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3화. 그러니 이제 그만 (2)
십좌의 마왕.
규격 외의 존재이자 천외천.
거악 칠죄종 색욕이 자신을 제물로 바쳐서 십좌 중 말석인 부에르를 소환하려 했거늘. 오직 목소리만을 불러내는 데에 그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십좌야말로 진정한 마계의 왕이다.
아득히 높은 경지에 올랐기에 미물과는 말조차 섞을 수 없다. 그 사이엔 헤아릴 수 없는 벽이 존재하니, 미물의 시야로 십좌의 마왕을 평가하는 것은 벽을 평가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한 십좌의 마왕, 부에르가 압도되고 있었다.
파르르.
부에르는 떨리는 자신의 근육을 보았다. 완전한 소환이었다. 무엇보다 힘의 원천이 되는 부정적인 감정이 주변에 충만했다. 그럼에도 열세였다.
캉.
검이 휘둘러진다.
부에르는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에게 검을 들이밀었던 수많은 인간군상의 면면을 떠올렸다.
홀리나이트, 웨폰마스터, 검마, 대마법사…….
용케도 기억에 남을 정도의 미물들이다.
하기야 각자가 한 세계를 평정할 정도의 인물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뿐이었다. 기억에 남았을 뿐. 그들 중 누구도 부에르의 육체에 상처를 남길 순 없었다.
푹.
그런데 이 순간, 부에르의 육신에서 피가 튀었다.
그것은 벼려진 검기도.
현학적인 검술도.
영혼을 대가로 발현한 마법도 아니었다.
“허.”
그저 휘두른 것뿐이었다.
말 그대로 벌레를 때려잡듯.
무심코 휘둘러진 일격에 부에르의 한쪽 팔목이 그대로 잘려나갔다.
“심히 놀랍다.”
진정한 왕의 반응.
흔한 마왕, 거악과는 다르다.
부에르는 동요하지 않았다.
고통에 울부짖지도 않았다.
그저 잘려나간 자신의 팔과 그랑펠을 번갈아 바라보며 놀라고 있었다.
부에르의 음성에 점차 격앙된다.
“나는 그대와 좋은 벗이 되리라 여겼다. 미물로서 천외천의 경지에 도달한 이는 여태껏 목격하지 못했던 나였으니까.”
첫 만남.
부에르가 건넸던 말은 진실이었다. 인간의 관점에서 비유하자면……. 인간의 말을 하는 개미가 있다니, 그 신기한 개미에게 관심이 가는 정도의 호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착각이었다. 벽을 보고 착각한 것은 나였어. 그대여, 그대는 한낱 미물이 아니구나. 나조차도 그대의 말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대는 하늘 위의 하늘조차 초월한 존재가 확실하다!”
마지막쯤에선 희열이 묻어나왔다.
“그랬어……!”
푹.
말을 내뱉는 도중에도 부에르의 육신은 난도질되고 있다. 편히 대화를 나누기 위해 인간에 가까운 모습으로 형태로 몸을 바꾼 탓이 아니느냐고?
그건 천외천을 모독하는 물음이다.
천외천의 권능은 고작 육신의 형태에 억압되는 게 아니기에.
부에르는 변명하지 않았다.
핏물과 함께 말을 내뱉었다.
“……그대야말로 ‘진정한 진리’였다!!”
부에르는 떠올렸다.
간혹 미물 중 용케도 자신의 이름을 부르짖는 이들이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소원을 비는데, 호기심이 생겨 귀를 기울이면 전부 터무니없는 바람에 불과했다.
-“내가 왕이 될 수 있게 도와다오……!”
-“영생을 누리게 해다오.”
-“그녀가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라!”
어찌하여 그리도 작은 세상에 얽매이는가, 미물들이여.
가여운 마음에 소원을 들어주면 미물들은 증오로 되갚아 왔다.
-“……내, 내가 바란 건 이런 게 아니었다! 세상을 멸하고 나와 그녀만을 살려두다니……! 나는 대체 무슨 짓을……? 이런 빌어먹을 악마 녀석이……!!”
그런 의미에서 아르카나 대륙의 미물은 영특했다.
그중에는 ‘진정한 진리’를 이해한 이들도 있었으니까.
가미긴이 말발굽을 들어 올렸던 이유도 그 때문일지 모른다.
“가미긴, 그에게 미안해지는구나.”
과거, 부에르는 말 대가리의 최후를 비웃었었다.
그러나 겪어보니 알 수 있었다.
가미긴은 그저 저항할 수 없었던 것뿐이었노라고.
“진정한 진리 앞에선 우리조차 거역할 수 없을진대.”
털썩.
부에르의 두 다리가 완전히 풀렸다. 부에르는 무릎을 꿇은 채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내를 보았다. 아니, 진정한 진리를 보았다. 광기에 물든 눈은 희열로 떨리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순전 탐구의 영역이다.’
부에르는 자신의 최후를 의심하지 않았다.
거스를 수 없는 것이야말로 진리다.
자신이 어떻게 입을 놀리든, 어떤 행동을 보이든.
결정하는 건 진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부에르는 감히 자신의 권능을 발휘했다.
그것은 마음을 꿰뚫어 보는 힘이었다.
모든 속내를 꿰뚫어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부에르의 권능은 오직 사내에게만 유효했으니.
사내라 다행이군.
부에르는 안도했다.
‘과연, 진리다. 탐구자를 배척하지 않는다.’
말조차 통하지 않는 격의 차이가 존재한다.
사내가, 진리가 자신을 배척하고자 하였으면 권능은 효력이 없었을 터. 그러나 자비인가. 부에르는 온전히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사내 내면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주륵.
그 즉시였다. 부에르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천외천의 존재는 시공간을 이해할 수 있다. 간섭은 불가능할지라도 탐색 정도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가.”
따라서 부에르는 목격하고 말았다.
비단, 과거뿐만이 아니다.
현재와 미래, 사내가 겪게 될 시련들을.
사내의 감정에 공감해서 흐르는 눈물이 아니었다.
“이것이 진리가 짊어진 무게란 말인가……!”
그저 엿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흘러나올 정도로 벅찼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부에르에게 사내의 말이 이어진다.
“□ □□ □□□ □□□ □□□□□.”
부에르는 진리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저는 우둔하여 당신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나이다…….”
그것은 공포에서 우러나온 행동도, 고압적인 압력에 나온 행동도 아니었다. 십좌의 마왕조차 진정으로 숭배하게 하는 존재, 그것이 바로 지금의 사내.
그랑펠이었다.
서걱.
부에르의 최후는 다른 악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목이 잘려나갔고 그것으로 지옥의 겁화에 삼켜지기 시작했다.
지옥의 불은 누구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나 악마는 지옥의 겁화가 주는 고통을 참을 수 없다.
“흐흐흐.”
그러나 부에르는 고통보다 더 큰 카타르시스에 잠겨있었다. 가엾구나, 가미긴. 자신보다 무려 6계단이나 높은 네 번째 왕좌의 마왕을 진심으로 조소했다.
“나는 진정한 진리를 보았다.”
십좌의 마왕의 태도는 다른 악마들과 달랐다.
만류귀종.
정점에 다다랐기에. 종을 초월하고, 사사로운 감정마저도 초월하여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부에르는 제 죽음에 일말의 후회도 없었다.
“누구보다 먼저 진정한 진리의 탄생을 목격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기꺼이 지옥에 내던져지리라. 흐하하하하.”
화륵.
한없이 깊은 어둠 속에서 지옥의 옥빛만이 일렁인다.
상위 마왕이 지옥에 떨어졌다.
저벅.
그러나 그랑펠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
애초에 그 시선은 지옥의 불을 향하지 않았기에.
그저 어둠을 나아갈 뿐이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는.
단 한 줄기의 빛을 찾기 위해서.
저벅.
저벅.
저벅.
.
.
.
아이언 캐슬 호는 참혹한 광경과 마주했다.
“미친…….”
『베히모스의 아가리』
아르카나 대륙과 마계를 잇는 가장 큰 영구 균열 중 하나를 일컫는 말. 체인워커는 의식을 다잡았다. 거너를 통해 익히 들은 풍경이었지만 직접 마주하는 충격이 상당했다.
“체, 체인워커 님. 저게 다 뭐죠……?”
마찬가지로 깔린 풍경을 내려다보던 남태민이 말꼬리를 흐렸다.
낯선 풍경이다.
사방에 깔린 짙은 어둠 위로 뭉개진 살점의 파편만이 가득했다.
체인워커가 말했다.
“모험가인 자네들의 세상에도 균열은 있다고 들었네. 다만, 영구적인 균열은 존재하지 않겠지. 아르카나 대륙도 마찬가지일세. 저건 강제로 유지되는 균열이네. 불안정하기 짝이 없지. 따라서 마계로 향하는 자도, 마계에서 넘어오는 놈들도. 불안정한 균열을 버티지 못하고 살점으로 흩어지기 일쑤지.”
“……!!!”
레오니가 미간을 찌푸리고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저 살점들은…….”
“그렇다네. 전부 악마의 살점이야. 아르카나 대륙에서 마계로 향하는 미친 자 혹은 영웅은 지금껏 알려진 바가 없었으니까.”
“그렇군요. 비로소 이해가 됩니다.”
히사기는 지그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카나 대륙과 마계, 그리고 현실까지.
마계에서 비롯된 악마는 폭넓게 퍼져 있었다.
그렇기에 마왕을 보았을 때 히사기는 의문에 휩싸였다.
어째서 마왕은 번거로운 제물 따위를 필요로 하는 것인가, 하고는.
“마왕, 마계의 높으신 분들께서 위험천만한 모험을 즐길 이유가 없을 테니까요. 제물 소환이라는 고전적이며 안전한 방법이 있으니 말입니다.”
균열이 가진 [『기이』]는 아직 누구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이가 없었다. 그 창시자라 불리는 호열조차도 기이는 아직 정복되지 않은 영역이라 말했었으니까.
마왕들도 마찬가지이리라.
제물을 거절하고, 균열의 불확실성에 몸을 던져 고깃덩이로 변할 위험을 무릅쓰며 아르카나 대륙으로 향할 이유는 없다는 뜻. 스칼이 냉정하게 평가했다.
“그 불안정함이 아르카나 대륙을 구하고 있던 거였나.”
흩뿌려진 살점의 양은 방대했다. 피와 살점으로 산과 바다를 이루었다고 해도 거짓말이 아닐 정도로. 장담컨대 이 순간, 아이언 캐슬 호의 모두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베히모스의 아가리를 빠르게 지나치고 싶다고.
그러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짙게 내리깔린 어둠 사이에서 형형한 광채를 뿜어내는 은빛을.
남태민이 소리쳤다.
“……호열 씨!!”
잔혹한 풍경을 외면하고자 했던 이들은 없었다.
철컥!
명령은 필요하지 않았다. 아이언 캐슬 호가 곧바로 하강했고, 남태민 일행을 비롯, 체인워커와 월스와일조차도 자신의 장비를 착용했다.
거너의 경고가 들려온다.
-“베히모스의 아가리는 위험해. 언제 어떤 순간에 어떤 악마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지. 더욱이 우리는 마계에 관해 온전히 알지 못하네.”
마왕급 악마가 베히모스의 아가리를 통해 등장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정찰대의 수장으로서 누구보다 아르카나 대륙을 넓게 지켜봐 왔던 거너다.
-“단순한 전투력만으로 마왕을 능가하는 악마들은 셀 수 없이 많이 봐왔네. 마왕, 그들은 그저 군주의 자질을 가질 자들일 뿐이었으니까.”
플레이어들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마왕도 [군주] 클래스와 비슷한 계열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전원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물론, 소식을 전하던 거너도 마찬가지다.
거너가 외쳤다.
-“그럼 목숨을 바치세, 제군들!”
철컥─
아이언 캐슬 호가 마력탄을 지상으로 발사했다.
탄환은 순수한 마력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마력석에는 마탑의 마법부여학 선임 마법사.
키코 아르민의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대규모 텔레포트』
이윽고, 바닥에 박힌 마력탄이 빛을 발하고 마력을 방출했다. 흩날리는 마력 입자 사이로 하나둘 성전 연합군의 일원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히든피스, ‘베히모스의 아가리’에 진입하셨습니다.]
[주의 : 정신력이 너무 낮습니다.]
[마계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지끈.
어지럽게 떠오르는 메시지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호열이었다. 마계의 압력을 이겨내고 다급히 눈을 굴렸다. 그리고 마주했다.
“……?”
허리를 넘어 길게 흘러내린 은발의 머리카락.
피로 물든 옆구리.
모두가 할 말을 잃고 멈칫한 순간.
“잠깐…….”
다른 누구도 아닌 남태민이 입을 열었다.
작게 중얼거렸다.
짐승처럼 예민한 감각을 가진 바바리안이기에.
오직 남태민만이 알아차린 것이다.
“저건 내가 아는 총대장님. 아니, 호열 씨가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