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1화. 지피지기
시간의 흐름이 얼어붙는다.
뒤틀린 시간 축에 익숙한 나다.
빙룡, 프로즈낙스와 사투를 벌일 때부터.
절대영도 속에서 꽤 많은 시간을 머물러 있었거든.
‘그것뿐이겠냐?’
가장 최근이라면 [어둠의 이해]도 빼놓을 수 없겠지.
찰나가 현실에서는 며칠이 되고.
그 반대의 경우도 경험해 봤던 나였다.
달칵.
덕분에 여유랄까?
나는 느긋하게 찻잔을 집어 들었다. 녹차는 내가 방출한 냉기에 차디차게 식어버렸지만, 한없이 까다로운 그랑펠은 녹차 앞에서 한없이 너그러워졌으니.
‘보자.’
나는 찻잔을 든 채 자리에 착석.
책을 펼쳤다.
뜬금없이 무슨 독서냐고 묻는다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마계의 성서, 진(眞) 네크로노미콘].
스멀스멀.
그 외관은 척 보기에도 상당히 불온했다. 뭐, 전설로 내려오는 악마의 책처럼 인간의 가죽으로 만들어지진 않았어도 표지 그림이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였기 때문이다.
번뜩─
그려진 해골들은 안광을 빛냈고, 해골마(馬)는 콧김을 내뿜었다. 그나저나……. 책 내용을 살피기에 앞서서 그런 책을 들고 있는 나의 모습은 어떻게 비치고 있으려나?
‘역시, 마왕이 따로 없겠구만.’
그랑펠은 마냥 인자하지 않다.
그랑펠의 과거를 1할이나마 이해하게 되면서.
그 사실을 깨닫게 된 나였다.
그러니 나는 이런 극약처방을 내릴 수 있었다.
“시, 시계가 멈춘 건가?”
“아뇨. 완전히 멈춘 게 아니라 움직이고는 있습니다. 초침이 시침이 된 것처럼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움직이고 있어요! 우, 우리 큰일 난 거 아닙니까?”
“그보다 갑자기 책을 꺼내 드시다니……?”
웅성웅성.
소란 속에서 나를 향하는 시선.
시간을 얼려놓고는 느긋하게 앉아서.
티타임과 독서를 즐기는 내 모습?
두 눈으로 지켜보면서도 어이가 없는 눈치로군.
근데, 어이가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호의를 뒤통수로 되갚을 줄이야.’
레이먼 션.
녀석의 영향력이야 대격변 이전부터 현실에 깊게 뿌리내려져 있었을 것이다. 세상에 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냐? 레이먼 션은 현실에서 압도적으로 돈이 많은 인물이었으니까.
‘분명, 복잡하게 얽힌 자들이 있겠지.’
미국만이 아니라 각국 AAU와 정부에도.
‘놈이 원한 건 간단해.’
AAU 지부장이라고 한들. 레이먼 션에게 아르카나에 관해선 도움을 줄 순 없다. 아르카나 대륙 전기의 창조주라 불리는 레이먼 션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을 짬밥은 아니잖아.
‘현실에서 설칠 수 있는 연줄.’
이번 사태로 알게 되었다.
정치, 사회, 경제.
더 나아가 세계는 레이먼 션에게 많은 것을 의존하고 있다고. 물론, 나는 빠르게 대처에 나섰다. 덕분에 플레이어들의 마음을 유스라 왕국으로 돌릴 수 있었지.
그러나.
‘지부장들은 다르다.’
플레이어가 아니니까.
그리고 이미 저지른 죄가 있으니까.
쉽사리 입을 열 수 없는 거겠지.
‘마음 같아선 강제로 자백하게 하고 싶지만.’
말했듯 추잡한 흙탕물을 뒤지는 건 내가 아니다.
고작 흙탕물 따위에 발과 손을 담그려고.
가다듬은 옷매무새가 아니란 말이다.
스륵.
더욱이 나는 경험이 있었다.
그래, 시간은 모든 걸 해결하는 법.
절대영도으로 시간의 흐름이 멈춰버린 이 공간은 무간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무간보다야 효과가 떨어지겠지만, 상관없다.
드높은 정신력을 가진 원로 마법사, 그 악마 숭배자들조차도 버티지 못했던 무간이다. 일반인에 불과한 지부장들에겐 축소판으로도 충분할 거거든.
스륵.
경험에서 우러나온 자신감이 있었기에. 나는 느긋하게 책장을 넘겼다. 마계의 성서, 그 거창한 이름에 맞게 네크로노미콘엔 마계의 지식이 가득했다.
[마계의 성서, 진(眞) 네크로노미콘]
[등급 : 에픽]
[제한 : 오직 마계의 존재만이 열람할 수 있다.]
[효과 : 이해 시, 마계에 관한 지식을 습득한다.]
[설명 : 마계의 리치, 디스커스가 집필한 서적. 악마에게 침식된 마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이 서술되어 있다. 더불어 위험천만한 마계에서 디스커스의 안식처에 출입할 수 있는 증표가 된다.]
스륵.
책장을 하나씩 넘기는데…….
디스커스, 이 녀석 내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녀석이었나 본데?
악마에게 완전히 넘어간 마계에서 세력을 유지하고, 상위 마왕 부에르에게 도전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짐작하긴 했었다.
그러나 예상보다도 훨씬 대단하다.
──────
마계를 지배하는 건 십좌의 왕이다. 그들의 전지전능은 마계에 밀접한 영향을 끼친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그러한 마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자신만의 규율이 필요하다…….
──────
뭣보다 디스커스가 남긴 정보의 질이 상당히 높았다.
만약, 이 정보들을 모른 채 마계에 진입했더라면…….
말 그대로 비명횡사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수준으로.
그런 의미에서.
‘너 정말 뭐냐, 그랑펠?’
칠죄종 분노를 사냥한 것도 모자라서.
부에르에.
그런 부에르와 맞먹는 디스커스를 연달아서 사냥하다니.
대체 어떤 방식으로 사냥한 건지.
혹시 남겨진 동영상이라도 있다면 확인하고 싶을 정도다.
‘……대충이라도 따라 해보게.’
어쨌거나 잘됐다. 마계 진입을 앞둔 내게는 이보다 귀한 정보가 또 없겠지. 시간의 흐름도 늦춰뒀겠다, 마계의 지식을 천천히 습득해 보자.
나는 얼어붙은 AAU 지부상실에서 태연하게도 책장을 넘겼다.
쏟아지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말했잖아?
자백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나갈 수 없을 거라고.
때마침 할 일이 생겼겠다.
나로서는 서두를 필요가 없어졌거든.
*
런던 지부장, 베이커는 양팔뚝을 쓰다듬었다.
“묘한 한기가 느껴집니다. 미스터 박.”
[『절대영도』].
그러나 엄연히 배려가 깃든 한기였다.
마왕으로 거듭나며 드높은 마법 발현력을 갖추게 된 호열이었다. 덕분에 오직 시간의 흐름만 얼어붙게 했을 뿐. 주변의 공기까지 얼어붙게 한 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지금의 한기는 무엇 때문인가?
박민재가 입을 연다.
“상당히 실망하신 모양이십니다.”
아마도 호열이 내뿜는 감정 때문이리라.
얼핏 보면 평온한 광경이었다.
찻잔을 들고, 책장을 넘기시는 모습은. 그러나 명백한 경고처럼 비쳤다. 호열이 손에 쥐고 있는 서적이 문제의 원인이었다. 베이커가 속삭인다.
“과연, 마계를 상대하기 위해선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야 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 표지만 봐도 마계 관련 서적처럼 보이지 않나요, 미스터 박?”
박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아르카나의 스킬북처럼 보이진 않네요.”
아르카나의 전문가들인 이들이었다. 저건 확실히 아르카나 대륙보다는 마계에서 튀어나온 아이템이 확실해 보였다. 베이커가 씁쓸하게 웃었다.
“마계라니. 저희를 추궁하시는 와중에도 짊어지신 무게를 잊지 않고 계시는군요, 총책임자님께서는. 이거, 저희도 소홀히 할 수 없겠습니다. 미스터 박?”
박민재는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주위를 살폈다.
다짐하지 않았던가?
호열의 발목을 붙잡을 존재는 악마로 충분하다.
적어도 현실에서만큼은.
누구도 호열의 발목을 붙잡을 수 없게 하겠다고.
“코스모의 미친개는 한번 물면 놓지 않거든요.”
그렇다.
박민재와 베이커는 물밑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들부터가 지부장이기에 알 수 있었다.
주어진 업무에서 벗어나 한눈을 팔고, 꿍꿍이를 품는 이들은 눈에 띄는 법이었으니까.
“과거와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밖으로 나돌게 된 이들이나 찔리는 구석이 있어 애써 외면했던 이들은 모르겠지만, 기이를 향해 도약했던 우리 AAU 아닙니까?”
“그렇지요.”
“지금쯤이면 계획대로 마탑이 움직였을 겁니다.”
대격변 초창기.
레이먼 션이 지급하는 균열 클리어 보상금의 자금 흐름을 추적했던 각국의 정부였다. 레이먼 션이 대격변의 원흉이라 생각하던 그땐, 레이먼 션만 체포하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었으니까.
그러나 레이먼 션은 영악했다.
“흔적도 찾을 수 없었죠. 수억이 넘는 아르카나 대륙 전기 사용자의 신상정보부터 DNA 정보. 그를 활용한 방대한 차명 계좌에 코스모의 초대형 서버까지 활용한 우회는 그 어떤 해커도 추적할 수 없었으니 말입니다.”
박민재가 한마디로 정리한다.
“과학의 한계였습니다.”
그러나 말했듯 [『기이』]를 향해 나아가는 AAU였다.
“하지만 마탑의 마법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지죠. 마르셀로 탑주님께 이야기를 듣자 하니, 대상에 담긴 기억을 읽어내는 마법이 존재한다고 하시더군요.”
“오호라!”
“소지품에 남겨진 기억도 예외는 아니겠지요.”
“……!”
박민재의 말에 몇몇 지부장들이 흠칫한다.
주머니를 뒤져봐도 잡혀오는 건 없었다.
AAU 지부장 회의.
안건의 외부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서.
소지품은 회장 밖에 보관하고 출입하는 게 원칙이었으니까.
박민재가 씨익 입꼬리를 올린다.
“보안에 신경을 써서 말끔하게 삭제했다고 한들, 마법은 기억 자체를 읽어내는 거니까요. 저야 마법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으니, 어떤 식으로 발현될지 짐작할 수 없지만. 천하의 마탑입니다. 분명 읽어낼 수 있겠지요.”
박민재가 느긋하게 지부장들을 둘러본다.
“총책임자님께서 시간을 멈춰주신 덕분에 서두를 것도 없습니다. 외부와 완벽하게 단절된 채, 손발이 꽁꽁 묶인 채, 결과를 기다리면 되는 겁니다. 청렴결백하다면 가슴을 졸일 필요도 없겠죠. 다만, 그게 아니라면…….”
“……?”
“지금의 서늘함이 한랭지옥처럼 느껴지겠지만.”
“……!”
시간의 흐름이 멈췄기에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체감상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나둘…….
“……젠장.”
어깨를 움찔거렸던 지부장들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으로 유스라의 총책임자.
호열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스륵.
그러나 호열은 그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고작 미꾸라지 몇 마리에 따위에게 시선을 주기에는.
머리에 새겨넣고 있는.
“!”
마계의 정보가 심각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었다.
*
아르카나 대륙.
베히모스의 아가리.
흉악한 마계의 통로를 지키고 있는 건 거너였다.
“현재 이상 현상은 포착되지 않는다.”
아이언 캐슬 호를 포함한 성전 연합군은 도전자를 추려내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 십좌를 두고 펼쳐질 마왕 쟁탈전이다. 총대장, 호열에게 방해가 될 악마의 머릿수를 조금이라도 줄여놓을 계획이었다.
거너가 작게 중얼거렸다.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거너는 아가리 주변에 널린 살점들을 바라봤다.
아르카나 대륙은 이미 악마에 의해 쑥대밭이 됐다.
그러나 베히모스의 아가리는 충실하게 악마를 걸러내고 있었다.
‘못해도 절반은 저렇게 찢겨나갔겠지.’
쉽게 말하자면 아르카나 대륙을 뒤덮은 방대한 악마가 절반가량이나 줄어든 머릿수였단 것이었다. 그러니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대체 마계란 어떤 곳이란 말이냐?”
더욱이 모험가들의 세계에 전해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저 아가리가 더는 마계의 악마를 찢어발기지 않는다고 했겠다.
거너는 아르카나 대륙을 바라봤다.
“……그 대군 앞에서 무사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총대장, 그도 이런 상황을 내다봤던 것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결단을 내린 것인지도 모른다.
아르카나 대륙에게는 더는 쏟아지는 악마를 버텨낼 재간이 없으니, 표적인 자신이 직접 마계로 몸을 던지는 게 대륙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거너는 디스커스를 압살하던 호열의 초월적인 무력을 목격했다. 그럼에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베히모스의 아가리. 저 공허한 구멍을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모를 불안이 치솟았다.
하지만.
절레절레.
거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정신 차리자고.”
스스로 타이르고 조종대를 잡은 순간이었다.
움찔─
베히모스의 아가리.
그 심연 속에서 치솟는 방대한 기세.
거너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
어떤 놈이냐?
눈을 부릅뜨는데…….
어째서인가, 그 형체가 낯설지 않았다.
“저, 저건……!”
거너가 말을 더듬었다. 아무리 봐도 ‘그놈’이었다. 총대장이 쓰러트렸던 그 해골이 또 다시 베히모스의 아가리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던 것이었다.
거너가 다급히 외쳤다.
“여, 여기는 거너! 마계의 리치, 디스커스가 부활했다!!”
.
.
.
부활이 아니다.
마계의 설정이다.
나는 책의 구절을 다시금 살폈다.
──────
마계에선 육체와 영혼이 분리된다.
──────
그러고는 읊조렸다.
“나쁘지 않은 소식이군.”
……이거, 잘하면 흑역사에서 해방될 수 있는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