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9화. 꽃밭의 나비 효과 (1)
윌리엄 가문.
마티스가 담백하게 그 위세를 평가했다.
“현시대 최고의 마도 가문 중 하나.”
벨리에는 지그시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나 벤쉬 선임은 윌리엄가의 염제라고 불릴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었죠. 마탑에 입성하기 전부터도 마탑에 소문이 들려올 정도였으니까요. 저도 담소를 나눴던 기억이 있네요. 카림제바도 그렇고, 화염마법사들에겐 유명해질 수밖에 없는 내력이 있는 건가, 하고는요.”
흠, 듣고 나니까 이해가 된다.
‘저 꺾이지 않는 자존감이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한마디로 실패를 모르고 자라난 온실 속의 화초.
따라서 역경이란 개념 자체가 없는 사내.
그게 바로 벤쉬 윌리엄이었다.
하긴 그랑펠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옷매무새에서 고귀함을 엿보긴 했었거늘.
‘그냥 평범한 선임 마법사들 수준인 줄 알았지.’
플레이어야 자기 뜻대로 마법사 클래스를 택할 수 있었지만, 아르카나인은 아니었다.
괜히 마도 가문이라 불리는 게 아니다. 마법사가 되기 위해선 그 혈통이 중요하단 뜻이다.
벨리에가 앞서가는 벤쉬를 보고 웃었다.
“그런 것치고는 사람이 구김 없죠, 벤쉬 선임께선?”
개성 넘치는 스무 명의 선임 마법사.
대략적인 성격?
같은 선임 마법사인 뱅그릿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마탑에서 유일무이한 할 수 있는 평민 출신 선임 마법사. 벤쉬는 어느 시점부터 그런 뱅그릿을 편견 없이 대하는 걸 넘어서 허물없는 친우처럼 대했다.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는 게 문제지만.’
뭐, 그래도 사람은 착하니까.
그나저나 역시 마르셀로였다.
괜히 벤쉬의 출탑을 허가한 게 아니었구나?
“내쉬 윌리엄, 제 아우이지만 상당히 기특합니다. 마법적 성취를 떠나 굉장히 성실하거든요. 마법사답지 않게 겸손하달까요? 때론 겸손이 지나쳐 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게 문제지만 말입니다.”
안토니움에서 만났던 황궁 마법사, 내쉬.
기억 속에서 얼굴을 끄집어내 본다.
금발이 묘하게 누구를 닮았다 했었는데…….
이제야 고개가 끄덕여진다.
‘외모 말고 닮은 게 없어서 몰랐던 거야.’
화려한 금발에 녹아드는 이목구비는 확실히 서로를 빼닮았거늘.
피를 나눈 혈육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을 정도로.
그 성격이 달랐으니까.
벤쉬가 확신에 차서 말했다.
“내쉬라면 분명 무언가 알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머뭇거릴 이유가 없겠지.
고오오.
벤쉬가 내쉬의 마력을 탐색했다.
마력 반응을 쫓아 포탈을 발현했다.
내가 먼저 발을 내디디고 나머지가 그 뒤를 따랐다.
“으헥?!”
……이제 보니까 놀라는 추임새도 똑같네.
내쉬가 내 얼굴을 보고 화들짝 발을 구른 뒤.
이어서 드러난 벤쉬의 얼굴을 보고는 경악한다.
“이호열 경……. 아, 아니! 베, 벤쉬 형님!!”
“그동안 잘 지낸 모양이구나, 내쉬.”
“보고 싶었어요, 형님……!”
내쉬는 눈물까지 글썽거리는 게. 형제끼리 심하게 호들갑을 떠는 게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거늘. 자세한 사연을 들었더니 충분히 고개가 끄덕여졌다.
“키가 엄청 자랐구나? 이젠 나보다 크겠어?”
벤쉬가 마탑에 입성하고 처음 얼굴을 마주한다고 했나. 마탑의 마법사, 특히나 고위 마법사, 더욱 특히나 벤쉬가 번번이 출탑에 실패하던 걸 생각하면…….
‘조금 찔리네.’
매번 출탑을 불허한 내 지분도 있겠군.
감동의 재회 정도는 너그럽게 지켜봐 줘야겠지.
이내, 벤쉬가 우리를 소개했다.
“흑마도학의 창시자, 마티스 딘 카를 선임 마법사님과 치유마법학, 벨리에 유시아 선임님이시다. 두 분 다 마탑에서도 명성이 자자하신 분들이시지. 그리고 이분은 너도 잘 알고 계시다시피.”
“네, 이호열 경…….”
“우리 마탑의 자랑.”
“……예? 마탑이요?”
그러고 보니까 내쉬하고는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던 것 같은데. 내가 마탑의 수석이라는 사실을 황제는 알고 있어도, 내쉬는 모를 수도 있겠구나?
벤쉬가 휘황찬란하게 금칠한다.
“마탑 역사상 가장 현학적인 마법이라 평가받는 반전마법의 창시자이시자 마탑의 재건자. 동시에 마탑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오신 우리의 이호열 수석 마법사 님이시다!”
“수, 수, 수, 수석 마법사……!!”
어째 제국을 구해냈을 때보다도 더 놀라는 표정이다 내쉬.
사실 마법사의 관점으로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수석인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아르카나 대륙에선 쉽게 볼 수 없는 존재니까.’
아르카나 대륙 최고의 무력 집단.
너무나도 강대했기에.
아르카나 대륙 전기 시절엔 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던, 바깥에 모습을 비출 수 없던 마탑의 간부들이다.
기본적으로 마탑을 동경할 수 없는 마법사들이 저런 시선을 보내오는 것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하지만 내쉬, 지금은 놀랄 때가 아니다. 아우야.”
동생 앞이라서 그런가.
벤쉬가 의젓하게 말을 잇는다.
벤쉬가 진지한 표정으로 사태의 경과를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안토니움 밖에 있는 것이냐, 내쉬?”
“예, 형님. 저는 폐하의 명에 따라 재건된 도시에 마력석 첨탑을 세우기 위해 안토니움 밖으로 향했습니다. 호열 경. 아니, 이호열 수석. 아니지, 한없이 깊은…….”
……그래, 더듬을 만도 해.
이명이 하도 많아서.
머리가 복잡한 거지?
‘나도 가끔 헷갈리거든.’
나는 방황하는 내쉬에게 너그럽게 말했다.
“그대가 편한 대로 불러도 좋다.”
“……감사합니다. 모든 건 이호열 경께서 반전마법으로 기반을 다져주신 덕분이었습니다. 퀴른베르크 기계탑의 보호도 간과할 수 없고요.”
“오오.”
그랑펠식 화법은 절대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제국이 재건을 시작했다고만 말했지, 그 과정에서 정확히 어떤 도움을 줬는지, 마탑의 선임들에게 세세히 말하지 않았다는 뜻.
“과연, 반전마법!”
벤쉬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잇는다.
“예상 그 이상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역시 이 수석님의 지원이 빛을 발한 거군요! 그렇다면 묻겠다, 내쉬야. 안토니움은 어찌하여 성문을 봉쇄한 거냐? 혹시 황제에게 계획이라도 있는 거냐?”
“그건…….”
순간, 내쉬의 시선이 찰나지만 나를 향했다.
“송구하게도 짐작할 수 없습니다, 형님.”
“그래? 뭐, 네가 밖에 있을 때 벌어진 일이니까.”
“죄송합니다.”
말꼬리를 흐리면서도 다시금 나를 향하는 눈짓.
‘이거.’
사회인의 눈치로 보아하니, 내게만 할 말이 있는 것 같군.
그렇다면 자리를 만들어 보자.
나는 곧장 세 명의 선임들에게 말했다.
“안토니움에 입성할 수 있겠는가.”
“저희 마법만으로 성벽을 무너트리기엔 무리라고 판단됩니다. 더욱이 예로부터 마탑을 경계해 온 제국입니다. 안토니움의 황궁 서고엔 옵시디언을 비롯, 마법사를 상대하기 위한 수단이 준비되어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안토니움에 입성할 방법은 없지 않을까요? 미국에서처럼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소환할 수도 없고 난감하네요.”
마티스와 벨리에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벤쉬는 이번에도 윌리엄가의 비전 마법을 운운하고 있었는데.
딱히 귀담아들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주시하며 고심해 보도록 하지.”
“그리하겠습니다.”
나의 말을 끝으로 흩어지는 무리.
내쉬가 자연스럽게 내 뒤를 따랐다.
이윽고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뒤에야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호열 경. 다른 분들 앞에서는 물론, 형님의 앞에서도 드릴 수 없는 이야기가 있어서 송구하게도 눈짓을 드리고 말았습니다.”
“양해를 구할 것 없다.”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제국을 위하는 그대의 마음을 내가 안다.”
내쉬에게 제국을 떠날 기회?
얼마든지 있었다.
멀리 갈 것도 없었다. 검성, 셰그윈이 반란군을 이끌고 안토니움을 포위했을 때만 하더라도. 내쉬 정도의 능력자가 제국을 배신하겠다고 결심했다면?
‘반란군은 극진한 대접을 해서라도 맞이했겠지.’
그러나 내쉬는 최후의 최후까지 안토니움을 지켰다.
제국과 황제를 위하는 마음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 말씀해 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내쉬가 지그시 고개를 끄덕이곤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드려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밑밥부터 까는 거지?
당연한 말이지만, 뒤끝은 심해도 속이 좁진 않은 그랑펠이었다.
뒤끝도 대상이 악마가 아니면 너그럽게 용서할 수 있으니까.
“물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내쉬가 결단했다.
그런데.
“……경의 혈육.”
첫마디부터 상상 이상인데……?!
“그렇습니다. 얼마 전, 클라우디 가문의 탕아를 자처하는 사내가 안토니움을 찾아왔었습니다. 그자를 폐하에게 인도한 제 잘못입니다. 그딴 소리 귀담아듣지 않았어야 했는데……!”
나의 혈육이라.
이곳이 현실이었다면 웬수를 말하는 건가.
이예림, 그게 사고라도 쳤나, 의심부터 했겠지.
그러나 이곳은 아르카나 대륙이었다.
과거의 시점도 아닌 현시점의 아르카나 대륙에서.
나의 혈육이라 할 수 이는 한 명밖에 없다.
그날의 그 자식이다.
“경과 똑같은 은발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기에. 혹시라도 경의 혈육에게 무례를 범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그가 폐하 앞에서 가증스러운 입을 놀리는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된 거였구나.
내쉬의 말을 듣고 나니까 짐작이 된다.
황제가 어째서 안토니움의 문을 봉쇄했는지를.
그래, 악마에게 홀린 거였어.
‘그거 보통 악마가 아니니까.’
무려 거악 칠죄종 오만이다.
-“사실대로 전부 고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정말로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모르신단 말씀이십니까? 클라우디, 당신과 똑같은 은발 머리칼의 사내가……!”
-“동족들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프라이드, 그는 분명 그렇게 말했었습니다.”
최상위 시공간의 의뢰를 수행하며 만난 오크, 울리취.
나는 그 퀘스트를 수행하면서 녀석을 오만이라 확신했었다.
‘어째 잠잠하다 싶었지.’
황제가 손바닥 뒤집듯 변심한 거?
사정을 알고 나니까 충격적이지도 않군.
빙의한 육체의 그릇에 따라 악마의 능력을 크게 상승하는 법. 악마들이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내 육체를 탐낸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
그런 의미에서 클라우디의 육체?
‘거악,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최후의 칠죄종.
그 이름값을 제대로 하는 사냥감일지도 모른다는 뜻이지.
단순한 강함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송구할 따름입니다. 만약, 제가 안토니움 밖으로 나서지 않았었더라면 경과 벤쉬 형님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녀석은 안토니움의 백성을 인질로 잡고 있었다.
수틀리면 어떤 짓을 벌일지 알 수 없다는 게 큰 변수였다.
나는 입을 열었다.
“그대의 잘못이 아니다, 내쉬.”
“……모두 제 불찰입니다.”
“아니, 모든 원흉은 악마다.”
“아, 악마라면……? 서, 설마?”
“혈육이 아니다.”
나는 차갑게 말을 이었다.
“그저 열등하고 추악한 족속에 불과하지.”
흠칫하는 내쉬를 뒤로한 채.
굳게 닫힌 안토니움의 성문을 바라봤다.
무사히 안토니움을 탈환할 방법을 생각해 본다.
‘쉽지 않아.’
오만.
무려 클라우디를 멸문으로 이끌고 간 악마였다. 그림자 용병단을 비롯한 다른 세력들이 가세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주도한 것도 녀석의 능력 중 하나일 테니까.
굳게 닫힌 안토니움에서 어떤 계획을 세우고 똬리를 틀고 있는 건지, 의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시급한 건 안토니움 내부의 정보였다.
‘구체적인 안토니움의 상황을 알아야 한다.’
경험을 통해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 본다.
만약, 오만이 안토니움을 제물로 바칠 계획을 세우고 있다면.
그 낌새는 마안으로 훑어보는 것만으로 알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찝찝한 건.
‘이런 개짓거리를 숨길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거야.’
숨기려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었다.
난데없이 안토니움 성문을 걸어 잠그지 않았다면. 나는 물론, 황제의 곁에 있던 내쉬조차도 오만이 마수를 뻗쳤단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테니까.
머리가 복잡해지던 순간이었다.
“!”
문득, 내쉬의 몸에서 마력이 일렁였다.
“누구냐?”
날카로운 목소리로 내쉬가 경고했다.
형인 벤쉬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훌륭한 마력 흐름이군.
상대도 그 낌새를 알아차린 걸까?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어색하지만, 최대한 격식을 차린 듯한 존댓말이 들려왔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에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뭐야?
“세상에게 버림받아 밑바닥에 처박힌 인생이지만, 그렇기에 타인에게 받은 은혜는 죽어도 잊지 않습니다. 당신에게 안토니움의 내부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고개를 들어올린 사내.
그의 얼굴 위로 겹쳐 보이는 시티델.
암살자들의 얼굴.
그랬구나.
그랬던 거였어.
“스케빈저가 클라우디의 자비에 보답하겠습니다.”
내 꼰대스러운 말을 흘려듣지 않았구나, 그랑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