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82화 (382/489)
  • ◈ 382화. 역시 우리는

    아르카나 대륙.

    아이언 캐슬 호.

    성전 연합군의 표정은 침울했다.

    “저 흉악한 아가리에 발을 들이겠다라.”

    아득한 지상.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는 거대한 구멍.

    체인워커는 베히모스의 아가리를 바라봤다.

    호열은 마계로 진입하겠다는 뜻을 밝힌 뒤.

    고향인 모험가들의 세계로 복귀한 참이었다.

    체인워커가 모험가들에게 물었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당연히 뒤따라야죠.”

    남태민이 대표로 내뱉었을 뿐. 다른 이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각오를 말하기도 새삼스럽다. 여태껏 호열의 뒤를 따르며 단 한 번도 목숨을 걸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까.

    다만, 히사기가 진실을 덧붙였다.

    “저희에게 그럴 자격이 있다면 말입니다.”

    그럼에도 단 한 번도 호열과 같은 위치에서 나아간 적은 없었다.

    호열이 남긴 자취를 따랐을 뿐이었거늘.

    뒤쫓는 것만으로도 벅차기 그지없었으니까.

    스슥.

    척 봐도 심상치 않게 몸을 웅크리고 있던 월스와일이 허리를 편다. 퉁명스러운 말투는 드워프다웠지만, 말에 담긴 뜻은 마냥 차갑지 않았다.

    “하! 누가 그 뒤를 쫓을 수 있겠는가? 나조차도 벅차기 짝이 없는데. 지금 내 꼴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드워프 역사상 최고의 대장장이라 불리는 월스와일이. 혹시라도 총대장의 마음에 들지 못한 결과물을 내놓을까 봐. 안절부절못하고 있단 말이야!”

    월스와일의 자학적인 농담.

    작은 웃음이 터져 나오던 순간이었다.

    체인워커가 쓴 입맛을 다셨다.

    “과연, 그대들의 각오는 우리와 다를 바가 없군. 그런 의미에서 위안이 되는군. 그러나 각오만으로 맞닥뜨린 현실을 극복할 순 없겠지. 마계라는 미지의 세계에서는 더더욱.”

    “…….”

    “냉정하게 우리는 되려 짐이 될지도 모르네.”

    누구도 반박할 수 없었다.

    간접적으로나마 마계의 위용을 체감했기 때문이었다.

    베히모스의 아가리에서 뛰쳐나왔던 마계의 존재, 디스커스 덕분에.

    월스와일이 찰나의 전투를 상기한다.

    깡.

    망치로 부식된 투구를 두들겨 본다.

    “아다만티움이 녹아내렸네. 쉽게 비교해 줄까? 이 두 눈으로 아다만티움이 녹아내리는 걸 본 건 두 번째네. 처음은 웬 드래곤 녀석이 드워프 왕의 금고를 노릴 때였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그래, 그 해골이 뿜어낸 맹독의 위력이 드래곤 브레스와 맞먹는다는 소리라네. 그런 놈들이 도전자로서 총대장의 목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야.”

    “그뿐만이 아닙니다.”

    히사기가 두 손가락을 펴 보인다.

    “총대장님께서는 단순히 도전을 증명하시는 것에 그치지 않으실 겁니다. 더 높은 서열의 상위 마왕조차도 지옥에 떨어트리겠다, 절차를 세우고 계시겠지요.”

    잠자코 있던 레오니가 중얼거린다.

    “……자기 몸 하나 간수하기도 힘든 상황이네, 그거.”

    거대 연합.

    그리고 스칼은 유낙서스 레이드를 잊지 않았다.

    만약, 호열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 도움이 없었다면.

    그날, 자신은 악룡(惡龍)에게 잡아먹혀도 이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맞아. 엎친 데 덮친 격이지.”

    꾸욱.

    남태민은 주먹을 쥐었다.

    단순히 자신의 약함이 분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주제 파악은 중요하다.

    호열 씨가 강조하시던 말이잖아?

    자신의 약함은 새삼스럽지 않았다.

    그보다도 한 가지 걸리는 게 있기 때문이었다.

    ‘……호열 씨는 괜찮을까?’

    여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의심하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남태민은 목격했다.

    정확하게는 짐승보다 예민한 후각으로 냄새를 맡았다.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긴 은발의 머리칼.

    그에게서 풍겨오던 냄새는 분명 호열의 냄새가 아니었다.

    그리고.

    ‘디스커스를 쓰러트린 건…….’

    호열이 아닌 ‘그’였다.

    우려가 되는 게 당연했다.

    그가 누구인지.

    당사자인 호열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대체 호열 씨에게 어떤 일이 벌어진 건지.

    의문투성이였으니까.

    “…….”

    그런 복잡한 속내를 숨기고 있는 남태민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앙숙.

    히사기가 그냥 지나치지 않고서는 못 배길 정도로.

    “하룻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어도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뭐라고? 뭔 강아지?”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뿐.”

    그렇게 말한 히사기는 체인워커에게 양해를 구했다.

    발표 자리를 넘겨받았다.

    히사기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언급한 것처럼 이번 마왕 쟁탈전에서 총대장님께선 양측에서 시련을 겪으실 겁니다. 도전을 받는 입장에서. 그리고 도전을 하는 입장에서. 실로 막대한 짐을 짊어지게 되시겠지요. 그러한 총대장님의 짐을 나눠 들고 싶다면…….”

    주제 파악을 했기에 낼 수 있는 결론이었다.

    “저희가 도전자를 맡아서 처리하면 됩니다.”

    마왕 쟁탈전.

    왕들도 서로의 숨통을 겨누게 될 터.

    부에르와 가미긴을 제외하더라도.

    호열은 무려 여덟의 상위 마왕을 노려야 한다.

    도전자들 따위에 발목을 잡힐 새가 없다는 뜻이다.

    “그것참 듣던 중 반가운 계획이군.”

    성전 연합군은 망설이지 않았다.

    도전자의 싹을 미리미리 짓밟기 위해 움직였다.

    어떤 악마가 십좌에 도전하겠는가는 중요치 않았다.

    남태민이 누구처럼 무게를 잡고 읊조린다.

    “열등한 족속은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는 법.”

    호열의 가르침.

    “임프처럼 별 같잖은 악마도 총대장님을 귀찮게 할 거야. 마계에 있는 놈들은 당장 어떻게 할 방법이 없겠지만……. 아르카나 대륙에 있는 놈들은 아니잖아?”

    아직도 아르카나 대륙에 똬리를 틀고 있는 악마들이 있었다.

    성전 연합군은 그런 놈들부터 차례로 사냥해나갈 생각이었다.

    “그래서, 다 좋은데…….”

    남태민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왜 하필 너가 내 파트너냐?”

    “조화가 중요하기 때문이겠죠.”

    “조화? 너 설마 우리가 어울린다고 생각하냐?”

    “저로서는 귀찮은 일입니다. 하지만 짐승과 다른 게 없는 당신의 충동을 감당할 수 있는 건 차가운 이성을 가진 저밖에 없으니까요. 제겐 익숙한 일이니 따로 감사 인사는 받지 않겠습니다.”

    “……미친놈.”

    됐다.

    뱀 같은 자식하고 말을 더 섞어봤자 피곤하기만 할 것 같았다.

    남태민은 혀를 내두르고는 주위를 바라봤다.

    보자…….

    바닥에 찍힌 수레바퀴 자국부터 말발굽까지.

    “그래도 사람 흔적이 보이네.”

    멸망을 향해가는 아르카나 대륙을 이렇게 되살려 내시다니.

    이 또한 아르카나인들을 구해낸 총대장님의 위엄일 터.

    남태민이 고개를 주억거리던 순간이었다.

    히사기가 냉정하게 말했다.

    “감당할 수 있는 적의 수준을 자각해 둬야 합니다. 악마족 몬스터일 땐 최대 700레벨까지. 보스 몬스터라면 사전약속대로.”

    히사기가 손바닥만 한 톱니바퀴를 들어 보였다.

    [무전기 - 아이언 캐슬 호]

    “알고 있어. 우리만으로 그 이상은 무리니까.”

    악룡, 유낙서스.

    그 사투에서 전력을 쏟아본 덕분일까.

    나름대로 정확한 견적을 낼 수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폐허가 된 마을로 진입했다.

    [붕괴된 마을, ‘풀럼’에 진입하셨습니다.]

    “…….”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의 표정이 굳어갔다.

    사방에 말라붙은 검은 핏자국이 보였다.

    아르카나 대륙은 무사하지 못했다.

    처참하게 무너진 뒤.

    재건 중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게 하는 광경이었다.

    “마냥 남 일 같지 않은데.”

    쏟아지는 균열을 클리어하지 못했다면.

    현실도 이런 꼴을 면치 못했겠지.

    느슨해진 긴장감이 다시 팽팽하게 당겨지는 기분이었다.

    저벅저벅.

    “이곳에서 악마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죠.”

    히사기가 창을 겨눈 채 주위를 탐색했다.

    클래스, 마창사와 바바리안.

    악마 사냥꾼이 아니기에 악마의 냄새 같은 건 쫓을 수 없다.

    서걱서걱.

    “……!!”

    그러나 호열을 제외한 플레이어 랭킹에서 나란히 1, 2위를 차지하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극도로 발달한 청각에 신경을 긁는 소음이 들려온 것이다.

    척.

    서로 눈빛을 교환할 필요도 없었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숨을 죽였다.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스스슥.

    먼저 도착한 건 남태민이었다.

    고양이과 맹수처럼 은밀하면서도 신속하게 움직인 남태민.

    그의 근육이 멈춘 곳은 마을과 마찬가지로 쑥대밭이 된 주점이었다.

    ‘……피 냄새.’

    하지만 그 내부에서.

    말라붙은 피 냄새와는 다른.

    비교적 생생한 혈향이 풍겨왔다.

    서걱서걱.

    폐허에서 피 냄새를 풍기며.

    기묘한 쇳소리를 낼만한 존재라.

    악마 말고 또 누가 있을까.

    쾅!

    남태민이 문을 박차고 주점을 습격한 순간이었다.

    그에 뒤질세라.

    깨진 창문으로 진입한 히사기의 뱀눈이 휘둥그레졌다.

    서걱서걱.

    “잠깐, 지금이 막 중요한 구절이라.”

    “……?”

    웬 사내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 얼굴에 앳된 티가 남아있는 게 사내보다는 소년에 가깝다. 자세히 보니 고풍스러운 깃털펜으로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써내려가고 있었다.

    그 태연한 태도에 남태민은 자신도 모르게 사과했다.

    “……일단, 그 미안합니다.”

    찌릿.

    “뭐?”

    히사기가 그런 남태민을 뱀눈으로 흘겼다.

    여기가 마탑의 에메랄드 홀도 아니고.

    무슨 예의를 챙기고 있느냐는 뜻이었다.

    히사기가 물었다.

    “당신, 이런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겁니까?”

    “뭘 하고 있냐니, 보면 모르나? 아르카나 대륙에 길이 남게 될 역사서를 써내려가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게. 시선을 줄 새도 없이 바쁜 참이라.”

    “엥?”

    폐허에서 저주라도 써내려가는 악마 숭배자인가 싶었는데.

    뜬금없이 역사서를 써내려가는 중이시란다.

    남태민이 속삭였다.

    “저걸 믿어야 해?”

    히사기가 무어라 답하기도 전 소년이 말한다.

    “뭐, 내 말과 글을 믿지 못해서 대가를 치른 이들이 있기는 했었지. 자네들도 그들이 흘린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든 게 아닌가? 충분히 맡았을 것 같군. 두 사람 중 하나에게서 프로스트 야만전사의 냄새가 풍겨오는 듯한데.”

    “……!”

    남태민은 흠칫하고.

    히사기는 그런 남태민을 흘겨봤다.

    남태민이 억울함을 표출한다.

    “……왜 그렇게 쳐다봐? 오늘은 씻었거든?”

    남태민은 소년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 시선은 여전히 깃털펜이 춤을 추는 종이에 고정되어 있다.

    정말로 냄새만으로 자신의 정체를 알아맞힌 모양이었다.

    ‘그것도 출신지까지.’

    바바리안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그러니 의문이었다.

    아르카나 대륙의 시간은 현실보다 네 배나 빠르다.

    소년이 프로스트 바바리안에 관한 정보를 알고 있을 순 없을 터.

    그렇게 생각하니 더욱더 의문이었다.

    ‘저런 꼬맹이가 어떻게 역사서를 쓴다는 거야?’

    동경의 현사.

    히사기의 두뇌 회전은 남태민보다 몇 배나 빨랐다.

    허점이 가득한 소년의 말 따위 조금도 신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히사기가 슬며시 창을 다잡았다.

    ‘악마에게 방심은 금물이다.’

    언제라도 창을 내지를 수 있도록.

    히사기가 내면의 마력을 예리하게 가다듬는 순간이었다.

    소년이 드디어 깃털펜을 내려놓고는 입을 열었다.

    “좋아. 일단락되었군. 어떤가, 그대들도 한번 읽어보겠는가? 뭐, 그대들이 작성하는데 영감을 준 건 없지만. 얌전히 기다려 준 값을 제대로 쳐줘야 하겠…….”

    시선을 옮기더니 말꼬리를 흐렸다.

    “설마, 자네들 모험가인가?!”

    남태민과 히사기는 소년의 눈과 마주했다.

    맑다.

    너무나도 맑고 반짝거려서 오히려 두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소년에게는 두 사람의 반응 따윈 중요치 않았다.

    “소문으로 듣던 모험가라니!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네. 세상에 떠도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 무려 부활의 기적을 보유하고 있다고 했었지? 어디, 내게도 그 기적을 보여줄 수 있겠는가? 뭐, 죽는 건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네!”

    맑은 눈에 어울리는 광기가 가득한 제안을 하고 있다……!

    남태민과 히사기.

    두 사내가 소년과 거리를 벌리려던 순간이었다.

    소년이 흠칫했다.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그래, 부탁하기 전에 오고 가는 게 있어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거늘. 이렇게 합세! 내 역작을 자네들에게 먼저 보여줄 테니까. 자네들도 모험가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는 걸로!”

    이번에도 역시나 두 사람의 의견은 중요치 않았다. 소년이 다짜고짜 자신이 작성한 자칭 위대한 아르카나 대륙 역사서 원고를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걸 보여줘 봤자 협조할 생각은…….”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이 현실 시간으로 몇 년 전인데.

    무슨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고 있는 거냐.

    남태민이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이건……?”

    히사기가 멈칫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소년이 적었다는 역사서에서 그 이름을.

    정확하게는 그 이명을.

    한없이 깊은 어둠을.

    “아무래도.”

    히사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긍지가 우릴 당신에게 이끈 모양이군요.”

    그 말에 소년, 로렌츠크가 반응했다.

    “긍지가 우리를 이끌었다라…….”

    그가 덥석, 히사기의 손을 잡았다.

    “이제 보니 자네들, 낭만이 넘치는군!”

    *

    간만에 현실 복귀.

    ‘대련이 끝나자마자 다시 쳇바퀴라니.’

    불행 중 다행히도 마탑에 밀린 업무는 없었다.

    새 탑주 마르셀로가 수석의 업무를 대신해서 처리해 준 덕분이었다.

    새삼스럽게 그 고양이가 얼마나 날로 먹었는지 깨닫게 된다.

    ‘다음에 제시를 만나면 모자에다가 잔소리 좀 해야겠어.’

    슥.

    나는 집무실 의자에 착석한 뒤 곧장 하이엘을 불러냈다. 현실로 돌아왔지만, 아르카나 대륙에 신경을 완전히 끌 순 없었다. 성전 연합군의 동태를 시시각각 살피는 게 총대장의 역할이니까.

    그런데.

    “주군. 좋은 소식들이 있습니다.”

    하나도 아니고 좋은 소식‘들’이 있다니, 하이엘.

    ……오히려 걱정이 앞서는 이유는 왜일까?

    듣기도 전부터 각오했거늘.

    ‘언제나 상상 그 이상이구나.’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어떻게 만나서 반가운 건 그렇다고 치더라도.

    로렌츠크, 당신……!!

    누구 허락을 맡고 역사서를.

    아니, 그딴 흑역사서를 써내려가고 있는 건데?!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