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76화 (376/489)

◈ 376화. 내가 그린 그림 (2)

극심한 부상이었다고 한다.

“정말, 정말로 괜찮으신 겁니까?”

옆구리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하염없이 걷고 있다고 했었겠다……. 하긴 그러니까 정신을 잃고 기절했던 거겠지. 생각하면서도 [첫 세계수의 축복] 효과를 떠올려본다.

‘아무리 큰 부상이라고 해도.’

전투가 끝난 시점에서 회복되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터.

기억을 돌아볼까?

영약 두 개를 동시에 섭취했던 과거를 떠올려보자.

‘그땐 정말이지…….’

극심한 고통에 기절하고.

찻잔까지 떨어트리고.

황천에 반쯤 몸이 적셔졌을 터.

‘정신을 차리는 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어.’

멀리갈 것도 없이 지금만 해도 그렇다. 아이언 캐슬 호에 복귀하고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부상은 이미 말끔하게 치유된 상태였으니까.

그러니까 의문이었다.

나는 어째서 피를 흘리며 걷고 있었을까?

‘첫 세계수의 축복이 발동되지 않은 건가.’

그게 아니라면 피를 흘리며 걸을 이유는 없었을 터.

지피지기라고, 이건 확실히 확인해 둘 필요가 있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문제인지, [흑화]가 문제인지 알 수 없다만. 정확하게 알아둬야 불상사를 예방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

나는 속내를 감추고 답했다.

“보다시피 언제나와 같다.”

슥.

이내, 내 시선이 피에 젖은 여명의 재킷을 향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옷매무새에 미련은.’

어쨌든, 다행인가.

아이언 캐슬 호는 들뜬 분위기였다.

나도 눈치가 있으니 짐작할 수 있었다.

내게 향한 시선이 우려에서 안도로 바뀌는 게 실시간으로 보였거든.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작 나는 아직도 식겁 중이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나를 깨운 건 남태민의 목소리였다.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그 풀네임을 읊기 전에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재킷을 어깨에 걸치고 객실 문을 나선 것이었다. 물론, 나는 구체적인 사정 따윈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임무 보고를 들을 수 있겠나.”

어차피 기절한 모습까지 보였겠다.

기억이 흐릿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면 되는 것을…….

‘솔직하지 못한 주둥아리를 보니 완전히 회복된 모양이구만.’

잘난 자존심은 여전히 대단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랑펠식 화법에 익숙한 성전 연합군이었으니.

우선 히사기가 입을 열었다.

“월드 메시지가 떠올랐었습니다. 한없이 깊은 어둠 속 한 줄기 빛이 희미해졌다고. 덕분에 총대장님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고 짐작한바. 저희는 곧장 총대장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거 시작부터 흠칫하게 한다.

‘풀네임을 띄운 것도 모자라서 뭐, 뭐라고?’

이젠 이명까지 월드 메시지로 띄워?!

레이먼 션, 그 악마 같은 녀석에게 발끈하기도 잠깐.

구체적인 상황이 이어진다.

“그대도 알고 있듯 아르카나 대륙은 짙은 어둠에 뒤덮였었네, 총대장. 마계로 통하는 영구 균열, [베히모스의 아가리]도 예외는 아니었지.”

월스와일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침음을 흘렸다. 천금보다 귀중히 여겨야 할 양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베히모스의 아가리]라는 곳에서 상처를 입은 모양이겠지.

‘어째, 말로 들어도 기억이 나질 않는데.’

아무래도 기절한 뒤에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발동된 게 원인 같았다.

그래서 상태이상, [흑화]가 발동됐고. 덕분에 내 기억 속 필름은 칠죄종 분노와의 전투에서 끊겨 있는 거겠지.

마치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나, 이호열의 의식이 어둠에 잠겨있던 순간 동안 그랑펠이 어떤 일을 벌였는지 행적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었다. 나는 철면피를 유지한 채 말을 이었다.

“그대들의 솔직한 감상을 듣고 싶군.”

그리고 경악했다.

‘……정말 내가 그런 짓을 했다고?’

칠죄종 분노야 사냥했다고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정신을 차린 곳은 베히모스의 아가리였으니까. 천하의 그랑펠이 거악이란 사냥감을 두고 다른 곳으로 발을 옮겼을 리는 없을 테니까.

그런데.

“디스커스, 마계의 리치로 언데드 몬스터였습니다.”

내가 마계에서 뛰쳐나온 보스급 몬스터를 사냥했단다.

이어지는 말은 더더욱 충격이었다.

디스커스, 놈은 보통 보스 몬스터가 아니었으니까.

체인워커가 장비의 장비를 가다듬는다.

“과연, 시체들의 왕이라고 할 만했지! 이 아다만티움 방어구가 손상되었으니 말일세. 제대로 맞붙었다면 우리만으론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네, 총대장.”

드워프의 무구.

그 성능은 아르카나 대륙에서 명성이 자자하다. 드워프들이 손을 댔다 하면 기본이 [유니크] 등급에 [에픽]급 장비 아이템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제작한 장비를 착용하고 전장으로 나서는 드워프들의 전투력? 대장장이를 전투 클래스라고 할 순 없겠지만, 템빨을 고려한다면 적어도 마탑의 선임들 바로 아래급은 될 터.

‘아이언 캐슬 호의 전력을 더하면 마탑급이라 해도 되겠지.’

그럼에도 승리를 자신할 수 없었다니.

나, 이호열은 주제 파악이 특기다.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합류했다고 한들.

디스커스라는 놈을 쉽게 쓰러트릴 수 없었을 거다.

‘심지어 걘 악마족도 아니잖아?’

악마 사냥꾼이 어째서 쓰레기 클래스 취급을 받았는가?

[천적관계]의 발동 대상이 극히 한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악마와 언데드.

생긴 건 비슷해도 언데드족 앞에선 [천적관계]가 발동되지 않는다는 말씀. 드워프 조종사로서 모든 상황을 지켜봤다는 드워프, 거너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총대장에겐 결례지만……. 그 광경을 목격한 나는 총대장, 그대를 재앙이라고 여기고 말았네. 허나, 그럴 수밖에 없었어. 그 마계의 리치를 손가락 까딱하지 않고 어둠 속에 파묻어 버릴 줄이야!”

나는 그런 디스커스를 어렵지 않게 처치한 모양이었다.

증인들이 이렇게 많았건만…….

실감이 나지 않아서 상태창을 확인했다.

레이먼 션은 나를 엿 먹이려고 혈안이 되어있을지 몰라도.

시스템만큼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

나는 우선 레벨을 확인했다.

‘보자, 그러면…….’

대충 100레벨 언저리쯤 상승해 있지 않을까?

내가 사냥한 건 칠죄종 분노와 디스커스라는 마계의 리치였다.

아르카나의 레벨 업에는 50레벨이라는 상한선이 있었으니까. 아무리 경험치를 많이 줬다고 해봤자 각각 50레벨씩 100레벨이 한계라는 의미였다.

[레벨: 826]

타락한 유낙서스를 지옥으로 배웅하고 상승한 시점의 레벨이었다.

거기서 100레벨이 상승하면 분명 926레벨이어야 했는데…….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레벨: 976]

[보유 포인트 : 150]

보유 포인트까지 보고 흠칫하고 말았다.

예상보다 무려 50레벨이 추가로 상승해 있었다.

아르카나의 레벨 사이엔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한다. 그 벽은 100레벨 구간마다 존재하며 구간을 넘을 때마다 레벨 업에 필요한 경험치 요구량이 대폭 상승한다.

900레벨 대.

보스 레이드는 몰라도 일반적인 사냥으로는 쉽게 경험치를 올릴 수 없다는 뜻.

그렇다면 이야기는 간단해진다.

칠죄종 분노.

그리고 리치, 디스커스를 어둠에 파묻어 버린 그 사이에.

나는 두 녀석에 뒤지지 않는 ‘무언가’를 쓰러트린 것이다.

그 녀석이 누구인가?

추측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들 들은 게 있는 모양이었으니까. 체인워커가 거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덧붙였다.

“그러나 아직 안심할 때는 아닌 듯싶군. 그 시체들의 왕은 분명 마왕을 쫓고 있는 모양이었으니까. 그렇네. 십좌의 마왕, 부에르를 말일세.”

부에르라니.

-환영하마. 천외천(天外天)의 영역에 발을 들인 것을.

상위 마왕, 부에르라면 칠죄종 거악은 물론이요. 마계의 리치, 디스커스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한 경험치를 드롭하지는 않았겠지. 그런데…….

‘내가 쓰러트렸다고 그걸?’

그저 믿기지 않았을 뿐이다.

상위 마왕,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왕이자 천외천이라고 인정한 게.

불과 얼마 전이었단 말이다.

‘……아무리 그랑펠이라고 해도.’

칠죄종 분노를 처치하고, 상위 마왕 부에르를 쓰러트리고, 부에르에게 도전할 정도의 힘을 가진 디스커스를 연달아서 어둠 속에 파묻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증거, 증거가 필요해.’

덕분에 나는 자연스럽게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리고 목격했다.

칠죄종의 전리품.

세트 아이템 [중립의 기생 생물] 세트.

엔비와 러스트에 이어서.

[중립의 기생 생물 라스(Wrath) 3/7]

분노가 드롭한 것으로 보이는 아이템을.

효과는 다음에 확인하기로 하고…….

다음 전리품을 살핀다.

역시나, 내가 알지 못하는 아이템 하나가 눈에 띄었다.

[마계의 성서 : 진(眞)네크로노미콘]

정체를 알 수 없는 가죽 표지.

외관을 장식한 피처럼 붉은 보석.

사슬처럼 칭칭 둘린 띠지까지.

척 봐도 리치가 들고 다닐 법한 생김새. 짐작이 간다. 디스커스의 전리품이겠지. 책이라면 스킬북인가, 호기심이 생겼지만 역시나 효과는 다음에 살피기로 하자.

그리고 시선을 옮기는데.

‘……없어.’

전리품은 그걸로 끝이었다.

부에르는 엄연히 마왕이었다.

그것도 말석의 상위 마왕.

분명 마왕의 전리품을 드롭했을 텐데.

그 전리품이 인벤토리를 샅샅이 뒤져도 없었다.

나는 추측을 되돌아봤다.

‘혹시 내가 사냥한 게 부에르가 아니었나.’

그저 아르카나 대륙은 넓고, 마계도 그에 못지않게 넓다고.

그와 맞먹는 정체를 알지 못하는 악마를 하나 더 처치한 건가.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

나는 상태창에서 목격하고 말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부에르를 처치했다는 증거를.

한데 그 증거가 심상치 않았다.

[칭호 : 십좌의 주인]

잠깐, 십좌의 주인이라면…….

왕이라는 거잖아?

설마, 부에르의 왕좌를 내가 차지했다는 거야?!

*

각 지부들 사이엔 미묘한 신경전이 있기 망정이다. 세계의 평화를 지향한다고 한들.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다. 조국과의 이해득실이 엮여있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AAU 총회의.

“넥타이가 이렇게 답답한 줄 몰랐어요, 선배.”

들썩.

성현준이 넥타이를 이리저리 매만지며 옆자리 윤수겸에게 속삭였다.

긴장을 풀려고 건넨 말이었거늘.

유감스럽게도 윤수겸은 듣지 못했다.

“……속이 울렁거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플레이어, 이호열.

그리고 유낙서스 레이드에서의 맹활약으로.

아르카나 공식 랭킹 1위를 차지하게 된 남태민.

그런 두 플레이어의 조국, 대한민국.

AAU 대한민국 지부의 영향력도 그만큼 급부상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서울에서 AAU 총회의가 개최된 것만 봐도 알 수 있으리라.

윤수겸이 속을 진정시키고는 눈에 담는다.

“모니터로 볼 때랑은 차원이 달라. 이렇게 웅장할 줄이야.”

마탑, 크리스탈 홀의 풍경을.

총회의엔 전 지부 AAU의 전 임직원이 참석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탑은 더없이 적절한 장소리라. 드넓은 것은 물론, 포탈로 지리적 문제까지 상쇄할 수 있었으니까. 다만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뿐.

마탑을 감히 총회의장으로 사용할 생각을 말이다.

“선배, 저기 보세요!”

“……응?”

“저기요, 박 지부장님이요!”

척.

성현준의 손가락이 향한 곳엔 박민재가 있었다.

정확하게는 마탑의 새로운 탑주 마르셀로.

그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는 박민재가.

윤수겸이 솔직하게 평가했다.

“어째 새 탑주님이 굉장히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은데.”

당연한 이야기지만 마르셀로는 ‘누구’처럼 철면피가 아니었다.

과한 대접에는 멋쩍어할 줄 알았다는 뜻.

성현준이 상사의 새로운 모습에 싱글벙글했다.

“박 지부장님, 아부가 아니라 진심으로 좋아서 오뚜기처럼 고개를 조아리시는 걸걸요? 세상에 마탑에서 AAU 총회의 개최라니. 아까도 보셨죠? 지부장님들 사이에서 얼마나 어깨에 힘이 들어가셨는지……!”

시기가 적절했다.

마르셀로가 새로운 탑주로 선출되며 보다 적극적인 개방을 시작한 마탑이었다.

그 행보엔 [『기이』]를 중요시한 호열의 영향력이 컸다. 마탑의 『정기 회의』와 AAU의 [총회의]. 새로운 결과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했으니까.

성현준이 시계를 확인하고 속삭였다.

“이제 곧 시작하겠네요.”

어째서 목요일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회의에는 안건이 필요한 법.

목요일의 정기 업데이트야말로 새로운 [『기이』]의 성능을 시험할 수 있는 좋은 무대와 다름없었으니까. 윤수겸이 긴장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자료는 틀림없이 챙겼고…….”

적어도 마탑이 실망하는 일이 없도록.

그럴듯한 결과를 내놓아야 한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

탁.

이윽고 떠오른 정기 업데이트 내역에 윤수겸의 손가락은 멈추고 말았다. 아니, 윤수겸뿐만 아니었다. AAU 전원은 물론. 탑주, 마르셀로의 얼굴마저도 굳게 굳었다. 박민재가 나지막이 이를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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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곁으로 새로운 사건이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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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 션, 이 새끼가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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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 대형 이벤트, ‘마왕 쟁탈전 : 십좌의 증명’이 시작됩니다.]

[상위 마왕과 새로운 도전자들이 등장합니다.]

[이제부터 ‘베히모스의 아가리’가 더는 악마족 몬스터를 공격하지 않습니다.]…….

──────

*

나는 떠오르는 메시지를 응시했다.

[도전하겠는가.]

[증명하겠는가.]

[선택은 오롯이 왕인 그대의 몫이다.]

……저기 뭔가 단단히 착각한 모양인데.

무슨 생각으로 나를.

마왕 쟁탈전에 참여시킨 거냐, 너희?

나는 한 단어로 상황을 요약했다.

“체크메이트(Checkmate)다.”

“체, 체크메이트……?”

이런 젠장, 듣는 귀를 간과하고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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