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84화 (384/489)
  • ◈ 384화. 금기를 어겼군 (2)

    미합중국 동부 지부장, 유진 매케인.

    박민재는 기억을 더듬었다.

    미간 주름이 깊게 파고들도록.

    그러나.

    ‘제대로 마주한 적이 없어.’

    유진, 미국 동부 지부장의 얼굴이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그의 이름은 명성이 자자했다. 그럴 수밖에. 자신만큼이나 유진 매케인, 그도 코스모의 유명 인사였으니까.

    최초의 비개발자 출신 지사장.

    능력을 중시하던 코스모에서 유진의 인사는 파격적이었다. 비개발자를 넘어서 유진은 애초에 게임계와는 거리가 먼 정계 출신이었다.

    향간에는 그런 소문이 떠돌곤 했었다.

    -“혹시 레이먼 정계 진출 준비하는 거 아니야?”

    박민재의 입꼬리가 비뚤게 올라갔다.

    “그것도 나름 볼 만했겠는데?”

    레이먼 션의 실체가 로봇에 불과했다는 걸 알고 있는 박민재였다.

    뭐든 빠른 선진국 미국 아니겠는가.

    세계 최초 로봇 정치인이 탄생하는 것도 재밌는 그림이었겠군.

    수화기 너머 조슈아의 음성에 웃음기를 지웠다.

    -“미스터 박. 당신이 나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서부와 동부로 나뉘어 있다고 해도 미국에서 발생한 일이니까요. 나도 마냥 무관하다고 할 수 없겠죠.”

    조슈아의 잘못이 아니다.

    유진, 그가 호열과의 대면을 피해 가면서.

    흉계를 꾸미고 있었을지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박민재는 성질을 죽이고 담담하게 말했다.

    “아뇨. 조슈아 지부장님은 무관하셔야 합니다.”

    -“……네? 그게 무슨?”

    “그래야 이 사태를 해결하실 수 있을 테니까요.”

    유진 매케인.

    그가 사태의 원흉이라고 생각하자 이해가 된다.

    비개발자, 정치계 출신으로 지부장에 내정된 유일무이한 인물이다.

    “유진은 아르카나의 무게를 알 수 없는 게 당연합니다.”

    AAU.

    그들이 호열을 진심으로 우러러볼 수 있는 이유는 따로 있지 않았다. 한때 창조주를 자처했던 만큼 아르카나 대륙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호열이 쌓아온 업적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 알고 있기에. 그의 행보를 진심으로 뒤따를 수 있었다.

    “와 닿지 않았으니 뒤로 나돌게 된 거겠죠.”

    하지만 유진은 다르다.

    그러니까 때를 기다리고 있던 거겠지.

    마치 레임덕만을 기다리는 정치인처럼.

    그러던 중 지나칠 수 없는 떡밥을 물게 된 것이다.

    “유진의 인맥이라면 이 사태도 충분히 설명 가능하겠죠?”

    -“그렇습니다, 미스터 박. 그의 출신을 생각하면 언론이 허무맹랑한 소리를 대서특필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겠죠. 심지어 우리 같은 개발자들보다 유진은 이런 판에 익숙합니다. 뭣하지만…….”

    조슈아가 멋쩍게 말을 잇는다.

    -“그동안 저는 유진을 어설프게 따라 하고 있었습니다. 고위층과의 연줄, 로비, 호의. 옆에서 보고 있자니 부러웠거든요. 뭐, 이젠 모든 게 쓸모없다는 걸 깨닫게 됐지만…….”

    박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깊숙한 속내까지 듣고서야 조슈아를 향한 의심을 지울 수 있었다.

    조슈아는 정말 이 사태와 관련되지 않았다고.

    그 신뢰에 보답하겠다는 걸까.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스터 박의 말이 옳습니다. 제가 해결하지요.”

    뚝.

    조슈아는 통화를 마치고 전용기에 올랐다.

    서브 연락책으로 유진에게 계속해서 전화를 걸고 있었지만 묵묵부답이다. AAU 동부 지부에 연락을 해봤더니, 유진은 멀쩡히 집무실에 있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무슨 속셈입니까, 대체.”

    동부 지부, 활주로에서부터 관심이 집중됐다.

    “저거 조슈아 지부장님 아냐?”

    서부 지부장이 동부엔 무슨 일인가?

    혹시 이 순간, 세상을 달구고 있는 소식 때문일까.

    이호열이 십좌의 마왕이라는 그 소식.

    몇몇 직원들이 속삭인다.

    “이호열 총책임자님의 입지가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잖아?”

    기사를 향한 세간의 반응은 혼란, 그 자체였다.

    -상위 마왕?? 요샌 찌라시도 창의적이네ㅋ

    -근데 약간 그럴싸하지 않냐??

    -뭣보다 자기 입으로 말했다는데?!

    -ㄹㅇ 뻔히 걸릴 거짓말을 할 리는 없잖음??

    -애초에 이호열 말투가 약간 마왕 같긴 했음;;;;

    일개 플레이어나 유사 언론에서 나온 추측이라면 모를까.

    무려 AAU 고위 관계자의 입에서.

    명성이 자자한 미국의 일간지에서 나온 기사였다.

    “확실히 누가 정보를 흘리긴 했나 본데.”

    “그건 그렇다 치고, 문제는 사족이었지.”

    “악의적으로 해석하면 끝도 없는데 말이야. 왜, 이호열이 매번 균열 공략에서 성공하는 바람에. 균열 난이도가 매번 상승하는 거라는 개소리를 진지하게 지껄이는 놈들도 있었잖아?”

    지부장 유진을 제외.

    마탑에서 호열과 조우했던 동부 지부 전원이었다.

    덕분일까, 그들은 뒤숭숭한 여론에 흔들리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그냥 유스라 총책임자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냥 다 까발리고 싶다니까? 결국, 이번에도 혼자 엄청난 위험을 떠맡고 계시는데……!”

    조슈아는 복도를 거닐며 분위기를 파악했다.

    ‘걱정할 건 유진밖에 없겠군.’

    머리를 굴려본다.

    유진이 움직인 데에는 자신감이 있어서일 터.

    그런 자신감이 어디서 나왔는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록스.”

    아르카나 대륙이라는 새로운 기회의 땅이 열렸다.

    어쩌면 유진은 믿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미국의 샤이닝.

    샤이닝의 록스.

    그가 호열을 대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대립 구도를 세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

    ‘십좌의 마왕, 이호열에 맞서는 샤이닝의 성기사 록스라.’

    나름대로 그럴싸한 그림이 그려지긴 한다.

    하지만 정말이지.

    비개발자 출신이기에 품을 수 있는 멍청한 상상이었다.

    “진심으로 가능할 거라 생각하는 겁니까?”

    이호열은 차원이 다르다.

    단순히 레벨만 따라잡는다고 따라잡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 뜻이다. 록스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절대 그의 빈자리를 채울 수 없단 말이다.

    조슈아가 굳은 표정으로 비서에게 물었다.

    “안에 있나, 유진 지부장께서는.”

    “……!”

    비서가 흠칫해서는 고개를 끄덕인다.

    조슈아는 곧장 걸음을 옮겼다.

    유진, 당신이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지른 건지.

    조목조목 이해시킬 생각이었다.

    그리고…….

    ‘언제부터 이런 개짓거리를 계획한 건지도.’

    벌컥.

    조슈아가 유진의 지부장실에 들어선 순간이었다.

    퍽.

    “!”

    둔탁한 소리와 함께 조슈아가 꼬꾸라졌다.

    “이, 이게 무슨……?”

    조슈아는 바닥에 엎어진 채로 간신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뒤통수가 뜨거웠다.

    둔기에 얻어맞은 건가.

    조슈아가 이를 악물었다.

    “유진 매케인……. 당신, 얼마나 큰 실수를 하고 있는 건지 자각하고 있긴 한 겁니까? 차라리 당신이 악마에게 휘둘리고 있다고 믿고 싶을 정도입니다…….”

    “악마? 악마보다 무서운 건 인간이지, 조슈아.”

    “……멀쩡하군요, 당신.”

    유진의 동공은 검지 않았다.

    악마에게 빙의당해 휘둘린 게 아닌.

    오롯이 자기 뜻대로 저지른 일이란 의미였다.

    슥.

    유진은 소파에 앉아 조슈아를 바라봤다.

    “세게 후려치긴 했는데. 자네를 죽일 생각 따윈 없네. 왜, 여기 편리한 아이템이 있지 않은가? 포션이라고 했었지? 이것만 부어주면 자네 상처도 말끔하게 치료되겠지.”

    툭.

    “이 늙은이의 머리론 도저히 믿기 힘들지만, 그게 대격변 이후의 시대니까.”

    유진은 테이블 위에 포션병을 내려놓고는 숨을 골랐다.

    조슈아는 목격했다.

    일을 저지르고 나서도 떨고 있는 유진의 어깨를.

    저건 자신이 저지른 짓의 무게를 아는 반응이다.

    “그딴 계획이 먹힐 거라고 생각합니까……? 유감이지만, 여긴 정치판이 아닙니다. 법원에서 증명할 필요도, 증거도 필요 없죠. 행동으로 증명하면 되니까.”

    그가 아무리 십좌의 마왕이라 떠들어대 봤자다.

    계획처럼 호열이 모든 마왕과 도전자를 사냥하는 데 성공한다면.

    누구도 호열에게 의심 따윈 품지 않으리라.

    조슈아가 빠득 이를 갈았다.

    “당신은 아르카나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유진이 품속을 뒤진다.

    “그래,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지. 내 눈에는 말이야. 자네도, 세계도, 플레이어도 너무 유치하게 보였어. 그런 말도 안 되는 힘들을 쥐고 있으면서 다들 뭣들 하는 건지. 이렇게 쉬운 길을 놔두고 왜 돌아가느냐는 말이지.”

    “……유치해?”

    “왜? 내가 못 할 말이라도 했나?”

    조슈아가 비웃었다.

    “당신……. 긍지를 그렇게 표현하다니. 큰일 났군.”

    “긍지? 뭐, 아무래도 좋네.”

    찰칵.

    유진은 품에서 꺼낸 시가에 불을 붙였다.

    “그런 의미에서 간만에 의견이 일치했네. 그래서 움직였지. 움직이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거든. 그림이 나오지 않는가? 마왕에 맞서는 미합중국. 흥행이 보장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스토리지 않은가? 자네에게는 미안하게 됐네, 조슈아.”

    조슈아는 말을 아꼈다.

    피가 빠져나간 탓일까.

    정신이 몽롱했거니와 유진의 말을 흘려들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의견이 일치했다고?’

    역시 독단적인 행동이 아니다.

    조슈아는 흐릿한 정신을 붙잡고 생각했다.

    그러면 이번 일은 어디까지 연결돼 있는 거지?

    미국에서도 신뢰성이 높다 평가받는 일간지를 이용. 이호열 유스라 총책임자님을 건드렸다. 일개 AAU 지부장 혼자 벌인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번 사태로 세계정세는 크게 흔들리게 될 수도 있었으니까.

    조슈아가 입을 열었다.

    “……역시, 백악관까지 연결되어 있군.”

    후욱, 유진이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거기까지만 하지, 조슈아. 자네가 그 이상 아는 척을 하면 내가 그대에게 이 포션을 사용할 이유가 없어질지도 모르니까.”

    “미쳐도 다들 단단히 미쳤어.”

    목숨을 자신이 쥐고 있다는 협박.

    그러나 조슈아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어이가 없었다.

    도움을 주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뒤통수를 쳐대는 꼬락서니가.

    “대체……. 이호열이 뭘 잘못했지?”

    “음?”

    “뭐가 그렇게 아니꼬웠냐는 거냐고 묻는 거다. 언제나 자기 목숨을 걸고 인류를 위해 최전방에서 싸우던 이호열이. 뭐가 그렇게 얄미웠던 거냐고.”

    과거를 되짚을 필요도 없었다.

    이 순간만 하더라도 호열이 십좌의 마왕이 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지 않았다. 아르카나 대륙과 현실에 위협이 되는 악마족 몬스터를 보다 효율적으로 사냥하기 위해서였다.

    단지 그런 이유로 이호열은 자신이 그토록 경멸하던 악마의 왕좌에 올랐단 말이다.

    연기가 흩어진다.

    “조슈아, 정치판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군지 아나? 돈만 많은 재벌 출신? 정치 명문가에서 태어나 엘리트 코스를 밟은 햇병아리? 전부 아닐세.”

    후욱.

    흩어지는 연기 사이로 유진의 눈빛이 번들거린다.

    “대중을 휘어잡을 수 있는 능력. 그런 능력을 타고난 인간이지.”

    “뭐?”

    “그런 의미에서 이호열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네.”

    유진이 덧붙였다.

    “달라진 자네의 낯선 모습을 보면.”

    “……!”

    유진은, 백악관은, 세계는.

    영향력을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점점 커져가는 이호열의 영향력을.

    조슈아가 비웃음을 뱉었다.

    “당신도 체스 말에 불과했나……?”

    “뭐, 그런 셈이지. 그나저나 유감일세.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렸어, 자네는. 이래서야 우리와 같은 배를 타는 게 아니라면 살려둘 수 없겠는데, 안 그래?”

    조슈아가 이번엔 피를 뱉었다.

    “F○ck…….”

    썩은 미소가 되돌아왔다.

    “그래. 그 태도가 바로 내가 말한 무서운 점일세. 대체 긍지가 뭐길래.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지키려고 드는 건지. 경계할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그 이후로 대화는 없었다.

    다음 계획도 없었다.

    고작 체스 말의 역할은 여기서 끝이었으니까.

    지직.

    유진은 떨리는 손으로 시가의 불을 껐다.

    “자, 마왕의 마수를 기다릴 때로군.”

    유진은 죽음을 각오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자신의 목숨마저도 이용할 계획을 세웠단 것이다.

    조슈아조차도 자신이 사태의 원흉이라는 걸 파악했다.

    ‘이호열.’

    그라면 반드시 자신을 찾아오겠지.

    그 후 쓰러진 조슈아를 목격한 뒤.

    추궁을 위해서라도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게 될 터.

    ‘그 행동 하나하나가 마왕의 증거가 될 것이다.’

    인간은 간사하다.

    세상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란 없다.

    단지 계기가 필요할 뿐.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죽음은 절대 헛되지 않으리라.

    “그래, 그러겠지.”

    유진이 씁쓸하게 중얼거리던 순간이었다.

    “?”

    문득, 강한 빛이 눈을 간지럽혔다.

    창가 쪽이었다.

    창 너머에서 눈이 부신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뭐야?”

    그저 햇빛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건 태양보다 강렬하고, 거대한 무언가였다.

    그래, 하늘에서 거대한 유성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비개발자 출신이기에 유진은 중얼거렸다.

    “소, 소행성……?”

    그러나 정확한 명칭은 『메테오 스트라이크』.

    유진은 간과하고 있었다.

    자신이 적으로 돌린 건.

    비단 이호열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아르카나 최강의 무력 집단, 마탑.

    탑주, 마르셀로.

    그와 더불어 선임 마법사 전원이 미국 상공에 나타났다.

    그리고.

    “마탑을 기만한 자는 모습을 드러내라.”

    선언했다.

    “이것이 마탑이 인류에게 베푸는 마지막 기회다.”

    .

    .

    .

    나는 도착한 문자를 확인했다.

    -호열아

    -천외천도 모자라서 이제는 마왕이니?

    -그러면 그다음엔 천마겠구나

    -어째 이 누님이 네가 은발로 염색했을 때부터 짐작했는데…….

    그것이 내가 마르셀로를 만류하지 않은 이유였다.

    -너 혹시 사춘기냐?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