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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63화 (363/489)

◈ 363화. 환영하마 (3)

거악, 칠죄종.

아르카나 대륙에서 태어난 악(惡)은 단 한 순간도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는 위대한 클라우디마저도 넘어섰다 믿었으니.

그러나 거악 칠죄종 색욕.

러스트의 자신감은 이 순간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내가, 되살아난 클라우디 때문에 우스꽝스럽게 몸을 비틀게 될 줄이야. 스스로 재단이 되고, 목숨을 바쳐 잡종들의 왕을 불러내게 될 줄이야.

쿠우우우웅─……!

“하하.”

갈라지는 하늘을 보며 러스트는 헛웃음을 뱉었다.

그래도 썩 나쁘지 않은 거래일지 모른다.

저 고아한 사내의 얼굴이 절대적인 힘 앞에 무너져 내리는 모습 또한 꽤나 흥분될 것 같았으니. 러스트가 아랫입술을 할짝이던 때였다.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포착한 건 그때였다.

“……?”

분명 하늘이 갈라졌거늘.

현현해야만 하는 열 번째 왕좌의 마왕, 부에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멎기는커녕 더욱 거세게 흐르는 피로 보아 의식은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었는데도.

끔찍한 상상이 들었다.

‘……설마 부족하단 거냐?’

이 몸께서는 거악이다.

태초의 악에게서 태어난 순혈.

아르카나 대륙의 칠죄종이란 말이다.

그러한 나를 온전히 제물로 바친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제물이 부족하다니. 러스트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는 하늘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꼈다.

‘……대체 너희는 어떤 존재인 것이냐?’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저들이 비롯된 곳은 마계(魔界).

마(魔)로 가득한 세계였으니.

태생 자체가 다르다는 말은 놈들에게 써야 하는 말이었던가?

하늘을 바라보던 러스트에게 절망이 깃든다.

“빌어먹을.”

주제 파악이었나.

마지막까지.

그놈의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한 나의 패배로구나.

눈꺼풀이 무겁게 감긴다.

악마 사냥꾼.

천적에게 난도질당한 육신이 지옥의 불로 번져간다.

그때였다.

-□□□□. □□ □□□ □□.

“……!!!”

갈라진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분명 부에르의 목소리였다.

러스트는 비아냥을 삼켰다.

‘고작 목소리를 현현하는데 그쳤단 거냐.’

퍽이나 위로가 되는군.

죽음의 순간은 여러 의미로 허탈했다.

그러나 러스트는 마왕의 음성과 직면한 이 순간.

뜻하지 않은 충격과 조우하고 말았다.

-□□.

……무어라 지껄이는 것이냐?

이대로라면 자칭 마왕들의 말이 옳게 된다.

십좌의 마왕.

그들은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무지의 존재라는 이야기가.

‘의식 없이 막대한 힘을 휘두르는 존재들.’

그렇기에 우둔한 왕들.

저런 우둔한 왕에게 기대를 걸었던 스스로 한심하다고 여기던 순간이었다. 러스트는 보고야 말았다. 자신에게는 관심을 거둔지 오래.

갈라진 하늘을 응시하는 클라우디를.

설마……?

러스트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네게는 들리는 것이냐. 저 음성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냐?’

그랬다.

“역시……. 대단하군, 클라우디.”

저건 알아듣지 못하고선 지을 수 없는 표정이었으니까. 색욕은 마지막으로 입맛을 다시고야 말았다. 이윽고, 시야를 뒤덮는 지옥의 불길 속에서 중얼거렸다.

“인간 주제에 마지막까지 나를 흥분하게 하는구나.”

*

[열 번째 왕좌의 마왕, 부에르가 출현합니다.]

악마 사냥꾼.

천적으로서 악마의 속은 꿰뚫고 있다고 생각했거늘.

솔직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거악이 스스로 제물이 되어 마왕을 소환할 줄이야.’

거악 칠죄종과 마계의 마왕은 출신부터가 다르다.

더욱이 칠죄종은 마왕들을 잡종이라 부르며 업신여겼단 말이다.

‘악마의 악의를 간과하다니, 실수다. 이호열.’

하지만 이로써 깨닫게 되었다.

악마를 사냥할 때는 마지막까지.

최악을 염두에 두고 사냥에 임해야 한다고.

나는 갈라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기억을 되새겼다.

십좌의 마왕 혹은 상위 마왕.

말했다시피 나는 서열 1위와 4위.

바알과 가미긴과 조우했었다.

정확히 따지자면 바알과는 [저주]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그 팔뚝과 마주친 거였으니 제외한다고 하더라도. 가미긴, 네 번째 왕좌의 왕과는 확실히 마주했었단 뜻이다.

그때의 경험이 도움될까?

‘글쎄다.’

넷튜브 보기처럼 하찮은 행동에도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고, 또 뭐라도 습득하게 하는 그랑펠의 재능을 무시하는 게 아니다. 다만, 가미긴을 쓰러트릴 수 있었던 데에는 천운이 따랐다는 것뿐.

마왕 쟁탈전이 시작된 덕분에 지옥의 문이 열렸고, 그런 지옥의 불길에서 가미긴을 사냥하기 위해 뛰쳐나오신 악크샨 선배님들의 도움이 워낙 컸어야 말이지.

물론, 레벨도 내실도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성장한 나였다만……. 가미긴과 부에르 사이에 적지 않은 서열 격차가 있다는 걸 감안해도 마냥 낙승을 예상할 순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일석이조군.”

악마가 강대해지면 강대해질수록 더욱더 드높아지는 그랑펠의 긍지였으니. 나는 귀철과 석궁을 다시금 고쳐 쥐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마력을 전력으로 가다듬었다.

갈라진 하늘에서.

언제 어떤 식으로 부에르의 마수가 뻗쳐올지 알 수 없다.

조금도 방심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어째…….

지나치게 잠잠하다?

등장만으로 일대를 초토화했던 가미긴 때와는 무언가 다르다.

무엇보다 모습을 드러냈어도, 진작 드러냈어야 하는 부에르.

놈이 어째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누구인가. 나를 불러낸 자는.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잠깐, 목소리?’

그 순간, 나는 흠칫했다.

가미긴 때의 경험을 되새기고 있던 터라 곧장 깨달은 것이다.

그때의 나는 가미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 □□□□.

웅얼거리는 게 옹알이와 다를 바 없다고 여겼었지.

그러나 같은 상위 마왕인 부에르의 음성은.

더없이 또렷하게 뇌리에 들려오고 있었다.

갈라진 하늘 사이로 시선이 쏟아지는 듯했다.

-그런가.

이쪽을 바라보는 듯하다.

-그렇게 된 상황이로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켜보는 눈이 많아서.

혼잣말하는 것처럼 비치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진정으로 우둔한 것이 누구인지 아직도 깨닫지 못하였구나. 이까짓 제물로 나를 온전히 불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자칭 거악이여.

거악 칠죄종 색욕이 자신을 제물로 바쳤거늘.

고작 부에르의 목소리를 불러내는 것에 그쳤다는 걸 알게된 덕분이었다. 그쯤에서 나는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비명횡사는 피하게 생겼구만.

‘말했잖아, 마냥 승리를 확신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이유, 전부는 아니었다.

이윽고, 온전히 나를 향해 쏟아지는 부에르의 시선.

녀석이 나를 향해 말을 걸어왔거든.

-그러나 녀석의 무지함 덕분에 우리가 마주하게 되었구나, 왕 시해자여.

……뭐, 왕 시해자?

내, 내가?

그건 또 누구 맘대로 붙인 이명이냐!

추측해 보건대 어쨌거나 가미긴을 지옥에 떨어트렸던 나였다. 그런 내게 왕 시해자란 이명이 붙을 수도 있겠지. 생각하던 중에도 부에르는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턱없이 빈약한 제물 탓에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눌 순 없겠구나. 허나, 기대하고 있겠다. 조만간 우리가 다시 조우하게 될 날을.

과연, 상위 마왕.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다시금 실감하게 된다.

다시 만나자니.

사냥감인 악마에게 저런 소리를 듣는 건 처음이었거든.

하늘이 서서히 닫혀간다.

-그리고 환영하마.

근데 환영한다니, 갑자기 뭔 소리야?

의문도 잠깐.

말이 이어진다.

-천외천(天外天)의 영역에 발을 들인 것을.

……천외천?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가미긴 때와는 다르게 같은 상위 마왕인 부에르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던 이유를. 가미긴과 조우한 이유로 숱하게 많은 발버둥을 쳐온 덕분에.

나는 비로소 상위 마왕들과 동등한.

기이의 영역.

천외천의 영역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눈앞이 점멸한다.

[칭호, ‘천외천’을 습득하셨습니다.]

[스킬, ‘시공간의 사교장’이 변화합니다.]

[이제부터 시공간의 사교장 최상층 출입이 가능해집니다.]

[이제부터 최상위 시공간 퀘스트 수행이 가능해집니다.]

이젠 하다 하다 상위 마왕에게 인정을 받게 될 줄이야.

상위 마왕의 위력을 지켜봐 온 나, 이호열.

솔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야 적에게 인정을 받을 정도로 성장했다는 거잖아?

그러나 우리의 그랑펠 님께서는 어떤 분이시던가.

상대가 악마라면 특별한 이유가 없이는 말도 섞지 않는.

드높으신 긍지의 소유자.

나의 입이 열린다.

“천외천의 영역에 진입한 걸 환영한다라.”

당연하지만 누구도 이 입방정을 말릴 수 없다.

“마치 천외천의 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말하는구나, 버러지.”

꽤나 노골적인 비난이었거늘.

아직은 여유가 있는 모양인가.

음험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후후, 시해자이기에 간과할 수 없는 반응이로군.

그 말을 끝으로 하늘은 완전히 닫혔다.

스스로를 제물로 바친 색욕도 지옥의 불에 완전히 타들어 갔다. 메시지가 떠오른다. 그래, 혼잣말처럼 오글거리는 말을 뱉었든, 천외천의 영역에 진입했든, 어쨌든…….

[높은 처치 기여도로 전리품이 자동으로 습득됩니다.]

챙길 건 챙겨야 하지 않겠어?

[중립의 기생 생물 러스트(Lust) 2/7]

*

넷튜브를 비롯한 인터넷 커뮤니티는 중국의 소식으로 가득했다.

포문을 연 건 블러드 엘프, 엘시도어의 맹활약이었다.

-그럼 여태까지 피 뒤집어쓰고 다닌 것도 전부??

-살다 살다 피로 세탁기 돌리는 건 처음 본다

-ㅋㅋㅋㅋㅋ클래스로 생각해도 골때리지 않음?

-ㄹㅇ 근접 전투 계열 힐러가 세상에 어딨냐?

그러한 엘시도어의 활약상만큼이나 화제가 된 건.

엘시도어와 직접 대화를 나눈.

중국 플레이어들의 인터뷰였다.

-“모든 건 그분의 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이라면 누구를 말하는 걸까요?”

-“당연히 한 분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분, 이호열.

대다수가 예상했던 바였지만, 실로 놀라웠다.

엘시도어를 저렇게까지 개과천선 시킬 줄이야.

하지만 그조차도 시작에 불과했다.

플레이어들의 아르카나 대륙 진입.

마치 그 소식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중국에 출현한 거악 칠죄종 색욕.

그리고 그러한 색욕의 움직임을 전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그 앞을 가로막은 호열의 대립.

그 전투는 지켜보는 눈들이 워낙 많았던 탓.

실시간으로 생생하게 중계되었었으니까.

-ㅁㅊ 거악이 반항도 못하네ㄷㄷㄷㄷㄷ

-괜히 악크샨 지도자가 아니시거든ㅋㅋㅋㅋ

-한 방에 나가떨어진 거 보소ㄷㄷ

하지만 그조차도 뛰어넘는 충격이 남아있었으니.

중국의 플레이어들이 전해온 소식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늘이 갈라지고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열 번째 왕좌의 마왕, 부에르가 출현한다고……?

-72 마왕 중에서 열 번째라는 뜻이야!!

-젠장, 내 고향에서 뭔 짓거리를 하는 거야 대체?!

상황을 중계하던 플레이어들의 외침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AAU 전 지부에는 긴급 상황이 발령되었다.

“상위 마왕의 출현이다.”

AAU가 호열에게 정보를 제공하듯.

호열도 AAU에 정보를 공유해왔다.

그 정보 중 하나가 바로 상위 마왕에 관한 지식이었다.

따라서 박민재는 이를 악물고 말았다.

“젠장, 하필이면…….”

악랄하기 짝이 없다.

성전 연합군 대다수가 아르카나 대륙으로 진입한 상황에서 거악도 모자라 상위 마왕까지 날뛰는 계획을 세울 줄이야. 물론, 그것조차 예상한 호열이 최후의 보루처럼 갈라지는 하늘과 직면하고 있기는 했다마는…….

‘……혼자서 감당하실 수 있으실까?’

물론, 모든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 □□□ □□ □□ □□.

어떤 보정 처리를 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부에르의 목소리. 그런 목소리에 대답하듯 읊조리는 호열의 모습이 전파를 타고 전 세계에 퍼져 나갔으니까.

-“천외천의 영역에 진입한 걸 환영한다라.”

-“마치 천외천의 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말하는구나, 버러지.”

“처, 처, 천외천?! 이거 그 무협에서 나오는 그거죠?!”

박민재와 윤수겸, 성현준뿐만 아니었다.

세상 모두가 알게 된 것이었다.

호열의 천외천 입성을.

아니, 정확히 따지자면 모두는 아니었다.

같은 시각, 완전히 다른 세계.

아르카나 대륙의 플레이어들에게 인터넷 신호는 닿지 않는다.

그러나 뒤늦게 소식을 접해도 억울할 이유는 없으리라.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특별한 경험을 하고 있었으니까.

드넓은 클라우디 저택을 구경하던 와중.

“……!”

계단에서부터 느껴지는 기척.

또각─

클라우디의 화려한 대저택.

그보다도 휘황찬란한 복장.

여명의 재킷을 어깨에 걸친 호열이 입을 열었다.

“클라우디의 가주로서 그대들을 환영하겠다.”

“……가, 가주?!”

자고로 클라우디의 가주를 알현할 영광은 흔치 않은 법.

.

.

.

기어코 지껄이고 말았구나.

그런 내 앞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놓여 있었다.

그래서 어떤 게 정답이냐……?

1.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2. 이호열 클라우디.

저 끔찍한 두 선택지 앞에서.

어떤 이름을 내세워야.

그나마 수치사를 피할 수 있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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