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88화 (388/489)

◈ 388화. 네 모든 것을

피로 적은 유서와는 또 인연이 깊은 나다.

왜, 무간에 투옥된 악마 숭배자만 하더라도.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피로 [저주]를 남겼었거든.

‘하지만 이건 저주가 아니다.’

원로 마법사였던 악마 숭배자와 달리 일반인이었던 대통령에겐 [저주]를 남길만한 능력은 없다. 유서는 그저 유서일뿐. 서부 지부장, 조슈아가 무거운 입을 연다.

“처음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땐 아직도 제가 꿈을 꾸는 건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꿈이 아니더군요.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혹시라도 각하께선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 건가, 하고는요. 그렇지만 그 유서를 확인한 순간…….”

그 눈빛이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저는 솔직하게 두렵습니다. 이 상황이.”

미국이 마탑을 간과한 것.

그 이상으로 세계는.

레이먼 션이라는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동부 지부장, 유진 매케인.

그도 입을 열었다.

“아르카나에 관해선 문외한인 제가 보기에도 레이먼 션은 경계 대상이었습니다. 그가 가지는 영향력이 어느 누구보다 커 보였기 때문입니다.”

영향력이 뒤로 밀렸다고 섭섭해하지 마라, 그랑펠.

‘사실 당연한 거지.’

레이먼 션.

대격변 이후 유일무이해진 아르카나의 관리자.

조슈아가 유진의 말을 정정한다.

“전문가로서 한마디 하겠습니다, 유진. 설령 레이먼 션이라고 균열을 완전히 통제할 순 없었습니다. 긴급 업데이트가 그 증거겠지요. 그러나 그가 가지는 막대한 영향력만큼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인류는 알게 모르게 많은 걸 레이먼에게 의지하고 있으니까요.”

조슈아의 말도 옳다.

‘그게 초반부터 레이먼을 경계하지 못한 이유였지.’

플레이어가 사지(死地)인 균열로 뛰어드는 이유?

가장 큰 이유는 돈이다.

균열을 클리어할 시 지급되는 막대한 균열 보상금.

‘물론, 내 경우는 달랐지만.’

그놈의 청렴결백……!

그와 동시에 이따위 성질머리로는 사회생활을 지속할 수 없었기에.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플레이어의 삶을 택했지만, 다른 플레이어들에겐 부귀영화라는 명확한 이유가 있었단 것이다.

나의 입방정이 굳이 덧붙인다.

“허나, 거품과도 같은 영향력이다.”

“……?”

내 말에 조슈아와 유진.

그리고 미국 정부의 고위 인사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나, 이호열이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애써 유감을 표하는 게 고작이었을걸.’

상황은 심상치 않았다.

미국의 대통령께서 레이먼 션이라 빼곡히 적힌 유서만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번 사태에 레이먼 션의 마수가 뻗쳐있었다는 것.

말고는 짐작할 수 있는 게 아직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랑펠의 관점은 달랐다.

“깊게 뿌리내렸다 한들, 잡초는 잡초에 불과한 법이니.”

레이먼 션.

그가 악마와 다를 바 없다고 판단을 내린 건 오래전이다.

그래, 그랑펠에게 악마는 잡초보다 못한 존재였으니까.

현실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레이먼 션이라고 해도.

예외는 없다는 거겠지.

나의 발언에 정부 측 인사 중 하나가 입을 연다.

“잡초라니?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플레이어 이호열? 그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손을 뻗쳐왔는지 확신할 수 없네. 막말로 여기에 있는 이들 중 누군가가 여전히 레이먼 션과 연줄이 닿아있을지도 모르지.”

“……!”

묘한 정적이 흐른다.

‘어쩌면 추잡하게 엮여있는 게 당연할지도.’

흘려들을 말이 아니었다.

악마와는 경우가 다르다.

레이먼 션은 대격변 이전부터 현실에서 멀쩡히 활동했던 존재였으니까. 마네킹을 내세워 코스모 시절부터 수많은 연줄을 쌓아왔을 가능성? 차고 넘쳤다.

“그리고 어쩌면 각하께서도……. 그와 얽힌 이들 중 하나였을지도 모르겠지. 나는 누구도 탓하려는 게 아닐세. 그만큼 깊게 감히 상상할 수도 없게 뿌리내리고 있다는 걸세, 레이먼 션은!”

이제 나를 향해 시선이 쏟아진다.

다들 내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지그시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이 없군.’

그랑펠.

너는 공감하지 못하겠지만, 돈은 중요하거든. 그런 의미에서 레이먼 션은 플레이어에게 빛과 소금이었다. 국가가 플레이어에게 지급하는 균열 클리어 보상금은 목숨 값치고는 소액.

‘나도 받아봐서 알지.’

그에 비해 레이먼 션이 지급하는 보상금은 ‘억’.

그것이 레이먼 션의 영향력, 그 원천이라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한들?”

“나는 바로잡을 수 있다.”

“바로잡을 수 있다니요……?”

나는 그 막대한 영향력조차 업신여기고 있었으니.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레이먼 션, 녀석의 영향력을 전면 부정할 생각이었다.

조슈아가 조심스럽게 물어온다.

“총책임자님, 그 뜻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어떻게 그 막대한 영향력을.

레이먼 션을 부정하려는 계획이냐는 거겠지.

말했다시피 레이먼 션의 영향력은 막대한 부에서 나온다.

‘아르카나의 살인적인 이용료를 떠올리면 이상하지 않아.’

아르카나 대륙 전기 시절.

접속기 하나에 천만 원.

매달 수십만 원의 접속료를 경험해봤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말했다.

“그 모든 걸 내가 대신하겠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야 간단하다.

내가 ‘어디’ 총책임자인데?

광활한 아르카나 대륙에서도 무려 전설의 보물섬이라 불리던 유스라 제도의 총책임자. 그렇다. 나는 유스라 왕국의 재력을 바탕으로 레이먼 션의 영향력을 서서히 억제할 생각이었다.

‘소시민 이호열이었으면 절대 꿈도 안 꿨다.’

그러나 우리 청렴결백하시고, 부귀영화를 한낱 돌처럼 여기는 그랑펠 님께서 나의 혀와 함께하셨으니. 나는 뻔뻔하게 입을 열 수 있었다.

“그리고 레이먼 션, 그 가증스러운 악마를 사냥하겠다.”

*

유스라 왕국, 황금 송아지 주점.

세상에 무엇 하나 감추지 않겠노라.

‘누군가’의 결단 덕분.

미국 대통령의 유서는 세상에 공개되었다.

찔리는 구석이 있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니다, 책임을 짊어지고 결단을 내린 것이다…….

덕분에 끊이지 않던 추측들이 가라앉았다.

“분위기 한번 지랄 맞군.”

쾅!

“왜 이렇게 침울해. 사람 뒈지는 거 처음 봐?”

락키드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웬일로 술을 통째로 들이켜는 게 아니라 잔에 따라 마시는 거냐고 묻는다면, 육체 관리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덕분이었다.

“자제라는 걸 배웠군, 락키드.”

“뭐래, 영감탱이가? 그냥 술맛이 안 나서 그런 건데.”

“뭐, 아무래도 좋아. 언제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게 될지 알 수 없으니, 부디 만취하지만 말게. 자네의 주사는 지나치게 시끄럽다고. 만류하기엔 난 너무 늙었어.”

“쯧. 늙어서 그런가, 노파심이 가득하군.”

그림자 용병단 7석, 알카리가 클클 웃는다.

아르카나 대륙으로의 진입이 가능해진 지금.

그림자 용병단은 단장, 울프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뭐, 좋아. 평소 같았으면 무시했을 텐데. 이번에는 듣는 척이라도 해주지, 영감탱이. 혹시라도 만취해서 키치, 그걸 두 눈으로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면 안 되잖아?”

그림자 용병단에겐 탈주자, 키치를 확보해야 한다는 명확한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울프에게 깃든 단장의 징표, 『그림자 신의 낙인』이 자신들을 인도할 때까지. 그림자 용병단원들은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질겅질겅.

육포를 씹던 락키드가 리모컨을 만지작거린다.

“근데, 어딜 틀어도 똑같은 소리뿐이야? 재미없게.”

한 나라의 왕이 뒈지는 소식이야, 아르카나 대륙에서는 꽤 흔한 일이었다. 더욱이 그들의 죽음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본 적이 있는 그림자 용병단이었다.

“자살은 개뿔이. 보나 마나 레이먼 션인가, 뭔가 하는 새끼가 관련된 거겠지. 보통 새끼가 아닌 것 같기는 해? 뻔히 자기 이름을 남기게 놔둔 걸 보면.”

락키드의 쩌렁쩌렁한 목소리.

덕분에 주점의 플레이어들이 속닥거린다.

“……존나 찝찝하지 않냐?”

“뭐가?”

“아니, 그렇지 않아도 이상했잖아. 레이먼 션, 그거.”

레이먼 션의 행보는 모순적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패치 내역을 정기 업데이트 할 땐 인류의 멸망을 바라는 것 같았거늘. 정작 인류가 멸망하기를 원했다면 업데이트 내역 자체를 띄우지 않았을 터.

“이상하긴 해도, 이호열이 했던 말이 맞았던 게 확실해! 이번 사태의 원흉이 레이먼 션이라면……. 레이먼 션, 그 새낀 악마와 다를 바 없잖아?”

유서에서 알 수 있듯.

미국을 배후에서 주무른 이가 레이먼 션이 맞다면.

레이먼 션은 인류의 파멸을 바라는 게 확실했다.

만약, 호열이 나서서 상황을 중재하지 않았다면. 마탑이 발현한 메테오 스트라이크가 미국을 강타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몇몇이 한숨을 내쉰다.

“그나저나 진짜 악랄한 새끼라니까? 이런 진실을 알게 됐어도 우리를, 플레이어를 고민에 빠지게 하고 있잖아? 진짜 악마 같은 새끼…….”

당연한 반응이었다.

레이먼 션은 플레이어의 숨통을 쥐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레이먼 션이 없다면, 당장 장비값을 충당할 수 없는 플레이어들이었으니까. 설령, 레이먼 션의 의도가 불순하다는 걸 알아차렸다고 해도.

“더럽고 찝찝해도 당장 클리어 보상금이 없으면…….”

모두가 반짝반짝 빛나는 스타 플레이어를 꿈꾸지만, 모두가 빛날 순 없는 법. 대다수 플레이어는 레이먼 션의 균열 클리어 보상금으로 하루하루를 버텨왔단 뜻이다.

답답한 마음에 애꿎은 맥주만 들이켰다.

“……젠장.”

무엇이 옳고, 옳지 않은가는 명확히 알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듯.

이번 사태에도 선과 악은 명확했으니까.

그러나 악랄했다.

레이먼 션의 마수는.

“아무리 그래도 우리부터 먹고살아야 하잖아?”

인간을 스스로 죄악감에 시달리게 한다.

동시에 자신을 향한 의존도를 키워간다.

악마의 유혹이라는 걸 알면서도 휘둘릴 수밖에 없게 한다.

그러나.

황금 송아지 주점에 퍼져가던 부정적인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윽고, 떠올랐으니까.

그것은 유스라 왕국에 선포된 새로운 법령.

“!!!”

플레이어들의 시야가 점멸한다.

[퀘스트 : 유스라의 치하]

균열을 폐쇄하고 정당한 보상을 쟁취하라.

전설의 고대 왕국 유스라가 그대의 노고를 성대히 치하하리라.

단, 유스라의 보상을 수령 시 균열 클리어 기록은 사라진다.

─균열을 클리어하라. (진행 중)

“자, 잠깐만. 이거?!”

레이먼 션의 마수를 쳐낼 수 있는 퀘스트가 떠오른 것이었다.

그러나 플레이어들은 냉정했다.

퀘스트의 조항을 꼼꼼하게 살피고 비교했다.

“그러니까……. 유스라 왕국에서 보상을 수령하면 다른 쪽에서 지급하는 균열 클리어 보상은 받을 수 없다는 뜻이에요. 아마도 레이먼 션이 지급하는 보상금도 포함이겠죠?”

그중에는 타이밍이 맞아떨어져 균열을 클리어하자마자 메시지를 목격한 이들도 있었다. 그런 이들이 유스라 왕국, 황금 궁전으로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

그리고 목격했다.

“기다리고 있었네.”

유스라의 국왕, 하쿠나.

“유스라가 그대들에게 합당한 전리품을 제공하지.”

자신들에게 전면개방된 유스라의 황궁 서고를.

“우리가 보, 보상을 선택할 수 있다고?!”

그 소식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플레이어들에겐 현금보다 귀한 취급을 받는 아이템이 아니던가?

가장 먼저 플레이어 커뮤니티가 불타기 시작했다.

-그동안 레이먼 션 후려치기에 속은 흑우들 없지???

-모르면 그냥 외워 유스라에 가면 공적이 복사가 된다니까?!

-골드로만 받아도 개이득임 ㄹㅇㅋㅋ

-요새 금 한 돈에 얼마임??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레이먼 션이 공을 들여가며 뻗쳐나간 마수가.

순식간에 잘려나가고 있었다.

락키드가 콧방귀를 뀌었다.

“말했지? 뭘 그렇게 침울해 하냐고.”

락키드의 시선이 TV 속 호열을 향한다.

“저 인간이 새파랗게 살아있는데, 그딴 걱정을 왜 해?”

*

나는 어느 때보다 진중한 투로 읊조렸다.

“그렇지 않아도 전할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통화 상대는 다름 아닌 애증의 웬수.

‘내 인생아.’

멋대로 축포를 터트리지 마라, 유스라 왕국아. 정작 당사자인 내게는 아직, 레이먼 션을 상대하는 것보다도 중요한 일이 남아있단 말이다……!

나는 의미심장하게 말을 끝마쳤다.

“지금 본가(本家)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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