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2화. 우리를 막을 순 없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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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좌는 마계를 지배한다. 그들이 지배하는 마계에선 누구도 하늘을 바라볼 수 없다. 그 무게에 짓눌린 마계에선 어느 누구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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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에르 때야 기절하는 탓에 기억이 나질 않으니까 넘어간다고 치더라도. 가미긴이 현현했을 때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했다.
가미긴, 그거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지.
다른 악마들처럼 피를 흩뿌리지도, 인간을 위협하지도 않았다.
공포를 조성하지 않고도, 등장만으로 만물에게 공포를 능가하는 경외를 느끼게 하던 가미긴이었다.
‘마계는 그런 놈들의 안방이란 거야.’
심지어 그런 녀석들이 여덟이나 남아있고.
마계에선 감히 하늘을 바라볼 수도.
제정신일 수도 없다는 게 과언이 아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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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라는 하등한 감정이 아니다. 십좌는 감정으로 재단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마계의 정신계를 온전히 지배한다. 마계의 생명체가 정신을 놓아버린 채. 그 육신만이 허망하게 마계를 떠돌게 되는 이유가 바로 그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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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저런 십좌의 존재가 바로.
악마족이 마계를 지배할 수 있는 이유가 아니었을까?
나의 추측이 정답이라는 듯.
스륵.
페이지가 넘어가자 디스커스의 목적이 드러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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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마왕, 녀석들만큼은 달랐다. 십좌를 말하는 게 아니다. 72좌, 가짜들조차도 십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던 것이다. 허울뿐인 왕좌를 차지한 것만으로 십좌의 정신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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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레이먼 션, 녀석이 정기 업데이트로 십좌를 제외한 모든 마왕을 삭제해 버렸지만……. 디스커스가 이걸 집필하던 시점에선 멀쩡히 살아있었던 모양이군.
‘내가 장담해. 디스커스는 웬만한 마왕보다 훨씬 강하다.’
그런데, 마왕들은 어째서 멀쩡할 수 있었을까.
‘뭐, 마계의 관점으로 보면 의문이겠지만.’
아르카나 대륙 전기의 관점으로는 해석할 수 있었다.
아마도 마왕의 왕좌에 십좌의 정신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버프 혹은 특성이 달려있던 거겠지. 마왕 쟁탈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떠올리면 당연한 이치다.
‘십좌와 나머지가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해도.’
어쨌거나 같은 왕이요, 서로에게 칼을 들이밀 수 있는 동등한 위치에 있었으니까. 나름대로 공정한 규율이라는 거지. 그렇다면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마왕도 악마족 몬스터도 아닌 리치.
디스커스는 어떻게 마계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고.
이런 글을 적어서 남길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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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 언데드의 지배자 디스커스는 굴복하지 않으리라. 죽음을 지배함으로써 십좌를 기만하리라. 내겐 뼈로 만들어진 무수한 육체가 존재하니. 나의 정신이 굴복하지 않는 이상, 나는 결코 십좌에게 굴복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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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리치다운 해결책이군.
탁─
나는 그쯤에서 서적을 덮었다.
그다음엔 디스커스가 왕좌를 노리게 된 계기가 적혀있었는데.
읽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슬슬 한계가 온 거겠지. 마계에서 처절하게 버티는 것도.’
허나, 십좌를 제외한 62개의 왕좌가 삭제되었으니까.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선. 살아남기 위해선. 부득이하게 십좌 중 최약체, 부에르를 끌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리라.
‘어쨌거나 덕분에 귀한 정보를 얻었다.’
과연, 마계(魔界)였다.
활자로만 봐도 호락호락하지 않구만. 보자, 아르카나 대륙 전기의 관점으로 표현하자면 발을 들여놓는 것만으로 엄청난 디버프에 시달리게 된다는 거겠지.
‘최상위 상태이상 공포보다도 더한 디버프라.’
아르카나 대륙의 상태이상이 아니니까.
[첫 세계수의 축복] 효과가 유효할지도 미지수였다.
[최후의 모험가] 효과는 말할 것도 없겠지.
걱정이 앞섰지만, 나는 그쯤에서 성전 연합군의 계획을 떠올렸다. 어쩌면 마계에 쳐들어가겠다는 계획부터 수정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거대 연합은 그렇게 선언했었다.
-“사지라고 해도 호열 씨를, 총대장님을 따르겠습니다.”
목숨을 걸겠다.
웬만한 일에 성전 연합군의 긍지가 꺾이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십좌의 전력을 알고 있는 나였다.
과연, 남태민과 같은 플레이어들이 십좌의 정신지배를 악으로 깡으로 긍지로 버텨낼 수 있을까?
‘무시하려는 게 아니야.’
타락한 유낙서스와의 사투.
그 사투에서 나는 그들의 진심을 목격했다.
그들을 동료라고 인정했기에.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없는 것이었다.
‘애초에 나부터도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거든.’
상태창을 향하는 시선.
[칭호 : 십좌의 주인]
디스커스의 정보에 따르면 나는 마계에서 멀쩡해야 한다.
그냥 왕좌도 아닌 부에르의 십좌를 차지했으니까.
나부터가 어쨌거나 마왕이니까.
십좌의 정신지배에서 멀쩡해야 한다는 거지.
그러나 문제는 나의 정신상태였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랑펠이 있으니까.’
스스로 질문을 던져본다.
십좌의 왕좌에 둘 다 앉을 수 있는 거라면 좋을 텐데 말이야.
만에 하나 그렇지 못하다면?
그 왕좌에 앉은 건 이호열인가, 그랑펠인가?
이호열 혹은 그랑펠.
둘 중 하나의 정신이라도.
육체에서 튕겨져 나가게 된다면?
‘심히 좆되는 거지, 뭐.’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흑역사에서 해방이요. 최악을 가정하자면 나, 이호열의 정신이 십좌의 마왕에게 지배당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물론, 믿을 구석이 없는 건 아니야.’
그래, 설령 그랑펠의 정신이 사라진다고 해도 나는 악마의 천적, [악마 사냥꾼]이었다. 그것도 이젠 일천(一千) 레벨에 가까워진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
그게 내가 태연하게 지껄일 수 있는 이유였다.
하이엘의 전언에 나는 읊조렸다.
“나쁘지 않은 소식이군.”
좋아, 보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
이른바 행복 회로를 굴려보자는 거지.
이호열과 그랑펠이 분리된다?
솔직한 말로 나, 이호열만 멀쩡하면 되리라.
‘우리 그랑펠 님께서 내가 없다고 뭐, 큰일이라도 나겠냐?’
확신할 수 있는 이유야 간단하다.
[흑화] 상태의 그랑펠이 해낸 전적을 돌아봐라.
만약, 분리된 그랑펠이 마계에서 날뛸 수 있다면?
‘듣는 성전 연합군이 서운할지 몰라도…….’
성전 연합군이 단체로 마계에 진입할 필요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다만, 말했다시피 문제가 되는 건 그랑펠과 분리된 내가, 마계에서 버틸 수 있느냐는 거겠지.
‘여전히 나약하구나, 호열아.’
마냥 천적관계의 효과만 믿을 순 없다. 천적관계가 무적이었으면 우리 악크샨 선배님들께서 지옥에 떨어지시는 일 따윈 없으셨을 테니까.
그러니까 나는 진지하게 판단을 내렸다.
‘결국, 내가 더 강해져야 한다는 건가.’
나, 이호열이 성장한다면.
나는 마계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흑역사에서도 해방되는 해피엔딩을 맡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어둠의 이해]를 통한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성장.
전성기 그랑펠의 능력을 발현하는 스킬 효과.
그걸 그랑펠의 정신과 분리된 상태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건가, 의문이 들었지만. 가능성이 있다면 시도해 봐야한다.
꽝이라고 해도, 그랑펠의 과거에서 클라우디 가문의 비기를 목격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거 아니겠어?
‘최상위 시공간 퀘스트도 빼놓을 수 없다.’
퀘스트 보상.
시공간의 금화으로 아이템을 구매할 수 있다.
그랑펠이 황새라면, 이호열은 뱁새다.
뭐, 가랑이는 이미 한참 전에 찢어졌지만…….
이호열의 전력은 뭐가 됐든 처절하게 써먹는 데에 있는 법.
파놓은 살 구멍을 완벽하게 활용하는 데 초점을 맞춰보자고.
나는 생각을 마치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 올렸다.
“…….”
AAU 지부장 총회의실.
시작부터 위축된 표정을 짓고 있던 몇몇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드디어 자백할 생각이 든 모양이군. 나의 답을 기다리는 건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살랑─
하이엘의 치렁치렁한 옷자락이 시야를 간지럽힌다. 베히모스의 아가리에서 디스커스가 부활했다. 전언을 전한 하이엘은 고개를 숙인 채 나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확실히 부활이라고 느낄 만하다.’
그러나 부활 따위가 아니다. 네크로노미콘에 적혀있던 내용에 따르면, 디스커스가 십좌의 정신지배를 피하고자 준비해 놓았다던 새로운 육체일 거다.
한마디로.
‘디스커스의 껍데기에 불과하겠지.’
나는 하이엘에게 답했다.
“우려할 것 없다고 전하거라.”
확신을 담아서.
“그대들이라면 능히 사냥할 수 있을 테니.”
디스커스.
십좌에게 점령된 마계에서도 살아남은 강력한 몬스터였다. 900레벨의 벽을 돌파한 나를 단번에 레벨 업 한계치인 50레벨을 상승하게 한 것만 봐도 그 강함을 짐작할 수 있겠지.
따라서 정신이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해도, 그 레벨은 쉽게 짐작할 수 없을 거다.
‘사실 제일 간단한 방법은…….’
지금 당장 아르카나 대륙으로 포탈을 열어.
내가 직접 디스커스의 껍데기를 사냥하는 거겠지.
경험치랑 레벨은 다다익선이니까.
그러나.
‘지금 내겐 할 일이 있다.’
나는 가라앉은 지부장실을 바라봤다.
쩌저적.
[『절대영도』]를 해제했다.
시간이 흐르기 시작해서일까.
시시각각 변하는 지부장들의 표정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중에서도 가증스러운 건 자리에 일어선 이들이었다.
‘여전히 긍지라곤 찾아볼 순 없군.’
화장실 들어갈 때,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는 거겠지.
단순히 후회가 막심한 표정들이시다.
저런 몰골을 보고 그랑펠은 어떤 말을 내뱉었을까.
‘절대 고운 말은 못 했을걸.’
하지만 나는 인내했다.
입을 꾹 다물었다.
저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고 싶었으니까.
그런 나는 인벤토리에서 마왕의 전리품을 꺼냈다.
[마안(魔眼)의 망원경]
아르카나 대륙 상공을 부유하는 마안과 시야를 공유하는 아이템. 마왕의 전리품답게 그 효과도 이질적이며 생김새도 그로테스크하다.
거기에 십좌의 마왕인 나의 후광이 덧씌워진 탓일까.
“……히끅!”
내가 자기네들을 잡아먹는 건 아닐까.
착각이라도 하는 반응들이군.
하지만 마왕이지만, 악마들의 왕은 아닌 나였다.
더불어 그랑펠 입맛이 얼마나 까다로운데?
그럴 생각은 죽어도 없으니까.
괜히 착각하지 말라고.
‘착각은 지금만으로도 충분하다.’
속으로 탄식을 삼키기도 잠깐.
스르륵.
이윽고, 마안의 망원경이 눈을 떴다.
허공에 아르카나 대륙의 풍경이 떠올랐다.
정확하게는.
“자, 잠깐! 저 비행선은……?”
“아이언 캐슬 호. 드워프들의 결전병기 아닙니까?”
“잠깐, 지상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베히모스의 아가리.
디스커스의 육신에 맞서는 성전 연합군의 사투가 떠올랐다.
그래, 성전 연합군의 목숨을 건 혈투를 세상에 알리는 것.
“똑똑히 보아라.”
그것이 이 순간, 내가 성전 연합군의 총대장으로서 수행해야 할 책무였다. 동시에 저들의 전투를 통해서 이 빌어먹을 배신자들에게 긍지를 깨닫게 하는 게 나의 목적이었다.
지부장들이 상황을 파악한다.
“남태민, 히사기, 레오니, 스칼……. 거대 연합이 선두에서 육탄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드워프들이군요!”
“상대 몬스터는 누굽니까?”
“저 외형으로는……. 확실히 리치 같습니다.”
그러나 나는 호들갑이 달갑지 않았다.
나는 저들의 각오를 알고 있었다.
빌어먹을 그랑펠식 화법 덕분이겠지.
‘껍데기란 걸 모르면서도 돌격한 거야.’
디스커스가 부활했다고 판단했으면서도.
디스커스의 말도 안 되는 강함을 경험했으면서도.
그대들이라면 능히 해낼 수 있다는 나의 말 한마디에.
목숨을 걸고 맞서고 있는 게 성전 연합군.
나의 동료들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
“저들의 사투를 단순한 유희로 여기지 마라.”
“……!”
“그대들에게 전황을 보여준 이유는 오직 하나.”
펄럭─
인벤토리를 오픈.
여명의 재킷을 어깨 위에 걸치며.
최후의 경고를 덧붙였다.
“이것이 내가 베푸는 마지막 자비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