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7화. 내겐 익숙한 역할이군 (1)
떠오른 메시지를 바라본다.
[??? : 마왕 쟁탈전 - 십좌의 증명]
퀘스트 형식이 분명한데…….
어째서 물음표로 시작하는 걸까.
의문이 들었지만, 내용부터 확인해 본다.
덕분에 짐작할 수 있었다.
십좌의 왕인 그대여.
수많은 도전자가 그대의 자리를 갈망하고 있다. 도전자의 손에 무릎을 꿇거나, 위에서 바라보고 있는 또 다른 왕을 무너트려라. 도전과 증명, 선택은 온전히 왕인 그대의 몫이다.
-열 번째 왕좌를 사수하라. (진행 중)
-아홉 번째 왕좌에 도전하라. (진행 중)
아무래도 이건…….
아르카나의 퀘스트가 아니라 ‘마계’쪽 퀘스트인 것 같았으니까. 그것도 모자라서 이 퀘스트는 나를 분명하게 왕으로 정확하게는 부에르의 자리를 차지한 새로운 마왕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왕이라고 기뻐할 리 있겠냐?’
십좌부터는 진정한 왕이기에.
종족에 관계없이 왕좌를 차지하는 게 가능하다는 건가?
의외로 상당히 개방적이구나, 마계는?
하긴 디스커스인가, 뭔가 하는 언데드족 리치만 하더라도.
부에르의 왕좌를 노렸다고 했겠다.
‘아무리 그래도 인간이 마왕이라니.’
여전히 믿기지 않았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는 시스템 메시지에 적혀 있었다.
도전과 증명, 선택은 온전히 왕인 나의 몫이라고.
일단, 나는 읊조렸다.
“체크메이트다.”
체스판 앞도 아니고.
체스를 제대로 둘 줄도 모르면서.
다짜고짜 체크메이트 선언이라니.
“……체, 체크메이트라뇨?”
주위의 시선이 집중되는 게 느껴진다.
체스를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그 뜻은 짐작할 수 있겠지.
왕이 위험에 빠졌다는 뜻이다
‘거창해서 그렇지, 틀린 말은 아니야.’
두 배로 맞는 말이라면 또 모를까.
퀘스트 목표가 두 개인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 나는 열 번째 왕좌의 마왕으로서 나머지 상위 마왕의 왕좌에 도전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십좌의 마왕으로서 수많은 도전자의 도전에 능력을 증명해 내야 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진퇴양난이 따로 없구나.’
지극히 솔직한 감상이었다.
이유야 간단하다.
나는 아직 상위 마왕을 쓰러트릴 실력을 갖추지 못했으니까.
부에르를 처치한 건 그랑펠이지, 내가 아니었으니까.
‘리치, 디스커스도 마찬가지야.’
도전자라는 게 전부 악마족이라면 또 모를까.
악마와 무관한 도전자가 나타난다면.
믿을 구석인 [천적관계]의 덕을 볼 수도 없을 터.
앞뒤로, 엎친 데 덮친 격이라 할 수 있었겠지.
허나, 나의 주둥이는 솔직하지 못했으니.
“일석이조로군.”
결국, 연속된 나의 읊조림에 의문이 든 걸까.
체인워커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총대장, 혹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체인워커뿐만 아니었다.
남태민을 비롯한 거대 연합의 일원들도 나를 진지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분신들, 하이엘과 디엔드도 머리를 숙이며 말을 건네왔다.
“주군, 다시는 후회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나 또한 진지하게 이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십좌의 증명은 개뿔.
부에르에게 떠넘겨 받다시피 한 열 번째 왕좌였다.
왕좌에 앉아본 경험은 없었지만, 직감할 수 있었다.
괜히 마계의 퀘스트가 아니겠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위협들이 넘쳐날지도 모른다는 의미.
비로소 진정한 전쟁이 시작된 걸지도 모른다.
‘다들 위험에 빠지게 될 거야.’
그렇기에 한 치의 숨김도 있을 수 없는.
나의 고집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나와 함께 전쟁에 임할 준비가 되었는가.”
전쟁의 무게감이 와 닿는다.
승패에 따라 수많은 이의 목숨이 오고 가리라.
전장에서 나부터가 죽을지도 모른다.
드워프 장비로 무장한 체인워커조차 처참하게 전사할지 모른다.
남태민, 히사기, 레오니, 스칼은 물론.
현실의 플레이어들조차 위협에서 예외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니 확실히 대답을 받아두고 싶었다.
나부터가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그런데, 대답은 내 생각보다 훨씬 금방 돌아왔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총대장.”
그것도 호탕한 웃음과 함께.
체인워커는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째서 그대의 칭호가 총대장이었는지 잊지는 않았겠지? 만약, 잊고 있었다면……. 나는 처음으로 그대에게 서운한 감정을 품게 될지도 모르겠군!”
칭호, 성전 연합군 총대장.
그 말에 나는 깨달았다.
‘다들 오래전부터 각오했다는 뜻이야.’
그랬던 거였나……? 어쩌면 제대로 상황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던 건 나뿐이었을지도 모른다. 목숨 따윈 성전 연합군에 합류했을 때부터 다들 내놓았던 거였어.
그때부터였다.
‘……그래, 총대장.’
지금까지는 낯간지럽기 짝이 없었던 ‘총대장’이란 칭호가 더 이상 오글거리지 않게 들리게 된 건. 흑역사에 물이 든 걸까, 철이 든 걸까, 그게 아니라면 긍지 덕분일까.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성전의 시작이라는 것.
따라서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나, 이호열이 그대들의 결정에 경의를 표하겠다.”
곧장 선언했다.
“성전 연합군의 총대장으로서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입 밖으로 내는 건 아직 쉽지 않구만.
*
제국의 외곽 소도시, 랑에리.
류오쥔춘은 영주의 성에서 떠오른 메시지를 바라봤다.
그와 동시에 오성들의 안색을 살폈다.
그들의 낯빛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이건 내게만 떠오른 메시지다.’
류오쥔춘의 시선이 다시금 메시지로 향한다.
[??? : 마왕 쟁탈전 - 십좌의 증명]
왕의 자질을 갖춘 찬탈자여. 진정한 왕의 자리를 차지할 때가 왔노라. 새로운 열 번째 왕좌의 마왕이 그 자격을 증명한 지금. 그대들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는 뜻이니. 안주하겠는가, 도전하겠는가. 선택하라, 도전자여.
-십좌의 마왕에게 도전하라. (진행 중)
대격변 이전에도 이후에도.
최상위 랭커로 활동하던 류오쥔춘이다.
더불어 천하통일의 길드 마스터로 수많은 정보를 접해왔다.
그런 해박한 플레이어의 시선이 메시지의 첫 글자.
물음표에 꽂혀 있었다.
‘시스템조차 감히 평가할 수 없다는 건가.’
이 퀘스트의 가치를.
류오쥔춘은 퀘스트 내용을 반복해서 읽어나갔다.
요약하자면 간단했다.
십좌의 마왕을 죽이고, 그 왕좌를 차지할 기회가 왔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열 번째 왕좌의 마왕이 그랬다는 것처럼.’
열 번째 왕좌의 마왕이라.
류오쥔춘으로선 그게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짐작해 볼 수 있는 건…….
마찬가지로 눈앞에 떠올랐던 메시지의 주인공.
‘그랑펠.’
신화급 퀘스트를 시작했다던.
그일 가능성도 간과할 수 없겠지.
어찌 됐든 알지 못하는 존재인 건 마찬가지인바.
류오쥔춘은 그 미지의 존재를 우러러보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중요한 건 단지 자신이 도전자의 자격을 손에 쥐었다는 것이었으니까.
‘왕의 자질이라.’
분명, [군주] 클래스를 말하는 것일 터.
류오쥔춘은 플레이어 중 유일한 [군주]였다.
과거, [군주] 클래스를 보유했던 플레이어들이 존재하기는 했다만.
대다수가 대격변 이전, 높은 육성 난이도에 캐릭터를 삭제하고 새로운 캐릭터를 육성했다. 대격변 이후 플레이어로 각성한 [군주]는 어떻게 되었느냐 묻는다면.
슥.
류오쥔춘이 시선이 오성의 칼자루를 향한다.
죽였다.
한 놈도 빠짐없이.
이유야 간단했다.
클래스 퀘스트.
동일 클래스 중 유일무이.
선택받은 자만이 수행할 수 있는 클래스 퀘스트를 류오쥔춘.
자신이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역풍이 불지는 않았느냐고?
그럴 리가 있으랴.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군주, 플레이어 셰오딘 균열에서 변사체로 발견!
-플레이어의 소행 가능성 높아 보여…….
-초신성과의 분쟁이 원인이었나? 의혹 증폭
오성을 제외하면.
천하통일의 그 누구도 신뢰하지 않았던 류오쥔춘이기에.
누구에게도 뒤를 잡힐 일은 없었으니까.
류오쥔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과연, 나의 판단은 실수가 아니었다.
유일한 플레이어 군주로서.
십좌의 마왕에 도전할 기회를 잡아낸 게 확실했으니까.
‘다만.’
이곳은 아르카나 대륙이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군주의 자질을 갖춘 이가 몇이나 될지 장담할 수 없다는 뜻. 그러니 류오쥔춘은 먼저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기회는 온다.’
더군다나 마왕이었다.
‘어쩌면 어부지리를 노릴 수도 있겠군.’
그렇다.
악마를 벌레처럼 여기며 철저하게 사냥하는.
이호열이 본격적으로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지 않았던가?
류오쥔춘이 중얼거렸다.
“처음으로 네 덕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크나큰 착각을 품고 있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한 채…….
*
마탑.
크리스탈 홀.
마르셀로는 웅성거리는 좌중을 바라봤다.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군요. 경.’
새로운 탑주는 수석 마법사를 여전히 경이라고 불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르셀로는 자신이 탑주의 그릇을 증명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노력해 보겠습니다.’
단지 그것이.
호열이 짊어진 짐을 나눠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에.
마르셀로는 탑주의 역할을 떠맡은 것뿐이었다.
‘마왕 쟁탈전이라.’
과거, 한 차례 경험한 적이 있었다.
72석의 왕좌.
지옥에 떨어진 마왕의 공석을 채우기 위해 벌어졌던 마왕 쟁탈전.
그러나 AAU 측에서 발언이 이어진다.
“서열 상위 10위권, 상위 마왕을 제외한 마왕들은 밸런스 조정을 이유로 삭제되었습니다. 지금껏 업데이트 내역은 한 번도 어긋난 적은 없었으니, 이 마왕 쟁탈전에서 말하는 왕좌는 상위 마왕의 왕좌겠지요.”
화염마법학 선임 벤쉬 윌리엄이 입을 씰룩였다.
“흥, 저런 말은 나도 할 수 있습니다. 상위 마왕를 주의하라, 다른 누구도 아니고 이 수석님께서 하신 말씀이잖아요? 문제는 그런 상위 마왕을 어떻게 상대하느냐 아니겠습니까, 뱅그릿 선임?”
“그거야 그렇죠……?”
“그래요! 문제는 이제부터 날뛸 게 분명할 상위 마왕에게 어떻게 대응하냐는 겁니다. 당장 어디에서 뛰쳐나올지 장담할 수 없어요. 놈들에게 판이 깔린 거니까요!”
언뜻 보면 언쟁처럼 보였지만.
마탑과 AAU.
아르카나 대륙과 현실.
완전히 다른 두 세계의 집단이 머리를 맞대고 [『기이』]한 답을 내놓기 위한 과정 중 하나였다. 따라서 AAU 대한민국 지부장, 박민재도 입을 열었다.
“벤쉬 윌리엄 선임님의 말씀이 틀리지 않습니다. 아르카나 대륙 전기 시절의 관점으로 봐도 상위 마왕, 그들이 날뛸 확률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이전의 경우를 돌아봐도 그렇습니다.”
타다닥.
박민재가 눈짓하자 윤수겸이 노트북 자판을 두들겼다.
그와 동시에 크리스탈 홀에 떠오르는 홀로그램.
거기엔 지난 마왕 쟁탈전의 풍경이 담겨 있었다.
프로스트.
시체로 그려진 별 문양.
데카라비아의 사진이 차례대로 흘러간다.
“본래 마왕을 소환하기 위해선 그에 상응하는 제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마왕 쟁탈전이라는 판이 깔렸을 때에는 달랐습니다. 왕좌에 도전할 정도로 강한 악마들이 별다른 제물도 없이 쏟아져 나왔지요.”
그게 박민재가 레이먼 션에게 이를 간 이유였다.
“그때와 마찬가지일 겁니다. 막대한 재물이 필요한 상위 마왕들이 별다른 제약 없이 현실로 범람하게 될지 모릅니다. 그런 상위 마왕의 자리를 노린다는 도전자들까진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되겠죠.”
“…….”
처음으로 맞댄 머리가 무색하게도.
레이먼 션은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지금으로선 풀 수 없는 문제를 던져놨다. 그것이 레이먼 션의 소통 방식이었으니까. 박민재의 발언에 선임 마법사들이 대화를 나눈다.
“우리 마탑이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 벤쉬 윌리엄에게 결전용 마도구만 쥐여준다면 상위 마왕이든 뭐든 불살라 버릴 텐데……!! 뱅그릿 선임, 당신은 나의 비전 마법을 목격해서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예, 틀림없이 대단했죠. 하지만 상위 마왕은 드래곤보다 더한 존재들이잖아요? 악룡으로 타락했던 유낙서스보다도 난적이라고 생각하면…….”
유낙서스보다 한술 더 뜬 적이란다.
“크흠.”
상상하자 벤쉬마저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탈 홀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불편한 정적 속에서 성현준이 중얼거렸다.
“……차라리 저희가 틀렸으면 좋겠네요.”
상위 마왕이 제물 없이 뛰쳐나올 수 있다니.
불공평해도 너무 불공평한 상황이 아닌가?
그러나 성현준의 작은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또각─
“……!”
발소리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었다.
호열이었다.
호열이 아르카나 대륙에서 현실로 복귀한 것이었다.
마탑의 정기 회의.
AAU의 총회의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기 위해서.
심지어는 오가는 이야기까지 듣고 있던 것인가.
크리스탈 홀을 거닐며 입을 열었다.
“그대들의 기이 탐구를 칭찬하마. 정답이다. 십좌의 마왕, 그들이 아르카나 대륙과 현실에 모습을 드러내는 데엔 별다른 제물이 필요치 않다.”
이윽고, 강단에 꼿꼿하게 서서는 터트렸다.
“내가 바로 십좌의 마왕이니까.”
“……?!!”
핵폭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