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0화. 마왕 (1)
마계 진입.
어쩌면 플레이어 각성 이후 처음으로 믿을 구석 없이 발버둥 쳐야 할 때가 온 건지도 모른다. 두렵냐고? 두렵다. 나, 이호열 아직은 누구처럼 겁대가리를 상실하지 못했거든.
유스라 왕국.
나는 별실의 뒤뜰에 섰다.
무성하게 자라난 수목이 울타리처럼 둘러져 있다.
문득, 새 지저귀는 소리만 들려오는 게 세상과 동떨어진 장소 같기도 하다. 그런 시야에 언뜻 보이는 건 별실에 딸린 [품격의 화원]뿐이다.
‘내 입방정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는 모르겠다만.’
천하통일 사태 이후.
엘시도어는 중국에 머물렀다.
우려할 건 없겠지.
엘시도어는 나름대로 믿을 수 있는 존재가 되었으니까. 뭐, 생각도 못한 짓을 저지른다고 하더라도 [축복의 위계질서]가 있는 이상. 엘시도어를 제어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대라면 잘 해내리라 믿겠다.”
뭣보다 나도 사회 경험을 허투루 한 게 아니다. 계속 화원에 묶어두는 것도 노동법 위반 아니겠냐. 어쨌거나 품격의 화원을 지키는 엘시도어도 없겠다, 이곳에 보는 눈은 없었다.
‘그러니 확인해 보자.’
지피지기.
마계 진입에 앞서 나의 전력을 확인해 두고 싶었다.
당연하게도 [흑화]는 전력에 포함할 수 없다.
그건 그랑펠의 전력이지, 이호열의 전력이 아니니까.
‘역시 위험 부담이 커.’
[흑화]는 발동하고 싶다고 마음대로 발동할 수 있는 스킬이 아니다. 오롯이 나의 전력이라 여길 수 있는 건 숙련도 10퍼센트짜리 [천상천하 유아독존]까지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야.’
스스스.
산들바람이 불자 어깨에 걸친 여명의 재킷이 펄럭였다. 칠죄종의 전리품, [중립의 기생 생물 엔비, 러스트, 라스]. 나는 보석처럼 반짝이는 세 아이템을 바라봤다.
‘식탐과 나태.’
그 두 녀석은 악마 사냥꾼인 내 손에 죽지 않았다. 각각 붉은 눈의 샤힌 듄과 다이아몬드 상단주 가몬드에게 처치당했으니까.
“내가 지켜보고 있음을 명심해라.”
탐욕이 그랬던 것처럼 다시 태어날 터.
그래도 당장 걱정할 건 없었다.
부활한 탐욕이 유스라 제도에서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흡수하고도 레벨이 600이었던 걸 떠올려보자.
‘그때완 다르거든. 나는 물론.’
지금의 아르카나 대륙은 탐욕이 부활한 시절과는 차원이 다르다.
제국령 곳곳에는 퀴른베르크 기계탑이 솟아있고, 살아남은 아르카나인들은 악마와 산전수전을 다 겪은 베테랑들이다.
웬만해선 공포에 시달리지 않을 거다. 게다가 아르카나 대륙을 밟게 된 플레이어들의 수준 또한 갓 태어난 칠죄종에게 호락호락 당해주지 않을 정도는 되거든.
나의 입방정이 냉정히 평가한다.
“되려 내게 영원한 안식을 구하러 올지도 모르겠군.”
한마디로 계속 죽고 죽어 부활할 바엔 깔끔하게 내 손에 지옥에 떨어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뜻. 나는 칠죄종의 전리품에 손을 뻗었다.
‘엔비는 또 살펴볼 필요가 없겠고.’
새롭게 습득한 두 아이템을 확인한다.
[중립의 기생 생물 러스트(Lust) 2/7]
[등급 : 전설]
[제한 : 알려지지 않음]
[효과 : 러스트는 선, 중립, 악, 세 가지 형태로 존재하며 각 형태에 따라 사용자에게 다른 효과를 부여합니다. 현재 상태 : 중립 - 사용자에게 ‘매력’ 스탯을 제공합니다.]
[설명 :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생물이다.]
엔비가 크리스탈처럼 투명한 보석의 형태였다면 러스트는 석류 알갱이처럼 새빨갛고 작은 보석의 형태로 재킷에 붙어있었다. 그나저나.
‘매력이라.’
새로운 스탯이 생성되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한계에 도전하는 단련을 반복한 덕분에 습득한 [집념]은 물론. 마찬가지로 아이템을 착용으로 습득한 [심미]도 기본 스탯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매력]이라니.
‘역시, 들어본 적이 없는데.’
평가하기도 전, 입이 먼저 쌜룩거린다.
“하릴없는 효과로구나.”
천하의 그랑펠.
인위적인 [매력] 따위를 달가워할 리 있으랴?
그러나 나는 다르다.
말했다시피 마계 진입을 앞두고 있단 말이다.
뭐든 소중히 여겨야 하는 처지에서 전설 아이템 효과?
절대 외면할 수 없다.
[매력 : 고유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효과는 간결하기 짝이 없었다.
스탯이라곤 하지만 [심미]처럼 보유 포인트를 분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수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스탯보다는 버프에 가까운 듯한데…….
‘고유의 분위기는 또 뭐야?’
이거 어째 실전에서 써먹기 전까지는.
알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활용이 어려울 것 같지는 않다는 거겠지.
스스슥.
전설급 아이템을 활용하기 위해선 그 아이템과 친화력을 쌓아야 하는 법. 이유는 모르겠다만……. 내 손바닥에서 뒹굴거리는 걸로 봐서 러스트는 내게 상당한 친밀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라스와는 다르게 말이지.’
[중립의 기생 생물 라스(Wrath) 3/7]
칠죄종 분노의 전리품.
끝까지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분노를 닮은 건가.
메시지가 떠오른다.
[친화력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온전한 효과를 발휘할 수 없습니다.]
효과를 발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이템 정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방금 말했던 것처럼 하나하나가 소중하거늘.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내색할 순 없다.
“아쉬운 건 내가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아이템이랑 기싸움은 하지 말자, 그랑펠.
어떻게 해야 친화력을 올릴 수 있을지는 차차 생각해 보기로 하자.
지금은 거악의 전리품 말고도 확인해야 할 게 남아있었으니까.
나는 상태창을 바라봤다.
[칭호 : 십좌의 주인]
칭호는 단순히 칭호에서 끝나지 않는다.
내가 그동안 습득한 칭호들만 봐도 알 수 있잖아?
처음으로 습득한 [최후의 모험가]부터 [숭고], [초월자], [흑암룡]…….
모든 칭호는 그 칭호와 관련된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하다.
‘어쩌면 나는 정말로…….’
십좌의 왕좌.
그 왕좌를 차지한 바람에 상위 마왕의 권능을 다룰 수 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내가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유스라 황금 궁전 별채 뒤뜰에 선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시험해 볼 필요가 있다.’
왕좌의 권능을.
거악 칠죄종의 권능이야 지켜봐 와서 알고 있었다.
인간의 일곱 가지 죄악에 대응하는 상태이상을 유발했었지.
그러나 상위 마왕은 무언가 달랐다. [흑화] 때문에 부에르가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가미긴을 떠올리면 추측할 수 있었다.
‘그건 상태이상을 유발한 게 아니었어.’
거악을 비롯한 기존 악마들이 불러일으킨 게 일반적인 공포였다면, 가미긴에게 쏟아지던 공포는 숭배에 가까웠다.
절대적인 왕 앞에 굴복하여 무릎을 꿇는 것에 가까웠다는 뜻이다.
나의 입술이 움직인다.
“무엇을 쥐고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겠지.”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랑펠은 상위 마왕 따위 인정하지 않는다.
덕분에 이 권능을 살필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상위 마왕, 그들이 강한 게 아니라 단순히 왕좌가 대단한 것이라면 납득이 되는 일이니까.
그렇다면 의문이 따르리라.
아무리 보는 눈이 없다고 하더라도 유스라 왕국에서 그런 힘을 발휘해도 되는 거냐고. 뒤뜰과 품격의 화원을 넘어서 유스라 왕국이 쑥대밭이 되는 건 아니냐고.
‘영약이 아까워서라도 그런 불상사는 피해야 한다.’
슬슬 약속한 시간이 됐는데…….
그 능력을 감당할 수 있는 상대를 불렀다는 뜻이다.
이윽고, 그 주인공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정확하게는 빗자루에서 내렸다.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클라우디시여.”
*
남쪽 바다의 마녀, 메어리.
그녀의 명성은 시공간의 사교장에서도 드높았다.
초월자 반열에 올라야지만, 입성이 가능한 시공간의 사교장이다. 메어리는 상층에 출입이 가능한 4가문의 가주들과 더불어 몇 안 되는 초월자 중 하나였으니까.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하다.
메어리는 아르카나 대륙의 검성으로 통하던 셰그윈보다도, 마찬가지로 동녘을 제패한 일출의 무사보다도, 수십 개의 영약을 섭취한 우르스보다도 강하다는 뜻이다.
순혈 마도의 피가 흐르는 황혼의 후예.
그들 중에서도 특출난 재능을 타고난 메어리.
그 능력은 마탑을 포함해도 마법사의 정점이라 불려도 무방했다.
누군가는 물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큰 부상을 입은 상태가 아니냐고.
온전한 힘을 낼 수 없는 게 아니냐고.
틀린 말은 아니다. 메어리는 수 세기에 걸쳐 흉조에게 시달렸다. 그 속삭임에 굴하지 않기 위해 지독한 궐련을 하루에도 수십 개비씩 태웠다.
하지만 궐련의 독성이 문제가 되는 건 체력적인 부분이지, 능력적인 부분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지독한 궐련의 각성 효과를 생각하면…….
사실상 전신이 궐련에 절어있다고 봐도 무방한 메어리의 마법적 능력은 지금이 전성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꺼지기 전 촛불이 가장 밝게 타오르는 것처럼.
“클라우디의 제안을 영광스럽게 받아들이겠습니다.”
탁.
메어리, 그녀가 빗자루로 가볍게 땅을 짚었다.
대련을 앞두고.
이윽고, 황혼의 마력이 별실 뒤뜰을 뒤덮었다.
촤르르.
대련의 충격이 외부로 새어나가지 않기 위한 일종의 보호막.
보랏빛 마력 입자 사이로 메어리의 시선이 호열을 향했다.
‘……지금은 짧은 머리칼.’
정확하게는 호열의 머리카락 기장을 향했다.
메어리는 짐작하고 있었다.
클라우디께서는 과거 전성기 시절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계신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가. 은발의 머리카락이 과거처럼 길어졌을 때는 그 시절의 모습을 재현해내셨다.
‘그 또한 클라우디 가문의 비밀일까.’
메어리로서는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아니.’
그러나 메어리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부터 흉조에게 삼켜졌던 일족의 구원까지.
클라우디께는 받은 은혜가 너무나도 많았다.
‘원치 않으시면 간섭하지 않겠어.’
따라서 메어리는 이 순간.
호열이 요청한 대련에만 집중할 생각이었다.
물론, 메어리는 전력을 다할 생각이 없었다.
전성기의 클라우디시라면 모를까…….
짧은 머리칼을 가진.
전성기의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지금의 클라우디께 자신의 마법은.
‘지나치게 거셀지도 몰라.’
진정한 강자는 자신이 강하다는 사실을 모를 수 없다. 메어리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설명은 필요치 않았다. 그녀가 끊이지 않고 피워댔던 궐련이 그 증거였다.
시공간의 임무.
그 성공 보수로 주어지는 시공간의 금화. 메어리가 입에 달고 살던 궐련은 몇 개비에 금화 일백 개를 호가한다. 시공간의 상점에서도 사치품에 속했으니까.
더 나아가 오만하기 그지없던 4가문의 가주들조차도 메어리의 강함만큼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니 메어리에게 자만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메어리는 그럴 자격이 있는 강자였으니까.
그녀가 가볍게 마법을 발현한다.
황혼의 마력을 폭풍처럼 일으킨다.
메어리의 손가락이 활시위처럼 구부러지던 순간이었다.
“전력을 다해도 좋다.”
호열이 말했다.
불경한 일이었지만.
찰나의 순간, 메어리는 생각했다.
‘……제가 전력을 다한다면.’
지금의 당신께서는 감당하실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메어리는 이내, 깨달았다.
자신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만’했다는 사실을.
고오오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압력이 뿜어져 나온다.
“……?”
흩날리는 보랏빛 입자, 그 사이에서 범접할 수 없는 높이에 있는 듯한 존재가 보인다. 메어리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 머리카락은 여전히 짧다.
전성기의 편린이 발현된 게 아닌 게 분명하거늘.
“……!”
메어리는 스스로에게 되묻고 말았다.
‘……나는 어째서 우러러보고 있는 거지?’
능력의 고저를 따질 순 없었다.
제아무리 위대한 장수라고 해도 왕의 명을 거스를 수 없듯.
메어리는 이 순간, 진정한 왕을 우러러보고 있었다.
뒤엉켜 피어오르는 기백.
흑색과 은빛이 요동친다.
펄럭거리는 재킷이 마치 날개처럼 펼쳐진다.
지천에 널린 수목이 머리를 조아린다.
지저귀던 새들이 노래를 멈춘다.
일대의 생명이 숨을 죽인다.
그 엄숙한 분위기가 말해주고 있었다.
이곳에 십좌의 마왕이 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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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의 분위기가 일대를 장악합니다.]
[현재 분위기 : 십좌의 마왕, 이호열]
[주의 : 악크샨이 당신을 주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