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1화. 합당한 이유
성전 연합군.
거대 연합을 비롯한 플레이어는 제국의 수도, 안토니움으로 향했다. 이유야 간단했다. 현시점에서 멀쩡한 도시라고 할 수 있는 건 안토니움이 유일했으니까.
남태민이 쓰읍 입맛을 다셨다.
“4가문의 영지나 아직 드러나지 않은 세력들의 도시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걔네가 우리한테 호의적일지 알 수 없잖아? 뭣보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수준이 아니다.
다짜고짜 목에 칼을 들이댈 수도 있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할 때와는 무게감이 다르다는 것이다.
히사기가 덧붙였다.
“귀찮도록 들었던 부활의 권능이 그리워지는군요.”
아르카나 대륙 전기 시절.
NPC들은 플레이어, 모험가를 대할 때마다 부활의 권능을 언급했다.
그땐 그 소중함을 몰라 귀에 딱지가 앉을 것 같았는데. 그들과 같은 처지가 되어서야 이해가 된다. 부활은 정말로 사기적인 권능이었다.
“올, 성벽은 튼튼해 보이네.”
쭈욱.
레오니가 한껏 고개를 들어 안토니움의 성벽을 올려다본다.
호열의 말로는 안토니움도 적잖은 풍파를 겪었다고 했는데…….
히사기가 평가한다.
“그래도 제국이라는 걸까요. 저력이 있군요.”
“다른 것보다 하르콘 스승님이 기뻐하시겠는데?”
“언제쯤 오신다고 했지?”
“시차를 고려하면 며칠은 더 걸리실 겁니다.”
라이언 하트 기사단장, 하르콘.
하르콘은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기 이전.
현실에서 막바지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성전 연합군에 소속됐지만, 어디까지나 제국과 황제의 검인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었다.
남태민이 섭섭한 투로 말했다.
“앞으론 우리 스승님 얼굴 자주 보기 힘들겠지?”
아르카나 대륙, 풍경을 보고 알게 되었다.
균열에 수많은 피해를 입은 현실이라고 해도 아르카나 대륙이 입은 피해와는 비교할 수 없이 처지가 좋다는 걸.
진정으로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 필요한 곳은 당연하게도 아르카나 대륙일 터.
아르카나 대륙을 밟은 하르콘이 다시금 현실로 되돌아오는 일은 없으리라.
레오니가 퉁명스레 답했다.
“뭘, 평생 못 보는 사람처럼 유난이야.”
“하긴 포탈이 열렸으니까.”
“평소에 잘하시지 그랬습니까, 태민 군.”
“네가 남자의 마음을 아냐?”
“저도 남자입니다만.”
“……말을 말자, 말을.”
언제나처럼.
티격태격 거리며 안토니움 북문에 가까워지던 때였다.
거대 연합 소속.
정찰을 수행하던 플레이어.
그가 믿지 못할 소식이 전해왔다.
“뭐? 북문이 폐쇄돼?”
“넵……! 북문만이 아닙니다. 안토니움 인근 마을에 머무르고 있는 상인의 말에 따르면 남문, 서문, 동문, 아주 그냥 안토니움이 완전히 봉쇄되었다고 합니다!”
“그게 뭔 미친 소리야?!”
거대 연합은 당황스러운 상황에도 빠르게 대처했다.
텔레파시, 아이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
클라우디령에 있는 아군에게 안토니움 폐쇄 소식을 전했다.
“당장 현실로 돌아가 마탑에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그렇게 안토니움의 소식은 현실로 전해졌다.
하지만 아르카나 대륙의 시간은 현실보다 4배나 빠르다. 시차를 고려하면, 더욱이 현실에서 호열이 떠맡고 있는 짐의 무게를 떠올리면…….
남태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먼저 뭐라도 단서를 잡아놔야 할 것 같은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같은 성전 연합군 소속, 드워프들과의 협력을 통해 안토니움의 상황을 파악해 본다?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히사기가 고개를 젓는다.
“대륙에 신경 쓸 게 한두 개가 아니니까요.”
이미 경험하지 않았던가?
마계의 존재들, 그들의 이질적이며 압도적인 파괴력을.
디스커스는 시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간과하지 말아야 했다.
마왕 쟁탈전, 그것도 십좌 쟁탈전은 이미 시작한 상태라는 걸.
[베히모스의 아가리]에서 시선을 뗄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베히모스의 아가리]를 지키는 아이언 캐슬 호를 안토니움으로 호출했다가 그 공백에 베히모스의 아가리에서 악마가 역류하기라도 한다면?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야.”
남태민이 입술을 깨문다.
“그냥 별일이 아니기를 바라는 게 최선인가.”
하지만 손을 놓고 있을 순 없다.
“일단, 다들 흩어져서 정보부터 수집해 보자.”
“어쩌면 단순한 퀘스트일지도 모릅니다.”
“들었지? 뭐라도 발견하면 연락해라.”
안토니움을 중심으로 호열이 반전시킨 마을들이 재건되어 있었다. 그 마을엔 각기 다른 이유로 안토니움에서 빠져나왔다가 복귀하지 못한 이들이 존재할 터.
“뭐라도 나오기를 바라야지, 뭐.”
병력을 분산시키는 게 부담스럽긴 했다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시야에 든든한 원군이 비치지 않고 있는가?
퀴른베르크 기계탑 말이다.
“저 기계탑이 악크샨의 비밀병기였다니.”
“저기에 들어갔다가 나왔어도 믿기지 않네.”
“……야, 저거 뭐냐?”
레오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협력했지, 호열 씨랑은.”
“저는 듣지 못한 이야기입니다만.”
“내가 너한테 그 얘길 왜 해주냐?”
남태민과 히사기, 두 사람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똥촉 그 자체. 레오니의 직감에 관한 소문은 버서커 길드원들을 통해 거대 연합으로 퍼졌으니까.
“아니, 저것 좀 보라고 새끼들아.”
그러나 이번엔 감이 아니었다.
“뭘 보라는 건데. 또 별것도 아닌 거로…….”
“방금 움직였잖아, 저거! 저 멀리에 있는 거!!”
“……뭐라고?”
끼기기긱─
“!!!”
눈에 보이고, 귀에 들려오고 있었으니까.
북쪽, 먼 곳에서부터 들려왔다.
거대한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가.
“퀴른베르크 기계탑이 움직이고 있다고!”
철커덕─
대지가 진동하고 요동친다.
비유하자면 기계탑이 발을 구르기 시작하는 듯했다.
그 상황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이것도 시차 때문인가? 일이 몇 배는 많이 터지잖아?”
악크샨의 비밀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이 일제히 가동을 시작할 정도.
그만한 적.
즉, 악마가 북쪽에서부터 다가오고 있다는 뜻.
스릉.
거대 연합의 세 길드 마스터는 외쳤다.
“전투 준비!”
“마을 주민들부터 대피시켜.”
“퀴른베르크 기계탑을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거대 연합의 전력은 안토니움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뿔뿔이 흩어진 상태. 동경의 현사, 히사기의 말대로 퀴른베르크 기계탑을 아군으로 활용하고 전투에 임해야 했다.
그때였다.
[부정적인 기운이 요동칩니다.]
눈앞에 메시지가 떠오른 건.
길드 마스터 셋.
그리고 대략 스무 명의 길드원들이 흠칫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이들에게도 낯선 메시지였다.
“일단, 상태이상은 아닙니다!”
아르카나 시스템상에서 메시지는 괜히 떠오르지 않는다. 대격변 이후에는 더더욱. 그러니 낯선 메시지가 출력되었다는 건 그만한 무게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마계의 기운이 악기를 증폭시킵니다.]
“……!”
그쯤에서 몇몇은 알아차렸다.
스오오.
북쪽 하늘에서부터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었으니까.
그래, 지금의 메시지는 프롤로그와 같았다.
쉽게 말하자면.
거물의 출현을 앞두고 출력되는 거창한 연출이었다.
레오니가 삐뚤게 입꼬리를 올렸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새끼길래.”
출현 메시지를 출력하기 전부터.
“쓸데없이 분위기를 처잡는 거냐?”
물론, 그런 삐딱한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래, 적어도 이 자리 세 명의 길드 마스터는 경험자였으니까.
히사기의 뱀눈이 더욱 가늘어진다.
“……이건.”
익숙했다.
구름의 움직임.
하늘에서부터 느껴지는 압박감.
이윽고, 고막을 강타하는 울부짖음까지도.
“크롸롸롸─!”
[타락한 빙룡, 프로즈낙스가 출현합니다.]
타락한 노룡, 유낙서스.
그리고 프로즈낙스와 마주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호열의 말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는 사실을.
“젠장……!”
유낙서스는 설령 악룡으로 타락했을지라도 긍지를 잃지 않았다고 했었던가? 그 말이 옳았다. 그건 내지르는 드래곤 피어에서부터 느낄 수 있었다.
[상태이상, ‘복종’이 발생합니다.]
[만물의 왕에게 당신의 감각이 복종합니다.]
[주의 : 육체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만물의 왕이 당신의 ‘죽음’을 원합니다.]
[생명력 재생이 중단됩니다.]
[마력 재생이 중단됩니다.]…….
“……미친.”
노골적인 살의였다.
이 순간, 하늘에서 드리우는 악룡은 눈에 띄는 모든 걸 죽일 각오로 드래곤 피어를 내지르고 있었다. 그나마 플레이어들은 형편이 좋았다.
남태민이 이를 악물고 시선을 돌렸다.
“빌어먹을……!”
전신 경련도 모자라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한 아르카나인들.
저들을 구해서 도망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봉쇄되어 굳게 닫힌 안토니움의 성벽.
안토니움이 성문을 개방하지 않는 이상.
어디로 도망친다고 한들.
날뛰는 악룡에게서 안전한 지역은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내릴 수 있는 판단은 하나뿐이었다.
“두 번째니까, 처음보다는 발전해야 하지 않겠어?”
프로즈낙스.
저 타락한 빙룡을 사냥하는 것.
히사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차가운 머리를 굴렸다.
‘여기서 총대장님의 도움을 바랄 순 없다.’
아르카나 대륙과 현실의 시차.
안토니움의 소식을 전달했다고 하더라도.
호열에겐 일정이 있으리라.
만약, 곧바로 아르카나 대륙으로 진입하셨다고 하더라도.
‘광활한 아르카나 대륙이다.’
안토니움의 북쪽.
자신들과 비슷한 위치에 있으신 게 아니고서야 프로즈낙스의 출현을 곧바로 파악할 순 없을 터. 히사기의 시선이 퀴른베르크 기계탑을 향한다.
‘어쩌면.’
이것조차도 염두에 두시고.
퀴른베르크 기계탑을 안토니움 인근에 배치해두신 걸까?
그 뜻을 헤아릴 순 없었지만,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철커덕.
퀴른베르크 기계탑 상층 부근.
촤촤촥.
층과 층을 구분하는 틈에서 무수한 은침(銀針)이 돋아났다.
악마 앞에서는 피도 눈물도 순서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인가.
더 나아가서 기계이기 때문에.
상태이상에도, 드래곤 피어에도 움츠러들지 않는다는 건가.
슈슈슈슉.
곧바로 무수한 은침을 하강하는 프로즈낙스를 향해 쏘아댔으니까. 안토니움의 북부에 배치된 퀴른베르크 기계탑의 숫자는 대략 십여 채.
각 기계탑이 쏟아낸 은침의 수는 못해도 그 수천 배가 넘을 터.
그럼에도 프로즈낙스를 저지하는 건 불가능했다.
스와와악─
온전한 드래곤의 날개가 펄럭인다.
냉기가 엄습한다.
쇄도하던 은침이 그대로 동결되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남태민이 헛웃음을 뱉었다.
“봐줘도 엄청나게 봐준 거였잖아, 유낙서스.”
만물의 왕.
아니지.
지금은 악에 타락한 만물의 폭군.
저것이 바로 드래곤의 전력이었다.
남태민은 이를 악물었다.
[광폭화].
야성에 의존한다면 두려움을 떨칠 수 있을 터.
[스킬, ‘광폭화’ 발동에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폭군은 자신 앞에서 날뛰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앞에서 복종하기를.
최후에 얌전히 순응하기만을 바랐다.
“흐읍.”
서서히 엄습하는 극한의 냉기.
순식간에 폐가 얼어붙기 시작한다.
레오니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씹……. 러시아보다……. 더 춥잖아?”
전력을 분산시키지 않았다면 조금이라도 발버둥 칠 수 있었을까?
아니, 차원이 달랐다. 거대 연합의 힐러 플레이어 중 [복종], 그리고 이 정도의 빙결계 상태이상을 치유할 수 있는 플레이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낙담하기엔 일렀다.
“……?”
고오오.
별안간, 거대 연합을 덮은 방대한 마력.
쉴 새 없이 갱신되는 메시지.
[당신에게 정순한 치유의 마나가 깃듭니다.]
[상태이상, ‘복종’이 해제됩니다.]
[상태이상, ‘빙결’이 해제됩니다.]…….
모든 선택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 법.
마탑의 엄격한 규율에도 예외는 없었다.
마티스가 순수한 능력으로, 벤쉬가 황궁 마법사 내쉬와의 혈연으로 아르카나 대륙을 밟았다면, 동반 출탑한 벨리에에게도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
“아무래도 우리 인연이 꽤 깊군요?”
“벨리에 선임님……?”
“감사합니다, 근데 어떻게 여기에 계신 건가요?!”
살랑살랑.
냉풍에 흔들리는 녹빛 머리칼.
벨리에가 온화한 미소를 흘리며 답했다.
“알아냈거든요. 악과(惡果)를 정화하는 방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