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5화. 귀가 가려울지라도 (1)
하이엘과 디엔드가 상황을 보고해 온다.
“우주의 정령들에게 주군의 명을 전달했습니다. 천하통일, 그들은 우주의 정령들이 비틀어 놓은 인과율의 수혜를 입지 못할 것입니다.”
우주의 정령에서 시작된 버프.
그 효과는 무려 아이템 드롭율 50퍼센트 상승. 하지만 너는 이런 사기적인 버프가 존재하는지도 모르겠지, 류오쥔춘? 적이기 전에 같은 플레이어로서 동정심이 들 정도.
하지만 그조차도 시작에 불과하다.
‘하나도 남김없이 박탈이니까.’
얼마나 원대한 꿈을 품고 건국을 선포하고 아르카나 대륙을 밟은 건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넌 명백히 실수했다, 류오쥔춘. 나를 따라잡기는 개뿔, 이제부턴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실시간으로 뒤처질 테니까.
나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숨통을 조이면 본색을 드러내는 법.”
언제쯤 그 사실을 깨닫게 되려나?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차이를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다시 개수작을 부리리란 것이었다. 클래스, [폭군]이 격차를 좁힐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고개를 내민 그 순간이 절멸의 순간일 것이다.”
광활한 아르카나 대륙에서 류오쥔춘을 찾으러 간다는 건 어불성설.
천천히 숨통을 조이면 알아서 모습을 드러낼 터.
그때까지는 내 할 일에 집중하는 게 최선이겠지.
“다음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주군.”
당연한 이야기지만, 류오쥔춘은 나의 관심사에서 주가 아니었다. 이번 경험으로 깨달았거든. 그랑펠은 악마를 업신여길지라도 나, 이호열은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상위 마왕, 부에르.
놈은 서열 10위의 상위 마왕이었다.
거악 칠죄종 색욕이 자신의 목숨을 제물로 바쳤거늘.
목소리밖에 불러내지 못했을 정도로 엄청난 체급을 가진 존재.
그런 부에르는 내게 똑똑히 말했었다.
-환영하마, 천외천(天外天)의 영역에 발을 들인 것을.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나는 이제야.
상위 마왕과 말을 섞을 수 있을 수준이 되었다는 것.
‘아는 만큼 보인다고…….’
과거, 쥐뿔도 없던 시절에 상위 마왕의 강함을 짐작하던 때가 떠오른다. 상위 마왕이니까. 그래도 드래곤보다 강하지 않을까, 어림으로 짐작했었다는 거지.
‘말도 안 되는 견적이었어.’
그러나 지켜봤기에 납득이 가는 강함이었다.
아르카나 대륙보다도 강성했던 세오른 대륙을 고작 팔 하나로 멸망시킨 바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지옥에 떨어진 가미긴만 봐도 그렇다.
‘다른 분들도 아니고 지옥의 선배님들이시다.’
지옥에 떨어진 이후.
쉴 새 없이 악마를 사냥해온 악크샨 악마 사냥꾼들일 터.
그런 선배님들이 가미긴의 네 다리에 잔뜩 달라붙었던 걸로도 모자라, 내가 발현한 [『기이』]에, 지옥의 문이 열린 특수한 상황까지 겹쳐서야 굴복시킬 수 있었던 가미긴이었다.
감히 그 레벨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
드래곤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말 그대로 하늘 위의 하늘.
천외천의 존재가 바로 상위 마왕이란 뜻이었다.
‘마냥 좋아할 수도 없어.’
그런 상위 마왕과 말이 통할 정도가 되었다는 건 기뻐할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막막했다. 대체 얼마나 더 강해져야 온전히 내 힘으로 쓰러트릴 수 있다는 걸까?
“이로써 보고를 마치겠습니다.”
하이엘에 이어 디엔드까지 이야기를 마치고 나서야 나는 결단을 내렸다. 그래, 앞으로 어떻게 발버둥을 쳐야 상위 마왕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 알 순 없다만…….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자.’
부지런히 파놓은 살 구멍들.
덕분에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는 건 나름대로 위안이었다. 그랑펠의 꽃밭 같은 마인드로 착실하게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 다다를 수 있지 않겠냐?
-후후, 시해자이기에 간과할 수 없는 반응이로군.
천적인 나를 보고도.
여유롭게 농담을 던지던 악마조차도.
언젠가는 허세가 아니라 진짜 사냥감으로 여기게 될 터.
이젠 파놓은 구멍들을 하나씩 채워나갈 시간이다.
“디엔드, 네겐 탐색을 맡기겠다.”
보자, 그럼 먼저 챙길 것부터 챙겨야겠지?
나는 디엔드에게 텔레파시로 좌표를 전달했다. 그 좌표는 총 넷으로, 그랑펠의 비상한 머리 덕분에 아직도 그 좌표들이 기억 속에 선명했다.
[육망성 브로치 2/6]
세트 아이템, 육망성 브로치.
브로치 조각의 위치들을 마왕의 전리품, [만물과 통하는 지도]로 알아놨던 나였다. 다만, 그동안은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의 괴리 때문에 찾을 수 없었을 뿐.
‘우연이 겹쳐 런던 던전에서 하나를 찾긴 했었지만.’
고작 두 개로 끝.
하지만 아르카나 대륙에 드나들게 된 지금.
육망성 브로치를 완성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유낙서스의 유산 [드래곤 스킨]으로 제작 중인 장비도 잊어선 안 되겠지. 그 무게를 알고 있기에. 드워프 최고 대장장이인 월스와일도 심혈을 기울여서 제작하고 있는 모양이었으니까.
‘시간을 가지고 기다려 보자고.’
뻔뻔하긴 해도 양심은 있는 나였다.
‘사실 장비는 이미 차고 넘치지.’
멀리갈 것도 없이 귀철만 하더라도 나는 아직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챙길 건 챙기면서도 근본적인 성장을 잊어선 안 된다, 호열아.
플레이어들이 아르카나 대륙으로 향한 것처럼.
나도 나의 방식대로.
나의 수준에 맞게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확인해 볼 건 역시나.
변화했다던 [시공간의 사교장]에 진입해 보는 거겠지.
사교장 상층을 넘어 최상층 출입 권한을 획득했다.
동시에 최상위 시공간 퀘스트까지 수행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나는 중얼거렸다.
“내키진 않지만, 최상층조차 나를 원한다면 별수 없겠군.”
……사교를 즐기지 않는다는 설정도 여전히 한결같군.
어쨌든 하이엘과 디엔드가 물러가고 나서야 나는 스킬, 시공간의 사교장을 발동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클라우디령의 경치. 이윽고, 시야가 지나치게 밝아지더니 눈앞에 시공간의 사교장이 펼쳐졌다.
이게 바로 최상층의 경지인가?
또각─
발을 내디딘 내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
현재의 아르카나 대륙.
대격변 이전.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에 비교할 순 없다.
“와씨, 하늘에 저 눈동자 뭐냐?”
“마안(魔眼)이라고 하던데? 저게 악마들의 인공위성 같은 존재라고 하더라. 그나저나 끔찍하지 않냐? 달 크기의 살아있는 눈동자가 우릴 지켜보고 있다는 거잖아.”
“다들 그거 신경 쓸 시간에 움직이는 게 좀 어때?!”
악마족 몬스터.
“긴장 풀지 마. 그 새끼들은 말 그대로 악마니까!”
놈들이 평범한 몬스터가 아니라는 건 무엇보다 플레이어들이 잘 알고 있었다. 대격변 이후, 고레벨을 달성했다는 건 그만큼 많은 균열을 헤쳐왔다는 뜻이니까.
꾸욱─
굳게 쥐는 양손의 무기들.
플레이어들의 얼굴에 비장함이 깃든다.
그들의 머릿속에 그동안의 경험이 스쳐 간다.
“방심? 내가 미쳤다고 저 새끼들 눈앞에서 방심하겠어?”
감히 일반화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한 플레이어.
모두는 악마족 몬스터에 의해 소중한 무언가를 잃은 경험이 있다고.
“나한테는 원수 같은 새끼들이야.”
그것이 동료였든, 가족이었든.
현실에서 악마족 몬스터의 위용은 말 그대로 일당백 수준이었으니까. 하지만 상황은 달라졌다. 부정적인 기운이 넘치는 현실에서도 악마를 상대했던 플레이어들이다.
“전방에 망령 출현! 빠르게 노려!”
때문에 절대적으로 머릿수가 많은 아르카나 대륙의 악마 앞에서도 플레이어들은 쉽게 꺾이지 않았다. 물론, 사기적인 버프의 덕을 톡톡히 본 덕분이었다.
점멸하는 눈앞.
[레벨이 올랐습니다.]
세컨드 썬의 길드 마스터.
슥─
슈레이그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세검, 플뢰레를 털어냈다. 런던의 기적 이후, 슈레이그의 어깨를 짓누르던 중압감은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간만이네. 전투에만 진입할 수 있는 것도.”
현실, 균열에서의 전투?
신경 쓸 게 지나치게 많았다.
실시간으로 상승하는 균열의 봉괴도를 신경 써야 하는 것은 기본.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의 풍경이 반반씩 섞인 균열의 풍경 탓에 적응하는 데에도 적잖은 시간이 걸리곤 했었다.
슈레이그의 말을 간부, 재커리가 거들었다.
“그러게. 난이도를 한 단계 낮춘 느낌이랄까?”
“정말 그렇게 생각해?”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까 아니네.”
“그래, 순순히 인정해야지.”
슈레이그는 피식 웃고는 상태창을 바라봤다.
정말이지, 빼곡하게 떠오른 버프의 효과들.
그래, 난이도가 낮아졌다고 착각할 만큼.
아르카나 대륙에서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건.
전부 성전 연합군 총대장님의 안배 덕분이었다.
벅벅─
재커리가 투구에 눌렸던 머리를 헝클이며 묻는다.
“근데, 버프 메시지에 있던 사내라는 게 정말로 총대장님을 말하는 게 맞아? 의심하는 게 아니라 플레이어의 상식으로서 납득이 되지 않아서 그래.”
슈레이그와 재커리.
아르카나 대륙 전기가 출시하기 이전.
플레이하던 게임에서부터 합을 맞춰온 동료.
그 오랜 친구를 슈레이그가 흘겨봤다.
“뭐가? 총대장님의 능력이?”
그렇지 않아도 슈레이그는 여러모로 심기가 불편했다.
세계에서 열 손가락.
동시에 영국 최고의 플레이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이었다.
덕분에 외면하고 싶어도.
자연스럽게 뻗쳐오는 불순한 손길들이 있었으니까.
-“언제까지 성전 연합군에 몸을 담을 생각인가?”
-“명심하게. 자네는 언제까지나 영국인이야.”
-“현실은 냉정해. 이호열, 그가 언제까지 자네를 책임져 줄 거로 생각하는 건가? 그런 의미에서 아르카나 대륙은 기회의 땅이네. 현명하게 행동…….”
자신은 물론.
AAU 런던 지부장인 베이커조차도.
적극적으로 호열을 지지하고 있었거늘.
다가오는 마수는 열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
‘샤이닝을 비롯한 다른 랭커들에겐…….’
자신보다 더한 유혹이 쏟아지리란 뜻이었다.
따라서 슈레이그는 곱게 반응할 수 없었다.
세컨드 썬의 이인자인 재커리에게도 자신 못지않은 유혹이 따를 수밖에 없을 테니까.
물론, 재커리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 의심이 아니라 단순히 이해가 안 되는 거라고! 그 독기 가득한 눈빛 좀 풀고 생각해 봐. 상식이잖아? 레벨이 오를수록 경험치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거 말이야!”
슈레이그가 끄덕─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어휴, 하여튼 총대장님만 관련되면……!”
재커리가 한숨을 삼키곤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총대장님이 보여주시는 퍼포먼스를 생각하면……. 분명 웬만한 일로는 레벨을 올리시기 힘드실 거 아냐? 막말로 마왕이나 거악, 드래곤 같은 걸 매일 사냥할 수도 없으니까.”
끄덕.
“근데, 그런 상황에서 어쨌거나 경쟁자라고 할 수 있는 우리 같은 플레이어들한테 아르카나 대륙을 개방하셨다고? 경험치 버프가 뭐야, 온갖 사기적인 버프가 가득한 대륙을?”
슈레이그는 그제야 답했다.
“그릇이 다르니까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하지.”
“……뭐? 그럼 너는 이해할 수 있어?”
“아니, 그릇이 다르니까 이해할 수 없어.”
그런 우려였다면 슈레이그도 동감이었다.
런던의 기적.
그때 받았던 호열의 은혜를 평생 잊지 않겠다, 다짐했던 자신과 다르게. 분명, 어쭙잖은 계기로 성전 연합군에 편승한 세력들은 틀림없이 존재할 터.
‘……그들이 버프를 등에 업고 성장한다면.’
그건 절대로 희소식이 아니었다. 노파심도 기우도 아닌 현실이 그랬다. 무지막지한 기회 앞에서 흔들리고 마는 게 바로 인간이란 짐승이라는 걸 슈레이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과소평가에는 증명을. 과대평가는 기어코 현실로 만들어 내고야 말았으니까.』
그조차도 누군가에겐 증명이요.
실현할 시간에 불과했다.
난데없이 점멸하는 시야.
떠오르는 메시지.
“……어라?”
그건 클라우디령 인근 플레이어에게만 떠오른 게 아니었다.
“이게 무슨……?”
대륙 외곽, 랑에리의 류오쥔춘과 오성에게도.
그리고 제국의 수도.
안토니움.
“!”
전(前) 천하통일 플레이어인 용성락에게도 메시지는 떠올랐다.
그러나 그 뜻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는 건 어째서일까.
플레이어 중 용성락이 유일했다.
“드디어 움직이시는 겁니까, 이호열 총대장님……!”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가 신화 퀘스트를 시작합니다.]
그렇다.
풀네임의 참뜻을 알고 있는 건.
플레이어 중에서 그밖에 없었기에…….
.
.
.
시공간의 사교장 최상층.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가 신화 퀘스트를 시작합니다.]
나는 점멸하는 메시지를 보고 또 한 번 다짐했다.
레이먼 션.
너는 내가 진짜로 가만히 안 놔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