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8화. 내겐 익숙한 역할이군 (2)
폭탄 선언.
참고로 호열의 소통 방식도 레이먼 션에 뒤지지 않았다. 본래 의미가 함축된 경우가 많았으니까. 모든 게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성현준이 윤수겸에게 속삭인다.
“서, 선배. 뭔가 숨겨진 뜻이 있으신 거겠죠?!”
돌아오는 건 도리질이었다.
“글쎄. 나도 모르겠다.”
내가 바로 십좌의 마왕이다.
단도직입.
직설적인 선언은 도저히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없었으니까.
누구보다 격하게 반응한 건 마탑의 선임 마법사.
벤쉬 윌리엄이었다.
“역시 피도 눈물도 없으셨던 이유가……!!”
……이 인간, 저 말씀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걸까?
꾹.
“어휴.”
뱅그릿은 한숨을 삼키며 벤쉬의 옆구리를 찔렀다. 벤쉬가 그제야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에 얼른 입을 다물었다. 허나, 충격에 휩싸인 건 비단 벤쉬만이 아니었다.
그런 반응조차 예상했다는 듯 이내, 호열이 말을 이었다.
“나는 아르카나 대륙에서 십좌의 마왕, 부에르를 처치하고 마탑으로 복귀했다. 그런 나의 행보를, 마계는 부에르가 차지하고 있던 열 번째 왕좌를 찬탈한 것으로 판단했을 터.”
“……!!!”
마탑과 AAU 모두가 경악했다.
박민재가 호열에게 되물었다.
십좌의 마왕, 상위 마왕의 다른 표현…….
“……정말 부에르를 처치하신 겁니까, 총대장님? 현실 시간으로 고작 하루. 아르카나 대륙의 시간으로 계산해도 채 며칠이 지나지 않지 않았습니까?”
상위 마왕의 존재감은 차원이 다르다.
다른 누구도 아닌 호열을 통해 그 정보를 습득하게 된 AAU였다.
흠칫한 건 마탑도 마찬가지였다.
크리스탈 홀에서 동요하지 않는 건 오직 두 사내뿐이었다.
당사자인 호열과 흑마도학 선임, 마티스 딘 카를.
‘저건.’
마티스는 호열에게서 일렁이는 적합한 마력을 바라봤다. 마도구를 통해야만 목격할 수 있는 적합한 마력이 시야에 보일 정도로 일렁거리고 있다…….
‘흑화의 증거인가.’
흑화는 과거의 역류다.
더불어 호열이 가진 적합한 마력량을 고려한다면, 그 과거가 역류했을 때의 후폭풍은 정말로 아르카나 대륙을 어둠으로 뒤덮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터.
마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상위 마왕조차도 문제가 되지 않을지 모르겠지.’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보다시피 지금의 호열은 멀쩡해보였기에.
흑화를 경험한 사람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흑화란 절대 쉽게 극복할 수 없거늘…….’
마티스는 호열을 바라보다가 멈칫했다.
이윽고, 시선을 알아차린 것인가.
호열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순간, 마티스는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저 눈빛이 내가 아는 이 수석님의 것이 맞는가?’
허나, 의미심장한 질문이 무색해질 정도로.
호열은 평소와 같았다.
이런, 노파심에 본의 아니게 결례를 범하고 말았군.
마티스는 호열에게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시선을 거둔 호열이 입을 열었다.
“말하지 않았나. 경계하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
“고작 악마 따위를 우러러볼 가치는 없으니까. 설령 그것이 진정한 악마들의 왕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다.”
진정한 악마들의 왕.
상위 마왕을 말하는 것일 터.
호열이 말을 덧붙였다.
“또한 이미 그들을 포위한 것과 다름없다.”
……잠깐만, 진도가 빨라도 너무 빠르다!
역시나 호열의 발언은 따라가기 벅찼다.
상위 마왕이 어느새 궁지에 몰린 사냥감에 비유되고 있지 않은가?
이해를 위해서라도 완급조절이 필요했다.
박민재가 상황을 차분히 정리한다.
“그러니까 유스라 총책임자님의 말씀은……. 서열 10위, 부에르를 처치하신 덕분에. 총책임자님께서 십좌의 마왕, 왕좌를 차치하셨다는 말씀이지 않습니까?”
호열은 언제나처럼 답했다.
“줘도 가지지 않을 왕좌거늘. 그렇다.”
그 대답에 성현준은 생각했다.
마왕이라니.
다른 플레이어들이었다면 장난이 아니게 우쭐댔을 텐데.
부귀영화에 연연하지 않으시는 게 여전히 청렴결백하시다고.
성현준이 속삭였다.
“마왕이라니. 이름부터 멋있잖아요?”
“……너, 감성이 살짝 질풍노도스럽다?”
“아직 젊은 거죠! 딱 중학생 감성. 그것도 2학ㄴ…….”
누군가에겐 다행스럽게도.
잡담은 길어지지 않았다.
박민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입을 열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었는지 알 수 없겠지만. 정기 업데이트를 통해 마왕 쟁탈전이 공지되었습니다, 총책임자님. 마왕 쟁탈전을 앞두고 아르카나 대륙과 현실이 마계에 포위된 상황이라면 모를까…….”
크리스탈 홀이 고뇌에 빠진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무려 상위 마왕들이 제물 없이도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단다. 그런 상위 마왕의 왕좌를 노리는 도전자들 또한 몇이나 될지 알 수 없단다. 그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져나가게 생겼으니까.
하지만 호열은 태연하게 되물었다.
“말하지 않았는가.”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내가 바로 십좌의 마왕이라고.”
호열의 시선이 박민재에게서 좌중을 향한다.
“마왕 쟁탈전에서 그대들이 우려하는 바를 짐작하고 있다. 그러나 그 쟁탈전 최전방에 내가 서 있지 않은가. 그래, 수많은 도전자의 비수는 가장 먼저 나를 향할 터.”
호열이 담담하게 덧붙인다.
“열 번째 왕좌는 그런 자리니까.”
……잠깐.
듣고 보니, 정말로 그랬다. 도전자라면 응당 가장 만만한 서열의 마왕을 노릴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곧바로 역으로 포위했다는 말이 이해가 되었다.
벤쉬와 뱅그릿이 숙덕거린다.
“그러니까 마왕으로서 도전자란 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리실 거란 말씀이시잖아요, 저건……?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이 수석님께서 포위하신 게 맞았습니다. 아니, 포위를 뛰어넘은 완벽한 함정이지요!”
물론, 담긴 뜻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또한 내게는 상위 마왕에게 검을 겨눌 기회가 있다. 열 번째 왕좌의 마왕으로서, 나 또한 상위 마왕에게 도전할 절차를 밟게 되었으니.”
“……!”
“그것이 바로 열등한 족속의 왕좌를 마다치 않은 이유다.”
호열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난다.
“단 하나의 사냥감도 놓칠 수 없지 않은가.”
*
천하의 그랑펠 성질머리를 떠올려보자.
하여튼 그놈의 청렴결백 때문에.
보물섬이라 불리는 금은보화가 널린 유스라의 국왕 자리도 고사했던 나였다. 그뿐이냐? 제국 북부의 대도시, 프로스트의 감투도 마다했었지. 심지어 제국 황제가 하사한 작위도, 탑주 자리도 마찬가지다.
그런 나더러 십좌의 마왕?
‘악마들의 왕, 그딴 자리를 달가워하겠냐?’
무엇보다 그랑펠에게 악마란 사냥감에 불과했다.
사냥꾼에게.
사냥감들의 왕이란 칭호가 어디 적절하기나 하느냐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많이 참았구나, 그랑펠.’
하지만 그랑펠은 타인 앞에서 십좌의 마왕을 자처했다. 거기엔 그보다 큰 명분이 있기 때문이었다. 마왕 쟁탈전에서 수많은 사냥감을 일망타진하기 위한 명분이.
“마왕이라. 꼴에 어감은 나쁘지 않군.”
마왕(魔王).
절대 중2병이 환장할만한 단어 덕분이 아니라는 거지.
달칵─
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당연하게도 찻잔에는 녹차 티백이 걸쳐져 있건만.
내가 우려낸 녹차는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조차도 잘 어울리신다고 하면 결례겠지요?”
이젠 제법 기이의 활용에 익숙해졌구나, 마르셀로.
‘이거 로켓 배송으로만 시킬 수 있는 녹찬데.’
내가 가르쳐 준 대로.
기이를 아주 잘 활용하고 있는 모양이군.
나는 탑주 마르셀로의 집무실.
한편에 놓인 티백 상자를 흘겨보며 읊조렸다.
“자고로 감상은 개인의 자유라네, 마르셀로.”
……내가 무슨 미술품이야, 뭐야?
하여튼, 이놈의 주둥아리는 위기의식이라는 게 없다.
마르셀로가 대화를 나누고 싶어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거늘.
“경의 농을 들으니 조금은 마음이 놓입니다.”
따져보면 언제나 틀린 말은 아니다.
체크메이트.
나는 십좌의 마왕.
그리고 그들의 십좌를 넘볼 가능성을 가진 악마들의 숨통을.
동시에 조일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었으니까.
다만.
‘그런 나부터도 왕이라는 게 문제겠지.’
체크메이트 상황이라는 건 피차일반이라는 뜻이었다.
악마를 하룻강아지보다도 못하게 여기는 그랑펠이야 언제나처럼 태연했지만, 그런 나의 계획을 파악한 이들은 우려를 보내올 수밖에 없다는 뜻.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경?”
달칵.
마주 앉아 녹차를 음미하기도 잠깐, 마르셀로가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이젠 탑주로, 마탑의 수장이 되었거늘. 수석인 나를 대하는 데엔 변함이 없었다.
“이번 폭풍은 그 어떤 폭풍보다도 거세 보입니다. 무엇보다 의도가 불순합니다. 아르카나 대륙이나 이곳 현실이 아닌, 마계를 위한 판이 깔린 셈이나 다름없으니까요.”
현실로 복귀.
나는 크리스탈 홀로 향하면서 정기 업데이트 내역을 확인했다. [마왕 쟁탈전 : 십좌의 주인] 퀘스트가 떠올랐을 때부터 예상했지만, 레이먼 션은 역시나 예상을 뛰어넘었다.
“베히모스의 아가리를 말하는 것이겠군.”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원정에서 목격한 참이네.”
“그게 정말이십니까?”
마르셀로의 말에 따르면 마탑도 베히모스의 아가리.
그 존재를 일찌감치 파악하고 있었다고 했다.
마르셀로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언젠가 집무실에서 소식을 접한 적이 있었습니다. 악크샨의 악마 사냥꾼들이 마탑 수뇌부에 베히모스의 아가리에 대해 의미심장한 경고를 전해왔다고…….”
천적의 직감.
마계의 개수작을 알아보고 일찌감치 성전(聖戰)을 준비했던 우리 악크샨 선배님들이셨다. 베히모스의 아가리, 그 위험성을 제국에도 마탑에도 전했던 모양.
“주의 깊게 여기지 못한 제, 자신이 원망스럽습니다.”
마르셀로를 포함.
그 당시엔 누구도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지만 말이다.
그 시절, 악크샨의 명성을 따져보면 그럴 만도 하다.
‘직접적으로 도움을 받은 드워프 말고…….’
내가 알기로 악크샨에게 우호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딱히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나는 마르셀로에게 너그럽게 답했다.
“그 시절, 마탑 수뇌부에는 악마 숭배자들이 똬리를 틀고 있었던바. 마르셀로, 그대가 나서고자 했어도 틀림없이 훼방을 놓았겠지. 자책할 필요는 없네.”
“……그랬었죠.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습니다.”
좋게 말하면 공동 수석.
사실대로 말하면 낙하산.
마탑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던 나조차도 원로 마법사들이 모순된 행동을 보인다는 걸 알았다. 그 시절, 마르셀로는 원로들에게 깊은 염증을 느끼고 있었지.
나는 말을 이었다.
“늦었다고 여겨질 때가 가장 이른 법이네, 마르셀로.”
“경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렇다면 역시…….”
과연, 매사에 철두철미한 마르셀로답다. 우려 섞인 시선은 온데간데없다. 마르셀로의 안광이 반짝이더니 곧장 해결책을 내놓는다.
“베히모스의 아가리를 봉쇄하는 것이 급선무겠지요. AAU, 그들의 보고에 따르면 이제부터 마계의 존재들이 별다른 제약 없이 쏟아져 나올 테니 말입니다.”
나는 속으로 웃었다.
‘이러니까 떠맡기 좋아하는 그랑펠도 탑주 자리를 넘긴 거겠지.’
마르셀로의 말은 정답이었다.
본격적인 마계의 침식을 막기 위해선 베히모스의 아가리를 봉쇄하는 게 최선이었다. 물론, 구체적인 방법은 곧장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마계의 리치, 디스커스가 베히모스의 아가리에 물어뜯긴 이야기를 마르셀로에게 전했다. 나도 전해 들은 이야기라 생생하게 묘사할 순 없었다.
그럼에도 마르셀로는 핵심을 알아들었다.
“이런, 생명체라면 더더욱 곤란하겠군요.”
베히모스의 아가리는 업데이트를 통해 더 이상 악마족 몬스터를 공격하지 않게 됐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하다.
괜히 봉쇄하겠답시고 녀석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그 공격성을 온전히 뒤집어쓰게 될지도 모른다는 뜻.
마르셀로가 답답한 모양인지, 찻잔을 집어든다.
“……이런.”
일찌감치 비웠다는 사실조차 잊고서는.
속이 답답한 게 당연하다.
베히모스의 아가리에서 악마들이 쏟아져 나올 걸 알고 있는데.
그걸 딱히 막을 방법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마르셀로.
나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불합리한 전장이군.”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전장을 바꾸면 그만이지 않겠는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경?”
마르셀로가 흠칫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우쭐거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건 나, 이호열이 내놓은 답이 아니었거든.
“진정한 체크메이트를 위해.”
“……위해?”
“내가 마계로 진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