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7화. 꽃과 잡초 (2)
화염마법학 선임, 벤쉬 윌리엄.
“하아.”
벤쉬는 상공에서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쉬었다.
비전 마법의 위력을 뽐낼 기회였거늘.
우둔하게도 이 수석님 앞에서 경거망동하고 말았다.
‘제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이 수석님……!’
따지고 보면 벤쉬는 중책을 떠맡았다.
무려 붕괴한 균열에서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를 처리하는 역할!
그러나 벤쉬는 짐작하고 있었다.
수백의 균열이 생성됐지만, 붕괴하는 균열은 하나도 없을 거란 걸.
“뱅그릿, 어떻게 하나만 남겨주면 안 되겠습니까……?”
그것은 동료 혹은 마탑을 향한 신뢰.
무엇보다 마탑의 울타리를 넘보지 못하던 녀석들이다.
고작 그 수준으로 마탑의 선임 마법사들과 대적할 수 있을까?
벤쉬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입맛을 다신다.
“……그래도 혹시 또 모르지?”
아르카나 대륙이 어떻게 변화했는가?
아르카나 대륙을 밟아보지 못한 자신이기에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마계에 짓밟혀 쑥대밭이 된 아르카나 대륙에서도 세력을 유지한 몬스터들이었다.
‘나름대로 강한 녀석들일 터.’
슈슉.
벤쉬는 마도구를 손바닥 안에서 초조하게 굴려가며 균열의 동태를 살폈다. 어디 보자, 차분히 바라보고 있자니 마냥 낙담할 이유는 없었는지도 모른다.
‘왜, 키코 선임만 하더라도…….’
마법부여학 선임, 키코 아르민.
매일을 가넷 홀에서 마법부여 연구에만 매진하는 그녀였다. 마법부여학에서 그녀의 성과를 무시할 수 없지만, 지금과 같은 실전 전투에는 분명 능숙하지 않다.
휙.
문득, 벤쉬의 시선이 도심을 향했다.
마력을 귓바퀴에 집중시킨다.
들려오는 대화에 경청한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갑자기 균열이 생성된 이유는 뭐고. 그런 균열을 클리어하기 위해서 마탑의 선임 마법사들이 진입했다고? 갑자기? 대체 왜?”
“어쨌든, 우리한텐 다행이지 않을까? 미친, 적정 레벨이 최소 400부터 시작이라고! 랭커들이 아르카나 대륙으로 진입한 지금, 현실에서 이걸 클리어할 수 있는 플레이어는……!”
모험가들이 초조한 표정으로 균열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의 뒤로는 대괴수용 무기들이 늘어서 있었다.
벤쉬가 코웃음을 쳤다.
“이제 와서 아닌 척해도 소용없지.”
미국이라고 했던가.
이 나라가 마탑에게 드러냈던 적의는 충분히 확인했다.
과거의 마탑이었다면.
국토 전부를 날려버려도 이상하지 않았을 터.
벤쉬가 중얼거렸다.
“이 수석님께 감사해도 모자랄 판에 말이야.”
뭐?
마왕인 게 아무래도 의심스러워?
이 수석님의 큰 그림, 큰 뜻을 왜곡해도 유분수였다.
벤쉬가 입맛을 다셨다.
“확실히 주제 파악을 시켜줄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화염 마도 가문, 윌리엄 가(家)의 비전 마법으로.
“크흠, 이것도 어찌 보면 이 수석님 덕분이지만.”
출탑 신청서 반려.
아르카나 대륙 진입 요청 반려.
결전용 마도구 대여 요청 또한 반려…….
연구할 시간이 남아돌던 벤쉬였다.
덕분에 벤쉬는 비전 마법의 발현식을 완벽하게 이해해 냈다. 오직 초대 가주님만이 발현하는 데 성공했다던 비전 마법까지 발현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제발 어떻게 균열 하나만……!”
저 어리석은 이들을 훈육하기 위해서라도.
그러나 벤쉬의 바람이 이루어질 리 없었다.
하나둘, 폐쇄되어 가기 시작하는 균열들.
균열 안에서 마탑의 선임 마법사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벤쉬의 미간이 억울하게 일그러진다.
“이러다가 진짜 손가락만 빨게 생겼잖아……!”
“무엇이 문제인가, 벤쉬 선임.”
“네? 마티스 선임님? 아, 아뇨! 문제라뇨!”
흑마도학 선임, 마티스 딘 카를.
실력으로는 수석이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은 마티스였다.
일찌감치 균열을 몇 개나 폐쇄한 그가 벤쉬 곁에 선 것이었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무슨.”
“간만에 마력 순환 좀 시켰네요.”
이어서 뱅그릿을 필두로 선임 마법사들이 집결한다. 벤쉬는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점 찍어뒀던 키코마저도 멀쩡한 상태로 균열에서 빠져나왔지만…….
“벨리에 선임께서는……?”
치유마법학 벨리에 유시아.
그녀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치유마법학은 학파 중에서도 방대한 연구량을 자랑하는 학파였다. 대다수의 치유마법학 마법사가 치유마법 이외의 마법에 능숙하지 못한 게 그 증거다.
심지어 벨리에 선임께서는.
‘출탑 전까지도 연구에 한창이셨지, 아마?’
세계수의 과실을 잘못 삼켰다던 드래곤.
그들을 정화하기 위한 방법을 위해 연구에 매진하셨다고 들었다.
벤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 지원을 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마티스 앞이기에.
벤쉬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 연기가 무색하게도.
“죄송합니다. 연구 스트레스를 발산하느라 조금 늦었네요.”
“……헉.”
벨리에마저도.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균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뱅그릿이 낙담한 벤쉬의 어깨를 토닥여 줬다.
“우리 벤쉬 선임님도 고생하셨습니다.”
“고, 고생은 무슨……!”
나의 비전 마법으로 오만방자한 이들에게 주제 파악이란 걸 시켜주려고 했거늘!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 벤쉬의 속내마저 꿰뚫어 본 것인가, 마티스가 나지막이 입을 연다.
“저들의 표정을 보고도 필요성이 드나, 벤쉬.”
“……?”
벤쉬는 그제야 모험가, 그들과 함께 늘어선 이들의 표정을 목격했다. 마티스의 말이 옳았다. 모두가 이미 아득한 격차를 실감하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들의 대화가 들려온다.
“그 많은 균열을 고작 몇십 분 만에……!”
“이, 이게 마탑의 전력인가?”
“방금 AAU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했어! 이호열이 균열을 생성한 게 아니라 원래 생성될 균열들을 마탑이 억제하고 있었을 뿐이라고! 근데, 저런 마탑한테 폭격을 쏟아부을 생각을 해?!”
역시, 나까지 나설 필요는 없었나.
“크흠.”
벤쉬가 멋쩍어서는 헛기침을 삼켰다.
불만스러운 표정을 드러내는 대신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래, 지금은 마탑을 우러러보는 시선에.
걸맞은 자세를 보여줘야 했으니까.
그러한 자세에 참고될 만한 건 역시…….
슥.
“크흠.”
벤쉬가 은근슬쩍 입고 재킷에서 양팔을 빼고는 어깨에 걸쳤다.
뱅그릿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뱉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이 수석님이라서 어울리시는 건데.’
자신을 보고 웃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벤쉬가 은근히 물어왔다.
“그나저나 탑주님과 수석께선 어디 계신 겁니까? 균열에 진입하셨다면 진작 폐쇄하고 복귀하셨을 텐데. 어째 모습이 보이지 않으시는 게…….”
그에 관한 답은 마티스가 내놓았다.
“두 분께서는 사태를 마무리 짓기 위해 나서셨네.”
*
역시, 찝찝한 생각은 어긋나는 법이 없군.
“용서를 구하지 않겠습니다, 유스라 총책임자님.”
미합중국 동부 지부장, 유진 매케인.
유진과 마주했지만 [천적관계]는 발동되지 않았다.
예상대로 이번 사태는.
순수한 인간의 악의에서 비롯된 일이라는 거겠지.
‘꽃밭에서 꺾여도 이상하지 않겠는데, 그래?’
그랑펠이 마냥 인간찬가를 외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지금.
나는 진심으로 미국의 안위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 어마어마한 짓을 저질렀잖냐, 너희?
“마탑은 절차에 따라 처분을 내리겠습니다.”
오죽했으면 마르셀로가 저렇게 엄격한 표정을 짓고 있겠냐고.
그러나 이 순간, 나는 언제나와 같았다.
불필요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말했다.
“안내하도록.”
“……안내라고 하시면?”
“이 사태의 원흉에게.”
사실 복잡하게 생각하면 끝이 없는 일이다.
미국 대통령이 이번 사태에 관련되어 있다니.
정치적으로도 쉽게 따질 수 없는 일이고, 이호열의 상식으로는 복잡해서 엮이고 싶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말했듯 지금의 내게는.
그랑펠에게는 물러나지 말아야 할 명분이 있었다.
‘그놈의 가문 사랑……!’
내가 클라우디 가문의 사정을 알고 있기에 휘둘려 준다, 진짜로.
유진은 곧장 스마트폰을 들고 어딘가로 연락을 취했다.
“……송구하게도 여전히 연락 두절입니다.”
유진의 말에 따르면.
그도 미국이 마탑을 선제공격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유진이 씁쓸하게 말을 이었다.
“어쩌면 저는 착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비개발자 출신 AAU 지부장이기에 제 관점이 AAU보다는 백악관과 비슷하리라고 여겼는데…….”
대격변 이후.
몇 년이 지났어도.
몇 번의 위기를 겪었어도.
변하지 않는 건 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지금은 그 관점의 차이를 탓할 때가 아니다.
나는 입을 열었다.
“좌표를 떠올리도록.”
역시, 미국의 대통령과 얼굴을 맞대야 할 운명인가보군.
다시 생각해도 간이 참 커졌다, 이호열.
대한민국 대통령에 이어서 미국 대통령하고도 얼굴을 맞댈 생각을 하다니 말이야.
‘그래도 마주해 봐야지.’
비유하자면 유진은 체스 말에 불과했다.
계획을 수립한 건 윗선.
유진은 그 계획에 동참했을 뿐이라는 것.
‘윗선에 악마가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면.’
대통령이 됐든, 부통령이 됐든, 누가 됐든.
지금의 사태는 인간의 악의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게 너무나도 많았다. 무엇보다 나를 향해 이빨을 드러낸 건 이해할 수 있다고 치더라도.
‘마탑을 적으로 돌려?’
대격변 이후, 마탑이 가지는 영향력을 생각하면…….
마탑을 적으로 돌리는 건 국제 사회적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라고 봐도 무방했다. 왜, 미국의 플레이어들이 마탑의 포탈을 이용할 수 없다고 생각해 보자.
‘히사기처럼 유스라 왕국으로 망명할지도 모르는 일이지.’
이윽고, 나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경.”
마르셀로가 나를 기대와 의문이 절반씩 섞인 듯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좌표를 물었을 때, 마르셀로는 내가 포탈을 발현하리라고 생각했겠지.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대통령께서는 백악관이 아닌, 분명 안전한 장소로 대피했을 테니까요.”
그러나 내가 말한 좌표는 그게 아니다.
“떠올려라, 원흉의 얼굴을.”
‘격’이 상승한 마력 덕분.
나의 모든 마법 발현은 한 차원 진보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서클을 형성했을 때보다도 훨씬 더.
구체적인 좌표를, 대상을 상상하는 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뜻.
감탄한 마르셀로가 말꼬리를 흐린다.
“대체 몇 개의 고위 마법이 맞물려 있는 건지……!”
물론, 그걸 가능케 하는 건 그랑펠의 무지막지한 재능 덕분이었지만. 자화자찬할 시간도, 생각도 없다. 나는 곧장 마법을 발현했다.
고오오오.
“……!”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포탈을 열지 못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능력 부족은 아니었다.
나의 마법 발현에는 조금의 착오도 실수도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유진 매케인.
그가 좌표를, 대상의 얼굴을 떠올리는 데에 실패한 것인가?
아니, 그것도 아니었다.
지이잉.
울리는 진동.
유진의 스마트폰.
그리고 나의 스마트폰.
이내, 나는 깨달았다.
마법의 발현이 실패한 원인은 간단했다.
그래, 좌표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에, 더 이상.
“뭐, 뭣……?”
유진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든다.
[속보 : 미합중국 대통령 숨진 채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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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책임자님…….”
나는 미합중국 서부 지부장, 조슈아가 건넨 유서를 받아 들었다. 그 종이엔 피로 적혀 있었다. 한 단어가 반복해서, 띄어쓰기조차 없이 빼곡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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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ymonSean.RaymonSean.RaymonSean.RaymonSean.RaymonSean.RaymonSean.RaymonSean.RaymonSean.RaymonSean.RaymonSean.RaymonS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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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흉은 레이먼 션이었다.
아니.
그랑펠이 정정한다.
“악마였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