낙스에게서 걷잡을 수 없는 마력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너로구나.”

냉룡의 한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의 어머니, 세계수를 타락하게 하고 나와 나의 형제들을 기만한 녀석이. 나, 프로즈낙스가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로소 원수를 갚게 되는구나.”

질풍노도의 한기가 일대를 뒤덮었다.

“그대로 얼어붙어서 멈춰라.”

모두가 경악했다.

“쥐어패 죽이기 전에.”

세상에.

뭐 저렇게 입이 거친 병아리.

아니, 드래곤이 다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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