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0화. 출사표 (2)
[어둠의 이해].
그 저주를 통해 그랑펠의 과거를 1할이나마 이해한 영향인가.
본가의 풍경 위에 클라우디 가문의 전경이 겹쳐 보였다.
“……!”
순간에 불과하지만, 선명하게도.
이윽고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분주한 소리들.
생기 넘치는 목소리들은 나를.
아니, 그랑펠을 우두커니 멈춰 서게 했다.
한동안 마당에 서 있던 나를 일깨운 건.
웬수, 이예림의 부름이었다.
“왔어?”
나는 지켜봐서 알고 있었다.
그랑펠의 누이가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를.
클라우디가 몰락하던 ‘그날’.
그랑펠의 누이는 거악의 의뢰를 받은 그림자 용병단 손에 쓰러졌다. 암시장을 떠돌고 있다는 은빛 머리카락이 그랑펠의 누이가 남긴 유일한 흔적이었다.
그리고.
‘……아니.’
그랑펠의 시야가 웬수.
이예림에게서 자신의 누이를 겹쳐보고 있었다.
나, 이호열.
정말이지,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가 없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다. 그랑펠……!’
저걸 보고 누이를 떠올리는 건 말이지.
네 누이를 향한 모욕일걸?
왜, 방금 목소리만 해도 그렇다.
왔어.
고작 두 글자에 어떻게 이렇게 장난기가 넘칠 수 있는지.
진심으로 궁금할 정도였으니까.
‘젠장.’
하지만 그와 동시에 클라우디 가문의 역사를 오롯이 인정하기로 했던 나였다. 과오가 있기에. 그랑펠의 감정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다는 뜻이었다.
‘……진짜 억울하다.’
왜 하필이면 이예림이냐?
차라리 큰누나였으면 겹쳐서 보는 것도.
네 애처로운 감정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진심으로 억울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 이예림이 말했다.
“……이호열, 너 우냐?”
우냐고?
봐봐, 지금도 놀리는데 여념이 없는 거.
하나뿐인 동생의 속내를 이해할 생각도 없구만.
‘억울해서 운다. 억울해서.’
이런 상황에서도 놀려먹을 생각밖에 없는 걸 보면 말이야.
솔직한 심정 같아서는 대답도 하지 않고 몸을 돌리고 싶었거늘.
그랑펠의 격식과 혈육 사랑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
그렇다면, 차라리 철면피를 백분 써먹는 수밖에 없다.
나는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누님.”
“……와씨 그 말투 어떻게 안 되는 거냐, 호열아?”
“합당한 격식을 갖출 뿐입니다.”
연년생.
어렸을 때부터 서로 고운 말은 하질 못하던 나와 이예림이었다. 내뱉는 나도 죽을 것 같은 기분이지만, 듣는 이예림도 마냥 즐겁기만 하진 않을걸?
좋다.
극약처방이다.
나는 차오르는 격식을 억제하지 않았다.
“누님을 뒤따르겠습니다.”
“뒤따라? 나더러 앞서 가라고? 내가 무슨 너처럼 마왕이라도 되냐? 여기서부터 거실까지 열 걸음도 안 되겠다, 호열아. 무슨 앞장을 서고 말고…….”
“한 걸음, 한 걸음에도 예를 갖추겠습니다.”
“우웩.”
인정하고 싶지는 않다만, 어쨌거나 남매니까 닮을 수밖에 없다.
내가 그랑펠의 격식에 치를 떠는 것만큼 이예림도 버티기 힘들어할 수밖에 없다는 뜻. 결국, 이예림이 질린 표정을 지으며 후다닥 나를 스쳐 지나간다.
“엄마, 호열이 왔다아아아!!”
현관문이 열리기도 전부터 쩌렁쩌렁 외친다.
나는 그제야 몸을 돌렸다.
열린 문틈으로 들려오는 아랑이의 목소리.
“삼초오오온!”
이 순간, 그랑펠의 감정대로라면 따뜻하게만 느껴져야 할 본가가. 적정 레벨, 측정 불가의 균열처럼 불길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부디 수치사하지 않기를.’
나는 다짐하며 걸음을 옮겼다.
또각.
.
.
.
“어디 아픈 데는 없고, 우리 아들?”
최강희 여사님께선 내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을 터트리셨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찾아뵌 이후로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
심정이 어떠실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효과는 이해가 안 되지만.’
우리 엄마 맞아?
누나들한테 이야기는 들었었다. 엄마랑 같이 밖에 나가면 자매 아니냐는 소릴 듣는다고 한다고. 이거, [아리아 이끼]를 괜히 젊음의 묘약이라 부르는 게 아닌 것 같았다.
‘과장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그리고 그런 아리아 이끼를 뇌물……. 아니, 선물로 챙겨왔기 때문일까? 최강희 여사님과의 상봉은 웬수들의 소란으로 일단락되었다.
“언니, 이게 그거래. 엄마가 바르던 거!”
“올. 이호열, 이제는 척하면 척이구나? 그래, 우리가 괜히 단톡방에서 그 얘길 했던 게 아니었거든! 야, 이예림. 찬물도 위아래가 있지. 씁, 손에 쥔 거 내려놔.”
“얘들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티격태격거리는 2호와 3호를 말리는 큰누나의 시선도 아리아 이끼에 꽂힌 걸 보면…….
역시 챙겨오길 잘했다, 호열아.
‘여신교에 헌금을 낸 보람이 있군.’
툭.
“고생했다.”
아버지, 이준욱 사장님께선 별다른 말없이 내 어깨를 두들겨 주셨다. 표정을 보아하니 입술을 꾹 다물고 계신 모습이 이제야 완전히 마음을 놓으신 것 같았다.
“몸도, 마음도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다.”
다음으론 웬수들이 나를 못살게 굴 타이밍이었거늘.
하나뿐인 조카, 아랑이가 나를 살렸다.
원래도 나를 잘 따르던 아랑이었지만. 자취방에서도 느낀 것처럼 아랑이는 어째 달라진 내 말투와 행동이 더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아랑아. 삼촌, 힘들어.”
큰누나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아랑이에 곤란해하면서도 덧붙인다. 쟤가 아무래도 공주님, 왕자님 나오는 영화를 아주 몰입해서 본 것 같다고.
“뭐, 왕자님? 아랑아, 너 속으면 안 된다?”
이예림은 콧방귀를 뀌고, 큰누나는 안절부절못했다.
“피곤해서 어떡해, 호열아?”
“괜찮습니다.”
왕자와 공주라.
……지금은 얼마든지 몰입해도 괜찮다, 아랑아.
부디 이 삼촌처럼 뒤늦게 흑역사에 몰입하지는 마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아랑이 덕분, 당장 용건은 오가지 않았다.
‘가끔 보면 의문이란 말이야.’
그랑펠의 까다롭기 그지없는 입맛.
가족들이 모인 밥상 앞에서도 반찬 투정을 하면 어쩌나 작게나마 우려했거늘. 다행히도 그런 불경스러운 일은 없었다.
혈육과 함께하는 식탁에서만큼은 그랑펠의 성질머리도 한없이 너그러웠다.
물론.
“호열아, 커피 마실 거야?”
“혹, 녹차가 있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녹차? 티백 녹차밖에 없는데 괜찮을까?”
“더할 나위 없습니다.”
그놈의 녹차만큼은 포기할 수 없는 모양이었지만.
창문 밖에선 해가 저물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쌩쌩하던 아랑이가 어느새 내 무릎 위에서 잠이 들었다. 큰누나가 아랑이를 안아서 옮기려고 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다리 안 저려? 아랑이 많이 컸는데, 이제.”
“잘 먹고 다녀서 볼 빵빵한 거 봐, 아랑이.”
“이예림, 니 뱃살 간수나 잘해.”
“언니,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리는 거야.”
이런 걸로 발이 저리기에는.
매일같이 말도 안 되는 육체 단련을 소화해 낸.
내 몸뚱이가 지나치게 튼튼하다.
그렇다.
몸은 문제가 없었다.
나의 수치심이 문제였지.
‘……심각하다, 진짜.’
거실.
결국, 온 가족이 모이고야 말았다.
그런 자리에서 나는 생전 하지도 않았던 존댓말을, 극진한 존칭을 뻔뻔하게도 지껄이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당사자인 나를 제외하고, 이딴 말투에 익숙해졌다는 걸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대화가 오가고 있다.
“아르카나는 어땠어? 사진 좀 찍어오면 안 돼?”
“나중엔 거기로 여행도 갈 수 있으려나.”
“아차, 호열아. 이번 여름휴가 때 유스라로 놀러 가도 될까? 엄마랑 아빠 모시고 가면 좋을 것 같은데. 거기 황금 궁전 겁나게 예쁘더라고. 인별에서 난리야~”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평화로우니 다행이지만.’
큰누나, 작은 누나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건 그렇다고 치더라도. 웬일로 이예림이 얌전했다. 왜, 전신 거울 앞에서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가?
‘천외천에 마왕에 흑암룡에……!’
이예림.
저건 나와 대면하기를 잔뜩 벼르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었거든. 어쨌거나 다행이었다. 엄마도, 아빠도 멀쩡한 내 모습을 보고 걱정을 지우신 기색이셨으니까.
‘그래,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쯤에서 멈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나는 무엇 하나 숨길 수 없다.
선의의 거짓말은 물론 빈말조차도 할 수 없는 몸이다.
심지어.
-“그렇지 않아도 전할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내뱉은 말도 반드시 지켜야만 하지.
그러니까 나는.
녹차를 완전히 비우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달칵.
정말이지, 단도직입적으로.
“마계에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누나들은 그리고 엄마 아빠는 아르카나에 관해 잘 알지 못하신다. 그러나 아르카나의 위협은 이제 상식이었다.
그중에서도 악마족 몬스터는 인류에겐 대재앙 수준.
“……마계라고?”
그런 악마족의 고향이 마계라는 것?
AAU를 통해서 익히 알려졌었다.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는다.
찬물을 끼얹어도 유분수구나, 호열아.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럴 줄 알았지. 잘 다녀와.”
누구보다 나를 격렬하게 만류할 것 같았던 웬수.
이예림이 그렇게 말했다.
장난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눈빛과 음성으로.
“다녀온 다음에는 집에 좀 자주 들르고 알겠지?”
……뭔데?
징그럽게.
갑자기 철이라도 들었어?
.
.
.
호열이가 떠난 뒤.
거실에는 적막이 맴돌았다.
마계에 진입하겠다.
마왕을 사냥하기 위해서.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을 지키기 위해서.
호열이에겐 분명한 대의가 있었다.
그러나 대의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최강희 여사께서 입을 여신다.
“세상? 나는 우리 호열이가 더 중요해요.”
아버지, 이준욱도 말없이 지그시 고개를 끄덕이셨다.
가족과 전 세계.
둘 중 하나를 택한다면 당연히 가족을 택할 두 사람이었다.
2호, 이지윤이 검색결과를 읊는다.
“마계……. 아르카나 대륙보다 더 위험하다고 하네. 그래도 우리 호열이 거짓말은 안 해?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할 때는 걱정할 거 하나도 없다고 하더니만, 이번에는 그런 소리 안 하더라고.”
이은혜는 잠든 아랑이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었다.
“할 이야기가 있다고, 집으로 찾아온다고 해서 심상치 않은 일일 것 같다고 짐작은 했는데……. 호열이가 저런 일을 앞둔 줄은 몰랐네. 호열이, 혼자서 엄청나게 고민했겠지? 나, 누나 맞아?”
“언니. 언니가 그렇게 말하면 엄마 아빠는 뭐가 되고, 남은 누나들은 뭐가 돼?”
쩝.
이지윤은 멋쩍게 말하고는 동생을 바라봤다.
남동생과 마찬가지로 하나뿐인 여동생, 이예림.
궁금한 게 있었다.
“이예림, 너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말한 거야?”
연년생.
이젠 표정만 봐도 속내를 알 수 있었다.
이예림은 평소답지 않았다.
호열이를 가장 많이 생각하는 건 세 자매 중에서 단연 이예림이었다. 그 표현 방법이 솔직하지 못할 뿐이지. 호열이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부터 한 살 차이라는 터울 덕분에 호열이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봐 온 이예림이었으니까.
“너, 잘 갔다 오라는 말. 진심으로 한 거야?”
이지윤은 어이가 없었다.
호열이를 만류할 수 없다는 거?
이미 알고 있었다.
플레이어라는 게 때려치우고 싶어도 때려치울 수 없는 직업이란 건 TV를 통해 지켜봐서 알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우리 호열이가 워낙 잘났어야지.
인터넷 댓글에서도 흔히 봤다.
호열이가 없었으면 지구가 멸망할 뻔했던 적도.
벌써 손가락으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이예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예림의 저렇게 반응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지윤은 혹시나 싶어서 물었다.
“너희 미리 무슨 얘기라도 하고 들어왔냐?”
이예림은 고개를 저었다. 모든 걸 터놓고 지내는 언니, 엄마, 아빠라고 해도 지금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에 남은 선명한 장면을.
쏟아지는 석양.
역광의 그림자 아래에서.
고개를 돌린 호열이는 눈물을 흘렸다.
뚝─
뺨을 타고 떨어지는 눈물을 이예림은 본의 아니게 목격하고 말았다. 그래서 더욱 장난스럽게 호열이를 대하며 넘어갔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도저히 몰랐으니까.
그러나.
“나도 눈치라는 게 있거든.”
알 수 있었다.
하나뿐인 동생은 분명 자신이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을 가족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을 거라고. 물론, 호열이가 어째서 눈물을 흘린 건지 이예림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그리고 자기가 한 말은 반드시 지키잖아. 호열이?”
가족이니까.
*
그랑펠의 성질머리가 고분고분한 건 혈육 앞 한정이라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된다. AAU 지부장 회의. 나는 유스라 지부의 총책임자로서 한자리에 모인 지부장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단순한 무능인가, 그게 아니라면 공조인가.”
다들 그동안 편하게 지냈지?
제군들의 안일함이 이번 사태로 드러났다.
당신들도 수치심이란 걸 느낄 수 있으면 좋겠군.
‘……나처럼.’
초인이라 불리는.
마탑의 마법사들조차 쥐 잡듯 잡은 나다.
그런 내가 진심을 담아서 읊조렸다.
“이 시간부로, 진상을 규명하겠다.”
미꾸라지를 찾을 시간이다.
그러나 미꾸라지를 잡기 위해 흙탕물 휘적거리는 건 내가 아니다.
결백을 증명해야 할 건 이제 내가 아닌 당신네들이니까.
나는 선언했다.
“결백을 증명하기 전까지. 누구도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
나는 이런 일에 귀한 시간을 허비할 생각 따윈 없었다.
아르카나 대륙과 현실의 시차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니까.
쩌저저적!
[『절대영도』].
우선 시간의 흐름부터 얼려주겠다.
“이른 감이 있지만, 때론 냉녹차도 나쁘지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