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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71화 (371/489)

◈ 371화. 나쁘지 않은 그림이군

클라우디의 저택으로 플레이어들이 복귀한다.

경험치, 드롭율, 스킬 숙련도 버프…….

엄청난 버프와 함께 한 사냥의 성과는 어마어마했다.

“하루에 꽉 찬 1레벨 올려본 게 얼마 만이냐?”

“새끼들아. 나 유니크 아이템 먹었다!”

“나도 이제 숙련도 마스터라고!”

그러나 어마무시한 전리품보다 중요한 게 있었으니.

바로 도중에 떠올랐던 메시지였다.

그렇다, 그랑펠 클라우디…….

“……그다음이 뭐였지? 어쨌든!!”

심정 같아서는 당사자일 게 분명한 이호열에게 당장에라도 묻고 싶었다. 신화급 퀘스트가 대체 무엇인지를! 하지만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민감한 질문은 되도록 삼가는 게 상식.

마찬가지로.

대저택에 드러선 샤이닝.

카밀라가 앞장서는 드미트리에게 말을 건넸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아, 드미트리? 누구보다 사생활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너잖아. 플레이어 파파라치한테 탈탈 털려서는…….”

“그, 그거랑 이거는 명백하게 다르거든!”

훽─!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듯싶었지만.

드미트리는 이미 몸을 돌린 상태였다.

눈가가 촉촉한 걸로 봐선 아직도 실연의 아픔을 극복하지 못했구나.

지켜보던 플레이어들이 안타까움에 혀를 찰 정도였다.

드미트리가 애써 항변했다.

“물론, 플레이어적인 관점에선 실연의 아픔 같은 것보다 퀘스트 진척 상황이 훨씬 사적이지. 하지만 이호열이잖아? 우리들의 총대장님이시잖아?”

다른 플레이어라면 묻지 않았을 것이다.

대격변 이전에도 이후에도.

아르카나에서 정보는 퍼지지 않을수록 귀중했으니까.

그러한 정보를 숨기고자 하는 게 사람의 심리였으니까.

드미트리가 진짜 이유를 덧붙인다.

“보통 사람이 아니시잖아?!”

그러나 호열이었다.

일개 플레이어가 아닌 것은 물론.

때로는 인간을 초월한 듯한 면모를 보여주는 이호열.

물론, 고작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 호열은 성전 연합군의 총대장이었다.

드미트리가 정말로 결심한 듯 주먹을 쥐었다.

“나는 물어볼 거야. 성전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그 정도는 물어볼 수 있잖아? 대답할지 말지는 총대장에게 달린 거지. 신화 퀘스트에 관한 정보가 우리 연합군에 필요하다면 말이야.”

드미트리의 말에는 논리가 있었다. 지켜보는 이들은 드미트리가 성전 연합군에 나름대로 진지한 소속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정도로.

록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선 조금 곤란한데.”

“응? 뭐라고 했어, 록스?”

“아니야. 아무것도.”

힐끗.

“…….”

카밀라는 작게 웃는 록스의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오랫동안 살필 순 없었다.

걸걸한 드미트리의 목소리 탓일까.

모여든 이들이 있었다.

“뭐야, 남태민네 식구들이시잖아?”

“할 말이 있다, 드미트리.”

“뭐, 스카우트 제의인가? 거, 마음은 알겠어.”

아르카나 대륙.

첫 사냥에서 대다수의 플레이어들은 깨달았을 것이다. 든든한 탱커의 필요성을. 업데이트 내역이 적의 수준을 제공해주던 균열과는 다르다.

근육질의 어깨가 우쭐거린다.

“직접 몸을 맞부딪히면서 몬스터의 수준을 파악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걸 가능하게 해주는 건 탱커밖에 없으니까. 이 드미트리의 도움을 원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나는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사는…….”

“뭔 개소리냐, 드미트리?”

“엥? 아니었어? 스카우트 제의?”

현 거대 연합.

전 가온 소속 강은택은 한숨을 삼켰다.

미국인이 김칫국은 나보다도 잘 마시는군.

“남태민이 있는 우리에게 네가 필요할까?”

“뭐, 뭐, 뭣?!”

바바리안은 딜탱이다, 정통 탱커가 아니라고!

열정적으로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야 남태민은 규격 외인 이호열을 제외.

플레이어 랭킹 1위를 달성했으니까.

그도 모자라 강은택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보탰다.

“우리가 널 멈춰 세운 이유는 간단하다, 드미트리. 총대장님께 메시지에 떠오른 이름과 신화급 퀘스트에 대한 질문은 삼가는 게 좋을 거다.”

드미트리가 이번에는 제대로 발끈했다.

“뭐냐? 최측근으로 붙어 다니면서 이젠 대변인 역할도 하는 거냐? 하지만 글쎄? 그건 너희가 판단하는 게 아니라 총대장이 판단하는 거 아닐까?”

드미트리가 무시한 채.

강은택을 스쳐 지나가려던 순간이었다.

강은택이 한숨을 뱉고는 결국 자세한 이유를 말한다.

“후우. 너라면 알고 있을 텐데, 드미트리.”

“아까부터 뭘 안다는 거야, 내가?”

“개인사는 파고들어선 안 된다는 걸.”

……개인사?

그 말에 샤이닝을 비롯한 대립을 지켜보던 플레이어들의 이목이 쏠렸다. 강은택은 남태민의 말을 떠올렸다. 되도록이면 플레이어 모두에게 전하면 좋겠다고 하셨으니까.

강은택이 숨을 고르고는 말을 잇는다.

“그렇다. 그랑펠 클라우디…….”

참고로 이름은 너무 길어 얼버무렸다.

“……로미오. 어쨌든, 이하 그랑펠. 현재 총대장님께선 그랑펠의 신화 퀘스트 수행 메시지를 목격하신 뒤. 저택에서 악크샨 늑대를 소환. 그 행적을 좇아 자리를 비우신 상태이시다.”

“……!!!”

강은택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내용은 절대 담담하지 않았다.

그야 몇 마디에 생각지도 못한 정보가 담겨있었으니까. 막 저택에 도착하는 바람에 사정을 알지 못하던 플레이어들이 동요한다. 저택에 머무르던 플레이어들을 붙잡고 묻는다.

“저거 구라 아니에요?”

“저도 봤어요. 악크샨 늑대랑 이호열 총대장님이요!”

“저, 정말이요?”

이하 그랑펠과 이호열.

두 사람이 동일인이 아니었단 말인가?

드미트리는 꽤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곁에 있던 록스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아무래도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록스.”

“그래?”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집안이야, 이거?”

클라우디 가문의 저택을 올려다본다.

히든피스로 취급되는 영지부터 웬만한 왕궁을 능가하는 대저택까지.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다만, 이 정도일 줄이야.

허나 그 무엇보다 충격적인 건…….

“이호열 같은 존재가 하나 더 있단 거잖아?”

신화 퀘스트를 수행할 수 있는 자.

아르카나인과 현실을 통틀어도 이호열 뿐이라고 여겼거늘. 자신이 알지 못하는 영역이어서일까. 수다스러운 드미트리조차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플레이어들이 속삭이는 소리만 들려온다.

“확실히 개인사가 맞기는 하네.”

“그것도 가정사 비슷한 거 아닌가?”

“악크샨 늑대로 봐선 악마가 관련됐을 가능성…….”

하지만 충격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만한 충격이 어찌 오래가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그보다 더한 충격이 플레이어들을 강타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말한다.

“그보다 시간의 흐름이 빠르긴 하네. 아까만 해도 해가 중천에 떠있었는데. 벌써 깜깜해졌잖아?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게…….”

그쯤에서도 모두가 낌새를 알아차렸다.

어두워도 너무 어둡다.

이건 고작 해가 저물었다고 찾아올 수 있는 어둠이 아니라는 것을.

각자가 가까운 창문을 내다본다.

그러고는 기겁한다.

유달리 넓은 시야를 가진 카밀라가 말을 더듬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칠흑이 하늘을, 땅을, 떠다니는 공기마저 덮은 듯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아르카나 대륙과는 다르게 취급되는 히든피스이기에. 클라우디령에만 펼쳐진 현상이 아닐까.

플레이어들이 생각하던 찰나.

메시지가 떠올랐다.

[아르카나 대륙이 한없이 깊은 어둠에 휩싸입니다.]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때와는 달랐다.

한없이 깊은 어둠……!

그 이명에 관해서는 적어도 이곳.

클라우디령의 플레이어들은 알고 있었으니까.

잠자코 있던 드미트리가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이호열?”

*

분노는 스스로 되물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자신의 권능을 헤아려본다. 탐욕, 질투, 색욕은 지옥에 떨어졌다. 그들이 관장하던 악의는 갈 곳을 잃었다. 주인을 잃은 악의는 분노로 뒤바뀌어 자신의 힘이 되었다.

그로도 모자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같은 시각. 식탐과 나태에게도 위기가 찾아온 듯싶었다. 그들의 악의 역시도 치가 떨릴 정도의 분노로 치환되어 자신의 육신에 깃들었단 뜻이다.

그런 분노의 권능?

감히 장담할 수 있었다. 만물의 왕, 드래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수십이 떼로 달려든다고 할지라도. 그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것이 지금의 자신이다.

그러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없이 깊은 어둠.

흩날리는 은발의 머리칼.

저런 고작 인간 하나에게.

이 몸은 어찌하여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인가?

달과 별, 마안, 밤하늘마저도 어둠에 파묻혔다.

지상도 마찬가지다.

한 치 앞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암흑.

보이는 건 오직.

최후의 클라우디이자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뿐이었다.

‘무언가 이상…….’

급격하게 달라진 광경.

그 이유를 찾던 분노가 머리를 굴리던 순간이었다. 거역할 수 없는 압력이 분노를 짓눌렀다. 마력도 검술도 아니다. 그건 그저 음성이었다.

“꿇어라.”

“……!”

알아들을 수 없어도 느낄 수 있었다.

이건 명령이었다.

그것도 고압적인.

거악인 내게 고작 인간 따위가 명령을?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썼을 때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타 칠죄종의 권능을 흡수한 지금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오만한 말을 내뱉은 주둥아리를 찢어발겨 버리리라.

분노의 핏줄이 꿈틀거렸다.

……털썩!

그러나 들끓는 감정과는 무관했다. 무릎이 사내 앞에서 굴복한 것이었다. 분노는 판단이 빨랐다. 가장 강렬한 원죄답게 공포 앞에서도 기세가 누그러들지 않았다.

콰득!

분노의 양손이 하체로 향한다.

손아귀에 핏줄이 바짝 튀어 오른다.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나약한 두 다리가 뜯겨 나간다.

압도적인 권능에서 비롯될 재생 능력을 이용.

나약한 다리가 아닌 새로운 다리로 다시 일어서리라.

그러나 결단이 무색하게도 목소리가 이어진다.

“다리가 없다면 머리를 바닥에 조아려라.”

“……!”

한낱 인간의 음성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득하다. 역시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저절로 몸이 움직였다. 사내를 바라보던 분노의 머리가 그대로 바닥에 처박힌다.

쿵!

……머리를 자른다?

넘치는 육신의 재생력을 생각하면 그래도 된다. 다리가 자라나는 것처럼 머리도 새롭게 자라날 테니까. 그러나 분노는 알고 있었다. 중요한 건 육체 따위가 아니다. 내면이다.

덜덜덜─…….

분노는 생각하고 말았다.

머리를 자른다면 그다음엔 내게 어떤 명령이 떨어지는 것인가?

덕분에 자각하고 말았다.

누구보다 강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압도되는 이 상황을.

이 순간 분노의 시야엔 피로 젖은 양손이 보였다.

자신의 피가 아니다.

조금 전, 저 사내의 육체를 헤집었던 양손이었다.

그 감각이 선명해서일까.

분노는 이해가 되지 않아 물었다.

“……너는 누구냐?”

강함의 문제가 아니다.

순식간에 길게 자라난 머리칼을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내뿜는 기세부터가 다르다.

저 내면에 조금 전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인격이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침묵.

그에 관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또각.

처박은 머리 탓에 공포가 더욱 극대화된다.

점차 가까워지는 기척이 분노를 조급하게 했다.

분노가 한층 다급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말해주지 않겠다는 거냐? 그렇다면 내가 말해주마. 너는 악마와 다를 바 없는 존재다. 한 육신에 두 개의 정신이라니. 빙의와 다를 바 없는 꼴이지 않느냐!!”

악마와 다를 바 없다.

클라우디 가문과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

악마를 극도로 혐오할 수밖에 없는 출신을 가진 그에게.

더없는 모욕이리라.

그러나 들려오는 건 역시나 대답이 아니다.

또각.

분노는 자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노력으로 이 위기를 모면할 수 없다. 자신의 목숨은 자신이 쥐고 있는 게 아니라 저 사내가 쥐고 있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진심으로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냐?”

그럼에도 손끝에서 느껴졌던 뼈와 살을 헤집는 감각.

그것만큼은 착각이 아니었다.

사내는 분명 절체절명의 위기까지 몰렸다.

“어째서 만물을 업신여길 정도의 힘을 가진 네가 그런 육체에 갇혀있는 것이냐? 조금만 깊었더라면 그대로 심장이 터져 사망했을 것이다……!”

그제야 말이 들려왔다.

자신을 배려해 준 것인가.

이번에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대답은 아니다.

그건 일방적인 읊조림이었다.

“분노에는 상실이 동반된다.”

“……뭐?”

“소중한 것을 상실했을 때 분노는 더욱 커지는 법이니까.”

동시에 모독이었다.

“하지만 열등한 족속에게 소중한 것 따윈 없다. 그러니 네가 느끼는 감정은 분노가 아니다. 그저 무언가를 헤치고자 하는 저열한 충동에 불과하다.”

……저열한 충동?

분노께서?

이 몸이 고작 저열한 충동에 불과하단 뜻인가?

빠드득─!

분노가 이를 갈던 순간이었다.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너는 나를 분노케 했다.”

서걱─

숙이고 있던 머리가 그대로 잘려나가 하늘을 향했기에. 분노는 그제야 사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천적, 악마 사냥꾼에게 숨통이 끊긴 악마는 지옥에 떨어진다. 거악도 예외는 아니다.

피어오르는 지옥의 불, 그 열감을 느꼈다. 그러나 분노는 고통에 소리치지 않았다. 최후의 순간, 마주한 사내의 얼굴이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기에.

분노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태초에 태어나 영겁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오며 처음으로 인간에게 호기심이 생겼거늘. 안타깝구나, 너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지옥에 떨어진다는 게…….”

분노가 완전히 타들어 가자 사내, 그랑펠은 입을 열었다.

“더는 내게서 무엇도 앗아갈 수 없다.”

차갑기 그지없게.

“나의, 아니, 우리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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