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4화. 널리 이롭게 하라
가능하다면 끝까지 숨기고 싶었다.
만천하에 ‘클라우디’라는 이름이 알려졌다고 해도 내 이명이 어디 한두 개냐? 나부터 언급하지 않는다면 자연스럽게 잊히지 않을까, 생각했거든.
‘왜, 방금까지만 해도.’
천외천(天外天).
혼잣말로 중얼거린 덕분에 이명이 하나 더 추가된 나였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내가 원한 초대가 아니다. 남들이 모른다고 해도 내가 안다. 내가 수치스러워 죽을 것 같다.
세상에 흑역사를 남들 앞에 드러내놓고 싶은 사람이 어딨겠냐?
“클라우디의 가주로서 그대들을 환영하겠다.”
그러나 가주로서의 자부심이 넘치시는 우리 그랑펠 님께서 용납하실 수 있으랴. 물론, 플레이어를 클라우디령에 초대하는 건 어찌 보면 최선의 판단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혼란하거든.’
흉조가 집어삼켰던 이들을 뱉어낸 덕분.
아르카나 대륙은 갖가지 시간대가 뒤엉킨 상태였다.
그로 인한 갈등?
류오쥔춘의 생각대로 춘추 전국 시대가 따로 없겠지.
그런데, 거기에다가 플레이어까지 끼얹는다?
‘상상만 해도 피곤하다, 정말.’
그런 의미에서 클라우디령은 일종의 울타리였다.
아르카나 대륙과 플레이어.
서로를 위한 최소한의 거리를 유지해주는.
플레이어들을 믿지 못하는 거 아니냐고?
글쎄, 머릿속이 꽃밭이신 누구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몰라도.
사람은 쉽게 믿는 게 아니다.
현재 아르카나 대륙이 어디 그냥 대륙이냐?
플레이어라면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는 버프가 몇 개씩이나 발동 중이다.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플레이어들 눈앞에 그런 버프가 떠오른다?
‘나라도 단독행동이 하고 싶어질걸.’
하지만 클라우디령은 히든피스이기에 버프의 영향권 밖에 있었다. 플레이어들의 들뜬 마음을 추스르기에 이보다 적합한 장소가 또 없다는 거지.
‘얄궂다, 내 처지가.’
그런 나의 피치 못할 사정이 담긴 환대였거늘.
남태민을 일행을 제외하면.
다들 내 태도가 굉장히 낯선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면 가주 선언에 놀랬든가.’
물론, 나는 낯설다 못해 민망할 지경이다.
‘가주는 개뿔이 가주야!’
클라우디의 초대.
그를 통해 이미 비슷한 상황을 경험해 본 나였거늘. 나를 클라우디로 알고 있는 이들 앞에 서는 것과 이호열로 알고 있는 이들 앞에 서는 건 별개의 수치심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둘러대야 하냐?’
로미오로 화룡점정 하는 풀네임이냐.
그에 못지않게 괴상한 퓨전식 이름.
이호열 클라우디냐.
‘……내 입방정이 어디로 튈지는 나도 모른다.’
허나, 다행스럽게도 당장 결단을 내릴 필요는 없어 보였다. 누구도 내게 이름을 묻지 않았거든. 하기야 누가 내가 이딴 풀네임 숨기고 있다고 생각이나 할 수 있겠냐?
‘굳이 궁금한 게 있다면.’
일개 플레이어인 내가.
어떻게 이런 영지를 보유하고 있는지가 제일 궁금하겠지.
과연, 나의 예상은 정확했다.
또각─
내가 계단에서 내려오자 플레이어 무리에서 누군가 질문해 왔다.
“그 실례가 아니라면 클라우디의 영지에 관해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히든피스라는 수식어도 그렇고, 이렇게 광활하면서도 품격 있는 영지를 대체 어떻게 손에 넣으신 것인지……?”
나, 이호열.
당연하게도 답변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실대로 답할 수 없었으니까.
‘내 흑역사가 실존했기 때문이라고 어떻게 말해?!’
그러나 그랑펠의 일하원칙.
격식을 갖추었는가?
그에 합당하기 짝이 없는 물음이었기에.
‘품격 있는 영지라는 칭찬만 아니었어도……!’
나는 흔쾌히 답변하고야 말았다.
“비로소 손에 넣은 것이 아니다.”
“……네?”
“그저 드러나지 않았을 뿐.”
물론, 그랑펠식 화법으로 말이지.
한 번 시동이 걸린 입방정은 쉽게 멈출 수 없는 법.
나는 집중된 시선 속에서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대들이 클라우디의 영지에서 부디 격식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이 땅에서 통용되는 것은 현실의 법도, 제국의 법도, 아르카나 대륙의 상식도 아니니까.”
이건 협박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다.
내 치부이자 안방이라고 할 수 있는.
클라우디령에 불특정 다수의 플레이어를 초대할 수 있었던 이유?
그건 클라우디령에서 클라우디의 가주.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의 명령이.
절대적인 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나는 말을 끝마쳤다.
“명심하도록. 이곳에선 나의 말이 곧 규율이다.”
*
빛나는 마력석.
고레벨 플레이어들이기에.
그 가치를 단번에 알아본다.
“이런 크기의 마력석이 영지 곳곳에 박혀 있다니. 제국 수도 안토니움에도 이런 건 없지 않았나? 이호열, 대체 돈이 얼마나 많은 거야……?”
“그것보다 얼마나 넓길래. 마력석으로 포탈까지 발현해 놓은 걸까? 괜히 히든피스라는 거창한 수식어가 붙은 게 아닐지도 몰라.”
“입 좀 다물고, 우리도 슬슬 출발하는 게 어때?”
플레이어들의 가장 큰 현실적인 문제.
아르카나 대륙에서의 숙식이 해결되었다.
호열이 원하는 만큼 대저택에 머무르는 걸 허가했기 때문이었다.
“그 규율이란 게 뭔지 걱정이 되긴 해도……. 감지덕지하지!”
플레이어들은 규율이 뭔지 알 수 없었다.
알지 못했기에 순수하게 의욕에 타오를 수 있었다.
아직까지는.
“얼마 만이야, 이게?”
이윽고, 마력석 위에 마법진이 일렁이더니 포탈의 빛이 쏟아졌다.
플레이어들은 아르카나 대륙에서 눈을 떴다.
펼쳐진 풍경은 의외였다.
“응?”
일찌감치 출발한 이들부터.
불과 몇 분 전에 포탈을 통해 이동한 이들까지.
모두가 제자리에 멈춰 서 있었으니까.
“……!!!”
그 이유는 곧장 알아차릴 수 있었다.
쉴 새 없이 점멸하는 시야.
떠오르는 메시지.
[경험치 획득량이 50퍼센트 증가합니다.]
[아이템 드롭율이 50퍼센트 증가합니다.]
[마법 발현력이 30퍼센트 상승합니다.]
[모든 무기의 숙련도 습득이 30퍼센트 증가합니다.]…….
마치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
“이, 이게 다 뭐야?!”
물론, 좋은 의미의 충격이었다.
하나만 하더라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사기적인 버프였거늘. 우두커니 멈춰서 확인해야 할 정도로. 떠오르는 버프가 멎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런 거, 나였으면 독점했을 거야.”
일반적인 플레이어였다면.
이 수많은 버프의 존재를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거라는 것을.
더 나아가 누구에게도 공유하지 않았으리란 것을.
“당연해. 아니, 그게 정상이야. 앞서나갈 수 있는 기회니까.”
실제로 호열에게는 그럴 능력이 있었다.
호열이 습득한 드래곤 하트가 아니었다면.
플레이어들은 아르카나 대륙을 밟을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러나 호열은 자신의 영지, 클라우디령을 내어준 것도 모자라서 이러한 버프까지 공유했다. 그건 마냥 들떴던 플레이어들마저도 생각에 잠기게 하는 행보였다.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뭘까?”
이유라.
성전 연합군 총대장으로서의 무게 때문인지.
이런 버프조차도 흔쾌히 공유해도 상관없다는 자신감 때문인지.
누구도 알 수 없겠지.
그러니 머리를 굴려볼 뿐이었다.
“생판 남인 우리에게 모든 걸 공유하시는 이유…….”
“진심으로 무슨 신의 환생 같은 게 아닐까, 우리 총대장님?”
“하긴,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긍지 높으시지.”
신의 환생은 개뿔, 전부 흑역사 때문이다……!
정작, 그 이름부터 숨기고 있는 당사자가 들었다면.
속으로 기함할 수밖에 없는 평가가 쏟아진다.
그도 모자라 플레이어 사이에서 널리 퍼져 가고 있었다.
마치 새로운 전설의 시작을 알리듯이.
*
대륙의 외곽 도시, 랑에리.
실감하게 된다.
혹독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건.
세상보다도 혹독한 자뿐이라는 것을.
뚝뚝─
피가 바닥을 적신다.
류오쥔춘은 숨을 거둔 랑에리 영주의 면상을 보며 기억을 되새겼다.
아르카나 대륙의 시간은 현실보다 4배 빠르다고 했나.
과연, 사실이었다.
“어린 돼지가 후대를 이었나 보군.”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지아비를 닮았던 새끼 돼지가 어엿한 성인이 된 모양이었다.
영주 자리를 물려받은 모양이었다.
감회가 새로울 법도 했거늘.
류오쥔춘은 그쯤에서 회상하기를 그만뒀다.
“썩 즐겁지 않은 추억이다.”
대격변 이전.
군주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시절, 류오쥔춘은 숱한 수모를 겪어왔다. 과거, 자신이 랑에리의 영주가 되었던 것도 그 수모 중 하나였다.
화살받이와 다를 바 없는 영주 자리였으니.
허수아비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는 것도 당연했다.
류오쥔춘은 시체를 향해 짧은 감상을 뱉었다.
“하지만 칭찬하마. 지아비를 빼닮은 네놈의 악독함이 나의 영지였던 랑에리를, 지금껏 지켜낸 모양이니.”
오들오들……!
랑에리의 신하들이 류오쥔춘을 보고 벌벌 떨었다.
예상치 못한 모험가의 복귀에 경악하기도 찰나였다.
그들이 랑에리의 성문을 가뿐히 뛰어넘어서 영주성으로 잠입.
뎅겅.
그대로 영주의 목을 떨어트렸다.
‘……저 실력은 살인귀와 다를 바 없다.’
깨달았다고 한들.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전무했다.
랑에리의 동맹이라 할 수 있는 인근 영지들의 지원?
이젠 시체가 된 영주의 변덕 탓.
일찌감치 함락되어 악마들의 손에 넘어간 지 오래였으니까.
그렇다고 영지민들의 도움을 바랄 수도 없었다.
‘……젠장.’
악랄한 영주가 드디어 뒈져버렸다고 좋아하면 좋아하겠지.
영주의 복수를 위해 목숨을 내던질 이유?
저들에겐 없었으니까.
‘막장이 따로 없군.’
보다시피 콩가루 영지인 랑에리였다.
그런 주제에 어찌 지금껏 무사할 수 있었는가?
누군가 묻는다면 신하들은 쉽게 답할 수 없었다.
‘어떻게 사실대로 말할 수 있겠는가!’
자신들이 악마의 공범.
악마 숭배자였기에.
랑에리가 온전할 수 있었다고, 어찌 고백을……!!
“사실대로 고하라.”
“……?”
속으로 울분을 삼키던 신하에게 류오쥔춘이 묻는다.
“랑에리는 어떻게 무사할 수 있었지?”
“……!!”
류오쥔춘.
‘나는 저 모험가를 알지 못한다.’
영주와 면식이 있어 보였던 사내의 속내는 더욱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랑에리의 악마 숭배 행위는 누구에게도 용서받지 못하리란 것이었다.
“……모른다.”
그러니 신하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설령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처자식을 위해서 입을 다물겠다, 결심했다.
그러나.
[군주]는.
아니.
“고하라.”
[폭군]은 침묵을 용납하지 않았다.
“삼족이 멸하고 싶지 않다면.”
“!!!”
그러자 신하들의 입이 의지와는 무관하게 벌어진다. 류오쥔춘의 시야에 상태이상 발생 메시지가 떠올랐지만, 정작 신하들은 메시지를 목격할 수 없었으니.
“랑에리가 어찌 살아남을 수 있었냐고? 랑에리의 영주는 악마에게 인간을 바쳤다. 사실상 악마와 다를 바 없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영주성 지하에 악마를 위한 제단이 있다…….”
“사내는 물론, 여자와 아이도 가리지 않고……!”
사건의 진위부터 악마 숭배의 과정까지.
류오쥔춘에게 상세히 털어놓고 나서야 그 입을 다물 수 있었다.
신하들은 질끈 눈을 감았다.
부르르!
‘이젠 끝이다, 모든 게 끝이야!’
당장 목이 달아나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
그러나 각오와 달리 신하들의 목은 달아나지 않았다.
……슬그머니.
눈을 뜨자 오히려 포물선을 그리는 사내의 입꼬리가 보였다.
그쯤에서 직감했다.
‘영주보다 더한 자다, 녀석은……!’
경악을 삼키는 신하들엔 아랑곳하지 않는다.
류오쥔춘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랑에리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를.
‘이곳이라면 안정적으로 힘을 키울 수 있다.’
류오쥔춘은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했다.
그러나 인정한 대상은 오직 하나, 이호열에 불과했다.
즉,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뒷덜미를 잡힐 생각은 없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르카나 대륙은 새로운 전장이 될 터. 나쁘지 않았다. 랑에리를 차지한다면 이호열을 제외한 플레이어들보다 아득히 앞선 출발선에 서게 될 테니까.
“나쁘지 않은 대답이었다.”
류오쥔춘의 시선이 신하들을 향한다.
랑에리가 무사할 수 있던 이유를 알게 되었으니까.
앞으로도 계속 무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의 격차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네놈들에게 본좌를 섬길 영광을 주겠다.”
어느새 영주의 자리에 착석한 류오쥔춘.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이 순간.
그와 오성들의 시야는, 상태창은.
다른 플레이어들과 비교하여 초라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을.
[현재 발동 중인 버프 : 없음]
경험치 획득량.
아이템 드롭율.
마법 발현력.
무기의 숙련도…….
사기적인 버프는 물론.
어떤 사소한 버프조차도 류오쥔춘과 오성들에게는 떠오르지 않았다.
이유는 더없이 간단했다.
[이 모든 것이 흑암룡의 안배였다.]
대륙의 진정한 주인이 그를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
보자, 빨간 딱지가 붙었을 때부터였나.
걱정이 많아질 땐 소설을 읽고는 했다. 대여점을 드나들던 시절도 있었는데……. 세상이 참 좋아지긴 했다. 신작 소설이 하루에 한 편씩 올라오고 말이야.
이예림이 중얼거렸다.
“이번 달, 쿠키 너무 구웠는데…….”
오죽 독서에 몰입했으면.
호열이를 놀려 먹기 위해서라도 매일 시청하는.
투데이 아르카나 본방 시작도 놓쳤을까.
이예림은 뒤늦게 리모콘으로 TV 전원을 켰다.
“어라?”
그러고는 떠오른 화면에 눈을 비볐다.
……밤을 꼬박 새워서 소설을 읽어서 그런가?
어째, 소설에서 봤던 단어가.
자막으로 떠올라 있었다.
“엥?”
그런데, 아무리 봐도 헛것이 아니었다.
피곤으로 가득 차 있던 이예림의 눈가.
어두웠던 안색에 화색이 돌기 시작한다.
“처, 천외천이라고?! 지가 지 입으로?!”
하나뿐인 동생이 현실에서 무협 소설을 써내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