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6화. 귀가 가려울지라도 (2)
[시공간의 사교장 최상층에 진입하셨습니다.]
최상층.
풍경은 뭐랄까.
기이했다.
‘……여기선 그 [『기이』]가 아니라.’
기괴를 뜻하는 기이다. 대다수 초월자가 머무르는 사교장 하층. 그리고 4가문을 비롯한 극소수에게만 허락된 상층과는 첫인상부터가 다르다.
그래도 사교장이라는 이름값을 했던 아래층들과 다르게 최상층의 풍경은 메시지가 떠오르지 않았다면 도저히 사교장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였거든.
마치 균열.
그것도 난잡하기 짝이 없는 균열을 보는 것 같았다. 균열이 아르카나 대륙과 현실, 완전히 다른 두 세계가 공존하는 장소라면…….
‘여긴 약간 누더기 같은데.’
셀 수 없이 많은 세계가 뒤섞인 듯한 모습.
그러니까 하나하나 뜯어보면 화려한 사교장의 모습이 보였지만.
덕지덕지 모아놓고 보니까 이해하기 난해한 현대 미술 같았달까.
오죽했으면.
“무엇이든 과유불급이거늘.”
그랑펠의 심미안도 싸늘한 평가를 내놓았을까.
그중에서도 압권은 뒤섞인 풍경만큼 수많은 시계였다.
생김새는 가지각색이었는데, 확실한 건 시계의 초침들이 가리키는 시각이 전부 제각각이라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일단, 이 해괴망측한 장소에서도.
사교장 시스템이 유효한지부터 살펴볼까?
나는 인벤토리에서 금화 한 닢을 꺼냈다.
[시공간의 금화]
[등급 : 에픽]
[제한 : 초월자]
[효과 : 시공간에서 화폐로 사용 가능.]
[설명 : 초월자의 영역, 시공간에서 통용되는 금화.]
그러고는 주문했다.
“녹차로 하겠다.”
현실이 아닌 아르카나 대륙의 초월자들이 모이는 시공간이다.
첫 방문 때 투덜거렸던 것처럼 녹차 따위는 존재할 수 없는 환경이라는 것. 그러나 이윽고, 손가락 사이에 끼운 금화가 증발하더니.
[금화 1개를 지불하셨습니다.]
모락모락.
내 손에는 어느샌가 녹차가 담긴 찻잔을 쥐어져 있었다. 거기에서 확신했다. 시공간의 사교장 최상층. 역시 보통 장소가 아니구나 하고는.
“음.”
녹차를 목구멍으로 삼켜 넘기자 머리가 더욱 빠르고, 영민하게 굴러가는 착각이 든다. 이래서야 아메리카노에 중독된 직장인과 다를 게 없군.
그래도 덕분에 상황파악이 되었다.
아무래도 이 최상층…….
‘시간대가 뒤섞여 있는 것 같아.’
그걸 넘어서 완전히 다른 세계들이 뒤섞여 있을 가능성 또한 충분했다. 아래층과 다르게 녹차가 주문 가능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
“나쁘지 않군.”
그것도 티백 녹차가 아니면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내는 그랑펠의 까다로운 입맛에 맞는 녹차가 튀어나온다는 것만 봐도 말이야. 불현 듯 추측 하나가 떠오른다.
‘……이거 혹시?’
아래층과 다르게 메뉴판이 없는 이유.
웬만한 게 전부 금화로 구매가 가능해서가 아닐까?
깨닫는 순간, 가슴속에 세속적인 물욕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야 시공간의 사교장에서 주문 가능한 음식들은.
하나같이 사기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냥 생수만 해도 그렇다.
‘누가 생수를 금화로 사 먹느냐고 하겠지만.’
시공간의 사교장의 생수는 상급 엘릭서와 다를 바 없는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생수가 그 정도인데, 음식들의 효과는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 허구한 날, 사교장 상층에서 연회를 벌이던 4가문의 가주들이 괜히 대륙을 호령하던 게 아니다.
‘그럼 영약 같은 것도 주문 가능한 거 아냐?!’
영약.
비약초가 정령의 축복이나 엘프의 보살핌이 없이 자라나려면 천 년으로도 부족할지 모른다. 그러나 뭐든 주문할 수 있다면, 그 귀한 영약도 주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소모품에 한정되어 있으리란 법도 없어.’
심정 같아서는 남은 금화 99닢으로 갖가지 실험을 해보고 싶었다. 허나, 간과해서는 안 된다. 부의 끝을 맛보았기에. 진귀한 금은보화 앞에서도 태연하실 수 있는 그랑펠 님의 청렴결백을……!
달칵─
찻잔을 내려놓으며 읊조린다.
“오늘은 이것으로 족하다.”
……네네, 아주 그냥 변함없으십니다.
그랑펠이 달아오른 흥에 찬물.
아니, 녹찻물을 끼얹어준 덕분에 정신이 돌아왔다. 오늘만 최상층에 들를 수 있는 게 아니다. 단순히 확인을 위해 충동 소비하는 건 좋지 않겠지.
‘뭣보다 어떻게 번 금화인데.’
시공간의 결투.
무려 아르카나 대륙의 검성, 셰그윈에게 승리를 쟁취.
‘……따지자면 귀철이 이긴 거긴 한데, 어쨌든.’
습득했던 일백 개의 금화였단 말이다.
새로운 금화의 사용처도 알게 되었겠다.
그렇다면 이젠 금화도 부지런하게 벌어둘 필요가 있으리라.
무엇보다 고양이가 생선 가게의 존재를 알게 된 셈.
“나의 선택을 기억해 두도록.”
이 녹차 중독자님께서는.
늘 같은 걸로 주문하실 테니까.
보자, 앞으로 녹차에 소비할 금화를 고려하면…….
‘서둘러 확인해 봐야겠는데.’
이제부터 수행할 수 있다는 최상위 시공간 퀘스트를.
물론, 시공간 임무의 존재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도저히 수행할 시간이 나지 않았었다.
그러나 더는 미룰 수 없다.
주제 파악을 하게 됐잖냐?
나름대로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겨우 상위 마왕들과 말이 통할 수준에 올라섰다는 사실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발버둥 쳐야 한다.’
그래서 최상위 시공간 퀘스트는 어떻게 수행하는 거냐?
아니, 애초에.
시공간의 의뢰는 어떻게 받게 되는 시스템인데?
나의 입에서 의문이 튀어나온다.
“의뢰를 수행해주겠다.”
물론, 언제나 갑인 그랑펠식 화법으로.
그러자 그 즉시.
사교장 최상층에 변화가 찾아왔다.
째깍째깍─
수많은 시계의 초침들이 정방향으로.
혹은 역방향으로 회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단 하나의 시계만이 움직임을 멈춘다.
째……깍─
다가가자 시계의 배경이 급속도로 확장되기 시작한다.
시야를 뒤덮는 배경.
떠오르는 메시지.
[신화 퀘스트 : 거슬러 오르다]
“!”
급격하게 뒤바뀌어 가는 풍경 탓.
내용은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달랑 한 줄로도 충분했다.
[신화]급 퀘스트라니. 이건 또 무슨 퀘스트야……?
아르카나의 상식을 뛰어넘는 등급이었다.
아르카나 시스템에서 최상위 퀘스트라 평가받는 건 [월드]급 퀘스트였다. 물론, 나는 [메인]급 퀘스트, [전국시대] 또한 수행 중이긴 했다만……. 월드와 메인, 둘 사이에서 우열을 가릴 순 없었으니까.
그런데, 신화란다.
거창한 이름만 봐도 직감할 수 있었다.
‘이거 보통 퀘스트가 아니다.’
그런 나의 추측을 증명하듯.
메시지가 떠오른다.
예고도 없이.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가 신화 퀘스트를 시작합니다.]
나의 부끄러운 풀네임이……!
월드 퀘스트만 하더라도.
같은 세계에 있는 이들에게 쩌렁쩌렁 이름을 울려 퍼지게 했거늘.
그보다 더한 신화급이었다.
심지어 현재 아르카나 대륙엔 나만 있는 게 아니었으니.
만천하에 떠올랐겠구나.
다른 플레이어들에게도 이 빌어먹을 메시지가……!
‘레이먼 션, 개자식.’
나는 속으로 곱씹고는 심호흡했다.
뜻하지 않게 벅찬 가슴을 가다듬고는 뒤바뀌는 시야에 집중했다.
처음으로 수행하는 최상위 시공간의 퀘스트이자 [신화] 퀘스트였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 방심해서는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항상심은 내겐 더없이 든든한 믿을 구석.
“…….”
덕분에 언제나와 같은 무표정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크, 크, 크, 클라우디?!”
나와 마주하고는 숨이 멎을 듯 놀라는 오크와.
*
키치는 하품을 뱉었다.
“솔직히 관심 없거든? 네 구구절절한 사연.”
“뭣?”
울리취는 섭섭한 표정을 지었지만, 알 바란 말인가? 그나마 지금까지 잠자코 듣고 있던 것도 순전 클라우디가 관련된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의미심장하게 말하더니 무슨 소리를 하나 했네.”
오크 옥션의 지배인이자 오크 족장.
울리취는 그렇게 말했다.
-“판도라의 다락방에서 미래를 예견하는 대현자 라이즈. 난 그 다락방의 창틈으로 그분의 최후를 목격했단 말일세……!!”
자신의 눈으로 분명 호열의 최후를 목격했었다고.
키치는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마주한 클라우디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러나 마냥 간과할 수는 없었다.
완전히 다른 두 세계.
아르카나 대륙과 모험가들의 세계를 모두 경험한 키치였으니까.
‘클라우디면서 모험가일 순 없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호열이 사실은 모험가들의 세계에서 태어난 게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품기도 했었다. 왜, 첫 만남 때부터 지금껏. 모험가보다는 아르카나인에 가까운 행보를 보여주던 호열이었으니까.
키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는 그 세계에 확실히 존재해 왔다.’
하지만 모험가가 아니고서야 알 수 없는 정보들을 호열은 완벽히 숙지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그 모험가들의 세계에 엄연히 피를 나눈 혈육들이 살아있었다.
키치의 시선이 테이블 위의 은빛 머리카락을 향했다.
‘……클라우디와는 다르게.’
젠장, 고뇌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복잡해지는 머릿속.
키치의 반응에 울리취는 혀를 찼다.
“역시, 내 말을 믿지 못하는 모양이군.”
그런 키치의 태도에 울리취는 결심했다.
아무래도 오크와 클라우디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를 상세히 말해줘야 하겠다고.
“키치, 오크에 관해 알고 있나?”
“뭐? 잘 알고 있지. 일단, 얼굴이 뭉개졌다는 것부터.”
“……못 들은 걸로 하지.”
“갑자기 뭔데, 폼을 잡고 그래?”
“우리의 본성에 관해서다. 그림자 용병단이라면 의뢰를 통해서도 몇 번 마주했으리라고 생각하는데? 문명화되지 못한 나의 동족들과 말이야.”
오크와 관련된 외뢰라.
단장답게 많은 의뢰를 수행해 온 키치였다. 의뢰가 끝나면 술에 만취해 정신을 잃는 것이 하루의 일과. 덕분에 온전히 기억이 나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그 괴물들을.”
문명을 거부한 야만의 오크.
그들과 마주했던 기억은 뇌리에 인상 깊게 새겨져 있었다.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근육에서 뿜어져 나오는 폭발적인 괴력. 그 괴력에 꽤 애를 먹었었거든.
서서히 떠오르는 잔상에 키치는 혀를 내둘렀다.
“물론, 그만큼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인지. 조금만 머리를 써가면서 상대해도 쓰러트릴 수 있었지만. 그래서 갑자기 동족 얘기는 왜 꺼내는 거야? 이제 와서 핏줄이 당기기라도 하는 거야?”
울리취는 썩은 미소를 흘렸다.
“풉! 동족? 뭉개진 얼굴이라는 모욕은 참을 수 있어도 그 비이성적인 놈들과 같은 취급은 불쾌하군, 키치. 놈들은 아직도 무지하기 짝이 없거든. 요즘 세상에 약육강식이라니.”
“……네가 할 말 맞아, 그거?”
오크 옥션.
뒷세계의 거상인 만큼 양지에선 구할 수 없는 물건들이 즐비하다. 가격대가 높게 형성되어 있는 건 당연하다만. 특히 인간 상대로 바가지를 씌우기로 악명이 자자한 울리취의 입에서 저딴 말이 튀어나오다니.
키치가 손가락을 접어가며 말을 이었다.
“보자, 대충 들은 소문만 읊어볼까? 치솟는 경매가에 눈이 돌아간 인간한테 말도 안 되는 금리로 금화를 빌려주질 않나. 오크 옥션 창고에 잔뜩 쌓아둔 물건을, 다시는 오지 않는 기회라고 거품을 잔뜩 부풀려 판매하질 않나. 또…….”
“크흠, 긍지롭지 못한 음해로군. 어디서 들었나, 그런 말은?”
툭─
울리취는 화제가 달갑지 않은지 서둘러 키치 앞에 책 한 권을 꺼내놓았다. 그 제목을 살펴볼 법도 했지만, 책과는 영 거리가 먼 키치였다.
울리취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곧장 설명했다.
“이번에는 부디 외면하지 말게, 키치. 오크 옥션의 초대 울리취가 남기신 회고문이니까. 클라우디와의 만남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나도 몇 번씩 정독했었으니.”
“허?”
믿지 못한다고 하니까.
이젠 증거까지 들이미는 거야?
키치가 어이가 없어 울리취에게 따가운 시선을 보냈지만.
울리취는 아랑곳하지 않고 뻔뻔하게 책을 펼쳤다.
“물론, 최근에는 일이 바빠서 펼쳐볼 시간이 없었지만. 말했다시피 다이아몬드 상단, 가필드. 그 인간 녀석이 워낙 심기를 거스르게 해서 말일세. 그래, 보자……. 여기서부터 시작이로군.”
슥─
키치는 여전히 관심이 쥐뿔도 없어 보였지만.
울리취는 꿋꿋하게 두꺼운 손가락으로 글씨를 훑어나갔다.
“……?”
그런데 어째서인가.
울리취의 안색이 급격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덜덜덜─
마치 보아서는 안 될 걸 본 오크처럼.
울리취가 사색이 되어선 입을 연다.
“……키치, 아까 뭐라고 했었지?”
“뭐, 너희 못생겼다고 한 거?”
“아니!”
울리취가 격앙된 목소리로 되묻는다.
“모험가들의 세계에서 클라우디의 이름 말이다……!”
키치는 뭔가 싶으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이름? 이호열이라고…….”
키치의 대답에 울리취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야 울리취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는.
똑똑히 적혀있었기 때문이었다.
『클라우디의 가주, 이호열 클라우디.』
그 시절.
단순히 특이하구나.
하고 넘겼던 클라우디 가주의 이름이.
울리취가 탄식을 내뱉는다.
“그, 그 이름이 어떻게 아득한 과거에? 그렇다면 그랑펠 님을 사칭하는 그 모험가가, 아득한 과거부터 존재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지금의 그랑펠님은 대체……? 대체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
신화급 퀘스트.
그 영향력을 한 단어로 설명하자면 간단했다.
시공간을 뛰어넘어서 ‘과거’를 뒤바꿀 수 있다.
익숙한 마법의 비유해 설명해 볼까?
그렇다.
과거에 간섭해서.
새로운 현실을 발현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내 이름은 이호열이다.”
나는 감격하는 오크를 바라보며 절규했다.
“이호열 클라우디……! 똑똑히 기억하겠습니다!”
제발 내 이름 앞뒤로 성을 붙이지 말아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