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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05화 (405/489)

◈ 405화. 세상을 뒤집었군

전황의 서고.

황제는 선대들의 계시를 빠짐없이 읽었다.

말 그대로 목숨과 맞바꾼 예언이었거늘.

더는 공포가 느껴지지 않았다.

……경악이라면 모를까.

──────

파멸이 도래했을 때, 검은 동공을 가진 드래곤들이 대륙을 불태우리라. 무자비한 살의가 만물을 짓밟을 것이나 이는 전조에 불과하리라.

──────

쿠구궁.

황궁을 뒤흔드는 진동.

‘이 계시 또한 실현되어 가고 있다.’

마도구를 통해 내다본 안토니움 북부.

그곳엔 계시처럼 드래곤이 있었다.

흑암룡의 이름을 울부짖으며 아르카나 대륙에 폭우를 몰고 오던 때와는 달랐다. 동공이 칠흑처럼 검었다. 흑암룡의 이름 대신 살의가 담긴 드래곤 피어를 내질렀다.

황제가 읊조렸다.

“진정 파멸이 시작된 것이라면…….”

계시의 클라우디가 정말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그를 뜻하는 것인가? 이 순간, 황제는 흔들리고 있었다. 머릿속에 클라우디의 탕아, 그가 건네온 말이 쉽게 떠나가지 않았다.

-“세릭로즈여,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 진실을 부정하지 마라.”

황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흔들리지 않기 위한 결단이다.’

나는 전황의 서고에 묻겠다.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당신을 의심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전황의 서고, 질의응답의 과정은 숙지하고 있다.

황가, 세릭로즈를 상징하는 장미.

아직 꽃이 피어나지 않아 가시밖에 존재하지 않는 장미넝쿨에 찔려 피를 흘리고, 장미넝쿨의 가시가 세릭로즈의 피로 젖으면 계약은 성립된다.

“…….”

저벅저벅.

황제가 서고를 지나쳐 장미넝쿨에 다가가던 순간이었다.

찬란한 빛이 전황의 서고를 관통했다.

흠칫할 수밖에 없는 광량이었다.

“……!”

황궁의 지하였다.

어떠한 마법도 속임수도 유효하지 않을진저.

그러나 황제는 순간.

머리가 맑아지는 듯했다.

며칠간 식음을 전폐했던 육체에 활력이 돌았다.

더 나아가 쇠약해졌던 마음까지도 치유되는 듯했다.

“……대체?”

고고하게.

전황의 서고를 가로지른 은빛 섬광 덕분이었다.

허나,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황제의 동공이 휘둥그레진다.

마찬가지로 은빛 섬광에 뒤덮였던 서고.

선왕들의 계시가 적힌 양피지.

스스스.

양피지 위에 글자들이 멋대로 춤을 추고 있었다.

그 배열을 바꾸어 가며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황제는 경악했다.

선대들이, 아버지께서 목숨과 맞바꾸어 내다본 제국의 미래가……!!

“멈춰라, 멈추란 말이ㄷ……?!”

그런데, 이상했다.

난잡하게 뒤섞이고 있는 게 아니다.

황제가 천천히 입을 연다.

“계시가……?”

그 내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말 그대로.

‘반전’된 것처럼.

──────

치밀하게 계획된 악에 물들었을지라도 드래곤은 굴복하지 않으리라. 그들은 아르카나 대륙. 만물의 왕으로서. 위기에 빠진 대륙을 위해 기꺼이 자신들의 영생을 바쳐 아르카나 대륙의 편에 서리라.

──────

아니.

비단 드래곤에 관한 계시뿐만이 아니었다.

아르카나 대륙과 제국의 파멸.

즉 클라우디가 몰고 올 멸망과 관련된 내용이 모조리 수정되어 있었다. 황제의 떨리는 입술에서 그보다 위태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렇다. ‘한없이 깊은 어둠’은 틀림없이 아르카나 대륙을 파멸로 치닫게 하리라. 허나, 그 행보를 비난할 수 있는 이는 없으리라. 어둠은 그저 받은 것을 되돌려줄 뿐이니. 그렇기에 감사히 여겨라…….”

생각지도 못한 내용이 이어진다.

“그 어둠을 인도하는 ‘한 줄기 빛’에게…….”

그 말뜻을 깨닫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없이 깊은 어둠 속 한 줄기 빛이 아니었다.”

한없이 깊은 어둠.

그리고 한 줄기 빛.

그건 서로 다른 존재를 칭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머릿속에 스쳐 가는 이름이 있었다.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그리고 또 하나의 이름.

“……이호열.”

아르카나 대륙의 이름, 그리고 완전히 다른 모험가들의 세계에서 통하는 이명(異名)이라고만 생각했거늘. 그가 내뱉었던 말이 뇌리에 스쳐 간다.

-“그 또한 나다.”

“……!”

황제의 눈에 비로소 이채가 어렸다.

그는 애초에 무엇 하나 숨기지 않았다.

이호열과 그랑펠.

둘 다 자신이라고 은연중에 인정하지 않았던가?

그랬다.

모든 건 오롯이 그를 신뢰하지 못한 나의 잘못이다.

휙─

황제가 그대로 뒤를 돌았다.

『전황의 서고』에게 더는 질문을 던질 이유가 없었다.

깨닫게 되었으니까.

그래, 설령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그가 제국을, 아르카나 대륙을 파멸로 몰고 갈 계시 속의 클라우디라고 할지라도.

뒤바뀐 계시가 미래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에겐 한 줄기 빛이 있다.’

그 어둠을 올바른 길로 인도할 존재를.

그렇다면 확인할 건 전황의 서고가 아닌.

봉쇄된 안토니움의 밖에 있었다.

‘분명, 드래곤에게도 변화가 생겼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들려오지 않는 드래곤 피어.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상황을 짐작하게 했거늘.

황제는 걸음을 서둘렀다.

쓸데없는 고민에 시간을 낭비한 만큼.

‘서둘러 안토니움의 봉쇄령을 해제해야 한다.’

바쁘게 움직여야만 했다.

저벅저벅…….

그러나 이내, 황제의 걸음은 멈추고 말았다.

“애송이 세릭로즈여.”

전황의 서고.

그 입구를 막아서 있는 건 은발의 사내.

길게 흘러내린 은발 사이로 보이는 건 피폐한 눈매였다.

황제의 입이 열린다.

“비켜주겠나, 프라이드.”

프라이드 클라우디.

클라우디의 탕아는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었다.

황명에도 프라이드는 꼼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꼬리를 올리며 한 발짝, 황제에게 다가갔다.

“내빼려고? 그래서는 다짐과 다르지 않나?”

“다짐이라니, 그게 무슨…….”

“너는 이곳에서 목숨을 바쳐야만 한다, 애송이.”

“……!”

한 걸음.

프라이드가 다가오는 만큼 황제는 뒷걸음질 쳤다.

“내가 그렇게 정했으니까.”

그가 뿜어대는 살기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노골적이었기에. 황제는 직감했다. 그런가, 애초에 나의 목숨을 노린 것이었나. 자신이 가진 수단과 방법을 떠올렸다.

‘이런.’

전황의 서고에서 갇혀 독 안에 든 쥐가 된 꼴.

평소 같았으면 곁에 대동했을 황궁 마법사, 내쉬 윌리엄은 자신의 명으로 안토니움 밖으로 내쫓아 버린 상황이었다. 결론이 나왔다. 황제는 쓰디쓴 웃음을 삼켰다.

‘……미련한 황제의 최후가 바로 지금이었나.’

나는 프라이드, 저 사내 앞에서 도망칠 수 없다.

허리춤의 검을 빼 든다고 한들, 자신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나의 검은 고작 허리춤에 걸린 쇳덩어리 따위가 아니다.

하르콘, 그대였으니까.

‘우리가 재회할 날이 머지않았다고 여겼거늘.’

진심으로 유감이군, 하르콘.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

뒷걸음질을 치던 황제의 눈에 들어온 건.

서고의 계시들이었다.

프라이드, 녀석은 이미 계시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 전, 그 계시가 바뀌었다.’

전황의 서고를 관통한 한 줄기 빛과 함께.

황제는 결단했다.

‘놈이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비루한 마력으로 할 수 있는 것.

그건 뒤 바뀐 계시를 녀석에게서 감추는 것.

황제가 마력을 끌어올려 화염을 내던졌다.

“내게서 물러서라.”

고의적으로 조준을 흩트려 불길을 서고로 퍼트렸다.

화르륵!

프라이드가 기괴하게 웃었다.

“손이 떨렸나? 두려움에 떨고 있구나, 세릭로즈.”

“그래. 그런가 보군.”

화르르륵!

뒤바뀐 계시들이 불에 타 사라진다.

프라이드, 녀석이 영영 알아차릴 수 없도록.

황제가 흡족함을 숨기며 뒷걸음질 친 순간이었다.

푹─

피부가 찌릿했다.

“……!”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장미넝쿨이 피부에 와 닿았다.

넝쿨의 가시가 피부를 뚫고 그 피를 머금고 있었다.

프라이드의 걸음은 그제야 멈췄다.

녀석이 기괴한 웃음을 뱉어낸다.

그러고는 윽박지른다.

“좋아. 계약은 성립되었다! 이제 질문을 던져라! 무엇이든 상관없다. 말하지 않았느냐? 진실은 바뀌지 않는다. 너는 그저 그 진실을 확인하고 참혹한 기분을 느끼며 죽어가는 게 고작이지!”

전황의 서고.

성립된 계약은 무를 수 없다.

누구보다 황제, 스스로 알고 있었다.

‘질문, 질문이라.’

질문을 던지나 던지지 않나.

장미넝쿨이 피를 머금은 시점에서 나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겠지.

마치 아버지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허나, 더는 의심할 게 없군.’

계시 속의 클라우디가 그랑펠인가?

의문은 해결된 지 오래였다.

설령 아르카나 대륙을 파멸로 이끌 한없이 깊은 어둠이.

그랑펠이 맞다고 할지라도.

나는 우려하지 않겠다.

‘당신의 곁엔 한 줄기 빛이 있으니.’

이호열.

그가 존재하는 이상.

그랑펠, 당신이 아르카나 대륙과 제국을.

파멸로 몰고 갈 일은 없을 테니까.

그 믿음에 확인은 필요치 않았다.

그렇기에 황제는 생각했다.

‘……다만, 한 가지.’

아직 남은 의문이 있었다.

삶에 더는 미련이 없어서일까.

지극히 사소한 궁금증이 떠올랐다.

‘그래서는 뵐 면목이 없을 텐데.’

이런 질문을 던질 생각을 하다니. 선대 황제들께서 전황의 서고는 그렇게 사용하라고 물려준 게 아니라고 호통을 치셔도 아마 할 말이 없겠지.

또한.

‘나를 불경하다고 여겨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황제는 결심했다.

프라이드, 녀석이 엿들을 수 없게.

내면으로 전황의 서고에 질문을 던졌다.

‘전황의 서고여, 묻겠다.’

한없이 깊은 어둠.

그리고 한 줄기 빛.

그랑펠과 이호열.

‘그 둘에게는 어떠한 운명이 있는 것인가?’

서로 다른 존재라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든 의문.

어찌하여 하나의 육체에 두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아르카나 대륙과 모험가들의 세계였다.

‘어떠한 운명의 흐름이 그 둘을 맞닿게 한 것인가?’

이윽고 전황의 서고가 질문에 답을 내놓았다.

“……!”

당연하게도 그 답은 황제의 내면으로만 전해졌다.

웃음을 그친 프라이드가 황제의 얼굴을 살피곤 입을 열었다.

“웃음이 나오는 모양이구나, 어리석은 세릭로즈.”

뭐, 어떤 질문을 던졌는가는 중요치 않았다.

애초에 자신의 목적은 저 개화 직전의 장미넝쿨에 양분을 공급하는 것이었으니까. 애송이 세릭로즈의 피가 양분이 되었으니 만족이었다.

그러나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것도 즐거운 미소를.”

개화 직전.

마지막 양분.

최후의 최후까지 흡수하겠다는 것인가?

선황들과 다르게 장미넝쿨은 황제를 더욱더 세게 억압했다. 황제의 육체가 뒤엉킨 넝쿨 속으로 점차 파묻히기 시작했다. 끔찍이도 고통스러울 터.

그럼에도.

황제의 입꼬리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황제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런가.”

이호열과 그랑펠.

그랬던 겁니까.

두 분 사이엔 그러한 운명이 있던 거로군요.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질풍노도의 운명이.

황제가 웃으며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과연, 철저히 숨기실 만하셨습니다.”

*

툭.

라이언 하트 기사단장, 하르콘.

“이런.”

하르콘은 떨어진 가죽끈을 매만졌다.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거늘.

허리춤에 장비를 고정하는 가죽끈이 끊어질 줄이야.

“바쁜 와중에 날벼락이군.”

드디어 아르카나 대륙을 밟게 된다.

안토니움으로 귀환한다.

폐하를 뵙게 된다.

문득, 창밖에 시야가 닿았다.

하르콘은 자신과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 주둔했던 프로스트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아르카나로 넘어가게 된다면……. 이 평화로운 프로스트를 다시 찾게 될 일은 아마도 없겠지.

하르콘이 복잡한 심경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성전이 끝나고, 승전보를 가지고 돌아오겠다.”

이로써 준비는 끝났다.

남은 건 총대장, 호열 경의 승인을 받는 것뿐.

하르콘은 포탈을 통해 유스라 왕국으로 향했다.

지금 이 시간이라면 호열은 유스라 왕국 집무실에 있을 터.

걸음을 재촉하던 하르콘이 작게 웃었다.

“상당히 놀라실지도 모르겠군.”

철컥거리는 두 다리.

다리를 잃은 자신을 보면 폐하께서는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그 부상이 드래곤과 맞서다가 얻게 된 훈장이라고 한다면. 착용한 의족이 드워프의 손재주로 세공된 의족이라고 한다면?

“뭐, 다행인가.”

하르콘은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오랜만의 재회라고 한들, 어색할 새는 없으리라.

서로의 이야깃거리가 마르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이내, 도달한 호열의 집무실.

똑똑─

하르콘이 문을 두드리자 대답이 들려온다.

“들어와도 좋네, 하르콘.”

언제나와 같이 차분한 목소리가 들뜬 마음을 차분케 한다.

하르콘은 숨을 고르고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마주했다.

“……어?”

집무실 책상 위.

호열의 앞에서 재롱을 피우고 있는.

웬 작디작은 샛노란 털복숭이와.

“총대장님, 그건……?”

호열의 대답이 들려오기 전.

샛노란 솜털.

병아리가 대신 부리를 열었다.

삐약─

소리가 아니었다.

앙증맞은 덩치.

그에 어울리지 않는 엄포가 떨어졌다.

“건방지구나, 인간.”

“……?”

“위대한 빙룡 앞에 머리를 조아려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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