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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03화 (403/489)

◈ 403화. 등가교환 (2)

[첫 세계수의 축복].

그 효과는 어마어마해서 무려 [『절대영도』] 속에서도 추위에 무뎌지게 해준다. 하지만 이번엔 오한이 아니라 시각적 자극도 상당해서 말이야.

내 눈이 하늘에 뜬 마안도 아니고, 광활한 안토니움의 풍경이 한눈에 보인 건 아니었다. 극도로 예민해진 악마 사냥꾼의 감각.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거든.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안토니움 북쪽.

아득히 떨어진 곳에서 느껴지는 악마의 기운.

심지어 어딘가 모르게 익숙했다.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

내쉬와 에밀리오.

두 사람에게 그랑펠식으로 내뱉은 뒤.

곧장 포탈을 발현했다.

그리고 마주했다.

우중충한 하늘.

쏟아져 내리는 폭설.

내가 익숙하다고 느낀 기척의 주인.

빙룡, 프로즈낙스를.

“프로즈낙스.”

세계수의 혈통.

모든 드래곤, 엘프와 형제라고 할 수 있는 나였다. 하지만 유낙서스 때만큼 충격이 깊군. 그야 프로즈낙스, 녀석과는 나름대로 미운 정이 들었던 나였으니까.

최소 수천 살.

하지만 드래곤들 사이에선 어린, 이제 막 해츨링 티를 벗은 프로즈낙스였다고 했던가? 그래서인가, 자연스러운 반말이 튀어나온다.

“슬피 울고 있구나.”

악룡에게 건네는 말치곤 온화한 말이 이어진다.

“그러나 우려할 것 없다.”

정작 걱정이 앞서는 건 프로즈낙스가 아니라 프로즈낙스에게 달려드는 우리 성전 연합군이었다. 남태민, 히사기, 레오니를 포함해서 기껏해야 스무 명쯤 되는 것 같은데…….

드래곤은 만물의 왕이다.

동시에 기이의 존재다.

기이가 아니라면 감히 맞설 수 없다는 뜻.

더욱이 악마화된 몬스터들이 더욱 강해지는 걸 생각하면……. 프로즈낙스가 유낙서스처럼 자비를 베풀 정도로 정신력이 강하지 않다는 걸 고려하면…….

이윽고, 녹빛 머리칼을 향하는 나의 시야.

‘설령 벨리에가 합류했다고 해도 역부족이다.’

찰나의 순간, 최선의 방법을 떠올려본다.

프로즈낙스는 [천적관계]가 발동된 나로서도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다. 스킬,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발동. 전성기의 그랑펠의 능력을 빌려 와야만 얼추 맞설 수 있겠지.

다만.

‘사냥하는 게 정말 최선이겠냐, 호열아.’

만물의 왕답게.

드래곤이 막대한 경험치와 전리품을 준다는 걸.

유낙서스를 처치한 덕분에 알고 있는 나였다.

그러나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50레벨, 한계치까지 단번에 상승한 레벨도, 드래곤 하트도, 드래곤 스킨으로 만든 새로운 장비에도 기쁨을 느낄 순 없었다.

그것이 그랑펠의 청렴결백의 영향인지.

세계수 축복 아래 형제의 우애 때문인지.

전부 아니라면 이호열의 찝찝함 때문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고 있다.

‘모든 일엔 타당한 이유가 있다.’

그러니까 나는 벨리에에게 다가갔다. 다른 누구도 아닌 마르셀로가 벨리에의 아르카나 대륙 진입을 허가한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을 터.

그 이유는 뻔히 짐작이 갔다.

“묻겠다, 벨리에 유시아 선임 마법사.”

“……!”

“악과를 정화하는 원리와 그 과정 전부를.”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내가 시킨 일이었거든.

‘시킨 사람이 모르면 직무유기 아니겠어?’

나의 요청에 벨리에는 수달 전부터 악과를 정화하기 위해 계속 연구를 해오고 있었으니까. 한데 어째서인가, 벨리에는 정곡을 찔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호열 수석님…….”

벨리에와 마주하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거대 연합.

저들이 프로즈낙스를 상대로 버티고 있을 수 있는 이유를.

쩌저적─

벨리에의 살갗이 천천히 얼어가고 있었다.

얄팍한 치유마법에 관한 지식이 머릿속에 흘러간다.

“상위 치유마법, 『등가교환의 증명』이군.”

“……역시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대상이 입는 피해를 『등가교환의 증명』의 발현자가 오롯이 감당하는 마법. 절대적인 피해 경감의 효과는 상당하나 그만큼 마력의 소비 효율은 뛰어나지 않다.”

그 탓에 마력 탈진에 빠졌군.

벨리에는 가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안부라도 묻고 싶은데, 주둥이는 핵심을 묻는다.

“정화 과정에서 마력이 요구되는 건 아니겠군.”

“……후후, 예리하셔라.”

“무엇이 필요한 것인가, 벨리에.”

이쯤되면 집요하다고 느낄 수 있겠지.

하지만 집요할 수밖에 없다.

아르카나 대륙에서 치유마법이란 만능이 아니었으니까.

화염, 전격, 물, 변형…….

지금의 나는 마탑에 존재하는 대다수의 마법을.

상위 마법까지 숙지한 상태였다.

『타고난 마법적 재능은 웬만한 마법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 흉내 낼 수 있을 정도였다. 더 나아가 그에 뒤지지 않는 육체의 잠재력까지.』

그래, 낯 뜨거울 정도의 재능 덕분.

마법 서적을 읽는 것만으로도 숙지했다고 수 있다고 할 정도로.

자유롭게 써먹을 수 있는 나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내가 치유마법은 고작 중위 마법 수준까지밖에 익히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치유마법은 상당히 정직한 마법이었으니까.

‘무언가를 회복시키기 위해선 대가가 필요하다.’

대다수의 경우엔 발현자의 마력이 그 대가였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벨리에에게 질문을 던진 이유였다. 마력 탈진 상태에서 대체 무엇을 등가교환의 제물로 바쳐 악과를 정화하겠단 거냐, 벨리에?

“우선, 『치유마법의 극의』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극의라니, 이름부터 거창하네.

하지만 그 원리는 간단했다.

발현자의 육체가 치유마법 등가교환의 제물이 된다.

즉, 목숨을 바쳐 반영구적인 치유마법을 발현하는 것이다.

벨리에는 웃으며 말했다.

“레라스 틸, 그는 치유마법의 극의를 발현한 후 빛나는 구체로 변했습니다. 구체로 변한 그는 지금도 마탑 어딘가에 고이 보관되고 있다고 하던데요……. 그에 비하면 제 최후는 조금 더 낫지 않을까요? 적어도 바깥 구경은 실컷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정말로 목숨을 걸 생각이었군, 벨리에.

“그대의 각오를 알겠다.”

새삼스럽게 놀랍지는 않다.

벨리에가 목숨을 걸겠다고 다짐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잖아?

왜, 마르셀로의 시한부 저주를 해결하기 위해 아르카나 대륙으로 진입했던 때를 떠올려본다. 벨리에는 그런 나를 따라나서겠다고 말했었지.

‘그때 아르카나 대륙은 멸망의 땅이었으니까.’

과언이 아니라 나도 한번 죽어서 돌아왔었잖냐?

그런 의미에서 하는 말이었다.

왜, 죽는 것도 죽어본 놈이 더 잘 죽을 수 있는 법.

“허나, 불허하겠다.”

이젠 공동 수석도 아니고, 유일한 수석이 되어버린 나였다. 원로 마법사도 없겠다, 탑주 마르셀로 밑으로는 전부 내 말을 따라야 한다는 게 마탑의 엄격한 규율.

벨리에가 당황한 기색으로 물어온다.

“불허하신다니요……? 제 안위를 걱정하시는 거라면 우려하실 것 없습니다.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한 순간부터 이미 각오한 바입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할까?

나한테는 [최후의 모험가]라는 아주 사기적인 효과를 가진 칭호가 있다.

아르카나 대륙에서는 죽어도 죽지 않는, 부활의 권능이라 불렸던 효과지.

그래서 그 치유마법의 극의라는 걸 발현한다고 해도 현실 시간으로 24시간이면 다시 아르카나 대륙에 발을 들일 수 있다.

그랑펠에게 있어서 시간은 금이라고 해도 목숨보다 중요하진 않거든.

물론, 사망 페널티인 경험치 하락은 크긴 하다만, 그걸 고려해도 목숨보다 중요한 건 없단 뜻이다.

‘그걸 참 친절하게도 설명하겠다, 이 주둥이가.’

하지만 나는 그랑펠의 화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

짐작대로.

주둥이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간결하기 짝이 없었다.

“프로즈낙스, 그다음은 누구인가.”

“……네?”

“벨리에, 그대 다음은 누구인가.”

어떻게 들으면 더없이 차갑겠군.

“숙련 마법사, 클레 오디아인가.”

“……!!”

나의 말에 벨리에의 녹빛 동공에 파문이 인다.

그래, 정신이 없었겠지.

등가교환, 목숨을 바친 치유마법의 극의로 악과를 삼킨 프로즈낙스를 정화한다고 한들. 프로즈낙스는 두 번째 악룡에 불과했다.

악룡이 날뛸 때마다 다른 누군가가 목숨을 바칠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클레의 얼굴을 떠올리는 걸까, 벨리에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저는!”

벨리에가 힘겹게 말을 이어보려고 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여유를 주지 않는군.

프로즈낙스가 더욱 거세게 날뛰기 시작한다.

나는 여명의 재킷을 여미며 입을 열었다.

“내가 하겠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대는 각오를 내비친 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다시금 물었다.

“치유마법의 극의. 그 발현 과정을 설명해 주겠나, 벨리에.”

“아뇨! 설령 수석님의 명이라고 해도 저는 따를 수 없습니다. 이호열 수석님께서는 아르카나 대륙을 위해서도, 모험가들의 세계를 위해서도 하셔야 할 일이……!”

……이래서 처음부터 친절하게 설명하는 게 낫다는 건데.

몰락한 위대한 가문의 가주라고 해도.

양반 고집이 어디 가지 않는다는 걸까?

나는 이번에도 그랑펠식 화법으로 대답했다.

“그대의 직감을 의심하지 마라, 벨리에.”

“……제 직감을?”

“그대는 이미 목격하지 않았는가.”

그래, 아르카나 대륙에서 살아 돌아온 나를.

물론, 멀쩡히는 아니었지.

육체는 멀쩡했을지 몰라도.

‘정장이 찢어지고 셔츠가 피에 물들고 꼴이 말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

기억해 낸 걸까.

벨리에가 흠칫한다.

그러고는 진지한 얼굴로 묻는다.

“……역시, 수석님께선 부활의 권능을?”

나는 답하지 않았다.

‘비슷하긴 한데, 엄밀히 따지면 부활이 아니거든.’

애초에 아르카나인들이 사망 페널티를 멋대로 부활의 권능이라고 착각한 것뿐이니까. 그러니까 나는 이번에도 정직하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의 시차.

보자, 현실의 24시간은 아르카나 대륙의 나흘이었으니까.

계산을 마치고 덧붙였다.

“나흘 뒤에 보도록 하지.”

*

-“그대는 이미 목격하지 않았는가.”

머릿속에 떠오른 것.

그건 피로 젖었던 호열의 의복이었다.

벨리에는 전문가였다.

출혈량만 봐도 부상의 정도를 파악할 수 있다는 뜻이다. 더욱이 호열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사유를 불문하고, 타인의 피를 흠뻑 뒤집어쓰실 분이 아니셨다.

‘……정말로 치명상을 입으셨던 거야.’

그러나 정작 현실로 복귀했던 호열의 육체는 멀쩡했었다. 벨리에는 그걸 기적으로 여겼다. 설명할 수도, 두 번 다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의 말이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흘 뒤라니?”

……대체 무슨 뜻?

마력 탈진의 여파인가.

그게 아니면, 호열이 남긴 말이 이해하기 어려워서인가.

벨리에는 나무에 몸을 기댄 채.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당신에게서 ‘온기’가 사라집니다.]

점멸하는 메시지.

아마도 벨리에 선임이 한계에 도달하신 것이리라.

히사기는 냉정하게 상황을 바라봤다.

‘그런데, 우린 제대로 된 데미지를 주지 못했다.’

프로즈낙스, 유낙서스와는 달랐다.

무엇보다 녀석에겐 온전한 날개가 있었다.

그 속도는 제아무리 [광폭화]를 발동한 남태민이라고 해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억지다.’

그럼에도 남태민은 기어코 프로즈낙스의 꼬리에 올라탔다.

대검을 쑤셔 박고는 완력으로 프로즈낙스에게 매달려 버텨냈다.

그러나 말했다시피.

‘억지에 불과하다.’

[걷잡을 수 한기가 엄습합니다.]

쩌저저적─

“후욱.”

내뱉는 숨결마저 얼어붙는다.

떨어져있는 자신만 하더라도 녀석의 냉기를 버틸 수 없거늘. 남태민의 상태는? 야성의 효과가 아니라면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히사기는 물러서지 않았다.

“벽에 부딪히는 건…….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벽에 부딪혀 좌절하는 것?

한두 번이 아니었다.

더 이상 좌절에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다.

벽 앞에 무릎 꿇고 싶지 않았다.

격차를 인정한다면 이제부터는 도태였다.

“우리에겐 마계라는……. 목표가 있으니까.”

꾸욱.

창을 쥐었다.

프로즈낙스를 향해 겨눴다.

마창기예, 투창.

히사기가 이를 악물고,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던 순간이었다.

“확실히 성장했군.”

“……!”

총대장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호열의 목소리가 아니라 총대장의 목소리라 표현한 이유는 간단했다. 호열은 이 순간, 총대장의 시선으로 전황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하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교육이다.”

“……!”

“명심하도록. 나의 지도는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성전 연합군이 비로소 전력을 갖추게 되었다는 것.

*

치유마법의 극의를 발현하는 데에.

마력은 필요하지 않다고 했겠다.

그렇다면 마력이 탈진될 때까지.

나는 프로즈낙스와 맞붙어볼 생각이었다.

‘이제부턴 주어진 모든 기회를 살려야 한다.’

어디보자.

『용의 신전』에서 자웅을 겨룬 뒤로 시간이 꽤나 흘렀지?

미리 경고하는데, 그때와는 다를 거다.

나, 이호열.

이래 봬도 꽤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거든.

검기, 마법, 기이…….

무엇하나도 그때처럼 가볍지 않을 거란 뜻이다.

그보다 분위기가 썰렁한 게 이게 뭐냐?

“지도에 앞서 적절한 환경부터 조성하도록 하지.”

나는 손가락을 입에다 가져다 댔다.

“먼저 정숙하거라, 해츨링.”

“크롸ㄹ……!”

뚝─

그러자 끊어진 드래곤 피어.

이내, 쥐 죽은 듯 사방이 고요해졌다.

이번에도 덧붙였다.

“그대를 위한 훈육도 예정되어 있으니.”

“……?”

“더는 슬퍼할 것 없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오해를 살 수 있는 화법으로.

“햇병아리 프로즈낙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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