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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74화 (374/489)

◈ 374화. 빛이 있었다

동경의 현사(賢巳).

이나즈마 시절.

히사기의 별명.

‘……중상이다.’

똬리를 틀고 먹잇감을 노려보는 독사와 같다. 매사에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히사기를 비유한 별명이었다. 그러나 펼쳐진 풍경은 히사기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뚝뚝.

호열의 옆구리서부터 시작된 출혈. 바닥을 적신 핏자국은 지평선 너머에서부터 이어져 있다. 히사기는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애써 굴렸다.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클라우디 가문의 인물. 총대장님께서 그를 쫓아 클라우디령을 나섰다고 결론을 내린 자신이었다. 신화급 퀘스트가 시작되었다는 확실한 계기가 있었으니까.

입술을 저절로 깨물게 된다.

‘그가 총대장님을 저런 꼴로 만들었다는 건가?’

히사기의 기억 속에서 호열은 단 한 번도 꺾이지 않았다.

상처를 입기는커녕.

제복에 먼지 한 톨을 묻히는 경우조차 드물었다.

“…….”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바닥에 닿을 정도로 길게 자라난 머리카락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하나는 확실했다. 지금의 호열은 온전한 상태가 아니다.

“뭔데?”

광전사, 버서커.

본인이든, 적이든.

피를 뒤집어쓰는 전투를 벌이는 레오니.

“……자기가 광전사도 아니고.”

그녀가 중얼거렸다.

긴장감을 풀고자 한 농담이었지만, 효과는 없었다.

분명 자신들의 인기척을 느꼈을 터.

그럼에도 호열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우려할 것 없다고, 태연하게 내뱉지도 않는다.

뚝뚝.

오직 핏물이 떨어지는 소리만 들려왔다.

“제길.”

드워프 지도자, 체인워커가 침음을 삼켰다.

일평생을 달아오른 광물 가운데 시달리는 드워프들이다. 강철처럼 담금질된 그들의 인내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상상하지 못한 상황 앞에서.

결국, 드워프 최고의 대장장이 월스와일이 소리쳤다.

“총대장! 그대가 의뢰했던 제련이 끝났네. 단언컨대 내 일생의 역작이라 자신하지. 그대가 노룡이 남긴 유산, 드래곤 스킨을 내게 건네준 덕분이었어.”

솔직하지 못한 드워프식 우려였다.

그러나 여전히 대답도, 몸을 돌리는 기색도 없었다.

호열은 그저 나아가고 있었다.

슈웅.

상공의 정찰기, 거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다들 뭐 하고 있는 건가? 이대로 총대장님을 놔둘 거야? 더는 위험하네. 저 방향으로 계속 나아갔다가는 총대장님께선 저 흉악한 아가리 속으로……!”

“……!!!”

그 말에 깨닫게 된다.

넋을 놓고, 호열을 바라보느라 간과하고 있었다.

『히든피스, 베히모스의 아가리』였다.

불안정한 영구 균열로 아르카나 대륙과 마계를 잇는 차원의 틈.

마계에서 아르카나 대륙으로 향하는 자도, 그 반대도.

처참하게 다져질 수 있는 말 그대로 대마물의 아가리 속.

호열이 나아가고 있는 방향은 더욱 깊은 아가리, 마계였다.

대체 어째서 마계로……?

필사적으로 고뇌해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모인 이들은 망설이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는 호열을 말려야 한다.

체인워커가 비장하게 읊조렸다.

“발길을 돌릴 수 없다면 저지하는 것도 생각해 두게.”

꾹─

망치를 다잡는 드워프들.

히사기와 레오니.

거대 연합의 정예들.

스칼까지도 고개를 끄덕였다.

총대장, 호열과 맞선다.

평상시라면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호열의 뜻에 반대하는 것도, 그를 저지하는 것도.

하지만 지금은 평상시가 아니다.

무엇보다 호열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으니까.

저벅.

체인워커가 선두.

전군이 호열을 향해 발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콰득.

“?!”

그들이 내던 발소리가 바뀌었다.

발을 내디딘 땅이 지나치게 움푹 파여 들어간 것이다.

마치 육체에 가해지는 중력이 수십 배로 늘어난 듯한 느낌.

엄연한 고압이었다.

“으윽?!”

모두의 몸이 일제히 굳었다.

아득히 높은 곳에서부터 짓누르는 듯한 중압감.

배려도 자비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코끼리에 짓밟히는 개미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체인워커가 본능적으로 소리쳤다.

“모두 뒤로 물러서게!!”

혼신의 힘을 다해도 다리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기에.

차라리 뒤로 나자빠지는 이들도 있었다.

그렇게 한 발자국 물러서자 거짓말처럼 압력이 사라졌다.

스칼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접근을 원치 않으시는 거야.”

아니, 원치 않는 수준이 아니었다.

낯선 반응을 넘어서 날 선 반응, 경고였다.

히사기가 고개를 젓는다.

“……아니, 경고라고 할 수도 없겠지요. 지금 총대장님께선 저희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계시니 말입니다. 가로막는다면 그저 짓밟힐 뿐인 겁니다.”

경고조차 아니다.

무관심이다.

당연히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모두가 적잖은 충격에 빠진 상황이었다.

잠자코 있던 남태민이 입을 열었다.

“……냄새가 달라.”

바바리안.

야만전사의 감각은 인간보다 짐승에 가깝다.

시각, 청각, 후각도 예외는 아니다.

남태민의 미간이 좁혀져 갔다.

양손이 등에 짊어지고 있던 대검으로 향한다.

“확실해. 저건 총대장님이 아니야.”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앞으로 뛰쳐나오며 반문한 건 레오니였다.

슥.

남태민은 고개를 한참 내리고 레오니와 눈을 맞췄다. 증거를 바라는 눈빛이다. 그러나 증거는 없다. 이건 순전 감각의 영역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남태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아는 호열 씨는 이러지 않아.”

프로스트 탈환전.

깨워선 안 될 존재.

런던의 기적…….

설령 모든 행보가 냉랭해 보일지라도.

되돌아보면 호열의 모든 행동엔 온기가 있었다.

수많은 이명 중 하나, 한없이 깊은 어둠 속 한 줄기의 빛처럼.

그러나 지금 호열의 모습은 그 빛을 상실한 어둠 같았다.

머리카락을 제외한 그 외관에는 변함이 없을지언정.

저 내면에서 온기와 빛은 느껴지지 않았다.

남태민은 쓰게 입꼬리를 올렸다.

“뭣보다 우릴 짓밟으실 거라면 아마도 한참 전에 짓밟으셨겠지. 어디 우리가 호열 씨를 귀찮게 만든 게 한두 번이냐?”

그때였다.

[베히모스의 위장이 뒤틀립니다.]

“!”

플레이어들의 눈앞에 일제히 떠오르는 메시지. 급박한 상황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베히모스의 아가리라는 변수가 요동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스멀스멀.

베히모스의 위장이 요동치고 있었다.

널브러진 살점 파편 사이로 꿈틀거리는 형체가 보였다.

마계에서 기어 올라오는 그림자.

놈의 살점이 사방으로 튀어 오른다.

그럼에도 놈은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음험한 음성이 들려온다.

“오직 이날만을 기다려 왔다, 부에르……! 오늘이야말로 네놈의 십좌를 찬탈할 때가 왔노라. 역병의 군세여. 고통을 이겨내라. 살점이 뜯겨나갔다면, 뼈가 되어 움직여라!”

[마계의 리치, 디스커스가 출현합니다.]

베히모스의 아가리는 범상치 않은 장소였다. 그 권장 레벨도 드높을 수밖에 없을 터. 그런 아가리에 진입한 플레이어들의 시야에 출현 메시지를 띄웠다. 뿐만 아니다.

“대, 대군이다!”

역병의 군세라는 말 또한 과언이 아니었다. 디스커스의 살점과 불러낸 피조물들이 터져가며 일대를 자욱하게 만들었다. 걷잡을 수 없이 짙은 독성이 퍼져 나갔다.

[상태이상, ‘중독’이 발생합니다.]

히사기가 메시지를 볼 수 없는 드워프들에게 소리쳤다.

“리치, 상위 마왕과 맞먹는 악마가 등장했습니다. 베히모스의 아가리를 통하며 적잖은 피해를 입은 모양이지만,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닙니다.”

철컥.

드워프제 방어구가 웬만한 상태이상은 상쇄해주리라. 체인워커는 동요치 않고 투구를 눌러썼다. 그래, 악마의 등장보다 우려되는 건 호열이었으니.

“총대장을 지원해야겠네.”

뚝뚝.

출혈은 여전히 멎지 않았다.

최후의 악크샨 악마 사냥꾼.

호열이 악마에게 당하는 모습이라, 상상은 되지 않았지만…….

남태민, 모험가가 말하지 않았는가?

저 사내가 자신이 알고 있는 호열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붙잡고 물어봐야 드워프 쇠고집이 풀릴 테니까.”

직접 정체를 묻기 위해서라도.

체인워커는 베히모스의 아가리에 달려들 생각이었다.

리치라는 놈과 맞서 싸울 심산이었다.

그건 남태민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 않아도 심란한데, 방해꾼? 지랄 맞아.”

[광폭화] 발동.

후욱.

남태민의 숨이 거칠어지고 대검을 한 손으로 고쳐든다.

자유로워진 한쪽 팔로는 땅을 디디고 한껏 몸을 낮춘다.

히사기, 레오니, 스칼.

이어서 거대 연합의 정예들도 전투태세를 갖췄다.

리치, 디스커스의 등장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놈과의 전투.

그리고 녀석이 쫓고 있는 상위 마왕, 부에르보다도 우려가 되는 건.

이 순간에도 마계로 향해 나아가는.

멈추지 않는 호열의 발걸음이었다.

탓.

전군 돌격을 앞둔 순간이었다.

베히모스의 아가리에 살점을 절반쯤 내어준 디스커스.

녀석의 반백골 주둥이가 벌어졌다.

“고약한 탄 내가 나는구나. 녹색 유황의 냄새. 그리고…….”

어둠에 뒤덮인 아르카나 대륙을 둘러보며 내뱉었다.

“거기에 지독한 네 놈의 냄새가 섞여서 풍겨오는구나. 부에르여.”

멈칫.

“뭣?”

체인워커의 근육이 바짝 치솟았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하다.

리치, 디스커스 녀석이 쫓던 상위 마왕.

그 부에르가 녹색의 불길, 지옥불에 타올랐다는 소리였다.

성전 연합군.

그리고 디스커스의 시선이 같은 곳을 향한다.

호열에게 정적(政敵)을 잃은 디스커스의 군세가 향한다.

“놈……!! 무슨 간계를 부린 것이냐!!”

스르륵.

리치, 죽음을 지배하는 자답게 베히모스의 아가리에 널린 살점이 놈의 군세가 되었다. 언데드의 군세가 쏟아져 나왔다. 히사기의 뱀눈이 빠르게 전황을 파악한다.

“녀석에게 지나치게 유리한 전장입니다.”

그 사실을 디스커스도 알기에.

디스커스 또한 상위 마왕인 부에르의 십좌를 찬탈할 장소로 베히모스의 아가리를 택한 것이었다. 상공에서 형세를 살피던 거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건 많아도 너무 많네. 수천, 아니, 수십만이야!”

체인워커는 결단을 내렸다.

“호열 경이 온전하지 않은 지금 상황에서 놈과 맞서는 것은 불가능한 일. 우리의 최우선 목표는 호열 경과 함께 이 베히모스의 아가리를 떠나는 것일세!”

끄덕.

더 이상의 말은 필요치 않았다.

성전 연합군과 디스커스의 군세.

각자가 다른 이유로 호열을 향해 쇄도한다.

“……?”

그러나 충돌은 없었다.

디스커스가 자신의 군세를 바라본다.

분명, 찢어발기라 명령했거늘.

까득.

공허한 뼛소리만 내며 모두가 멈춰버렸다.

수백만의 군세가 마치 투명한 막에 가로막힌 듯.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오가지 못했다.

“……!”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대로 멈춰선 채로 바라보는 게 전부였다. 베히모스의 아가리, 정확하게는 마계로 향하는 사내의 모습을.

파직.

마계에서도 악마에 멸하지 않고 여태껏 존속해 온 언데드.

그들의 지도자 디스커스의 예지력이 번뜩였다.

그의 머릿속에 잔상이 떠올랐다.

고작 한 사내의 의해 멸망하는 마계의 풍경이었다.

……위험하다.

디스커스는 필사적으로 사내를 막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억압된 육체가 답답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가까스로 고개를 숙인 디스커스의 시야에 보인 건.

후두둑.

이미 산산이 부서져 허공으로 흩어지고 있는 자신의 육체였으니까. 한 발짝, 사내가 마계를 향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군세가 사라지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한없이 깊은 어둠에 파묻히고 있었다.

디스커스는 이해하고야 말았다.

“……부에르, 그대는 간계에 당한 게 아니었군.”

이 사내야말로 십좌마저도 감당할 수 없는 존재였다.

디스커스는 마지막 순간, 바알을 떠올렸다.

바알의 변덕이 부디 마계를 저버리지 않기를 바랐다.

“……말도 안 돼.”

거너는 그 광경을 상공에 바라보고 있었다.

저 몇 발자국에 수십, 수백만의 군세가 흩어져 사라져 갔다.

거너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저, 저건 재앙이야…….”

그러고는 외쳤다.

“누구도 다가가선 안 돼!”

정찰로 얻은 정보를 멋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거너가 확신할 수 있는 건 오직 하나였다.

으스러지는 지반만 봐도 알 수 있다.

저 재앙은 아군도, 적군도 가리지 않으리라.

타다닥.

그러나 이미 늦었다.

성전 연합군 측에서 호열을 향해 다가가는 이가 있었다.

정확하게는 짐승처럼 내달리는 이가 있었다.

남태민.

콰득.

[광폭화]로 증폭된 야성은 물불을 가리지 못하게 해준다. 근육과 뼈에 가해지는 고통조차도 찰나 동안은 잊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남태민은 간신히 입을 열 수 있었다.

“당신…….”

콰드드득.

육체가 으스러지는 와중에도 제대로 질문을 건넸다.

“누구야? 역시…….”

그 이후의 전개 또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한없이 깊은 어둠.

그 어둠 속에 한 줄기 빛을 다시 드리우게 만든 것.

그것이 거창한 행동도, 의식도 아닌 고작 질문에 불과했던 이유.

오직.

“역시,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ㄹ…….”

그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이유, 아니, 역사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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