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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81화 (381/489)

◈ 381화. 마왕 (2)

십좌(十座).

상위 마왕은 재단할 수 없는 존재다.

세계관 하나를 좌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원래부터 타고난 건지, 아니면 그들이 앉은 왕좌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 없다만. 그 강함만큼은 거짓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 이호열은 혹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뭘 가릴 처지가 아니잖아?

그랑펠은 몰라도 이호열은 무엇하나 가려선 안 된다.

그 초심을 잊지 않고 발버둥칠 거리를 찾았다.

스킬이 됐든, 아이템이 됐든, 구질구질한 꼼수가 됐든, 초등 수준의 과학이 됐든, 마법이 됐든, 뭐든. 전부 가져다 써야만 내가 짊어진 짐의 무게를 버틸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삶이라는 게 역시 만만하지 않다.

십좌.

악마와는 무관한 특별한 힘을 가졌기를 바랐거늘.

막연한 바람에 불과했던 건가.

나는 떠오르는 메시지를 바라봤다.

[고유의 분위기가 일대를 장악합니다.]

[현재 분위기 : 십좌의 마왕, 이호열]

[주의 : 악크샨이 당신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매력]이 이끌어 낸 [고유의 분위기]는 잠깐 넘어가자.

지금 중요한 건.

우리 악크샨 선배님들께서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뒤통수가 따가워지는 기분인걸.’

한 줄의 메시지.

그러나 담긴 뜻은 절대 가볍지 않다.

나는 잊지 않았다.

몇몇 악크샨 선배님들이 지옥에 떨어졌던 이유를.

악마를 사냥하기 위해서 악마를 들여다보다가 결국, 악마로 타락해 동료의 손에 사냥당해 지옥에 떨어지신 게 바로 지옥의 악크샨 선배님들이시다.

‘변명의 여지가 없겠어.’

그런 의미에서.

나도 그들과 다를 바 없었다.

아니, 훨씬 심각하지 않을까.

왜, 그냥 악마도 아니고 마왕.

그것도 상위 마왕이 된 거나 다름없는데.

악크샨 선배님들이 이 후배를 주시하시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설령 상위 마왕의 힘이라고 하더라도.

그 악함에 휘둘리지 않을 자신이.

이 자신감의 원천은 역시나 그랑펠이다.

나는 입을 열었다.

“그대가 짐작하는 바가 맞다.”

메어리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인다.

“이것은 마왕의 힘이다.”

아득히 높은 곳에 있는.

아득히 높은 존재를 바라보는 듯한.

그야말로 넋이 나간 표정의 메어리.

내게는 익숙한 표정이었다. 바알의 팔뚝과 마주했던 세오른 대륙 사람들 반응이 딱 저랬거든. 하지만 말했다시피 우려할 것 없다, 메어리.

고요하기 짝이 없다.

심장 고동도.

내면에도.

육체에도.

내게는 그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그랑펠이 차기 가주로서 가장 먼저 몸에 익힌 건 사사로운 것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것이었다.』

설령 상위 마왕의 힘조차도.

그랑펠은 사사로운 것이라 여기기 때문일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클라우디 가문의 가주의 자리는 조금의 동요도 용납되지 않는 그런 자리였다.』

지금의 나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니까…….’

악마라면 특히나 상위 마왕이라면 득달같이 달려들었을 우리 악크샨 선배님들조차도 나를 지켜보기만 하고 있는 거겠지. 그것이 과소평가든, 과대평가든 중요하지 않다.

『과소평가에는 증명을. 과대평가는 기어코 현실로 만들어 내고야 말았으니까.』

그렇다.

지금의 나는 상위 마왕의 힘조차도 온전히 나의 것으로 소화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렇지 않고서는 최하위 서열인 나를 노리는 도전자들에게서. 상위 마왕과의 서열전에서. 제 발로 걸어 들어간 마계에서 살아남 수 없을 테니까.

나는 각오하듯 읊조렸다.

“그러니 전력을 기울여도 좋다.”

끄덕.

스오오오.

메어리의 보랏빛이 더욱 거세게 용솟음친다.

나 또한 시공간의 사교장에 출입할 수 있는 초월자.

덕분에 메어리가 입에 달고 사는 담배가 얼마짜린 줄 알고 있다.

‘제일 싼 게 한 갑에 100골드였지, 아마?’

나는 메어리의 전력을 목격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장담하건대 메어리는 내가 그동안 봐온 그 어떤 마법사보다도 강할 게 분명하다. 탑주, 그 고양이조차도 서클을 형성하진 못했었으니까.

‘거기에 비교하면 나는.’

절대적인 마력의 총량?

비교할 수 없이 낮을 거다.

서클?

영약 섭취를 통해 형성하기는 했다만 목숨을 걸고 억지로 열어 재꼈다고 봐도 무방했다. 심지어는 경험도 비교할 수 없겠지. 메어리는 영겁에 가까운 세월 동안 흉조를 감시했다.

그 담뱃값을 위해서라도 꾸준히 고난이도의 시공간 임무를 수행해왔을 테니까.

스스스.

그러니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나는 메어리의 첫 발현부터 받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상위 마왕의 힘을 사용하지 않고, 마법으로만 맞붙었다면 말이지.

고오오.

황혼의 마력은 같은 총량의 마력보다 농도가 수십 배는 짙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하다. 적은 마력으로 높은 마법 발현력을 끌어낼 수 있다는 뜻이다.

‘진짜 전력이군.’

심지어 메어리는 마탑에 머무르며 새로운 마법을 익혔다.

이젠 내가 유일하게 앞서있다고 할 수 있는.

마법 지식 우위도 살릴 수 없었다.

‘그 증거로 속성마법을 발현하지 않았어.’

속성 마법에는 뚜렷한 우위가 존재한다. 빙결마법사, 세니오스가 화룡, 카림제바를 극복할 수 없던 것처럼. 먹고 먹히는 천적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쏴아아아.

하지만 내게 쏟아지는 건 그저 순수한 황혼의 마력 그 자체였다.

순수마법학의 개념을 완벽하게 숙지한 거겠지.

언젠가의 정기 학회, 뱅그릿 선임의 발표가 머릿속에 스쳐 간다.

-“순수마력학은 이론상 가장 효율적인 마법입니다! 딱히 상성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죠. 다만 한 가지 크나큰 약점이 존재하는데……!”

순수마법이 다른 마법과 충돌하는 순간. 그 절대적인 마력의 총량에서 밀리게 된다면 순수마법이 다른 마법에 편승하여 역발현된다는 취약점이 있었다고 했겠다.

‘뱅그릿이 선임이 된 이유가 그 때문이지.’

마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마력 친화력.

뱅그릿은 말 그대로 진흙 속에서 피어난 연꽃과도 같은 존재였으니까. 타고난 마력 친화력은 뱅그릿의 순수마법이 어떤 마법과 충돌해도 역발현을 경험하지 않게 해준 것이었다.

‘그러니까 메어리가 발현하는 순수마법은.’

뱅그릿의 완벽한 상위호환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나로서는 받아낼 재간이 없다는 소리지, 뭐.

‘온다.’

슈우우욱.

보랏빛 황혼의 마력 폭풍이 매섭게 몰아쳤다.

기본적인 마법적 지식이 머릿속에 흘러간다. 순수마법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발현할 수 있는 마법 중 가장 발현력이 뛰어난 마법으로 맞서야 한다.

‘절대적인 총량이 중요하기 때문이지.’

하지만 내 특기가 뭐냐?

주제 파악이다.

내가 발현할 수 있는 마법 중, 가장 마력 효율이 좋은 일명 건축마법을 내세워도 나는 메어리의 황혼 마력 폭풍에 대응할 수 없겠지.

그러니 제대로 휘둘러볼 수밖에 없다.

상위 마왕의 힘을.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마왕의 힘을 써먹을 생각을 했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경험담을 내밀 수밖에 없다.

일전의 마왕 쟁탈전에서 목격했기 때문이다.

무수한 악마가 목숨을 내던지면서 왕좌에 앉으려고 했던 이유를.

격(格).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랑펠은 이해할 수 없을 거다. 악마가 다 똑같은 악마지, 열등한 족속에게 격 따위가 존재하는 게 말이나 되느냐고 차갑게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 이호열은 알고 있다.

게임에 불과했던.

아르카나 대륙 전기를 플레이한 덕분에 말이야.

‘왕좌를 차지하면 보스 몬스터로 승급한다.’

일반 몬스터와 네임드 몬스터엔 격차가 존재한다. 그런 네임드 몬스터와 보스 몬스터의 격차는 가히 수십에서 수백 배라 봐도 무방하다.

보스 몬스터 레이드에 수십에서 수백 명의 플레이어가 달라붙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같은 레벨이라고 할지라도 [보스]라는 수식어가 붙는다면 차원이 달라졌으니까.

왕좌가 일흔 두 개나 존재하던 시절에도 그랬다. 그렇다면 단 열 개의 왕좌만 존재하는 지금. 그 왕좌를 차지하게 된다면 그 새로운 마왕은 어떤 격의 상승을 이루어낼까?

당사자인 나는 시험해 볼 생각이었다.

슥.

살며시 손을 치켜든다. 건축마법은 발현하지 않는다. 나는 메어리와 마찬가지로 순수한 마력을 이끌어냈다. 순수마법을 발현했다는 것이다.

고오오오.

말했다시피 나의 마력 총량은 터무니없이 적다.

150레벨 상승, 레벨이 일천(一千)이 가까워졌다고 한들.

[근력], [민첩], 심지어는 [행운]에 투자한 포인트도 적지 않았으니까.

‘나도 황혼의 마력을 써먹을 수 있긴 하다만.’

황혼의 마력을 다루는 법 역시도 어깨너머로 배운 거에 불과했다. 겸손을 떠는 게 아니라 정말로 메어리가 제시를 교육할 때 엿보고 배운 거였잖아?

상식적으로.

그런 나의 순수마법과 메어리의 순수마법이 충돌하면 백이면 백.

내 쪽이 처참하게 깨지는 게 옳게 된 마법의 순리였다.

그러나.

충돌한 마력 입자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아니…….

저걸 마력의 충돌이라고 볼 수 있을까?

“……!”

일방적인 짓누름.

나의 마력이 황혼의 마력을 짓밟고 있었다.

마치 ‘격’이 다르다는 것처럼.

황혼의 마력에게 접근조차 허가하지 않고 있었다.

메어리가 소리를 낸다.

“……어떻게 이런 마력을?”

물과 기름.

서로 섞이지 않아 충돌의 충격은 없다.

하지만 물이 아래에 깔리고 기름이 위로 떠오르듯.

나의 마력과 황혼의 마력엔 거스를 수 없는 순리가 존재했다.

메어리가 중얼거렸다.

“황혼의 마력보다도 정순한 마력이라니……?”

순혈의 마도 일족, 황혼의 후예.

그들이야 사용하는 황혼의 마법과 마력이야말로 본래의 마법, 자체였다. 하지만 지금 내가 발산한 마력은 그런 황혼의 마력보다도 서열상 우위에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태연하게 읊조렸다.

“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쭐댈 의도는 없었다.

그저 십좌를 차지해 격이 상승한 덕분이었으니까.

새삼스럽게 입맛을 삼킨다.

‘……정말이지, 이호열답구나.’

이번에도 처절하기 짝이 없는 발버둥이었다는 거지.

그러나 나는 간과하지 않았다.

마왕이 어째서 마왕이라 불리는가.

악마(惡魔)의 왕이기에 마왕(魔王)이라 불린다.

만약, 나의 정신력이 조금이라도 흔들렸다면…….

‘지금쯤 지옥의 선배님들한테 끌려갔겠지.’

그러나 그랑펠의 정신머리가 나와 함께였다.

그랑펠에게 악마란 용납할 수 없는 존재니까.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상위 마왕의 힘을 빌린다는 건 그랑펠 사전에 있을 수 없는 일.

그런 그랑펠의 똥고집을 믿었기에.

나는 도려내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악(惡)을.

덕분에 손에 쥐게 된 것이다.

‘참고로 마법(魔法)에서도 같은 마 자를 쓰거든.’

정순한 마(魔)의 왕좌를.

스오오오.

나는 나의 몸에서 일렁이는 마력을 바라보았다. 격이 다른 마력의 효율을 체감했다. 깨닫게 되었다. 이제는 정말 마력 핑계를 댈 수 없는 수준까지 성장했구나, 호열아.

“대응할 여지가 없습니다.”

메어리가 입을 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메어리의 말이 옳았다.

황혼의 마력은 흐름을 완전히 멈췄다. 움직일 수 없으니 발현 과정에 이를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저 한 합을 주고받았을 뿐인데. 메어리는 그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살았다.’

한숨을 돌리자 그제야 주변의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확하게는 주변의 ‘분위기’가 읽히기 시작했다.

분명하게 말하지만 이건 엄연히 기뻐해야 할 일이었다.

‘상위 마왕의 힘에서 악을 도려내고 써먹는 데에 성공한 거니까.’

한마디로 단물만 쪽쪽 빨아 먹는 데에 성공했다는 뜻.

그런데 어째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울창한 수목도 모자라서.

대지의 수풀마저 나를 향해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

비유하자면.

‘정말 나를 무슨 마왕을 보듯 하고 있잖아?!’

그쯤에서 나는 자각했다.

[고유의 분위기].

스탯 [매력]의 효과가 이런 거였구나?

쉽게 말하자면 연출력이었다.

매력에서 비롯되는 고유의 분위기라는 게.

타인에게 나를 정말로 마왕으로 비치게 하고 있었다.

나는 여명의 재킷에 달린 붉은 보석, 러스트를 바라봤다.

‘이렇게 달갑지 않은 효과라니……!’

그렇지 않아도 쓸데없이 분위기를 잡는, 그랑펠식 화법만으로도 충분히 부담스럽단 말이다……! 그것도 모자라서 고유의 분위기, 이런 연출까지 더해진다고?

‘심히 두렵다.’

화법과 분위기의 시너지가 어떤 일을 초래할지.

내가 속으로 침음을 삼키던 순간이었다.

별안간 소리가 들려온다.

털썩.

시선을 옮기자 메어리가 무릎을 아니.

내 앞에 엎드려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남쪽 바다의 마녀, 메어리.”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진정한 마왕을 뵙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그 마왕이 아니다……!

분위기 때문에 마왕처럼 보여도 여기에 증거가.

그것도 천적이 인정한 증거가 있잖아?

[악크샨이 당신에게서 의심을 거둡니다.]

그러니까 그런 마왕이 아니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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