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85화 (385/489)

◈ 385화. 금기를 어겼군 (3)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말도 이래서 나온 게 아닐까.

사회인이었던 나, 이호열은 그렇게 생각한다.

‘만만하게 보이면 기어오르지.’

지금 상황이 딱 그렇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뒤통수를 맞을 이유는 없는데, AAU 미국 동부 지부장?

처음엔 빙의가 아닐까, 생각했다.

무엇보다 얼굴을 맞대지 않았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AAU에서 내 직책을 고려하면 만날 기회가 몇 번 있었을 텐데.

단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다?

그가 나를 의도적으로 피했단 뜻이니까.

그러나 그랑펠의 의견은 다른 모양이었다.

“열등하기에 주제 파악조차 하지 못하는 족속.”

어디, 인간에게 빙의했던 악마를 되돌아볼까?

하긴 천적인 나를 의도적으로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제 발로 나를 찾아온 악마들이 더 많았지.

‘게다가.’

미국 동부 지부장이 나를 피하던 시기는 내가 악크샨과 관련되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기 훨씬 전이었다. 그렇다면 결론이 나왔다.

-“경, 다시금 되새겨 줄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이번 사태는 순수한 인간의 악의에서 시작된 것.

그것이 내가 마르셀로를 만류하지 않은 이유였다.

마탑의 호의를 뒤통수로 되갚고, 기만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다른 건 몰라도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에는.

아니, 내가 수석이 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군.

‘간이 배 밖으로 나왔네. 마탑을 기만해?’

아르카나 대륙에 선임, 수석, 원로, 탑주보다 강한 이들?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초월자들만 하더라도.

최소 탑주 이상의 무력은 가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니까.

그러나 마탑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오직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대륙 최고의 기재들이 모여든다.

그런 이들이 쌓아올린 금자탑이 바로 마탑이었다.

-“마탑이 어떤 존재인지를.”

마르셀로는 그런 마탑의 탑주였다.

마탑에서 새어나간 정보를 좌시할 수 없는 처지겠지.

이래 봬도 절차는 칼같이 지키는 나였다.

뭐, 존댓말은 하지 못하더라도…….

‘수석인 내가 탑주의 결정을 만류할 순 없다, 심지어.’

마르셀로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경께서 어떤 존재이신지를 말입니다.”

화난 이유가 마탑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으니까.

사실 떠오른 기사의 내용은 상당히 악의적이었다.

식겁한 나의 혈육들이 문자 메시지를 보내올 정도로 말이야.

나의 주둥이가 아련하게도 읊조린다.

“누님…….”

슬픈 눈으로 스마트폰 액정을 바라본다.

제삼자가 보면 영락없이 가족들의 걱정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모습처럼 비치지 않을까?

-맞지? 너 사춘기지?!

하지만 절대 아니다……!

천외천으로도 충분히 벅찬 칭호였거늘. 결국, 십좌의 마왕이라는 새로운 칭호마저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말았구나. 웬수의 톡에서 아주 그냥 들뜬 기분이 전해져 오는 듯하다.

‘사춘기? 돌겠네, 진짜로.’

허나, 입방정은 공손하기 짝이 없다.

“우려하시게 할 뜻은 없었습니다.”

가문을 끔찍하게도 생각하는 그랑펠 때문이 아니다.

웬수, 이예림 제외.

누나들은 걱정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으니까.

나를 배려하는 건지 티는 내지 않고 있었지만 말이야.

“아버님, 어머님께도 면목이 없습니다.”

특히 나와 관련된 기사라면 전부 오려서 스크랩해 두신다는 아빠가 고민하고 계시겠지. 하루아침에 아들내미가 인류의 영웅에서 웬 십좌의 마왕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고 있는데…….

‘걱정을 안 하시면 내가 서운해해야지.’

그러나.

“바로잡아야 할 것은 바로잡겠습니다.”

그랑펠이 누구냐?

그것이 설령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한들.

어쨌거나 거짓말이라면 할 수 없는 피곤한 성격의 소유자.

사실 나, 이호열의 심정 같아서는.

‘괜히 걱정시킬 필요 없잖아.’

나는 그런 마왕이 아니다.

사춘기는 더더욱 아니다……!!

전적으로 부인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어쨌거나 내가 십좌에 앉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단톡방에 보낼 수 있는 메시지는.

간결하디간결하기 짝이 없었다.

-증명하겠습니다.

입방정이 사족을 덧붙인다.

“가문에 누가 되지 않도록.”

……이건 전송하지 않아서 불행 중 다행이구만.

*

미국.

상공에 드리우는 소행성의 그림자.

전 세계는 경악에 빠졌다.

“저런 크기의 소행성이 충돌하면 북아메리카 대륙 전역은 지구상에서 사라질 겁니다……! 미사일로 대응할 수 없냐고요? 저 크기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옵니까?”

플레이어들을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마탑이 보여왔던 행보를.

-걸리적거리는 건 전부 도륙 냈었음

-마탑이 그동안 많이 참긴 했지ㄷㄷㄷ

-그러니까 왜 마탑 회의록을 유출 시키냐고!!

-사실 유출된 게 문제가 아니라 날조가 원흉임 ㄹㅇ

아르카나 대륙 전기 시절, 마탑의 마법사는 하나하나가 초인이라 불려도 무방했다. 과언이 아니라 원로부터는 반신(半神)이라 불리기도 했었으니까. 그 사실을 알고 있어도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마탑 수뇌부 전원이 움직이다니……!”

마탑의 악명 아닌 악명.

그건 마탑 마법사, 개개인이 써내려 나간 것에 불과했었으니까.

그럼에도 최강이라 평가받았던 마탑이다.

누구보다 플레이어들이 먼저 직감했다.

“저, 정말로 미국을 지워버리려는 생각인가?”

그때였다.

메테오 스트라이크가 허공에 멈춰선 건.

탑주, 마르셀로가 마지막 경고를 해온 건.

“이것이 마탑이 인류에게 베푸는 마지막 기회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마탑을 기만한 자.

그러니까 십좌의 마왕에 관한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린.

익명의 AAU 관계자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저 소행성이 미국에 떨어진다는 거야!”

그 말에 세계는 안도했다.

역시 과거의 마탑이 아니다.

대화의 여지가 남아있다.

물론, 그들의 인내심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양심이 있다면 튀어나오겠지! 다 죽게 생겼는데!”

당사자, 유진 매케인은 뒤늦게 소식을 접했다.

“마탑……!!”

비서가 마르셀로의 선언을 전해온 것이다. 그러나 유진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말하지 않았던가? 그는 이미 할 일을 다하고 버려진 체스 말이었다고.

유진이 중얼거렸다.

‘나서는 거야, 어렵지 않아. 아니, 나서야 한다.’

그러나 유진은 비현실적인 풍경 앞에서 깨달았다.

아르카나의 존재들에게.

현실의 잣대와 상식을 들이밀 수 없다는 사실을.

그가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전에 내게 그만한 가치가 있는가?’

조슈아의 말이 옳았다.

이 사태에는 백악관을 비롯한 수많은 세력이 얽혀 있었다. 세계의 패권을 국가도 아닌 개인인 이호열에게 넘겨줄 순 없다. 이해관계로 묶인 이들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유진은 최악을 상상했다.

보다시피.

마탑은 소행성을 자유자재로 떨어트리는 집단이다.

‘……만약, 나 하나로 부족하다면.’

크나큰 대가를 치른 뒤.

추악한 진실이 세상에 밝혀지게 될 터.

조국이 세계의 비난을 받게 될 게 뻔했다.

이런 일을 계획한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었다.

유진이 기절한 조슈아에게 말했다.

“조슈아, 자네의 말이 맞았네.”

지금이라도 용서를…….

하지만 깨달은 건 유진뿐인 모양이었다.

이윽고, 하늘 너머에서 반짝이는 무언가.

그건 소행성에 비하면 작디작은 혜성과 같았다.

“……?”

유진이 흠칫했다.

“서, 설마!”

그렇다, 조국은 이미 결정을 내렸다.

자신들을 위협하고 있는 마탑에게 공격 명령을.

유감스럽게도 최악의 판단이었다.

콰콰캉!

“!!!”

마치 불꽃놀이 같았다.

수십 수백 개의 전투기가 허공에서 터져 나갔다.

간신히 탈출한 조종사들이 펼친 낙하산만 보였다.

유진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어째서 아직도 상황 판단을 하지 못한단 말인가?

“저 괴물들을 정말 적으로 돌릴 생각인가……!”

여기서 물러선다면 뒤가 없다고 판단한 것인가?

폭발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전투기들이 불나방처럼 돌격을 멈추지 않았다.

유진은 그제야 자각했다.

-“유진 매케인……. 당신, 얼마나 큰 실수를 하고 있는 건지 자각하고 있긴 한 겁니까? 차라리 당신이 악마에게 휘둘리고 있다고 믿고 싶을 정도입니다…….”

자신이 어떤 짓을 벌였는지를.

그리고 또 한 가지를 깨달았다.

일촉즉발의 순간.

허공에 나타난 또 하나의 형체.

척.

뽐내던 초월적인 무력이 무색하게도.

그를 향해 일제히 고개를 숙이는 마탑 전원.

저 괴물들에게 칭송받는 마왕(魔王)의 존재감을.

조국의 명줄을 쥐고 있는 마왕.

“묻겠다.”

이호열이 입을 열었다.

“그대들에겐 내가 마왕으로 비치는가.”

*

그러니까 그 마왕이 아니잖아?!

‘좀 친절하게 말할 순 없냐.’

십좌의 마왕.

본의 아니게 그 힘을 거머쥔 게 된 건 맞는데.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건 취한 것뿐이라고.

악마의 왕이 아니라 마법의 왕이라 부르는 게 옳다고.

나의 결백을 남쪽 바다의 마녀, 메어리가 증명해 줄 수 있다고.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단 말이다.’

그러나 이미 내뱉어 버렸다.

게다가 지금 모습을 봐라.

미국 땅 위에 메테오를 소환해 놓고는.

무게를 잡고 있는 마탑이었다.

그 마탑 수뇌부가 내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지금은 영락없이 악의 축으로 보이지 않을까.’

심지어는 탑주, 마르셀로도 예외는 아니었다.

슥.

나는 재킷에 달린 러스트를 흘겨봤다.

‘봤지? 고유의 분위기 같은 거 없어도 충분하다니까.’

그러나 이 또한.

모두 계획된 일이었다.

왜, 마르셀로와는 미리 이야기를 나눴었거든.

‘진짜 메테오를 떨어트릴 생각 따윈 없어.’

그렇다고 전투기가 곧바로 공격해올 줄은 몰랐지만.

‘더 높으신 분들이 관련되어 있다는 거겠지.’

차라리 악마의 짓이라면 해결하기 편할 텐데, 그게 아니라면 이야기는 복잡해진다. 세상의 평가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그랑펠이지만, 지금은 가문의 명예라는 자비롭지 않을 명분이 있단 말이다.

그런 나의 입술이 싸늘한 말을 뱉어냈다.

“나의 명예를 실추시킬 생각이었다면.”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바라본다.

“되려 실추당할 각오도 되었다는 것이겠지.”

마탑이 인류에게 마지막 자비를 베풀고 있듯.

그랑펠도 인간에게 실망이란 걸 할지 모르는 일이거든.

고작 1할에 불과하지만.

[어둠의 이해]를 통해 그랑펠을 보다 깊게 알게 된 나였다.

‘어쩌면 그랑펠은 설정보다 자비롭지 않을지도 모른다.’

만약, 이번 사태에 악마가 관련되어 있지 않다면.

그랑펠의 꽃밭에서 미국이라는 꽃은 가차 없이 꺾일지도 모른다.

섬뜩한 상상을 하던 중 마르셀로가 말을 건네왔다.

“아직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경.”

아까도 말했듯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 누군가 도움을 줘도 그 도움에 금방 익숙해지고는 한다. 물에 빠진 걸 건져놨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옛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란 거지.

그래, 추락하는 건 고작 메테오 스트라이크가 아니다.

미국, 그 자체다.

누군가는 묻겠지.

어떻게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미국을 추락시킬 수 있겠느냐고.

글쎄,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를 하는군.

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딱.

“약속한 시간이 되었다.”

스스스.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메테오 스트라이크가 역행한다. 『반전 마법』. 마르셀로와 스무 명의 선임 마법사들이 합동 발현한 메테오 스트라이크가 다시금 우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에는 불가능한 발현이었겠지만.’

십좌의 힘을 완벽하게 소화해 내면서 ‘격’의 상승을 이뤄낸 나의 마력이었다. 남다른 마력 친화력 덕분에 내 마력의 변화를 알아본 걸까.

뱅그릿이 말을 더듬었다.

“이, 이 수석님?! 그 마력은……?”

그에 관한 이야기는 후에 나누도록 하지, 뱅그릿 선임.

지금은 세상이 깨닫게 해야 하는 중요한 순간이었으니까.

나날이 커지는 균열의 위협 앞에서.

어떻게 인류가 무사할 수 있었는지를.

현실이 평화로울 수 있던 이유.

그건 단순히 모든 걸 마탑이 지탱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오오.

나의 시야에 마력의 흐름이 보인다.

마탑에서 뻗어져 나와 전 세계로 퍼져 나가던 마력이 요동친다.

정확하게는 미국에 깔렸던 마력이 허공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하다.

마탑이 미국을 보호 반경에서 배제했다는 것이다.

더 이상 떠받치지 않겠다는 것이다.

변화는 곧장 찾아왔다.

콰지지직─!

깨져가는 허공.

동시다발적으로 균열이 생성되기 시작한다.

나는 언제나처럼 말했다.

“이것이 그대들이 부르짖던 마왕의 처분이다.”

뒤끝……. 아니, 명분을 담아서.

“온전히 감당해 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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