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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00화 (400/489)
  • ◈ 400화. 꽃밭의 나비 효과 (2)

    밑바닥 인생에도 긍지는 있다.

    “웃기지 않느냐? 부모에게도 받지 못한 호의를, 방금까지 숨통을 끊겠다고 바짝 추적하던 표적에게 받다니. 그건 정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밑바닥의 왕은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물론,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듣는 스케빈저는 없었다.

    단순히 믿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거 구라죠?”

    “할배 얼굴이 살려줄 정도로 호감상은 아닌데.”

    “눈살이라도 안 찌푸리면 다행이지. 킥킥.”

    버려진 데에는 이유가 있다.

    스케빈저들이 지겹도록 듣는 말 중 하나였다.

    타고날 때부터 크고 작은 장애를 가진 이들부터 화상, 부상으로 인간보다 괴물에 가까운 외모를 갖게 된 이들까지. 시궁창, 밑바닥, 그늘에는 각각의 사연이 있었으니까.

    왕은 웃었다.

    “글쎄. 나도 그런 줄만 알았는데. 아니더구나. 그를 보면서 우리보다도 더한 바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에이, 스케빈저보다 더한 바닥?”

    “죽을 때가 돼서 노망이라도 나셨수?”

    “애초에 고귀한 귀족이었다면서?”

    “후후, 이해한다.”

    “하여튼 그놈의 이해한다는 말만 계속하네.”

    언제부터였을까.

    이해한다.

    그 말을 입에 달고 살게 된 건.

    ‘……아마도 그때부터였겠지.’

    표적, 은발의 사내는 시티델에서 그리 말했다.

    -“내가 너희를 이해하겠다.”

    그것은 버려진 자들의 왕이 받아본 첫 호의였다.

    참으로 웃긴 일이었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인데.

    아르카나 대륙의 모두가 그 사내.

    그 가문의 목숨을 노리고 있던 상황이었다고 했었지.

    ‘나라고 해도 대륙에게 미움받진 않았는데 말이야.’

    그야 같은 처지의 스케빈저들.

    볕 하나 들지 않는 시궁창이라고 한들.

    함께 웃고 떠들 수 있는 동료들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당시 사내에겐 무엇도 없었다.

    -“위대한 가문이라 불렸다고 하던데.”

    -“……그런데 돕는 새끼들이 하나도 없다고?”

    -“시티델에서도 결국, 절뚝거리며 혼자 사라졌잖아.”

    -“하여튼 있는 새끼들이 더하다니까.”

    최고의 자리에서 전부를 잃었음에도.

    오히려.

    밑바닥 인생인 자신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대체 뭐야……?”

    그 사내의 고독한 뒷모습이 아직도 기억 속에서 선했다.

    버려진 자들의 왕은 모여든 이들을 바라봤다. 글쎄, 이 가엾은 녀석들이 직접 마주하지 않은 사내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저마다 상처가 깊은 녀석들이니까.’

    하지만 기억하거라.

    아니, 기억해야만 한다.

    버려진 자들의 왕이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명심해라. 밑바닥에도 긍지는 있다.”

    “……긍지?”

    “누구도 우리에게 베풀지 않는 만큼. 우리에게 은혜를 베푼 이들을, 우리는 절대 배반하지 않아야 한다.”

    사내의 이름을 말했다.

    “그 사내를, 긍지를, 클라우디를 기억하거라.”

    .

    .

    .

    악마가 등장하고 대륙은 뒤집어졌다.

    “기분이 어때?”

    “……으윽.”

    “퉷. 더럽고 축축한 시궁창에 익숙해지라고.”

    밑바닥에는 새로운 스케빈저들이 넘쳐났다. 당연한 일이었다. 황폐화가 된 대륙이었다. 버려진 이들이 향할 곳은 밑바닥밖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새로운 왕은 난세에서 태어나는 법이었다. 새로운 버려진 자들의 왕, 에밀리오는 늘어난 스케빈저를 빠르게 규합했다.

    “새끼야, 뒈질 거면 구석에 처박혀서 뒈ㅈ…….”

    “불필요한 다툼은 그만둬.”

    “그치만, 에밀리오! 이 새끼들, 우리를 비웃던 새끼들이라고. 너는 속도 없는 거냐? 열 받지도 않아? 나만 쓰레기야?”

    에밀리오는 반박하지 않았다.

    울분을 토해내는 사내의 마음이 이해됐으니까.

    그러나 에밀리오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네 마음을 이해해.”

    그러나 그저 입버릇이었다.

    까마득하게 어린 시절.

    버려진 자신을 거둬준 스케빈저의 왕.

    그가 남긴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하지만 자비를 베풀어.”

    그러나 에밀리오가 진정한 자비를 알게 되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래, 뜻하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으니까.

    “위대한 가문…….”

    들려온 소문이 기억 속 단어를 끄집어냈으니까.

    “클라우디가 돌아왔다는데?”

    “클라우디? 듣도 보도 못했는데. 누구 맘대로 위대하단 거야?”

    “……잠깐만, 클라우디라고?”

    처음엔 반신반의했다.

    밑바닥에서 늘어나는 건 타인을 향한 의심뿐이니까.

    그러나.

    “뭐야, 하루아침에 마을이 생겼어?!”

    “저, 저 기계는 또 뭐냐. 악마를 짓밟고 있는데?!”

    “그러니까, 저것도 이것도 클라우디의 짓이라고?”

    클라우디는 증명하고 있었다.

    위대함도.

    베풀었다는 자비도.

    “그때 은발이랑 얼굴이 달라, 에밀리오……!”

    그렇기에 더는 간과할 수 없었다.

    “스케빈저가 클라우디의 자비에 보답하겠습니다.”

    *

    내쉬는 여전히 날을 세우고 있었다.

    “클라우디의 자비에 보답하겠다고?”

    충분히 보일 수 있는 반응이었다.

    에밀리오, 그 이름이 제국에선 꽤나 유명한 모양이었거든.

    내쉬가 입술을 짓이겨 물곤 말을 이었다.

    “스케빈저, 밑바닥의 왕, 에밀리오. 그 존재는 익히 알고 있었다. 하수도에서 세력을 규합하고 있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제국은 관여하지 않았다. 신경 쓸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듣자 하니 밑바닥의 거물인 모양.

    “하지만 그 입을 함부로 놀린다면 나는 더 이상 너를, 스케빈저를 간과할 수 없다. 추잡한 기만에 놀아나는 건 지긋지긋하다.”

    오만에게 속아서 황제와 제국에 폐를 끼쳤다고 생각하는 걸까?

    내쉬는 화를 내고 있었다.

    에밀리오에게 화풀이를 한다기보다는.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해서 내뱉는 느낌이었다.

    ‘나름대로 무섭네.’

    왜, 형만한 아우가 없다는데.

    벤쉬도 화가 나면 저런 느낌일까.

    그러나 에밀리오도 명성 값을 했다.

    그 기가 조금도 죽지 않았다.

    “알고 계십니까? 우린 시궁창 밑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기에. 당신처럼 높으신 황궁 마법사님께선 보지 못하는 표정들을 보고는 합니다.”

    “……뭐?”

    “당신은 볼 수 없던 그놈의 얼굴을 봤단 거죠.”

    그놈이라, 오만을 말하는 거겠지.

    “저는 높으신 황궁 마법사님과 다르게 착각하지 않았습니다. 찬란한 은발 머리칼을 가진 사내가 안토니움에 입성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달려갔지만…….”

    에밀리오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당신이 아니라는 걸. 정확하게는 당신과 같은 클라우디가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는 뜻입니다. 내가 전해 들은 클라우디는 절대 그렇지 않았으니까.”

    다시금 내쉬를 향한다.

    “그러니 내가 황궁 마법사였다면 황제 앞에 그 녀석을 데려가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뭐?”

    “왜요? 찔리는 구석이라도 있습니까? 밑바닥 출신의 말은 들을 가치도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냥 헛소리라 치부하고 무시하시지요.”

    거친 환경에서 살아서 그런가, 확실히 입이 거치네.

    윌리엄 가문, 벤쉬가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왔듯.

    내쉬도 귀한 대접을 받으며 살아왔을 터.

    부르르, 내쉬의 주먹이 떨린다.

    “…….”

    누군가에게, 저렇게 직설적인 말을 듣는 게 익숙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죄책감이 큰 모양일까. 내쉬는 쉽사리 말을 잊지 못했다.

    ‘그렇게 자책할 거 없는데 말이지.’

    악마 사냥꾼도 아니고, 어떻게 악마라는 걸 곧바로 악마라는 걸 간파하겠어? 그러니 관심이 갔다. 에밀리오는 어떻게 오만의 낌새를 알아본 걸까.

    나는 입을 열었다.

    “안토니움의 백성들은 무사한가.”

    일단,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폐쇄된 안토니움.

    황제를 꼭두각시로 부리게 된 시점부터 방해꾼도 없겠다.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데에 더없이 적합한 환경이리라.

    더욱이 제국의 수도였다.

    제국령 대다수의 도시, 마을이 파괴되고 수도 안토니움에 더욱 많은 인구가 모여든 걸 고려하면……. 만약, 인신공양이 일어난다면 걷잡을 수 없는 피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을 터.

    ‘그 제물로 오만은 걷잡을 수 없는 힘을 얻게 될 거다.’

    나의 말에 에밀리오의 낯빛이 진지해졌다.

    “역시, 당신께서는 말씀 그대로시군요.”

    ……그나저나 무슨 말은 들은 건데? 사소한 일화에 거품이 생겨서, 부풀다 못해 전설이 되어가는 걸 몇 번이나 경험한 내가 아니냐.

    ‘……나중에 제대로 묻고, 정정하기로 하자.’

    하지만 지금은 그럴 새가 없다.

    말했다시피 찝찝하기 짝이 없다고.

    에밀리오가 말을 잇는다.

    “아직까지 안토니움의 백성들은 무사합니다. 갑작스러운 봉쇄령에 당황했다는 것만 빼면 안토니움의 분위기는 평소와 다를 바 없습니다.”

    괜찮다는 거군.

    아직까지는.

    하지만 오만은 착실히 제물을 준비 중일지도 모른다.

    나는 기억을 되짚었다.

    ‘제물을 바치는 데엔 재단이 필요해.’

    쥐도 새도 모르게 안토니움에 제사를 위한 재단이 쌓아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위험성을 에밀리오에게 경고했는데, 에밀리오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안토니움에도 안토니움의 지하, 하수도에서도 이상한 낌새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쥐들이 아직 안토니움을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쥐라니…….”

    내쉬의 반응에 에밀리오가 피식 웃었다.

    “황궁이 마법과 마도구로 위험을 예견할 때 스케빈저는 벗으로 삼은 쥐로 미래를 예견하죠. 그 효과는 제가 아직까지 멀쩡히 살아있는 걸로 증명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쉬는 반신반의하는 모양이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그거 나름대로 과학적이네.’

    왜, 대지진이 나기 전에 까마귀들이 울고 쥐가 대피하고 그런 소식을 뉴스로 본 기억이 났거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밀리오는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런, 곧바로 이해해 주실 줄은 몰랐는데.”

    안 그럴 이유가 뭐가 있겠냐?

    밑바닥이라도 할 수 있는 건 다 하면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남아야지 않겠어?

    ‘사실 따지고 보면 나도 밑바닥부터 시작했거든.’

    플레이어 각성 당시 50레벨 언저리에 불과했던 레벨.

    스케빈저들한테는 쥐라도 있었지.

    나는 정말 쥐뿔도 없었던 시절이 있었단 말이다……!

    ‘물론, 덕분에.’

    있는 거, 없는 거.

    전부를 쏟아부어야 하는 상황에 익숙하단 뜻이지.

    그러니까 내게 에밀리오, 스케빈저의 능력을 의심할 이유는 없었다.

    ‘의심할 시간에 움직이기도 바쁘니까.’

    그런 의미에서 한 가지를 묻겠다, 에밀리오.

    에밀리오의 말에 따르면 오만, 녀석은 그저 안토니움의 문을 봉쇄한 채였다. 사방팔방에 떠벌리듯 사건을 터트리고서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았다.

    ‘분명, 무언가를 꾸미고 있을 거야.’

    그렇다면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

    안토니움의 황궁.

    과연, 황제는 그곳에서 무사할까?

    더욱이 나는 안토니움의 황궁.

    지하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다.

    그래, 황제는 그걸 『전황의 서고』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말이야.

    나는 그게 시한폭탄이라는 걸 알고 있거든.

    [전황의 서고]

    [적정 레벨 : 측정불가]

    [붕괴 진행도 : 92.7%]

    어쨌거나 균열이잖아, 전황의 서고는?

    그러니까.

    나는 내쉬와 에밀리오에게 물었다.

    “황궁과 안토니움의 하수도는 연결되어 있나.”

    “……그러리라 생각됩니다.”

    “경비병이 지키고 있어 황궁 쪽으론 스케빈저들조차도 얼씬거리지 않지만, 말씀대로 일단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높으신 분들이라고 안 싸시는 건 아니시니까요.”

    연결이 되어 있다면…….

    굳이 안토니움에서부터 재단을 쌓을 필요가 없지 않나?

    황궁에서.

    정확하게는 황궁의 지하.

    [전황의 서고]부터 균열을 붕괴시킨다면?

    ‘어쩌면, 안토니움을 통째로 집어삼킬 수 있다.’

    나는 두 눈으로 균열, 전황의 서고를 확인했었다.

    90퍼센트에 육박했던 균열을 보고도 걱정하지 않았던 건.

    붕괴도가 특수한 경우에만 상승했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황제가 자신의 수명을 대가로.

    전황의 서고에 해답을 구할 때만.

    문득, 황제와의 대화가 머릿속을 스쳐 갔다.

    -“경이 마치 저와 같은 짐을……. 아니, 저보다 더욱 무거운 짐을 들고 계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덕분에 그 말씀이 진정으로 마음에 와닿습니다.”

    대격변 초창기와 비교하면 지금 상황은 비교할 수 없이 좋았다. 그러니 황제가 제 발로 전황의 서고에 발을 들이는 일은 없지 않을까.

    하지만 확신할 순 없었다.

    왜,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거든.

    그러나 이놈의 긍지는 드높아서.

    의문조차도 고상하게 표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만에 하나, 전황의 서고를 발을 들인다면…….

    나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엄격하게 처분할 수밖에 없다.

    나의 입이 열었다.

    “부디 합당한 이유이길 바란다, 황제여.”

    *

    ──────

    클라우디가 아르카나 대륙을 파멸로 이끄리라.

    ──────

    황제는 기억을 되새겼다.

    그의 눈빛에 결연한 의지가 내비쳤다.

    그가 중얼거렸다.

    “떳떳하기 위해서.”

    “황제의 자격(Pride)을 위해서.”

    “나는 물을 수밖에 없다.”

    선대가 남긴 계시 속의 클라우디.

    그것이 진정으로.

    저 사내의 말처럼.

    “아직도 믿지 못하는 거냐, 애송이 세릭로즈?”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를 뜻하는 것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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