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83화 (383/489)

◈ 383화. 금기를 어겼군 (1)

역사서는 개뿔이 역사서다.

낭만은 개뿔이 낭만이다.

이건 창작 수준이잖아?

유스라 왕국.

집무실에 울리는 경건한 목소리.

하이엘이 말을 이어나간다.

“……어둠이 종말을 고하자 마계가 반응했으니. 죽음, 그 자체. 마계의 리치조차도 어둠을 경계하여 무덤에서 깨어나리라. 허나, 무의미하리라.”

어둠.

한없이 깊은 어둠.

그러니까 나는 종말 따위 고한 적이 없었다. [흑화]의 여파로 그랑펠이 저지른 일 아니었냐고? 뭐, 그랑펠이 그런 비슷한 말을 하기는 했지.

그런데, 뉘앙스가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

‘금칠해도 너무했어.’

이 정도면 역사서가 아니라 성서에 가깝지 않나?

왜, 구절 끝마다 ‘호멘’으로 끝마쳐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다. 저 끔찍한 내용을 하이엘의 입으로 전해 듣고 있자니, 손가락이 오그라들고 심사가 뒤틀리기 시작한다.

‘젠장.’

흉조의 뱃속에서 튀어나온 전설의 탐험가.

낭만의 로렌츠크.

아르카나 대륙에서 분명 그런 메시지를 목격했다.

[행방불명된 낭만 탐험가, 로렌츠크가 아르카나 대륙에 복귀했습니다. 극적인 생존에 은둔생활을 청산하고자 한 낭만 탐험가의 지식이 아르카나 대륙을 더욱 풍요롭게 합니다. : 낭만 탐험가, 로렌츠크가 대륙을 떠돌며 지식을 설파합니다.]

이제부터 로렌츠크가 대륙을 떠돌며 그가 가진 지식을 나눌 것이라고. 남태민과 히사기도 덕분에 로렌츠크와 만날 수 있었던 거겠지.

‘……그런 의미에선 다행인가?’

매도 일찍 맞는 게 낫다고.

만약, 로렌츠크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저런 말도 안 되는 역사서.  아니, 흑역사서를 대륙에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녔을 거 아냐? 가뜩이나 풍성한 나의 거품이 거품기로 젓듯 부풀어 갔으리라.

‘진짜 고맙다, 둘 다.’

바짝 긴장하게 된다.

곧장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해야겠구만.

심지어 아르카나 대륙의 시간은 현실보다 네 배나 빠르니까.

그동안 로렌츠크가 어떤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이엘이 낭독을 마치고 나서야 나는 답했다.

“좋은 소식들이 맞구나, 하이엘.”

“주군의 기쁨이 되었다니 영광입니다.”

아주 그냥 뻔뻔하게 반응하고는 하이엘에게 답신 아닌 답신을 보냈다. 로렌츠크의 소식은 아주 잘 들었으니, 내가 대륙에 복귀할 때까지 로렌츠크를 잘 좀 붙들어놓으라는 부탁이었다.

‘여러모로 놓치면 안 되니까, 로렌츠크는.’

흑역사서를 널리 퍼트리는 게 두려워서만은 아니다.

마왕 쟁탈전의 전장을 바꾸겠노라.

내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서.

마계 진입을 앞둔 나였다.

마계를 탐험했다는 로렌츠크의 경험이 절실했다.

하이엘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주군의 성대한 복귀를 준비하겠습니다.”

……성대한 복귀라니.

아르카나 시간으로 따져도 고작 며칠 만에 돌아가는 건데.

물론, 하이엘이 저렇게까지 말한 데에는 이유가 있는 모양이었다.

“착실히 마무리되어 가고 있는 모양이구나.”

만반의 준비.

그러니까 맡겨뒀던 장비의 준비가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는 소리겠지. 청렴결백의 그랑펠에게 아이템이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겠지만.

‘나, 이호열은 아니거든.’

[육망성 브로치 2/6]

[만물과 통하는 지도]로 파악해 뒀던 브로치의 위치.

나머지 조각들의 위치를 디엔드에게 전달해 둔 상태였다.

디엔드라면 어렵지 않게 브로치를 찾아올 수 있을 터.

‘세트 아이템 완성인가.’

그뿐만 아니다.

유낙서스의 유품, 드래곤 스킨.

나는 월스와일에게 드래곤 스킨의 제련을 맡겼었다. 그 작업도 막바지에 이르렀다고 하니, 이번 재회에서는 새로운 아이템 효과를 확인할 수 있겠지.

‘마력 성장에 외적 성장까지.’

그래도 며칠 만에 유의미한 성장을 이뤄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마침 마력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메어리와의 오해 아닌 오해는 잘 풀었다.

-“십좌의 마왕, 그 권능조차 정화하실 줄이야…….”

정화라.

거창하게 말하자면 적절한 표현이긴 하겠군. 나는 십좌의 힘에서 정확하게 악(惡)만 도려내고, 빨대를 꽂은 셈이었으니까. 하지만 진실을 알게 됐어도 메어리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당신께서는 저를 더욱 경외하게 하십니다.”

메어리의 소감을 듣는데, 그녀는 정말로 각오를 마쳤던 모양이었다.

설령, 내가 십좌의 마왕으로 타락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나를 쫓겠다고 다짐했었단 거지.

‘대체 그놈의 긍지가 뭐길래.’

어쨌든, 오해를 풀어서 다행이다.

새로운 스탯 [매력]의 효과도 알게 됐으니까.

다음에는 이런 불상사를 만드는 일이 없도록 하자.

‘세상에 악마 사냥꾼이 마왕이 뭐냐, 마왕이.’

우리 선배님들께서야 이젠 완전히 의심을 거두셨지만, 나 스스로 체면이 서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내 입방정이 탐탁해하지 않았다.

“고작 왕좌 따위.”

그렇다.

천하의 그랑펠 님에게는 그냥 왕좌든 십좌든 작디작은 그릇에 불과할 테니까. 아무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신데. 평범한 직위는 구속에 불과하시겠지.

달칵.

녹차를 기울이며 현실에서의 미룰 수 없는 절차를 수행한다.

당연하게도 그중엔 클래스 퀘스트.

육체 단련도 빼놓을 수 없다.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

●100KM 달리기 (진행 중)

●팔굽혀펴기 5,000회 (진행 중)

●턱걸이 3,000회 (진행 중)

●버피 테스트 2,000회 (진행 중)

‘언제 이렇게 목표치가 늘어났는지…….’

하나, 둘…….

탄식도 잠깐.

나는 팔을 굽혀가며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왕이라니.

분위기에서 비롯된 오해라고 해도 억울하다.

세상에 이렇게 근면 성실한 마왕이 어디 있냐!

*

마탑.

탑주의 집무실.

마르셀로는 쌓인 서류를 처리해 나갔다.

새삼스럽게 체감하게 됐다.

수석, 호열이 짊어지고 있던 마탑의 무게를.

마르셀로가 중얼거렸다.

“어떻게 버텨오신 겁니까, 경께서는.”

스스슥.

벤쉬 윌리엄 선임의 출탑 신청서에 ‘불합’을 서명하며 마무리.

드디어 호열이 담당하던 업무가 끝났다.

“이래서야 제대로 잠은 주무시는 건지요.”

달칵.

마르셀로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티백 녹차의 효능을 떠올렸다.

카페인이라 불리는 성분이 각성 효과를 제공한다고 했던가.

마르셀로가 지그시 고개를 끄덕인다.

“녹차를 즐기셨던 이유가 달리 있으신 게 아니었군요.”

그저 입맛 때문이었거늘…….

멋대로 결론을 내린 마르셀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래 앉아있어서 온몸이 들쑤셨다.

“포탈부터 다음 정기 학회의 진행까지.”

탑주는 마탑과 일심동체라 봐도 무방하다.

신경을 써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니란 뜻이었다.

마르셀로가 작게 중얼거렸다.

“다만, 저는 경이 아니기에.”

조금은 숨을 돌릴 틈이 필요하겠지요.

그럼에도 마르셀로는 호열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

휴식 시간을 활용한 기이의 탐구.

마르셀로가 스마트폰을 꺼내 능숙하게 조작했다.

“새벽 도착 보장이라. 대륙에도 이런 날이 올까요?”

티백 녹차 로켓 배송 주문 완료.

“반전마법은 언제 봐도 질리지 않습니다.”

넷튜브 동영상 감상.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터넷에 접속.

마르셀로가 새로운 소식, 뉴스를 확인한 순간이었다.

“……?”

그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생각지도 못한 활자가 떠올라 있기 때문이었다.

다름 아닌 호열에 관한 기사가.

마르셀로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AAU 고위 관계자, “이호열이 바로 십좌의 마왕!”]

기이로 나아가기 위해.

마탑과 AAU.

두 세력이 모였던 크리스탈 홀.

“호의를 이렇게 갚을 줄이야.”

크리스탈 홀에서 진행된 회의.

그 내용이 외부로 새어나간 것이었다.

마탑을 향한 기만이자 도전과 다름없었다.

“미리 깊은 유감을 표하겠습니다.”

*

AAU 대한민국 지부.

성현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는다.

“그냥 덧붙인 거겠죠?”

대다수가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이었다.

총회의엔 각 지부의 AAU 구성원이 전원 참석한다.

AAU에서도 내부 정보가 새어나가는 게 흔한 일이라는 걸 생각하면……. 호열의 폭탄선언은 언제 세상에 알려져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다만, 문제는 기사의 사족이었다.

“고위 관계자라니. 이런 말도 안 되는 개소리가 그럴싸해 보이잖아요? 무엇보다 의도가 명확해요! 이호열 총책임자님께서 그래야만 했던 이유를 전부 설명해 주셨는데……!”

내가 바로 십좌의 마왕이다.

호열은 선언에 쏟아졌던 의문에 전부 답했다. 자신이 십좌의 마왕을 쓰러트려 그 왕좌를 차지하게 된 경위부터. 차지한 왕좌를 마왕 쟁탈전에서 어떻게 활용할지까지 말이다.

윤수겸이 추잡함에 혀를 내둘렀다.

“유사언론도 아니고, 저명한 포스트에서 터트린 기사야. 확실한 소스가 있다는 거겠지. 이번 회의록을 대중에게 공개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악의적으로 써먹고 있어. 내부자가 관련된 게 확실해.”

기사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간단했다.

“마왕 쟁탈전의 원인이 이호열의 행동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제아무리 이호열이라고 하더라도 마왕의 권능에 심취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이 미친 새끼가. 어디 균열도 총책임자 탓을 하지 그러냐?”

지부장 박민재가 싸늘하게 말했다.

턱끝까지 차오른 인류의 위기 앞에서.

고작 이해관계 때문에 이런 음해를 해올 줄이야.

이전부터 낌새를 느끼긴 했다마는 정말로 대단들하셨다.

“그래, 예전 같았으면 내 속만 터졌겠지.”

그러나 박민재는 다짐했었다.

이제부턴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으로도 바쁜 호열이었다.

플레이어도 아닌 자신이.

호열의 발목을 붙드는 세력 전부를 어떻게 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AAU 내부만큼은 확실하게 정리하겠다고.

한때 코스모의 미친개라 불리던 박민재다.

그에게 진흙탕 싸움은 익숙했으니까.

박민재는 곧장 전화를 걸었다.

상대가 전화를 받자마자 물었다.

웃음기라고는 조금도 없이.

“당신입니까?”

미합중국 서부 지부장, 짐 조슈아.

“아니. 당신까지 나한테 이러깁니까, 미스터 박?”

조슈아는 그렇지 않아도 빗발치는 전화에 시달리던 참이었다.

켈리포니아, 네바다, 오레곤…….

미국 서부의 주지사들부터가 자신을 득달해댔다.

“주지사들도 그렇고 나를 어떻게 보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미스터 박, 저 성경 앞에서 회개했습니다. 기독교 국가에서 성경을 언급한 게 무슨 뜻인 줄 알죠?”

박민재의 조소가 들려왔다.

-“신 따윈 믿지 않는다. 제가 좋아하는 말이죠.”

“……누가 한 말인가요, 그거?”

-“이호열 총책임자님이 남기신 말씀이십니다.”

“아, 아니! 내가 아니라니까요?!”

그동안은 몰라도 이번에는 정말로 아니었다.

그야 직접 대면하지 않았던가?

유스라 총책임자, 호열과 말이다.

“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직감했습니다. 나의 방탕한 생활은 전부 끝장났구나, 하고는. 어느 누가 유스라 총책임자님과 얼굴을 맞대고도 허튼 생각을 품겠습니까, 미스터 박?”

직위가 직위였다.

덕분에 조슈아는 수많은 랭커 플레이어와 대면했었다.

그러나 호열은 차원이 달랐다.

자신도 모르게 우러러보게 되는 게…….

“무엇보다 나는 총책임자님의 결단에 감동했습니다. 마왕을 사냥하기 위해서 당신께서 마왕이 되셨다니. 그거 완전 니체의 명언하고 딱 맞아떨어지는 상황이 아닙니까? 왜, 당신이 심연을 들여다볼 때…….”

칼 같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렇다면 어째서 워싱턴 포스트에서 기사가 나왔을까요, 조슈아 지부장? 당신이 아니라면 선택지는 하나밖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하여튼 미스터 박.

문학적 소양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니체의 명언도 끝까지 듣지 않다니.

조슈아가 한숨을 삼키곤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고 있습니다. 동부를 말씀하는 거겠죠? 하지만 아닐 겁니다. 이제부터 제 나름대로 뒤를 캐볼 생각입니다만. 아마도 포스트에서 멋대로 부풀린 걸 겁니다. 말했잖아요? 어떻게 유스라 총책임자님하고 얼굴을 맞대고도 뒤통수를 칠 생각을…….”

문득, 조슈아가 말꼬리를 흐렸다.

-“……조슈아 지부장?”

박민재가 이름을 불러도 대꾸할 수 없었다.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가는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조슈아가 입을 열었다.

“……얼굴을 맞대지 않았어.”

호열과의 첫 만남.

그때 미합중국 동부 지부장은 호열이 있는 회의장에 입장하지 않았다. 화장실에 들렀다가 약속 시각을 어겨 회의장에 입장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번 마탑과 AAU의 총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요? 가정사라면 어쩔 수 없죠.”

“……미스터 박.”

조슈아의 표정이 급변했다.

“아무래도 적이 상당히 가까이에 있던 모양입니다.”

.

.

.

꼬물꼬물.

작은 손가락이 꼼지락거린다.

TV에 떠오른 글씨를 몇 번이고 훑어본다.

이젠 어엿한 유치원생.

소리 내어 읽는 건 어렵지 않았다.

“으으으음.”

다만, 그 뜻을 도대체 알 수 없을 뿐.

“엄마아.”

“아랑이, 왜요?”

“요기. 삼촌 이름 뒤에 있는 글자 무슨 뜻이야요?”

“뭔데요? 엄마가 설거지 중이라 아랑이가 읽어줄래?”

또박또박.

서아랑이 발표하듯 우렁차게 읽어본다.

“이.호.열. 그.는. 정.말.로. 십.좌.의. 마.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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