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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79화 (379/489)

◈ 379화. 어쩌면 나와 그대는

마왕 쟁탈전, 전장을 바꾸면 그만이다.

아르카나 대륙도 현실도 아닌 마계로. 사실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자기네들 왕을 왜 남의 고향에서 뽑냐고 되물으면 그 녀석들도 할 말은 없을 테니까, 뭐.

문제는 그런 짓을 벌일 미친 작자가.

아르카나 대륙과 현실에 존재하느냐는 것이었지만.

때문에 마르셀로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마계에 진입하시겠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현실에 있는 마르셀로는 목격하지 못한 탓이다.

-“진짜 마계 너머로 사라지시는 줄 알았다니까요?”

내가 정신을 잃었던 순간.

마계로 통하는 베히모스의 아가리를 향해 나아갔던 그랑펠의 행보를. 애초에 그랑펠의 목적지는 마계였다. 상위 마왕 부에르와 찬탈자 디스커스는 그 과정에서 우연하게 마주친 것뿐.

‘둘로는 그랑펠 성에 차지 않았단 거지.’

사라진 한 줄기 빛에 대한 대가.

그때 그랑펠은 정말 마계, 전부를 받아낼 기세였다.

그 경험이 있던 덕분이겠지.

나는 간단히 사고를 전환할 수 있었다.

“고작 악마 놀음에 고향을 내어줄 순 없지 않은가.”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진다.

마왕 쟁탈전을 앞둔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의 입장을 그보다 잘 표현할 수 없다. 그러니 나는 고래 싸움이 벌어질 장소를 마계로 옮기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새우 등 대신 악마 등이 터지지 않겠어?

‘내가 미끼가 돼서 말이야.’

말했다시피 마왕 쟁탈전에서 내 위치는 독보적이다. 독보적으로 강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어떤 상위 마왕보다도 열렬한 관심과 도전을 받을 게 뻔하단 뜻이다.

‘제일 만만해 보일 테니까.’

이제 막 왕좌에 오른 서열 최하위 상위 마왕이라.

입장을 바꿔 생각해도 나라도 나부터 노릴 거다.

그런 먹음직스러운 마왕이.

제 발로 마계에 나타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냐?

마르셀로가 천천히 답한다.

“……경께서는 수많은 도전자에게 집중 공격을 받게 되실 터. 만약, 경께서 마계에 발을 들여놓으신다면. 마계의 존재들이 베히모스의 아가리를 통해 아르카나 대륙으로 넘어올 이유가 없을지도 모르겠지요. 그럴 이유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 표정이 밝을 리가 없다.

“……허나, 그것이 진정으로 경의 대의(大意)이신 겁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우려하는 바를 알고 있다.

사실 나부터도 굉장히 걱정됐거든.

마계 또한 완전히 다른 세계일 텐데. 아르카나 대륙에서 유효한 [최후의 모험가] 효과도 없겠다. 마계에서 죽는다면 정말로 시체도 못 건지게 될 텐데…….

별별 생각이 다 들었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이 최선이었다.

이번엔 그랑펠의 긍지에 휘둘린 게 아니다.

성전 연합군 총대장.

그 직위를 받아들인 나, 이호열이 내린 판단이었다.

마르셀로가 힘겹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다면 더는 경을 만류하지 않겠습니다.”

그러고는 곧장 다음 수를 생각한다.

‘공과 사가 확실해서 좋아.’

마르셀로의 이런 면 때문에 나는 모든 중대사를 가장 먼저 그와 상의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마르셀로는 어느덧 내색을 감추고 계획에 충실해져 있었다.

“알고 계시다시피 진입에 앞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계는 위험할 수밖에 없겠지요.”

마계.

본격적으로 악마족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전설처럼 여겨졌단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했던 시절의 이야기이니까. 게임 시스템적으로 표현하자면…….

‘떡밥만 던져졌단 뜻이야.’

어떤 NPC가 악마족 몬스터 임프를 발견했다든가.

길을 잃은 악마에게 빙의되었다든가.

그런 소문이 악크샨까지 들려 오기도 했었지.

‘악크샨 퀘스트에도 분명 그런 스토리가 있었으니까.’

마르셀로가 씁쓸하게 말을 잇는다.

“돌아봐도 당시의 마탑은 오만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허울뿐인 진리를 좇겠답시고, 아르카나 대륙에 다가오는 위협을 바라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마탑에 마계에 관한 정보는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르카나 대륙은 넓고, 마계를 일찌감치 경계한 인물도 한 명쯤은 있던 모양이었다. 마르셀로가 그런 존재에 대해 말을 꺼냈다.

“로렌츠크, 그가 마탑에 서신을 보내왔었습니다.”

로렌츠크.

그 이름을 어떻게 있을 수 있겠냐.

탐험가 연맹을 찾아갈 때마다 보고 들은 이름이 바로 로렌츠크였다. [악크샨의 유지]를 발동하는 데 필요한 지옥의 불. 그런 지옥의 불로 타오르는 [지옥의 횃불]부터가 로렌츠크가 수집해온 아이템이었거든.

나는 답했다.

“낭만 탐험가를 말하는 것이군.”

“역시 경께서도 그를 알고 계셨군요! 그렇습니다. 낭만 탐험가, 로렌츠크는 마계에 대해서도 일찌감치 관심을 보였습니다.”

스스스.

마르셀로가 손가락을 가볍게 까딱거리자 그의 집무실에 마력이 일렁였다. 책상에 놓인 서류. 책장에 꽂힌 서적들이 들썩이기도 잠깐. 빛이 바랜 종이 한 장이 마르셀로와 내 사이로 사뿐하게 날아들었다.

팔랑.

“그리고 이것이 로렌츠크의 서신이었습니다.”

고작 종이 하나를 집는 데에도 꼿꼿한 팔의 각도.

나는 태연한 표정으로 읽어나가다가 흠칫했다.

이거……. 그냥 경고장이 아니다.

──────

마계견문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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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낭만 탐험가, 로렌츠크. 그는 일찌감치 짧은 견문록을 써낼 수준으로 마계를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 말인즉, 마계를 경험했다는 뜻이겠지요.”

그 내용은 간결했다. 마계에 관한 풍경 묘사만 가득했는데, 복잡한 수식어가 없는 게 오히려 신뢰성을 더했다. 다만, 중간쯤에서 끊겨있는 게 문제였다.

“그는 견문록을 증거로 마탑의 힘을 빌리고 싶어했습니다. 마계를 보다 깊숙이 탐험하는 게 목적인지, 위험성을 확인하고 싶었던 건지. 이유를 알 수 없겠지만……. 당연히 그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요.”

마르셀로가 덧붙였다.

“참고로 벤쉬 윌리엄 선임께서 자원했지만, 수뇌부에선 허가하지 않았습니다. 벤쉬 선임이 미덥지 않았다기보다는……. 역시, 악마 숭배자들의 영향이었겠지요.”

……그런가?

벤쉬가 아니었다면 다른 선임이 자원했다면 허가가 나오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만.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저 심히 아쉬울 따름입니다. 로렌츠크, 마탑이 그와 인연을 쌓아두었다면 지금의 경에게 큰 힘이 되었을거늘……. 이 또한 마탑이 부족한 따름이겠지요.”

마르셀로의 말은 절반만 옳았다.

마계를 밟았다는 로렌츠크.

그는 마계 진입을 앞둔 내게 큰 도움이 되겠지.

그러나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그야 마르셀로는 알지 못하겠지만.

나는 메시지를 통해 목격했거든.

흉조가 뱉어낸 사라졌던 존재들.

그들의 복귀로 아르카나 대륙에 적용 중인 버프들.

그 가운데에.

[행방불명된 낭만 탐험가, 로렌츠크가 아르카나 대륙에 복귀했습니다. 극적인 생존에 은둔생활을 청산하고자 한 낭만 탐험가의 지식이 아르카나 대륙을 더욱 풍요롭게 합니다. : 낭만 탐험가, 로렌츠크가 대륙을 떠돌며 지식을 설파합니다.]

로렌츠크의 이름을.

“뒤늦게 로렌츠크를 수소문하고자 하였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마법으로 그의 필체와 마력을 추적해도 그의 흔적 하나 발견할 수 없었으니 말입니다.”

마르셀로가 침음을 흘렸다.

“그를 둘러싼 소문을 생각하면 지금껏 살아있다고 여기는 게 더욱 이상한 일이겠지요. 괜한 이야기를 꺼낸 듯싶습니다. 헛된 기대는 머리를 어지럽힐 뿐인데…….”

“아니, 헛된 기대가 아니네. 마르셀로.”

한때 삭제되었던.

흉조에게 삼켜져 아르카나 대륙에서 모습을 감췄던 로렌츠크.

그가 아르카나 대륙에 돌아왔단 뜻이었으니까.

“헛된 기대가 아니라니요, 경?”

다만, 그랑펠식 화법이.

구구절절하게 사연을 설명할 리가 없었으니.

나는 이번에도 핵심만 굵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로렌츠크를 되살려낸 참이니 말일세.”

“되, 되살리시다니요. 설마 부활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경?”

……거창하게 포장하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거늘.

그렇다고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닌 게.

나로서는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최선이었다.

덕분에 마르셀로는 멋대로 마법적 추측을 뻗어 나갔다.

“설마……! 반전 마법으로 죽음마저 반전시키신 것입니까? 경을 보면서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역시 탑주 자리는 제가 아니라 마땅히 경에게 돌아가야……!!”

달칵.

‘이젠 하다 하다 반전 마법으로 부활의 기적까지?’

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어째 광활한 아르카나 대륙을 떠돌고 있다는 로렌츠크를 수소문하는 것보다 내 거품을 덜어내는 게 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고…….

*

악마의 공세에 무너졌던 작은 마을.

매캐한 먼지를 대충 털어낸 주점에 사내들이 앉아있다. 그 생김새는 제각각이다. 복장은 물론, 같은 시간대를 살아가는 이들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걸걸한 목소리가 울린다.

“비록 우리가 살아온 시대는 다르나, 한날 한배에서 튀어나온 사이가 아닌가? 하하핫! 쥐뿔도 없는 건 서로 마찬가지인데. 사이좋게 지내보자는 거지!”

그들 모두가 흉조에서 튀어나온 이들이었다.

그중에서도 기댈 곳이 없는 이들이었다.

누군가 씁쓸하게 내뱉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전쟁에서 도망치지 않았을 텐데……. 운명을 거스른 형벌이 이렇게 길어질 줄이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고.”

“이봐, 꼭 그렇게 분위기를 깨야 하겠는가?”

“미안하네. 부러워서 그랬어, 부러워서…….”

모든 건 상대적이다.

이들에겐 처참한 제국도.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흉조에서 튀어나왔지만.

혼자가 아닌 이들조차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쩝.”

그런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선 때론 화풀이 대상이 필요한 법.

사내들이 자신들이 아는 아르카나 대륙의 지식을 쏟아낸다.

“그보다 어이가 없지 않은가? 아르카나 대륙을 통일한 게 세릭로즈 가문이었다니. 내가 살아있을 적만 하더라도. 그러니까 흉조에게 삼켜지지 않았을 시절만 하더라도 세릭로즈는 변방 중에서도 변방 귀족……!”

“드래곤이 날아다니는 시대라니. 말세도 이런 말세가…….”

“뭣보다 나는 악크샨 소식에 놀랐다네. 천하의 악크샨 하루아침에 대륙에서 종적을 감추다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그야 악크샨은…….”

그때.

사내들의 시선이 일제히 구석을 향한다.

아까부터 거슬리는 소리가 하나 있었다.

서걱서걱.

날카로운 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

“뭐야, 저 새낀.”

구석에서 쉴 새 없이 무언가를 적어나가고 있는 건 앳된 청년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모인 이들은 심히 기분이 별로였다. 감정을 표출할 대상이 필요하던 참이었다.

“어이, 뭘 그렇게 적고 있는 거냐?”

서걱서걱.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액면가로 보아하니 이제 막 성년이나 됐을까 싶었거늘.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내 말을 무시하다니. 중년 사내가 벼려진 나이프를 뽑아들고는 다가갔다.

“홀로 떠돌고 있는 꼴을 보아하니 너도 그 괴물의 뱃속에서 튀어나온 거겠지? 그 출신만 믿고 내 말을 우습게 여기는 건가? 그렇다면 오산이야.”

세상은 꿈과 희망으로 가득한 화원이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선 추악함을 뒤집어써야 하는 게 지금의 아르카나 대륙이다. 중년인은 힐끗 뒤편의 무리를 바라봤다.

‘뭣보다 놈들에게 얕보여선 안 된다.’

푹.

나이프를 나무 테이블 위에 꽂은 순간이었다.

침묵을 지키던 청년이 입을 열었다.

“한날 한배에서 태어난 사이.”

“……뭐?”

“확실히 그 표현에는 낭만이 담겨있군.”

그렇게 말한 사내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

협박하던 남자는 흠칫했다.

‘……뭐냐, 이 눈동자는?’

청년의 눈이 지나치게 맑기 때문이었다.

마치 검은 눈동자에 밤하늘의 은하수를 담은 것처럼.

마주 보고 있자니 소름이 돋을 정도로.

그런 눈으로 태연하게 물어온다.

“그 표현을 내가 빌려 사용해도 되겠는가? 자고로 내가 지금 써내려가고 있는 글은 아르카나 대륙 불세출의 소설이……. 아니지, 역사서가 될 것이네.”

“……뭐, 뭐라고?”

“허세라고 생각하나? 좋아, 그렇다면 한 구절을 읊어주겠어.”

중년인이 무리와 눈빛을 교환한다.

협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하는 게 위험해도 굉장히 위험한 놈이다. 맑은 눈의 광인(狂人)이 바로 이런 녀석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끄덕.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나둘, 일어서기 시작하는 무리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청년은 말을 이어나갔다.

헛기침으로 목까지 가다듬고서는.

“크흠! 아르카나 대륙이 한없이 깊은 어둠에 빠져있는 순간이었다. 한없이 깊은 어둠이 마계를 향해 발을 떼었다. 시체들의 왕이 울부짖었다. 한없이 깊은 어둠이시여, 어찌하여 마계마저 집어삼키시려 하시나이까!”

……한없이 깊은 어둠이 뭔지는 몰라도.

듣기만 해도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잘도 글로 써내려가고 있었구나.

그렇기에 틀림없이 광인이다.

사내들이 의미심장하게 움직이던 순간이었다.

청년의 맑은 눈이 가라앉았다.

“이런, 이다음부터가 굉장히 흥미진진한데……. 아쉽게 됐군. 그대들에겐 조금도 진지하게 듣는 구석이 없으니. 뭐, 상관없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인용에 관한 값은 확실히 치를 테니까.”

그와 동시에 청년의 손에서 무언가 번뜩였다.

“컥!!”

그러자 청년을 제외한.

전원이 단말마와 함께 바닥에 널브러졌다.

인용에 관한 값을 쳐줬다는 걸까.

말 그대로 숨만 붙어있는 채로.

슥.

청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에 앉아 다시금 깃털펜을 들었다.

써내려가는 작품의 주인공이 듣는다면.

“한없이 깊은 어둠은 십좌의 왕좌에 올랐다. 아니, 표현이 너무 심심하지 않나. 낭만이 느껴지지 않잖아, 낭만이! 보자, 한없이 깊은 어둠은 진정한 진리에 이르렀다……. 아니, 이걸로도 부족하다. 정신 바짝 차려, 로렌츠크! 일반적인 표현으로 부족해. 보다 위엄 넘치고, 화려하고, 웅장하고,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표현이 필요하단 말이다……!!”

기절할 말을 읊조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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