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94화 (394/489)

◈ 394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뭐지?

불안하게 귀가 가렵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았다.

세트 효과 발동을 위해선 전황을 놓쳐선 안 되는 법.

말했다시피 여명의 재킷을 걸친 데엔 다 합당한 이유가 있단 말이다. 그러니까 당신네들 행동에도 나처럼 부디 합당한 이유가 있었기를 바란다.

“절차에 따라.”

나는 빳빳한 고개를 세워 지부장들을 바라봤다.

“이제 그대들의 결백을 증명할 차례다.”

*

복잡하고도 추잡하게 얽혀있었군.

그나저나 사람은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고.

미국의 지부장들 말고도 러시아, 일본, 이탈리아, 이집트…….

다들 레이먼 션과 오고 가는 관계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손바닥 뒤집고 내뱉은 말을 무르고, 마지막 자비마저 없던 걸로 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야 다들 내 앞에서 긍지에 공감한 사람들처럼 굴었었잖아?

‘봐라, 그랑펠. 세상이 이렇게 무섭다니까?’

물론, 다들 나름대로 이유는 있으신 모양이었다.

“……제안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AAU 지부장.

살아있는 권력이 아니냐고 말하는 이들이 있겠지만.

그건 뭘 몰라서 하는 이야기였다는 거겠지.

‘나름의 일리가 있어.’

거슬러 올라가 보면 AAU 지부장들은 코스모의 간부들이었다.

출신이 평범한 월급쟁이였다는 뜻이다.

그런 이들이 각국 정부의 압박에서.

얼마나 꼿꼿하게 AAU의 규율을 지킬 수 있을까?

차갑게 쏘아붙이는 박민재.

“당신들을 전우라고 생각한 내가 부끄럽습니다.”

코스모의 미친개라 불렸던 게 아니고서야 쉽지 않을 거다.

지부장들이 뭐, 플레이어도 아니었으니까.

협박이 됐든, 청탁이 됐든.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이해가 된다.

나는 그쯤에서 입을 열었다.

“일말의 긍지를 지켜낸 그대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

나의 칭찬에도 분위기는 풀어지지 않았다.

자신들의 과오 앞에 뻔뻔할 수 없겠지.

양심이 있다면 그럴 수밖에.

왜, 대비 효과가 확실했거든.

‘칭찬은 내 동료들이 받아야 하는 건데 말이지.’

마안의 망원경을 통해서.

성전 연합군의 사투를 지켜본 지부장들이었다.

지켜보는 있는 이들이 있는 것도 아니요, 승리한다고 명예를 거머쥘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오직 아르카나 대륙과 현실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내던진 저들 앞에서 뻣뻣하게 고개를 치켜들 수 있다면…….

‘그건 정말, 사람 새끼도 아니니까.’

그 사실을 알기에.

“그 한 톨의 긍지가 그대들을 살렸다.”

나는 그렇게 덧붙였다.

참고로 그랑펠의 뒤끝은 오래간다. 한번 목격한 마법을 그대로 따라서 발현할 정도로 명석한 두뇌가 지부장들의 증언을 기억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설령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해도.

‘마탑의 힘을 빌리면 되고.’

보자, 지금쯤이면 마르셀로의 지휘 하에 선임 마법사들이 움직였을 거다. 지부장들의 소지품에서 기억을 읽어내 이들의 증언이 사실인지, 그래서 이들의 정확한 윗선이 어디인지를 파악하리라.

‘확실한 일처리군.’

나조차도 거기까지 계획해 두지 않았는데.

상당히 철저하다.

우리 박민재, 베이커 지부장. 아무래도 같은 AAU 지부장이라서 더욱 철저하게 계획해 둔 거겠지. 증언에 증거까지 확보해 빠져나갈 구멍이 없도록.

‘덕분에 이젠 빼도 박도 못할걸?’

[『절대영도』]가 해제된 건 일종의 신호탄이었다. 당연하게도 그 신호를 알아볼 수 있는 건 마법사밖에 없다. 오직 마탑을 위한 신호라는 뜻이었다.

현시점에서 마탑을 향한 세간의 평가를 떠올려볼까?

미국 사태의 파급력을 생각해보자. 현재 마탑은 아르카나 대륙 전기 시절의 마탑, 그 이상의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 강함을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모든 걸 짓밟던 그 시절 마탑의 포스를 보여주고 있다는 뜻. 확실히 메테오 스트라이크가 괜히 최상위 마법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시각적 효과가 어마어마하더라고.’

그런 마탑의 선임 마법사들이 원흉의 신원을 확보하기 위해 움직였다. 감히 장담할 수 있다. 누구도 마탑의 행보를 저지할 수 없으리라고.

나의 예상은 정확했다.

탑주, 마르셀로의 텔레파시가 전해져 온다.

흑마도학 선임, 마티스.

그가 일본 정부 인사의 신병을 확보했다는 소식이었다.

이후로도 속속들이 소식이 도착했다.

그쯤에서 나는 입을 열었다.

무엇하나 숨기지 않는 당당함.

당연하게도 세상에도 알려야 하지 않겠냐?

“우려하지 말도록.”

나의 말에 박민재와 베이커를 제외한 지부장들의 얼굴에 의문이 서린다. 다짜고짜 무엇을 우려하지 말라는 건지 알아듣지 못한 거겠지. 그러나 그랑펠식 화법은 절대 친절하지 않았으니.

나는 그렇게 말을 끝마쳤다.

“절차에 따라 모든 것을 돌려놓을 것이다.”

남의 나라 고위 관료들을 어떻게 잡아서 처형할 생각은 없었다.

불법, 어쨌거나 규율을 어길 순 없잖아?

물론, 마탑의 엄격한 절차도 간과할 수 없으니까.

상호간의 합의가 필요한 법.

“이상.”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지부장실에서 벗어났다.

마음 같아서는 성전 연합군의 승리를 축하해 주고 싶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마르셀로의 텔레파시가 나의 발걸음을 마탑으로 돌려세웠다.

-레이먼 션의 관한 증언이 나왔습니다, 경.

내가 말했지?

마탑을 적으로 돌려서 좋을 게 없다니까?

*

“후우.”

성전 연합군.

디스커스의 육체와의 전투에서 승리.

전리품은 전무했다.

디스커스의 껍데기는 영혼도, 거창한 장비도, 심지어는 경험치도 품고 있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이 순간, 누구도 그 점을 아쉬워하지 않았다.

“해냈다아아아아!”

척.

남태민이 대검을 하늘로 치켜들고 외쳤다.

고작 껍데기에 불과할지라도.

호열의 도움이 없이 마계의 존재를 처치했다.

“이런, 온몸이 들쑤시는구만.”

전투가 끝나자마자 엄살을 부리는 체인워커의 표정도 후련해 보였다. 마계에서 총대장의 발목을 붙잡아서는 안 된다. 이번 승리로 그 강박적인 우려를 조금이나마 덜어낸 덕분이었다.

“씁.”

“좋으면서도 좋지 않습니다.”

“저거, 아주 재수 없어.”

레오니와 히사기는 남들보다 승리의 기쁨에 조금 덜 취해있었다.

이번 전투에서 남태민의 활약이 눈부셨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레오니는 속으로 쓰디쓴 입맛을 삼켰다.

“재수 없는 건 뱀눈, 너도 마찬가지거든?”

“레오니 양이라도 태민 군과 같은 취급은 조금 그렇군요.”

“……둘 다 똑같은 새끼들.”

남태민과 히사기는 확실하게 괄목상대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이번 전투에서 밥값을 해냈다고 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레오니는 주눅이 들지 않았다.

아니, 들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슥.

고개를 들자 유달리 찬란하게 빛나는 하늘의 별. 어느샌가 곁에선 남태민이 말했다. 사실 메시지가 떠오르지 않았어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아무리 봐도 똑같지? 호열 씨, 머리카락색이랑.”

아르카나 대륙에 더는 별은 존재하지 않았다.

밤하늘을 수놓은 건.

거대한 눈동자를 굴리는 마안(魔眼)뿐이었으니까.

레오니가 피식 웃었다.

“아주 희번뜩하시네.”

그래, 저건 십좌의 마왕인 호열의 마안이겠지.

자신들의 지휘관은 호열밖에 없었으니까.

그것이 레오니가 주눅들 수 없는 이유였다.

남태민이 생글생글 웃었다.

“어쩐지 날뛰어도 지치지가 않더라. 그리고 처음으로 야성을 제어하는 데 성공했어. 사기가 최대치까지 치솟은 덕분이겠지. 근데, 이러면 안 되는데.”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했다.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거늘.

살아남으니까 곧바로 웃음이 나오는 걸 보면.

그러나 성전 연합군에겐 그럴 자격이 충분했다.

“훌륭한 성장물을 써내려가고 있군, 자네들!”

전설 속 낭만 탐험가, 로렌츠크가 인정했으니까.

“에이, 성장물이라뇨. 이번에도 총대장님 덕분이죠.”

로렌츠크의 낭만 가득한 칭찬에 남태민은 멋쩍게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빈말이 아니었다. 마계를 경험했기에 마계의 존재들에 대해 알고 있는 로렌츠크였다.

“글쎄. 모험가의 시야는 다르다고 했던가? 나로서는 저 찬란한 별에 어떤 효과가 담겨있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마계의 존재에 관해서는 잘 알고 있네. 그 어떤 효과라고 해도 그대들이 마계의 리치를 사냥한 건 위대한 업적이네.”

“……그런가?”

남태민과 체인워커를 비롯한 성전 연합군이 눈빛을 교환했다.

우리 정말 대단한 일을 해낸 게 맞는 건가……?

다른 이도 아니고, 전설의 탐험가라 불리는 로렌츠크.

숱하게 많은 구경을 해왔을 그가 저렇게 말하는 거라면.

남태민이 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조금 더 기뻐해도 되는 건가? 하핫.”

그리고 그 모습은 로렌츠크에게 장면이 되었다.

“이런, 놓칠 수 없는 영감이군.”

어느새 로렌츠크가 깃털펜을 들었다.

이 순간, 그 누구보다 겸손하며 주제 파악을 잘하는.

다른 세계의 영웅들에 관한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완전히 다른 세계. 보다 강렬한 표현으로는…….”

그 이야기는 화자가 누구이냐에 따라 무게가 달라지는 법.

로렌츠크가 깃털펜을 멈춘 순간이었다.

플레이어들의 시야가 점멸했다.

“……!!!”

순간, 로렌츠크를 향하는 남태민, 히사기, 레오니.

그리고 거대 연합 길드원들의 시선.

“저, 전설? 우리가?!”

어째서인가.

처음으로 전설을 써내려간 이들이었거늘.

기쁘기보다 당황스러웠다.

[아르카나 대륙에 ‘이세계 모험가 전설’이 울려 퍼집니다.]

“이, 이세계……?”

“나, 이런 제목 만화책 책방에서 본 적 있어.”

“아니. 로렌츠크 님, 제목 센스가 이게 뭐예요?!”

이 순간, 밤하늘을 비추고 있는.

‘누군가’가 서운하지 않도록.

약간이나마 수치심을 이해할 수 있게 된 이들이었다.

*

제국의 수도, 안토니움.

“란샤, 오늘은 그만하고 돌아가자.”

“네. 이것만 마저 챙길게요!”

“정말,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니야?”

안토니움은 성문을 개방했다.

안토니움의 소도시들이 성공적인 재건을 끝마쳤기 때문이었다.

그 과정은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퀴른베르크 기계탑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아르카나 대륙에서 자취를 감췄던 과거의 존재들이 되살아나 아르카나 대륙에 되돌아올 줄이야.

산골 마을, 드레드센 출신의 란샤가 물었다.

“제가 산골 출신이라 뒤처지는 걸까요? 퀴른베르크 기계탑까지는 드워프님들의 손재주를 고려하면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겠는데. 다른 건 도저히…….”

“란샤, 네가 안토니움 토박이인 나보다 나은걸? 난 아직도 퀴른베르크 기계탑의 존재를 믿을 수 없거든. 세상에 저렇게 커다란 게 움직이질 않나. 악마를 사냥하질 않나. 다 늙은 내 눈에 정령이 보이질 않나.”

“아이언 캐슬 호는 기계탑보다 훨씬 대단한 걸요?”

“그래? 하지만 들어도 믿을 수 없는 건 마찬가지거든.”

란샤는 안토니움의 여인들과 함께 짐을 챙겼다.

아르카나 대륙의 밤은 여전히 위험했다.

병사들을 제외하면 안토니움으로 복귀해야만 했다.

그러나 대륙에 활기가 돌아왔기 때문일까.

소소하게 오가는 이야기조차도 희망찼다.

특히나.

“그나저나 모험가들이 아르카나 대륙에 돌아왔다는 소문이 돌더라고요! 왜, 수십 년 전에 나타났다가 하루아침에 모습을 감췄다던 모험가들이요!”

“정말요?”

“그럼요! 그때처럼 부활의 기적을 가진 건 아니지만, 그때보다 훨씬 성장해서 돌아온 것 같다고 하던데요? 정말 다행이죠. 간만에 희소식이네요.”

란샤는 살짝 어깨를 으쓱였다.

괜히 기분이 좋았다.

소소한 대화에서도 호열의 업적이 높게 평가받고 있다는 게.

‘이 순간에도 고생하고 계시겠지?’

란샤, 자신처럼 보잘것없는 산골 마을 출신이 할 수 있는 건 기도밖에 없었다. 란샤는 아낙네들의 잡담에서 한 발짝 내빼고는 기도했다.

‘그분께서 오늘도 무사하시기를.’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안토니움의 성문 앞.

잊을 수 없는 머리칼이 보였으니까.

“……저건!”

찬란하게 빛나는 은발.

한데, 어째서인가.

그 머리카락이 이전과는 다르게 길게 늘어져 있다.

하지만 내뿜는 빛깔에서 확신할 수 있었다.

저건 호열의 머리카락이었다.

란샤가 반가운 마음에 걸음을 서두르던 순간이었다.

“저기……?”

란샤가 탄식을 뱉었다.

“아!”

드러나는 얼굴이 호열이 아니었다.

크고 찢어진 눈에서 흘러나오는 퇴폐적인 기색.

하얀 것을 넘어서 창백한 피부.

베일 것처럼 날카로운 인상.

다시 보니 닮은 구석이라고는 머리카락색밖에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슥.

자신을 향하는 사내의 시선에는 온기가 없었다.

그건 사람이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었다.

마치 벌레를 내려다보는 시선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완전히 착각해 무례를 범했다.

란샤는 자신도 모르게 놀라서 고개를 숙였다.

그때였다.

안토니움의 경비병이 사내에게 질문을 던진 건.

“신분을 여쭙겠습니다.”

사내는 답했다.

“세릭로즈에게 전해라.”

“세릭로즈? 감히 폐하의 이름을 입에 담……!!”

“오만(Pride).”

그 입꼬리가 미묘하게 뒤틀려있었다.

“아니, 클라우디의 탕아가 진실을 설파하러 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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