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5화. 내가 그린 그림 (1)
깊은 잠에 빠진 것 같다.
꿈조차 꿀 수 없는 깊은 안식.
각성 이후로 이렇게 눈을 붙여본 건 처음이지 않나.
나름 반가우면서도 죽은 듯 잠든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거악 칠죄종 분노.
녀석에게 이런 신박한 패턴이 있을 줄이야.
분노는 예상보다 훨씬 강했지만 걱정이 되진 않았다.
나한테는 믿음이 있거든.
내가 아닌 그랑펠이라면 틀림없이 사냥해내리라는 믿음.
그랑펠 걱정을 할 바엔 차라리…….
내 걱정을 하는 게 맞다.
이제부터 마주하게 되는 적들은 차원이 다르다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그런 적 앞에서 나, 이호열은 한없이 부족하다는 것도.
예전과는 다르다.
거품 주제에 쓸데없이 많은 짐을 짊어지고 있다.
내가 긍지에 익사하면 짐들도 함께 가라앉는다.
따라서 내가 할 일은 간단했다.
나는 스킬,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숙련도를 상승시켜야만 한다.
저주, [어둠의 이해]를 통해서.
그랑펠의 전성기 시절의 능력을 온전히 되살려내야 한다.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에 닥친 상황을 감당할 수 있는 건 나, 이호열이 아니라 그랑펠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웃었다. 어쩌면 이 감각에 익숙해져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어둡다.
어째 눈을 감은 것보다 더 어두운 기분이다. 그 어둠 속에서 어디론가 있는 듯한 느낌은 드는데, 보이는 것도 느껴지는 것도 없어 장담할 수 없었다.
다만.
육체가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마치 입방정이 전신으로 전염된 느낌이랄까?
비유하자면…….
나와 그랑펠의 평상시 처지가 바뀐 것이라 생각하면 되려나.
왜, 그런 생각을 했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숙련도가 100퍼센트에 도달하는 순간.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하는 생각.
아무래도 내가 기절한 덕분에 나는 훗날의 일을 미리 체험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마지막에 [흑화]라는 메시지를 본 것 같은데……. 어쩌면 그 영향 때문인지도 모르겠지.
어쨌든, 예상대로 썩 좋은 기분은 아니다.
다만, 투덜대지 않는 건 단순한 역지사지. 평상시의 그랑펠이 이런 기분일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둠 속에서 표류할 때 문득,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줄기 빛마저 내게서 앗아갔구나.”
내 목소리지만,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랑펠이 뱉은 말이겠지.
그나저나 한 줄기 빛이라.
무슨 소리를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척 들어도 그랑펠 취향답게 의미심장하다. 별게 아닌데, 또 의미부여 하고 있는 거겠지. 티백 녹차나 인터넷 서핑처럼 말이야.
그러나 이어지는 말엔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나도 앗아가 주마.”
……뭘?
“마계, 그리고 너희의 전부를.”
악마의 고향, 마계.
아르카나 대륙에서 태어난 칠죄종을 제외하면 상위 마왕을 비롯한 모든 악마는 ‘마계’에서 비롯된 존재들이다. 그랑펠의 선언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그랑펠은 그 한 줄기 빛을 빼앗긴 대가로.
마계, 전체를 받아낼 생각이었다.
나는 그제야 이 걸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새삼스럽게 또 한 번 자각하게 된다.
스킬,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처음 발동했을 때 느낀 점.
역시, 나는 그랑펠에 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게 분명하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시스템이 말했듯.
숙련도 정도, 고작 1할밖에 모르는 게 확실하다.
내가 끄적거렸던 설정과 그랑펠의 언행에는 미묘한 괴리감이 있었으니까. 지금만 해도 그렇다. 지금의 그랑펠은 노골적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그랑펠이 차기 가주로서 가장 먼저 몸에 익힌 건 사사로운 것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것이었다.
클라우디 가문의 가주의 자리는 조금의 동요도 용납되지 않는 그런 자리였다.』
설정과는 다르게.
어째서일까.
지금의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보자.
평상시라면 이쯤에서 호들갑을 떨었겠지.
혼자 마계에 쳐들어간다고?
상위 마왕이라도 뛰쳐나오면 어쩌려고 그러냐며……!
정말로 긍지에 익사하게 생겼구나, 하고는.
하지만 그건 언제까지 나, 이호열의 관점이었다.
당연히 그랑펠, 너라면 해낼지도 모르지.
그쯤에서 나는 깨달았다.
어쩌면 이대로 계속 눈을 감고 있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모두를 위한 최선이 아닐까, 하고는…….
그러나 인생이라는 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어둠 사이로 목소리가 들려왔으니까.
“당신 누구야? 역시…….”
희미하게 들리는 사내의 음성.
그러나 익숙했기에 곧장 알아차렸다.
남태민의 목소리였다.
그런 남태민이 진지하게 읊고 있었다.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ㄹ…….”
그 빌어먹을 풀네임을……!!
풀네임이 타인.
완전히 타인도 아닌 남태민의 입에서 나오고 있다.
진심으로 듣고 있는 것조차도 고통스럽기 짝이 없다.
‘아무리 그래도 로미오만큼은 안 된다니까?!’
……그러니 유감이지만 마계 정벌은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그랑펠. 나는 필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당황하지도, 막 잠에서 깨어난 티 따위도 내지 않는다.
그렇게 언제나처럼 내뱉었다.
“새삼스러운 질문이군.”
뻔뻔하게도.
“이호열이다.”
그러자 시야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완전히는 아니었다.
한없이 깊은 어둠에 한 줄기 빛이 드리운 정도……?
*
-“나는 이호열이다.”
풀썩.
호열은 그 말을 끝으로 쓰러졌다.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저런 출혈량으로 어떻게 꼿꼿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것인가. 어떻게 앞으로 걸어나갈 수 있는 것인가. 오히려 두 눈을 의심하게 할 정도였으니까.
“……호열 씨!!”
남태민은 뼈가 으스러졌지만, 땅을 박차고 튀어 나갔다. 호열이 바닥에 꼬꾸라지기 전에 부축하는 데 성공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호열이 기절했다.
우려해야 하는 게 당연한데…….
“젠장.”
남태민은 작게나마 웃고 있는 자신이 병신 같았다.
멋대로 의심하고, 멋대로 좋아하는 거냐, 남태민.
자책하면서도 ‘나는 이호열이다’.
그 호열의 대답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작전 성공이다, 전군 후퇴하라!”
성전 연합군은 총대장, 호열과 함께 아이언 캐슬 호로 복귀했다.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베히모스의 아가리는 만만한 장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악마가 저기서 다 튀어나오고 있었던 건가?”
아르카나 대륙을 뒤덮을 정도의 악마들.
그들의 머릿수가 이해가 되는 풍경이었다. 찢겨나가는 악마도 많았지만, 생존해 아르카나 대륙을 무사히 밟는 악마의 수도 만만치 않았다.
쾅.
체인워커가 망치로 악마를 떨쳐내며 말했다.
“이제야 이해가 되는가? 대륙은 놈들의 침공을 방치한 게 아닐세. 그저 알면서도 손을 쓸 수 없었을 뿐이지. 손을 대기엔 이미 늦었으니까. 그렇기에 악크샨의 말을 들었어야 했거늘.”
히사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수한 장비를 내세운 드워프의 탱킹, 그리고 아이언 캐슬 호의 화력 지원이 아니었다면 비명횡사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보다시피 성공했다. 비록 총대장님은 정신을 잃고 쓰러져서 아이언 캐슬 호로 복귀하셨지만……. 모두가 아이언 캐슬 호로 복귀했단 뜻이다.
히사기는 두 정령, 하이엘과 디엔드를 바라봤다.
“송구합니다, 주군…….”
호열이 쓰러지고 두 정령의 의식 또한 돌아왔다.
아르카나 대륙을 뒤덮었던 한없이 깊은 어둠도 사라졌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히사기는 남태민은 바라봤다.
‘어떻게 생긴 근육인지.’
팔다리 골절에 멀쩡한 구석이 없었는데, 벌써 어느 정도 자연 치유가 된 모양이었다. 덕분에 남태민은 의자에 바로 앉아 제 손으로 붕대를 감고 있었다.
“괜찮다니까. 내가 할게.”
“가만히 있어.”
“아니, 너 붕대 감는 법 알긴 아냐? 버서커잖아. 너한테 붕대는 디버프나 다름없는데. 철민이 형도 아니고 너한테 부탁할 바에는…….”
“안 닥쳐?”
꽉.
레오니가 피도 안 통할 정도로 붕대를 감아버렸다. 남태민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는데, 히사기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건 후련한 표정이었다.
가온과 이나즈마.
한때 한일(韓日)을 대표했던 길드의 마스터로서 서로를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이다. 얼굴만 봐도 감정 정도는 알 수 있다. 레오니가 자리를 뜨고 나서야 히사기는 남태민에게 물었다.
“무슨 대화를 나누신 겁니까?”
“궁금하지?”
“네, 궁금합니다.”
남태민은 흠칫 놀랐다.
자신에게 무엇하나 쉽게 굽히는 법이 없는 앙숙이 고분고분했다.
남태민은 새삼스럽게 피식 웃었다.
상황의 심각성 때문이겠지.
“글쎄.”
입을 열면서도 남태민은 생각했다.
‘나도 뭐가 뭔지, 머릿속이 굉장히 복잡한데.’
온몸이 으스러지는 고통을 참아내고 마주한 호열.
예상했던 대로 그건 호열이 아니었다.
긴 머리카락을 제외한다면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그 시선이 호열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벌레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도 아니었어.’
아마도 그의 시선에서 자신은 보이지도 않는.
아주 작은 먼지로 비치고 있었으리라.
주변을 떠도는 작은 먼지가 어떻게 되든 신경 쓰는 이가 없듯.
그에게도 자신의 고통 따윈 안중에도 없었겠지.
덕분에 남태민은 확신했기에 물었었다.
“그걸 대화라고 할 수 있나, 그냥 질문이었어.”
“어떤 질문을 하신 겁니까?”
“그냥……. 당신, 누구냐고.”
히사기는 남태민의 말을 떠올렸다.
-“저건 내가 아는 총대장님. 아니, 호열 씨가 아니야…….”
베히모스의 아가리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남태민은 그렇게 말했다.
히사기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땐 단순한 비유인 줄 알았습니다.”
그저 평소와 다르다는 뜻으로만 받아들였다. 하지만 남태민의 직설적인 평상시 화법을 생각해 보면……. 히사기가 작게 웃고는 말을 잇는다.
“역시 당신과 대화할 땐 머리를 쓸 필요가 없군요.”
“너, 그거 무슨 뜻인데?”
“칭찬입니다.”
“그래? 그럼 됐어.”
두 사람뿐만 아니다.
아이언 캐슬 호는 여전히 의문으로 가득했다.
어째서 호열이 쓰러지는 순간.
대륙을 뒤덮은 한없이 깊은 어둠이 사라졌는가.
긴 머리카락이 원래대로 돌아왔는가.
그에게서 온기가 돌아왔는가.
답할 수 있는 건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러니 그저 호열이 안정을 취하고 있는 객실 문을 바라보는 게 최선이었다. 물론, 당신의 가르침대로 자신들의 할 일에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문득, 히사기가 물었다.
“총대장님께선 질문에 무어라 답하셨습니까?”
“일일이 다 말해야 하는 거냐? 뭐, 회고록이라도 쓰게?”
“그렇지 않아도 의향이 있습니다. 총대장님의 행보를 기록한 일대기를 말입니다. 마탑에서 서적을 둘러보며 다짐했습니다. 총대장님의 위대하신 업적을 기록한 서적이 하나도 없다니, 나라도 집필해야겠다고.”
“……너, 그 정도면 광기야.”
남태민은 진심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히사기의 얼굴이 더없이 진지했기에.
정확하게는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았기에.
귀찮은 뱀을 떨쳐내기 위해서라도.
“뭐, 못 할 말도 아니고.”
입을 열었다.
“그전에 내 질문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어.”
“하나도 빠짐없이 부탁드립니다.”
“평소에도 그렇게 고분고분해 봐라.”
핀잔도 잠깐, 남태민이 말을 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호열 씨가 아닌 것 같았거든. 그렇다면 호열 씨의 제복을 걸치고 있는 저게 대체 누굴까, 생각했어. 그랬더니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더라고.”
“그렇겠지요.”
“맞아.”
그때였다.
“클라우디령에서 호열 씨가 찾아 나섰던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ㄹ…….”
덜컥.
“……!!!”
호열이 누워있던 객실의 문이 열린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