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8화. 뜻깊은 첫걸음
손이 많이 가는 스타일이었구나, 그랑펠.
‘역시, 언제까지 날로 먹을 수 없다는 거냐.’
여러모로.
그랑펠의 설정을 실현하기 위해선 나의 발버둥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악크샨이라. 사실 회사 뒷담화를 까듯 불평불만을 입에 달고 살았었잖냐?
그냥 왠지 모르게 있어 보인다는 거. 그거 하나 빼면 장점이라곤 쥐뿔도 없다. 오만가지 취향을 가진 플레이어에게조차도 외면받았던 클래스.
‘나 말고는 죄다 접어버린 클래스.’
그런 악크샨이 그나마 관심이라도 받은 건 대격변 이후, 악마족 몬스터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다음부터였다. 아르카나 대륙과 현실의 시차를 생각하면…….
‘지금은 어마어마한 과거니까.’
그러니 악크샨을, 악마 사냥꾼의 능력을, 그랑펠의 기억에 각인시켜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급 악마 앞에서도 악마 사냥꾼의 자세를 유지해야 했다.
‘폼생폼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제대로 된 구마의식이라.
이거, 그랑펠에게 과외라도 하는 기분이구만.
하지만 이번만큼은 거창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괜히 악마 사냥꾼에 매료된 게 아니었듯.
그랑펠에게도 악마 사냥꾼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각인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것보다 쉬운 건 없지.’
서당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그랑펠의 긍지에 시도 때도 없이 시달려온 나다. 그러니 나는 아직도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한 악마를 바라봤다.
쉿.
손가락을 지그시 나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
그러자 악마가 입을 다물었다. 아니, 닥쳤다는 표현이 맞지 않을까. 한창 떠들던 와중에 다무는 바람에 혓바닥을 깨물기라도 한 건가. 입가에서 피가 역류하듯 쏟아졌거든.
이제야 낌새를 알아차린 듯하다.
그 동공이 휘둥그레진다.
뭐, 늦었지만.
‘틀린 말이 아니었구나.’
마왕, 거악, 그보다 더한 상위 마왕을 상대하다가 진명도 없는 중급 악마와 마주하니 기분이 새롭다. 평상시 그랑펠의 감정을 알 것만 같다.
‘열등한 족속.’
덕분에 자연스럽게 사냥할 수 있었다.
거창한 무기도, 마법의 발현도 필요하지 않았다.
지금의 나와 녀석의 사이엔 아득한 격차가 존재했으니까.
그저.
“닥친 채로 죽어라.”
말 한마디로 숨통을 끊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이름도 없는 중급 악마는 그렇게 지옥으로 떨어졌고, 구마의식은 끝났다. 정신을 잃고 휘청거리는 여자. 나는 쓰러지는 여자를 부축했다. 그녀가 가쁜 숨을 내뱉었다.
“하아…….”
악마는 죽어도, 빙의자는 죽지 않았다는 뜻이다.
지금의 구마의식이 그랑펠의 기억에 확실하게 담겼으리라. 별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랑펠은 설정처럼 악크샨으로 향하게 되겠지.
그나저나.
‘익숙해지지가 않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과거, 현재, 미래가 복잡하게 뒤섞이는 듯하다.
그러나 문과탓은 하지 말자.
이건 이과생들도 이해하지 못할걸.
‘하지만 확실한 건.’
나, 이호열.
지금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후회는 없었다.
다만, 우려할 뿐이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바라본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곳곳에서 시티델의 생존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반전된 시티델을 바라봤다.
분명 제국의 영지일 터.
어째서 제국은.
악마의 손에 떨어진 시티델을 구하러 오지 않았을까.
뒤따르는 또 하나의 의문.
“히, 히이익……!”
그림자 용병단이 클라우디를 노렸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런 수준 낮은 암살자들도 클라우디를 노렸을 줄이야.
‘만약, 밑바닥까지 긁어서 전부 쏟아부은 거라면.’
자연스럽게 사고 회로가 굴러간다.
‘어쩌면 내가 알지 못하는 적이 훨씬 많을지도 몰라.’
마왕 쟁탈전만으로도 벅찬데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니까, 벌써부터 피곤해진다.
심지어 클라우디가 대륙에 돌아왔다는 걸 만천하에 떠벌린 나였다. 덕분에 과거의 원수들이 부활한 클라우디를 경계할 가능성도 덩달아 높아졌겠지.
‘앞으로는 진짜 쉴 틈이 없겠는데.’
저주, [어둠의 이해]를 파훼했다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스킬 숙련도가 상승했다고.
만족할 때가 아니란 뜻이었다.
그때였다.
‘!’
익숙한 감각이 찾아왔다.
정신이 붕 뜨는 듯한 느낌.
그랑펠의 과거에서 튕겨져 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과거가 불안정합니다.]
……잠깐만, 아직이다.
나는 필사적으로 의식을 붙잡았다. 그랑펠에겐 이미 악크샨을, 악마 사냥꾼의 존재를 확실하게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거늘. 어떤 미련이 남은 거냐고 묻는다면.
‘두 번째니까 발전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
이번 저주를 파훼하면서 이해도가 고작 1할에서 얼마나 상승했는지, 메시지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모르겠다만. 한 가지를 확실하게 알았거든.
그랑펠의 원래 성질머리 하나만큼은……!
‘저 암살자들을 절대 살려 보내지 않겠지.’
하지만 그랑펠.
이번 기회로 자비라는 걸 배워보는 게 어떠냐?
후환이 두렵지 않으냐고?
저 정도면 살려둔다고 위협이 되는 수준도 아니잖아.
‘물론, 강요하는 건 아닌데…….’
나비효과라는 있는 거 아니겠냐?
누가 또 알아?
저 녀석들이 현실에서 도움이 될지?
‘……뭐, 나 좋으라고 하는 말은 아니고.’
나는 눈물을 흘리는 이들을 바라봤다.
“이제 살았어.”
“여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정말……!”
“엄마아, 아빠는 어디 있어?”
시티델에 찬물을 끼얹을 필요가 있느냐는 거지.
[저주, ‘어둠의 이해’가 해제됩니다.]
물론, 나는 더 이상 그랑펠의 과거에 간섭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저 비루한 암살자들의 최후도 목격할 수 없겠지.
그렇게 불쌍한 눈으로 쳐다봐도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단 뜻이다.
‘간절하게 기도라도 해보든가.’
부디, 그랑펠 님께서 자비를 베풀기를.
*
시야가 점멸한다.
[어둠의 이해 (저주) : 적합한 마력 친화력을 대폭 상승시켜 준다. 단, 적합한 마력의 원천이 되는 과거와 직면해야만 한다. - 현재 적합한 마력 친화력 : 30%]
……웬일이야?
‘이거, 마냥 좋아하면 안 되는데.’
시스템 메시지를 보고 놀란 것도 간만이었다.
친화력이 20퍼센트나 상승하다니. 1할이라고 해도 맨땅에 머리를 들이박던 시절과는 효율에서 차이가 난다는 걸까. 하긴 되돌아보면…….
‘과거가 불안정하다는 메시지도.’
떠오르는 빈도수가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그랑펠의 육체에서 느껴졌던 이질감도 그렇고 말이야. 이어서 다음 메시지를 확인해 본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30%) : 불세출, 여신조차 모독하는 희대의 천재.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의 재능을 발휘한다.]
마찬가지로 20퍼센트 상승.
부디 마계에서도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사용할 수 있기를 바라며 나는 메시지에서 눈을 돌렸다. 그야 간과할 수 없는 경험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오늘은 며칠이냐?!’
지난번, [어둠의 이해]에 진입했을 땐 뜻하지 않게 행방불명 처리가 되어버린 나였다. 그에 대비해서 이번에는 마르셀로에게 서신까지 남겼던바.
마탑의 집무실.
책상 위.
나는 양피지를 바라봤다.
‘벌써 빼곡하게 갱신된 게.’
보자, 최소 이틀은 지난 것 같은데.
“기이의 힘을 빌려야겠군.”
거창하게 말했지만, 단순히 스마트폰을 확인하겠다는 뜻이다.
직감이 맞았다.
정확하게 이틀이 지나있었다.
이틀에 [천상천하 유아독존] 스킬 숙련도 20퍼센트 상승이라.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장사인데?’
물론.
“귀하게 여겨야 할 시간이거늘.”
그랑펠 님에게 만족이란 없는 모양.
하기야 또 이틀 동안 밀린 일을 처리해야 하니까.
틀린 말은 아니겠지.
다행인 건 마르셀로에게 미리 언질을 해놨다는 것이다.
‘진짜 그 고양이 때랑은 차원이 다르다.’
덕분에 나는 한층 부담을 덜고 양피지에 오간 소식을 들을 살필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냐? 아니, 다른 두 사람은 몰라도 어떻게……?
──────
아르카나 대륙 진입 명단.
1. 흑마도학 선임 마티스 딘 카를.
2. 치유마법학 선임 벨리에 유시아.
3. 화염마법학 선임 벤쉬 윌리엄.
──────
어째서.
벤쉬 윌리엄의 아르카나 대륙 진입이 허가된 거지?!
고양이 탑주라면 몰라도 승인자가 마르셀로였다.
나보다도 마탑을 위한 판단을 내리는 마르셀로가 벤쉬의 대륙 진입을 허가한 데에는 분명 합당한 이유가 있었을 터.
‘아무리 그래도 출탑 허가라니.’
나의 입이 무겁게 열린다.
“아르카나 대륙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풍기는군.”
스스슥.
나는 망설이지 않고 깃털펜을 놀렸다.
답신은 곧장 돌아왔다.
그저.
──────
경, 안토니움이 성문을 봉쇄했습니다.
──────
‘……뭐라고?’
보고도 믿지 못할 뿐이었지만.
.
.
.
또각─
나는 곧장 마탑 최상층으로 향했다. 마탑의 포탈을 통해 아르카나 대륙으로 진입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불필요한 관심 따윈 사양하고 싶었다.
‘포탈의 좌표는 클라우디령에 고정되어 있다.’
어쩔 수 없이 플레이어들과 마주칠 수밖에 없을 터. 더욱이 마티스, 벨리에, 벤쉬가 이미 포탈을 통해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한 상황이다.
나까지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아주 그냥 특종거리에 목이 마른 언론들이 상상의 나래를 펼쳐서 기사를 써내려 가겠지.
“가문에 폐를 끼칠 순 없는 노릇.”
……그래, 간만에 효심 덕 좀 보자고.
“무사히 귀환하셔서 다행입니다, 경.”
최상층에 들어서자 마르셀로가 고개를 숙여왔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본론을 꺼냈다.
대체 무슨 일이래?
“안토니움에 이상 현상이 포착된 것인가.”
“성전 연합군, 그리고 모험가들이 전해온 소식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제국이, 정확하게는 제국의 수도 안토니움이 모든 세력과 교류를 끊어냈다고 합니다.”
“그렇군.”
그랑펠은 태연하게 반응했지만, 내 속은 놀라서 뒤집어질 정도였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전개야? 마르셀로가 말을 잇는다.
“안토니움의 인근, 다시 세워진 도시들조차도 그 영문을 모르고 있다고 합니다. 파견을 나온 제국 고위 관료들조차도 안토니움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 전해 들었습니다.”
나는 곧바로 답했다.
“황제의 독단적인 판단이군.”
애초에 안토니움 폐쇄라는 어마어마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건 황제밖에 없을 터. 그나저나 대체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던 거냐, 우리 황제 폐하께선.
‘그럴 낌새는 보이지 않았는데 말이야.’
분명, 계기가 있었을 터.
“경께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이번 사태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서 마탑은 세 명의 선임 마법사를 아르카나 대륙으로 파견하였습니다.”
마르셀로가 진지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주제를 넘는 부탁일 수도, 노파심일 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탑의 선임 마법사들이 안토니움의 진위를 밝히는 데에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부디 그들과 동행해 주십시오, 경.”
정중하게 고개까지 숙였다.
‘설마 내가 거절할까 봐, 그러는 거야?’
나, 이호열.
누가 봐도 찝찝한 안토니움에 혼자 쳐들어갈 생각은 없다……!
물론, 아르카나 대륙이다.
[최후의 모험가] 효과 덕분에 내 목숨은 걱정하지 않아도 됐지만.
‘아무래도 의도가 구려 보이거든.’
굳이 성문을 폐쇄한 이유.
그건 안토니움의 백성을 인질로 잡고 있다는.
협박과 다름없는 행동이었으니까.
그 탓에 섣불리 움직일 생각은 없다는 것이었다.
‘나도 든든하고 좋지.’
마티스와 벨리에.
스물의 선임 마법사 중에서도 특출난 실력을 갖춘 이들이었다. 그 두 사람이라면 믿고 나의 등을 맡길 수 있었다. 다만, 한 사람, 벤쉬 윌리엄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이놈의 절차 준수.’
그러나 탑주인 마르셀로의 부탁이었다.
존댓말은 하지 못할지언정.
토를 달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나는 군말 없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고오오─
격이 상승하며 한층 더 정순해진 마력. 나는 소란을 떨지 않고, 아르카나 대륙으로 향하는 포탈을 발현해 냈다. 일단, 선임들과 합류가 먼저다.
목표 좌표는 세 명의 선임 마법사.
또각─
발을 내디딘 나는 곧 그들과 조우할 수 있었다.
“이 수석님.”
“앗, 이 수석님!”
“으헥! 이, 이 수석님?!”
각자 다른 반응을 보이는 세 명의 선임 마법사들.
그러나 나의 시선은 가장 먼저 벤쉬를 향했다.
그래, 탑주인 마르셀로에게는 절차를 지키느라 묻지 못했지만.
그 당사자에겐 물어봐야 이놈의 직성이 풀리겠다.
“벤쉬 윌리엄, 그대가 선출된 이유를 알고 있나.”
뻔뻔하기 짝이 없는 그랑펠식 화법.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벤쉬가 입을 연다.
“그야.”
그 대답에 나는 흠칫하고 말았다.
“황궁 마법사, 내쉬 윌리엄이 제 아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벤쉬 선임, 있는 집 자제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