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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68화 (368/489)

◈ 368화. 붓을 쥐다 (1)

또각.

웅장한 계단은 나를 생각에 잠기게 하기 충분했다.

-“……크, 크, 크, 클라우디?!”

신화 퀘스트에서 마주했던 오크, 울리취.

울리취가 나를 보고 경악한 이유는 간단했다.

-“우,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겁니까……!”

아무래도 내가 아닌 다른 클라우디에게 된통 당한 모양이었거든. 신화 퀘스트의 목적은 과거에 간섭하여 새로운 현실을 발현하는 것이다.

아득한 과거에 클라우디는 멸문당하지 않았으니, 다른 클라우디의 존재와 막대한 영향력은 야만스러운 오크조차 두려움에 떨게 하기에 충분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미 목숨마저 앗아가시지 않았습니까!!”

울리취의 반응은 내게 그 이상으로 익숙했다.

그건 경외가 아닌 공포였다. 악마 사냥꾼으로서 악마에게 질린 인간들을 봐왔고, 또 천적 앞에서 공포에 질린 악마들의 몰골을 지켜봐 온 나였다.

덕분에 냄새를 맡았다.

이건 클라우디 사전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클라우디는 다르다.

아르카나 대륙 최강의 무력 집단, 마탑과 비교해볼까?

설령 클라우디와 마탑이 아르카나 대륙에 미쳤던 영향력이 비슷하다 할지라도. 내가 아는 클라우디는 단순히 목적을 위해 타인을 헤치지 않는다.

그것이 오크라고 할지라도.

-“사실대로 전부 고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정말로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모르신단 말씀이십니까? 클라우디, 당신과 똑같은 은발 머리칼의 사내가……!”

울리취는 분노를 삼키고 내게 그동안의 일을 털어놓았다.

그건 수모에 가까웠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악마의 농락에 가까웠다.

-“동족들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나는 악마 사냥꾼으로서 확신할 수 있었다.

오크에게 접근한 클라우디, 그는 악마라고.

가장 먼저 떠오른 인물이라면 단연, ‘그날’ 클라우디령에서 마주했던 사내였다.

그깟 가주의 자리를 탐내 그랑펠을 증오한다고 선언했던, 클라우디를 멸문으로 몰고 갔던 그 사내.

그러나 앞뒤가 맞질 않았다.

사내가 타락하게 된 데에는.

그랑펠이 차기 가주로 선택되었다는 확실한 계기가 존재했다.

‘신화 퀘스트의 시간선보다 미래의 일이란 뜻이다.’

복잡하게 꼬여갈 수 있었던 생각을 정리해 준 건 역시나 경험이었다.

그래, 마르셀로의 시한부를 해결하기 위해 밟았던 아르카나 대륙. 그곳에서 마주했던 시무아르드 가문의 저주.

‘……율라 시무아르드.’

시무아르드를 사칭하며 가문을 시한부의 저주로 집어삼켰던 악마.

그런 영악한 악마가 율라 하나뿐이었을까?

만약, 클라우디에도 율라 같은 악마가 존재했다고 가정한다면?

이야기는 맞아떨어진다.

그 악마가 클라우디의 핏줄에게 명맥을 이어 사내에게 내리 빙의한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말이야. 그렇다면 역시나 납득이 된다.

천하의 그랑펠이 어째서, 자신의 가문을 파멸로 몰고 간 사내 앞에서 무기력했는지도.

위대한 클라우디 가문이 오래전부터 악마에게 좀먹어가고 있었다니, 그건 차기 가주였던 그랑펠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었을 테니까.

그러나 중요한 건 내가, 이호열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단 것이다. 그렇다. 어떤 잔혹사라고 할지라도 그게 클라우디 가문의 일이라면 내게는 흑역사에 불과하거든……!

무엇보다 충분히 있을 법한 설정이군.

중2병, 가문의 비밀, 비운의 주인공…….

그런 거에 환장해도 이상하지 않았거든.

‘그 시절의 나란 놈의 취향은…….’

어둠의 이해를 통해서든, 최상위 시공간 의뢰를 통해서든.

그 잔혹사 또한 바꿀 수 있는 지금의 나였다. 때문에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울리취, 오크에게 내려진 클라우디의 명령을 파기하고 이름 모를 클라우디이자 악마가 행한 만행을 바로잡았다.

-“제가 감히 이름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감격한 울리취는 그렇게 물어왔다.

그래서 당당히 대답했다.

나는 이호열이라고.

그랬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것이다.

-“이호열 클라우디……!”

……너희 참 편견이 없구나?

이름이 해괴망측하다거나.

뭐, 그런 관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모양인가 봐?!

[퀘스트를 성공하셨습니다.]

[종족, 오크와의 관계도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종족, 오크에 대한 영향력이 대폭 상승했습니다.]

[종족, 오크의 상태가 변화합니다.]

첫 번째 신화 퀘스트는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울리취와의 만남으로 상승한 관계도와 영향력.

지금에는 어떤 변화를 이끌어낼지 아직 알 수 없었다만…….

째각─

귓가에 들려오는 초침 소리에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다시금, 시공간의 사교장 최상층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고.

그러니까 잊지 않고 물었다.

나한테도 이름을 물었다면.

클라우디를 자처하는 악마에게도 이름을 물었을 터.

나의 물음에 울리취는 그렇게 답했다.

-“프라이드, 그는 분명 그렇게 말했었습니다.”

프라이드(Pride).

거기서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클라우디 가문 내부에 마수를 뻗칠 정도로 간 큰 녀석?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는 악마.

악마 주제에 거대함을 자처하는 ‘거악’밖에 없겠지.

그렇기에 내뱉었다.

-“그렇지 않은가. 거악 칠죄종 오만이여.”

과거였다면 광활한 아르카나 대륙에서 어떻게 거악을 찾느냐고 징징거렸겠지만, 이젠 아니다. 화르륵─! 지옥의 불을 휘감고 나타난 악크샨의 수호령, 템페스트.

‘……그래도 너는 이름이 아깝지 않아서 다행이다.’

휘황찬란한 이름에 걸맞은, 악크샨의 얼굴마담다운 외관.

템페스트는 나의 손에 머리를 비벼왔다.

나는 그런 템페스트를 적당히 쓰다듬어 줬다.

의복에 털이 묻지 않는 선에서…….

‘그나저나 한숨 돌렸다.’

얼마든지 묻기는 뭘 얼마든지 물어, 진짜로……!!

고민하던 내 표정이 꽤 심각했던 모양인가.

아니면 엿들었기에.

스스로들 질문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건가.

“……꿀꺽.”

다들 마른침만 삼킬 뿐.

저택의 누구도 내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무사히 저택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앞으로도 문제겠지만 어쨌든.’

그러고는 곧장 여명의 재킷을 장식한 보석.

그중 두 개를 떼어내서 템페스트에게 내밀었다.

진짜 보석은 아니다.

[중립의 기생생물 엔비(Envy)]

[중립의 기생생물 러스트(Lust)]

칠죄종.

세트 아이템에서 알 수 있듯.

놈들은 태초의 악에서 비롯된 형제 같은 존재들이었다.

당연하게도 풍기는 냄새가 엇비슷하지 않겠어?

킁킁─!

나는 질투와 색욕이 남긴 냄새로 오만을 추적할 생각이었다.

물론, 다른 칠죄종도 마찬가지다.

마주치게 된다면 망설임 없이 사냥해야만 한다.

‘상위 마왕은 몰라도 거악쯤이야.’

현실에서 더더욱 강성해지는 악마들이다.

나는 그런 현실에서 거악을 탐욕까지 합쳐 셋이나 사냥했거든.

남은 건 넷으로 더 많았지만, 나의 태도엔 변함이 없었다.

다시금 가다듬는 옷매무새.

두 보석을 재킷에 올려놓은 나는 입을 열었다.

템페스트에게 명했다.

“이 시간부로 얼마든지 울부짖어도 좋다, 템페스트.”

아우우우우!!

템페스트는 곧장 하울링으로 화답했다.

말 그대로 천적의 울음소리.

대륙의 악마들은 공포에 떨 수밖에 없을 터. 누군가는 물으리라. 이렇게 요란하게 움직여서는 거악들이 알아차리고 어디로든 숨어드는 것 아니냐고. 뭐, 틀린 말은 아니다.

‘숨는 게 뭐냐.’

온갖 개수작을 다 부리겠지.

내 시선을 분산시키려고 난장판을 피울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히 그러겠지. 성장하는 악마족 몬스터의 특성을 고려하면 거악은 아르카나 대륙을 웬만한 인간보다 능숙하게 주무를 테니까.

그걸 알면서도.

이렇게 광고하며 대륙을 내달리는 이유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그럼에도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놈의 긍지 때문이었다.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라도.

“눈치를 보는 건 사냥감이지, 사냥꾼이 아니다.”

악크샨의 똥고집 때문이겠지, 뭐.

그런 의미에서 템페스트는 아주 충직하게 말을 잘 들었다.

어찌나 우렁차게 울어댔는지.

아주 그냥 전설이 요동치고 있었거든……!

[아르카나 대륙에 ‘신시대의 영웅, 악크샨 전설’이 더욱더 널리 울려 퍼집니다.]

전설 또한 내가 파놓은 우물 중 하나.

그 우물이 채워지고 있었지만,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악크샨이 돌아왔다는 소문이 아르카나 대륙에 퍼지게 된다?

그 과대평가를 실현하기 위해서.

나는 또 한 번 짐을 짊어지게 될 수밖에 없을 터.

탄식이 저절로 삼켜진다.

‘악크샨 지도자, 그 헛소문도 실현하게 생겼군.’

낙하산 탑주로 선출될 위기를 넘겼더니, 이젠 악크샨이냐?

당장 템페스트의 입을 다물게 하고 싶었거늘.

한번 내린 명령을 그런 치졸한 이유로 무를 순 없었으니.

아우우우우─!

……덕분에 귀가 심히 간지럽구나, 템페스트.

*

거악.

태초의 악에서 태어난 일곱의 형제들.

순수한 악에게 우애란 존재하지 않는다.

탐욕의 어리석은 최후에는 모두가 조소를 뱉었으니.

그러나 지옥에 떨어진 형제가 하나가 둘이 되고, 셋이 되었다.

일곱 중 셋을 지옥으로 보낸 악마 사냥꾼이.

클라우디라는 끔찍한 사실마저 알게 되었다.

잘근잘근─

칠죄종 식탐은 자신의 손톱을 물어뜯었다. 어찌나 격하게 물어뜯었는지 열 손가락은 이미 피로 물든 상태. 쉴 새 없이 입을 놀려도 극도의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문득.

아우우우─……!

“……!”

귓가에 울리는 맹수의 울음소리.

식탐은 자신이 인간에게 빙의했고, 작은 마을 여관에 숨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채. 템페스트의 하울링에 공포에 떨었다. 그것도 모자라서는 주인장에게 쏘아붙였다.

“못 들었어? 저 울음소리가 안 들리냐고!!”

“뭐라고? 이보쇼. 취했으면 엎어져 잠이나 자쇼.”

“……!”

까득까득─

손톱은 이미 조금도 남지 않았다. 살점마저 뜯겨나가고 이제부터는 뼈가 부딪히는 소리만이 식탐의 입가에서 들려왔다.

식탐은 미식가의 체면도 잊어버리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카니발리즘밖에 없다.”

천적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선. 자신의 냄새를 피하기 위해선 피를 흩뿌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식탐은 알고 있었다. 공포에 떠는 건 비단 자신만이 아니리라는 것을.

‘설령 잡종들은 이 공포를 알지 못할지라도.’

나의 핏줄들, 칠죄종은 나와 같은 공포에 떨고 있을 터.

형제이자 자신이기에 알 수 있었다.

그들 또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천적의 추적을 회피하겠지.

“합을 맞춰보자고 빌어먹을 형제들이여.”

뚝뚝.

식탐이 양손을 흐느적거리며 여관 밖으로 나섰다.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피.

여관주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든다.

“저, 저, 저 미친놈 뭐야?!”

여관주인이 역정을 내며 뒤쫓아 나왔지만, 식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의 권능, 카니발리즘을 시작할 뿐. 식탐의 입에서 음산한 말이 튀어나온다.

“먹고 먹어라. 살아남는 자는 피와 살점을 취할 것이요. 나의 권능을 잇게 되리라. 먹고 먹어라. 무한하게 갈망하며, 무한하게 먹어치워라. 최후엔 세상을 먹어치우리라. 서로를 먹고 먹어라. 삼킬 게 없다면 자신의 살점이라도 뜯어 먹어라.”

스멀스멀.

식탐에게서는 걷잡을 수 없는 부정적인 기운이 흘러나왔다.

뛰쳐나온 여관주인의 눈에 노기가 사라진다.

아니, 생기가 사라진다.

여관주인의 입에서 허망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먹고, 먹어라…….”

명백한 상태이상.

여관주인만 빠진 게 아니었다.

작은 마을, 고작 수백 남짓한 인간들이 식탐의 주위로 몰려든다.

입가에 침을 질질 흘려가면서.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군침을 삼켜가면서.

식탐은 마지막으로 읊조렸다.

“이 작은 마을의 축제가 대륙을 뒤흔들지니……!”

그러나 비로소 막이 오른 축제의 여흥을 깨는 존재가 있었다. 초점이 사라지기는커녕 마을에 드리운 어둠 속에서 더욱 형형하게 빛을 발하는 붉은 안광.

“뭐야, 축제인가?”

저들에게서 부정적인 감정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붉은 눈으로 마을을 살필 뿐.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에게 부하가 보고한다.

“누가 봐도 축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 하긴 그럴 상황이 아니긴 하지, 지금 대륙은.”

이윽고, 사내의 시선이 식탐을 향한다.

식탐은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영겁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왔다고 해도 아르카나 대륙은 광활하다. 모든 세력을 알 수 없다. 더욱이 그들이 너무나도 강대했기에 존재감을 드러낼 수 없었던 세력들이라면.

거물.

붉은 눈의 일족, 듄.

그 우두머리 샤힌 듄이 식탐을 바라보며 웃는다.

“그렇다면 장례식인가 보군!”

식탐은 되뇜을 멈춘 채 샤힌 듄을 바라봤다.

비범함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비범하다고 한들, 인간이었다.

식탐이 샤힌 듄에게 내뱉는다.

“이해가 느리구나. 이름 모를 자여.”

이 몸의 접대를.

카니발리즘을.

미식을 이해하지 못하다니.

지금도 귓가엔 천적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방해꾼은 빠르게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식탐이 샤힌 듄과 붉은 눈의 일족을 굴복시키려던 순간이었다.

스릉!

샤힌 듄이 유려하게 휘어진 곡도를 치켜들었다.

“이해가 느리다, 누가 할 소리인지 모르겠군.”

“……뭐라?”

“제 장례식을 어찌 본인이 알아차리지 못한단 말인가?”

“……!!”

이어지는 샤힌 듄의 말.

그 말은 식탐을 얼어붙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렇다.

“역시, 클라우디의 말씀대로 악마란 우둔하기 짝이 없군.”

“……클라우디?”

“그분의 이름을 추악한 입에 담지 마라.”

그림은 이미 그려지고 있었으니까.

거악조차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광활한 큰 그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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