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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06화 (406/489)

◈ 406화. 나흘 (1)

햇병아리를 향해 꾸짖었다.

“건방지게 굴지 마라, 프로즈낙스.”

“흑암룡의 말씀이 있으시니, 오늘은 용서해 주마. 인간.”

“총대장님, 그 병아리는 대체?”

제 부리로 말했다시피 이건 빙룡, 프로즈낙스였다.

‘입방정의 위력을 간만에 실감하게 되네.’

내뱉는 말은 실현하고야 만다는 건가? 프로즈낙스가 폴리모프를 발현, 외관을 햇병아리로 뒤바꾸고는 차원을 찢고 나를 뒤쫓아온 것이었다. 그 이유야 뻔하지.

‘하여튼 남한테 걱정 끼치는 건 잘하니까, 내가.’

속으로 한숨을 삼킨 나는 하르콘에게 답했다.

“그대의 희생이 있었기에 성공했다.”

“제 희생이라 하심은……. 설마!”

“그래, 악과를 정화했다.”

나야 치유마법의 극의를 발현하고 아르카나 대륙에서 사망해 버린 탓에 프로즈낙스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정화되었는지. 또 아르카나 대륙의 상황은 어떠한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흑암룡이시여!”

허공을 찢고, 프로즈낙스가 햇병아리 모습을 드러냈던 순간.

나는 놀라기보다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개죽음이 아니었다는 안도감. 거기에 더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진 건지,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거든.

그런데.

갸우뚱거리는 햇병아리.

-“급하게 뒤쫓느라 모르겠는데요?”

과연, 질풍노도 감정에 충실한 해츨링이로고……!

‘이래선 하이엘에게 묻는 수밖에 없나.’

고뇌하던 찰나.

하르콘이 집무실의 문을 두들겨 온 것이었다.

그랑펠식 화법에 단련된 하르콘이다.

나의 말에 담긴 속뜻을 금방 알아차린 모양.

“유낙서스 이후, 아르카나 대륙에도 악룡이 출현했던 모양이군요. 그것이 이쪽의 빙룡 프로즈낙스……. 한데, 어찌하여 병아리의 모습을 띠고 있는 건지 그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거기에 관해선 프로즈낙스가 답했다.

“인간아. 폴리모프가 존재하는 이상, 드래곤에게 외관은 무의미하다. 당신께서 내가 햇병아리이기를 원하시기에 나는 그저 명령에 따를 뿐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흑암룡이시여?”

햇병아리가 진짜 햇병아리를 말하는 게 아닌데 말이야.

해츨링이라 그런가,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는구만.

그래도 뭐, 햇병아리 정도면 양호했다.

‘털이 날리기는 한다만.’

뭣보다 집무실에서 육중한 빙룡의 모습으로 돌아오기라도 해봐라. 난장판이 되는 걸 떠나서 호화스러운 황금 궁전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하르콘이 흠칫하여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나 총대장님의 영향이었군요. 과연.”

나는 감탄하는 하르콘을 바라봤다.

‘감정을 완전히 숨길 순 없구나, 하르콘도.’

하르콘은 백전노장이었다.

수많은 전장을 겪으며 마지막에는 두 다리를 잃을 정도로 극심한 시련을 겪었다. 따라서 웬만한 일엔 감정변화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그런 하르콘의 얼굴에서 기대가 내비치고 있었다.

‘이거 말하기가 더 미안해지는데.’

황제가 내린 의문의 선택.

안토니움에 선포된 봉쇄령.

그 사태에 클라우디의 탕아, 오만이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따져봐도 내 잘못은 아니었거늘.

나, 이호열.

눈치가 있기에 섣불리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 하나 숨기지 않는 그랑펠이 침묵을 허용할 리 있으랴?

결국, 나는 입을 열었다.

“안토니움에 봉쇄령이 떨어졌네, 하르콘.”

“……그렇지 않아도 소문을 접했습니다. 사실이었군요.”

“또한 그 봉쇄령엔 거악이 연관되어 있지.”

“거악이라 하심은 칠죄종이겠군요.”

“그렇네. 최후의 칠죄종, 오만이다.”

나는 말을 이었다.

“동시에 나와 같은 은발을 가진 클라우디다.”

“……!”

하르콘의 동공이 흔들린다.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겠지.

그러나 구체적인 사연은 나도 아직 알지 못한다.

애초에 오만, 녀석과 마주한 건 [저주, 어둠의 이해].

그것도 ‘그날’의 기억 속 찰나뿐이었다.

‘정확하게 어떤 관계인지도 모른단 말이지.’

하지만 우려할 건 없다.

스케빈저의 왕, 에밀리오.

그와 인연이 닿은 지금.

나는 하수도를 통해 안토니움의 동태를 파악할 수 있었으니까.

에밀리오의 이름에 하르콘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폐한 대륙은 스케빈저가 들끓 수밖에 없는 환경이겠지요. 그런 스케빈저들을 규합했다는 건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뜻인데……. 그런 이조차도 포용하시다니. 역시, 총대장님이십니다.”

……내가 포용했다기보다는 나비효과 덕분이지만.

나는 거기에 대해선 침묵했다. 애써 대답하고 있지만, 하르콘의 얼굴에 가득한 근심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야겠군.

“라이언 하트 기사단의 아르카나 대륙 진입을 허가하겠다. 그 일시는 정확히 내일 이 시간. 그 목적은 안토니움의 사태파악.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하르콘의 눈빛이 빛난다.

“황제와의 대면이다.”

“!”

오만, 녀석에겐 분명 꿍꿍이가 있겠지.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안토니움에 발을 들이기를 원하고 있는 눈치였거든. 예전 같았으면 곧바로 안토니움에 진입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혼자서 발버둥치던 예전과는 다르다.

성전 연합군 총대장, 그 무게를 인정한 만큼.

나는 수많은 아군.

그들을 지휘하고 책임져야 했으니까.

척.

이내, 하르콘이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다.

“라이언 하트가 총대장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하르콘이 막바지 출정 준비를 위해 물러가고, 집무실엔 나와 프로즈낙스만이 남았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추궁해 보자. 나는 햇병아리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삼켰던 악과는 어찌 된 것이냐, 프로즈낙스.”

*

아르카나 대륙의 시간은 현실보다 네 배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마력 탈진.

그 여파로 쓰러졌던 벨리에의 눈꺼풀이 움찔거렸다.

“……?”

낯선 천장.

조그마한 가정집.

시야에 들어온 금발 머리칼의 사내.

“여긴…….”

“벨리에 선임님, 괜찮으신 겁니까?!”

“벤쉬 선임……?”

“다행입니다. 정말로요!”

마탑의 숙련 마법사는 전공 마법을 정해야만 한다.

호열이나 마르셀로, 혹은 마티스처럼 특출난 재능을 가져 새로운 학파를 창시하는 게 아니라면, 숙련 마법사 때부턴 자신이 선택한 마법만을 갈고닦게 된다는 뜻이다.

“정말로 한시름 놨습니다. 고생했다, 아우야.”

“헤헤. 과찬이십니다, 형님.”

허나, 내쉬 윌리엄은 마탑에 속하지 않았으면서도 숙련 마법사의 실력을 갖춘 마법사였다.

제국 도서관에 남겨진 양질의 마법서를 통해 섭렵한 마법 중에는 치유마법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그 수준은 치유학파 숙련 마법사에 견줄 만했다.

노고를 알아차린 벨리에가 감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내쉬 경.”

“아, 아닙니다!”

내쉬의 얼굴이 붉어진다.

벤쉬의 눈썹이 개구장스럽게 움찔거렸거늘.

농담을 내뱉을 여유는 없었다.

벨리에가 곧바로 물었다.

“이호열 수석님께서는 어디에 계시죠?”

마지막 기억을 떠올려본다.

드래곤이 삼킨 악과를 정화할 방법.

그건 치유마법의 극의를 발현, 악과에 강대한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 정확하게는 목숨을 바쳐 악과가 품은 세계수의 씨앗을 싹 틔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분명, 이 수석님께선 자신을 대신해 그 역할을 떠맡으셨지.

벤쉬와 내쉬.

두 형제의 얼굴이 굳어진다.

“유감스럽게도 저와 제 아우 내쉬는 이 수석님의 마지막 모습을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벨리에 선임.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슥.

벤쉬의 손가락이 창 너머를 향한다.

“벨리에 선임의 연구는 틀리지 않았다는 겁니다.”

“……?”

벨리에는 무언가에 홀린 듯 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보였다.

안토니움의 북부, 커다란 세계수의 씨앗에서 피어난 새싹을.

“저는 처음에 웬 바윗덩어리인가 싶었는데……. 모험가들은 곧장 알아보더군요? 저게 세계수의 씨앗이라는 걸 말입니다. 아마도 이 수석님께서 이전에 모험가들에게도 보여주셨던 모양입니다.”

그렇다.

[세계수의 비밀정원]에서 이미 한 차례, 하이엘의 {축복}을 통해 세계수의 씨앗을 싹 틔웠던 호열이었다. 그러나 벨리에는 알고 있었다.

“……아니요, 그때와는 달라요.”

허나, 그 씨앗은 악에 물들지 않은 온전한 세계수의 씨앗이었다. 악과라는 악의 결실 속에서 세계수의 씨앗을 싹 틔우기 위해선 하이엘의 축복만으론 부족하다.

앞서 말했듯 강대한 생명력이.

치유마법의 극의가.

희생이 필요하단 뜻이었다.

벨리에의 단호한 말에 벤쉬는 답했다.

“그럼, 직접 물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벤쉬의 시선이 향한 곳엔 세계수의 새싹을 바라보고 있는 모험가들이 있었다. 환자로서 치유학파의 별실을 찾았던 이들. 남태민, 히사기, 레오니였다.

벨리에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저들이라면.’

유낙서스 때와 마찬가지로 프로즈낙스와도 사투를 벌인 이들이다. 저들이라면 이 수석님의 행방을 알고 있을 터. 벨리에가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꼈는지 셋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

그러나 벨리에는 곧바로 묻지 못했다.

설령 위대한 치유마법사라고 한들.

인간의 마음은 치유할 수 없다.

그들의 상처 입은 내면이 얼굴에 선명히 드러나 있었기에.

히사기가 눈치껏 입을 열었다.

“프로즈낙스는 빛줄기가 되신 총대장님과 함께 모습을 감췄습니다. 그리고 빛줄기가 사라진 자리엔……. 싹을 틔운 세계수의 씨앗만이 남았습니다.”

히사기가 물었다.

“……계획이 성공한 겁니까, 벨리에 선임님?”

레라스 틸.

그가 웅크려 빛의 구체가 되었다면, 우리 꼿꼿하신 이 수석님께선 빛의 줄기가 되신 걸까?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꼿꼿하셨던 걸까? 생각하던 벨리에가 고개를 끄덕인 순간이었다.

레오니가 이를 악물었다.

“이딴 미친 짓이 계획이야?”

벨리에를 바라보며 똑똑히 말을 이었다.

“당신도, 이호열도 미쳤다고. 알아?! 목숨을 내던지는 게 유일한 방법이라고?! 그러면 포기할 줄도 알아야지. 왜 그렇게까지 자기를 궁지로, 절벽으로 몰아넣는 건데?!”

……으읍, 이거 안 놔?!

남태민이 커다란 손으로 레오니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할 말은 전부 내뱉은 레오니였다. 격식을 어길 대로 어긴 무례였거늘. 벨리에는 그저 쓴웃음을 머금었다.

“당신들도 다르지 않잖아요?”

스스로를 궁지로 몰고.

절벽으로 향하는 건 성전 연합군도 다르지 않았다.

벨리에는 현존하는 최고의 치유마법사였다.

웬만한 부상은 바로 치유할 수 있는 벨리에조차도.

무려 일주일을 가량을 매달려 치유시켰던 세 사람이었다.

특히나.

“레오니 양, 왼팔의 통증은 어떤가요?”

버서커.

“뭐?”

언제나 피와 부상을 뒤집어쓰고 전투에 임하는 레오니. 레오니의 왼팔은 단지 붙어만 있을 뿐. 절단해야만 했던 하르콘의 두 다리와 상태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벨리에의 말에 남태민이 그제야 흠칫했다.

“너, 그러고 보니까 한 자루는 어디에 팔아먹었냐?”

“……넌 그냥 다물고 있어.”

쌍검을 자유자재로 다루던 레오니가 왼팔을 상실했다.

그 전력은 반 토막이 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럼에도 유낙서스보다 위험한 프로즈낙스에게 달려든 것이었다.

목숨을 걸고.

레오니가 잠잠해지자 벨리에가 말을 이었다.

“저희와 마찬가지로 이 수석님도 각오하신 거예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것이 결말이었다.

벨리에는 찬란하게 피어난 세계수의 새싹을 바라봤다.

과연, 이 새싹에 호열의 목숨과 맞바꿀 만한 가치가 있을까?

이 수석님, 저는…….

벨리에가 감정을 억누르던 순간이었다.

히사기가 나지막이 입술을 떼었다.

“이제부터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글쎄요.”

벨리에는 마을을, 제국민들을 바라봤다.

당장은 저들의 상태를 치유하는 게 최우선 과제가 아닐까.

대답하기 전에 히사기가 먼저 말을 이었다.

“저희는 기다릴 생각입니다.”

“기다리다니…….”

“나흘.”

“……?”

“나흘 뒤에 다시 시작하시겠다고 하셨으니까요.”

나흘.

그 단어에.

마력 탈진 탓에 흐릿했던 기억이 되돌아온다.

-“나흘 뒤에 보도록 하지.”

“……!”

호열이 남겼던 그 말이.

“이 수석님께서 제게도 비슷한 말씀을 남기셨어요.”

“……네?”

“잠깐만, 나흘이라면.”

동경의 현사.

히사기의 머리가 바쁘게 회전한다.

그랑펠식 화법에 숨겨진 말뜻을 찾아낸다.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습니다.”

“가능성? 뭔데? 뜸 들이지 말고!”

“어쩌면 총대장님께선 이 순간, 현실에 계실지도 모릅니다.”

“뭐, 뭐라고?!”

벨리에의 녹색 동공마저 휘둥그레진 순간이었다.

파지직─!

문득, 허공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마법사인 벨리에.

그리고 떨어져 있던 윌리엄 형제들이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저건 평범한 포탈이 아니다.

차원과 차원을 잇는.

그러니까 현실에서 발현된 기이의 포탈이었다.

이윽고, 포탈에서 모습을 드러낸 형체.

그 형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 작았다.

아니, 하찮았다.

“……저건?”

웅장한 연출에 어울리지 않는.

웬 작디작은 햇병아리였으니까.

허나, 그 음성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괄목하라, 인간들이여.”

“……뭐야? 병아리지, 저거?”

“빙룡.”

“그래, 누가 봐도 빙아리……. 가 아니라, 뭐? 빙룡?!”

그 내용도 마찬가지였다.

파닥파닥.

앙증맞은 날갯짓.

“이 몸, 프로즈낙스 님께서 현실에서 우리들의 위대한 흑암룡, 그대들의 성전 연합군 총대장. 그분께서 내리신 명령을 가지고 돌아왔단 말씀이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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